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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 왼손잡이는 예술에 뛰어난가 고정관념 Q 6
마리 알리스 뒤 파스키에 그랄 지음, 한정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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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족 구성원의 3/4이 왼손잡이다. 물론 각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딸이 어렸을 때 글씨를 자꾸 왼손으로 쓰길래 다른 건 몰라도 글씨만은 오른손으로 쓰게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다행히' 글씨는 오른손으로 쓴다. 하지만 그림은 왼손으로 그리는데 어색하거나 불안한 면 전혀 없이 아주 잘 그린다. 이 책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글씨만은' 오른손으로 쓰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어쩌다가 왼손으로 글씨 쓰는 아이를 보면 신기하다는 듯이 '어! 왼손으로 글씨 쓰네.'라는 말이 나온다. 거기에는 왼손으로 쓰는 데도 꽤 잘 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왼손으로 쓴다고 해서 글씨를 잘 못 쓰는 것은 아니란다. 오른손잡이 중에도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이 있듯이 그런 경우일 뿐이란다. 음, 그 부분에선 나 조차도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왼손잡이로서 특별히 부당한 대우를 받은 기억은 없다. 다만 한 동네에 사시던 고모부가 혀를 끌끌 차던 것 밖에는. 그런데 불편한 적은 아주 많이 있다. 거의 모든 도구가 오른손잡이용이기 때문에 그걸 감수하고 사용해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기에 책에서 그런 예들이 나올 때마다 속으로 '맞아 맞아'를 외치며 읽었다. 특히 가위의 경우는 왼손으로 사용하면 잘 안 잘리기 때문에 불편함이 많다. 그나마 다행히 난 가위는 오른손으로 사용하지만 남편은 왼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어떤지 잘 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경우는 나 혼자 익힌 것은 왼손으로 사용하고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은 오른손으로 사용하나 보다. 왜냐. 가르쳐 준 사람이 오른손으로 가르쳐 줬으니까. 

특별히 왼손잡이거나 오른손잡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둘째는 아예 처음부터 오른손만 사용하는 걸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이야 왼손잡이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약간의 눈총만 감내하면 된다. 예전에는 왼손잡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지.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확실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단다. 왼손잡이로서 내 마음을 대변해 줄 것을 기대하며 읽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가볍게 읽고 넘어갈 만한 글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읽는 동안 번역 문체 때문에 다시 읽어야만 하는 부분이 꽤 있었다. 마치 특정 분야의 전공서적을 그 분야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 번역해 놓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매끄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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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헤 2
미카 왈타리 지음, 이순희 옮김 / 동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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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신화에 약하다. 우리 신화야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것으로 어떻게 끼워 맞출 수 있다지만 다른 나라 신화는 그야말로 손수 찾아 읽어야 하는데 그럴 열정과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신화의 숨겨진 뜻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외국의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조금이나마 눈을 떴다.

내게 이집트라는 나라는 신비로운 나라이며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나라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피라미드의 높이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훨씬 이전에 도구라는 것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절에 그런 높이의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에 항상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에 대한 내 상식은 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도 아이들 책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오죽하면 예전에 한창 베스트셀러였던 <람세스>조차 읽다가 어찌어찌 해서 그만두었을까.

이번에는 그 뒤를 이어 시누헤라는 인물이야기란다. 시누헤... 글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름이다. 람세스는 파라오니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는데 시누헤는 일반인으로서 파라오와 그 주변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편집자가 분명히 역사적 사실 위에 가공의 인물을 그려냈다고 했는데도 많이 듣던 이름들이 나와서 읽는 동안 이게 역사서인지 소설인지 헷갈렸다. 또한 편집자는 너무 많은 배경 지식이 소설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은 알지만 너무 먼 시대의 너무 먼 나라 이야기라 간단하게 배경 지식을 소개한다고 하는데 어쩜 딱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바로 내가 이집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한데 말이다. 그래서 지명도 낯설고 이름도 낯설어서 읽는 속도가 다른 책들에 비해 현저히 느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신화란 무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속뜻은 정말 이런 이야기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러면서도 이건 소설인데를 생각했고. 아무튼 헷갈려 하며 읽었다. 시누헤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실감난다. 하지만 정말이지 너무 먼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문화가 그려지질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와 관련된 영화라도 잘 봐둘 걸... 신화에 대한 것이라도 잘 읽어둘 걸...

이 책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유배지에서 쓴 자서전"이라 말하고 싶다. 파라오의 혈통을 타고 났지만 그것을 철처히 숨긴 채(물론 처음에는 자신도 몰랐다.) 평생을 의사로 때로는 첩자로 살았던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죽을 때까지 떠날 수 없는 유배지에서. 뒷부분에서는 삶의 의미를 읊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시누헤의 눈을 따라가며 그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편집자 편지'에서는 아케나톤이 유일신주의자이며 평등주의자이며 혁명가이며 반전주의자라고 한껏 치켜세우고 감탄하고 있지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그는 실망스러웠다. 나약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두 권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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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맹모 성공기 - 아이를 행복으로 이끄는 관계 이야기
김강일, 김명옥 지음, 금현진 스토리 / 예담Friend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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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저 놀아달라는 것 함께 놀아주고 궁금해 하는 것 답해주면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점점 자라서 학교에 들어가고 아이만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아이와 부딪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좌절을 느끼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하며 아이와 끊임없는 충돌을 빚었다. 아마 그 중에서도 공부와 관련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던 듯 싶다. 그러니까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좋았던 아이와의 관계가 학교 들어가면서 점점 벌어졌겠지.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몇명이 팀을 이뤄서 의사소통과 부모교육에 관한 강좌를 듣기로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을 들으면서,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았고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덕분에 아이와의 관계는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 때 받았던 수업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서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좋으면 대부분의 것이 저절로 해결된다. 가족이라는 것은 서로 보듬어주고 용기를 주는 관계라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싪천하기란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 특히 공부라는 것이 끼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가도 시험 성적만 나오면 악화되는 경우를 경험해 보지 않은 학부모가 있을까. 이 시대 부모들의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하면 공부를 스스로 잘 하도록 하는 것일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조건 공부하라고 이야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온갖 방법을 다 써보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거나 포기하고 만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방법을 부모와의 대화에서 찾은 듯 싶다.

대화, 아주 중요하다. 둘이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대화라면 말이다. 처음에 지훈이 엄마가 생각한 그런 대화가 아니라 나중에 깨닫는 그런 대화. 그러나 많은 부모들은 대화라고 이야기하면서 훈계를 하곤 한다. 물론 나부터도 종종 그런다. 속으로는 '이게 아닌데...'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을 멈추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아이보다 위에 있고 싶은 마음 때문에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비단 나만 그럴까?

이 책은 자녀교육우화답게 설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으며 맞장구를 치게 된다. 처음 시작하는 부분부터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원격으로 조종하는 모습이 이제는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면서도 항상 초조해한다. 지훈이 엄마처럼. 그러다가 교장을 하다가 은퇴하고 아파트 경비를 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여러가지를 배운 다음부터 지훈이 엄마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부모교육을 들은 사람은 알겠지만 배운다고 다 실천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괴리감 때문에 자책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진정으로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지훈이 엄마는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결국은 변했다. 어쩌면 정확히 말해서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던 것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맹모를 포기함으로써 지훈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여기에 있는 에피스드들이 하나하나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다.  또한 거기에 들어 있는 부모 자녀 관계 개선 프로젝트는 모두 너무나 유용한 정보들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꾸밈없이 표현하기, 맺힌 것 풀어주기 등 모두 알고 있지만, 그리고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서서히 시도해 보면 분명 발전이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은 '부모되기도 공부가 필요하다'라는 말이다. 정말 그렇다. 부록에 나와 있는 우리 집의 대화 단계 체크리스트를 읽으면서 그냥 잠자리에 들게 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내일부터라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이것이 또한 육아서를 읽는 이유기도 하다. 계속 자극을 받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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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가지 법칙
켄 로빈슨 지음, 유소영 옮김, 백령 감수 / 한길아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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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랜스포머>를 보고 남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을 가지고 저렇게 기발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사람들은 분명 뭔가 다른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바로 요즘 뜨는 주제인 '창의력' 아닐까. 너도 나도 창의력만이 살아남을 방법인 양 거기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회의감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물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된다. 그래서 다들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자녀 교육에 창의력이라는 단어만 붙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일까.

흔히 창의력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정확히 어느 것이 창의력인지 또 어떻게 해야 창의력이 좋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긴... 그러니까 창의력이라는 말에 그렇게 쉽게 현혹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혹시 창의력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다. 결론이야 대부분의 이론서들이 그렇듯이 당연한 이야기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거기에 좀 더 보태 약간의 지식체계를 정리하게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결국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는 나 자신에게 달렸다는 '당연한' 결론을 얻었다. 옮긴이의 말에서도 나왔듯이 오히려 창의적인 인재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요긴한 책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실 결론이야 뻔한 것이었다고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형광펜으로 줄치며 읽었다. 여간해서는 책에 연필로도 밑줄을 치지 않는 성격임을 감안할 때 와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내가 막연하게 이럴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을 명확하게 규정지어줄 때 반가워서 형광펜 뚜껑을 열었고 창의력에 대한 오해들을 깔끔하게 풀어줄 때 또 그랬다. 분명 창의력이라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주고받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혹 하는 부분은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창의력'이라는 문구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해 하던 참이었다. 흔히 생각하듯 예술 분야에만 창의력이 필요할 뿐 과학 분야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폄하하기도 한다며 그것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물론 지금은 과학 분야에서도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되고 있다. 다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이론적인 지식만을 중요시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런 문제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우리 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동경하는 영국도 이 작가가 보기에는 똑같은가 보다.

창의성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부분에서 나도 지금까지 범하고 있었던 오해를 발견했다. 바로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의 밀접한 관계에 관한 오해. 요즘 부모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이며 우려를 듣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를 제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창의성이 길러진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 부모들과 아이들 교육을 그런 식으로 시키면 안 된다고 바라보는 기성 세대 간 시각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작가는 거기에 일침을 가한다. 그건 전적으로 오해라며...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왜 이리 속이 후련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이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만 찌푸릴 뿐 반박할 근거가 없었는데 이제 그 근거를 찾은 셈이다. 뭐, 로빈슨의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것이 진리라고 간주할 수 없다쳐도 적어도 그에 관해 연구한 사람이니 일반인 보다는 확실히 다른 증거를 갖고 있겠지.(역시나 또 논리만을 따지려 든다. 이게 바로 창의력을 무시한 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했던가.) 장황한 글을 읽었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아진다. 창의력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얼마든지 계발 가능하고 늦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한 분야에서만 창의력이 발휘될지라도 다른 분야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소중한 결론을 얻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전혀 낯선 것도 아니건만 지금까지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다. 마치 파랑새를 멀리서만 찾으려고 애썼던 것처럼...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는 어떤 매체의 창의력이 있을까 곰곰 생각하고 찾아내는 일만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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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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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와 80년대 반공교육을 너무나 '잘' 받은 덕분에 북한이라는 곳은 보통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줄 알았다. 아직까지도 그런 생각이 알게 모르게 남아 있다. 얼마 전에 대동강변에서 낚시를 즐기는 어른들과 애완동물을 데리고 나와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방송에서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너무나 '잘' 받은 반공교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의식 깊은 곳에서는 그저 서로 감시하고 고된 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휴, 이 무서운 이념교육의 잔재라니...

우리 신화에 대해 조금씩 흥미를 갖게 되었을 때 처음 접하는 것이 바로 바리데기 또는 바리공주 이야기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한다. 아마 그저 옛날 이야기로만 생각했지 신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신화를 현대판 이야기로 바꾸어, 아니 적절히 섞어서 재구성해 낸 이야기 바리데기. 신화 속 바리데기가 그렇듯이 여기 나오는 바리도 결코 순탄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제목만으로도 알겠다.

비록 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기도 한 어린 시절이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뭄과 기근으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고 설상가상 외삼촌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어려워진 바리.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어린 여자아이의 몸으로 어찌 그리 험한 삶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읽으면서 내심 놀랐다. 이게 과연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글쎄... 어찌보면 이 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고 탈출하거나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할머니의 바리데기 이야기와 현재 시대 바리의 삶을 왔다갔다 하는 구성에 그나마 바리의 고통을 잠시 잊기도 했다. 사실 북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하는 말을 읽을 때는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권의 이야기 속에 온갖 인간사가 들어 있는 듯도 하고 세상사의 이치가 들어 있는듯도 하고, 무엇보다 그동안 있어 왔던 여러 사건들(특히 북한의 기근과 이슬람 문제-왜 하필 북한 소녀 바리는 이슬람교도인 알리와 결혼했을까. 이것은 작가의 명확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이 녹아 있어서 자꾸 소설이 아닌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내 일이 아니라고 멀찌감치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라고 작정한 듯하다. 분명 알리가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해야 할 결말임에도 어딘지 먹먹하고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닐런지... 신나는 살풀이 굿판을 벌여서 액을 물리쳤건만 또 다른 액운이 어디선가 밀려오는 것만 같다. 설마 아닐 거야. 알리와 바리는 이제 행복하게 잘 살거야라며 행복한 결말이라고 애써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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