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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ㅣ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평점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
동창생 모임에 참석을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고정관념이다.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진부하다. 나의 답은 이렇다. ‘동창생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유능한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일 처리를 다 하고 바쁜 티를 내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나 바빠서 그 모임에 못 나갈 것 같아’라고 말하며 바쁜 티를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에코’이다. 이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193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는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이자 저명한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다. 그리고 지독한 ‘공부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이런 대학자가 유머 있는 가벼운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될까? 이런 궁금증이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진짜 힘 있는 사람은 걸려 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는다. 늘 회의 중이라서 전화를 직접 받을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힘 있는 자이다. (203쪽)
이렇듯 휴대폰을 권력의 상징으로 과시하는 자는 오히려 자기가 말단 사원의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203쪽)
이것은 “긴급한 업무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온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 이를 테면 아무데서나 휴대전화로 큰 소리를 내며 통화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일침을 가한 것이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집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책이 많이 있는 걸 본 방문자는 이렇게 묻기 일쑤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나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아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있었는데,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세 가지의 대답을 소개해 놓았다.
질문 :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대답 1 :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 두겠어요?
대답 2 :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지요.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말입니다.
대답 3 :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학의 연구실에 놓아두지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혀 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많은 책들을 마주하게 되면 ‘지식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질문으로 자기 자신의 고뇌와 회한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253쪽)
책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며 사는 나로서도 서점에 있는 많은 책들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하질 않곤 했다. 세상엔 이렇게 책들이 많은데 그것에 비해 난 조금밖에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찜찜함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에코는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지식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
영화가 늑장을 부린다면 그건 포르노 영화가 맞다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의 소개는 참 신선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포르노 영화일까, 아닐까를 구분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단다.
“만일 배우들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 (174쪽)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오로지 그런 장면들(입에 담기 어려운 천한 장면들)만 본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공백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174쪽).”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가. 이 책엔 유쾌하게 또는 통쾌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책 속의 ‘차례’에 있는 제목들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하는 방법 /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 / <맞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 방법 /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앞으로 누군가가 묻는 말에 개성 없이 ‘맞습니다’로 대답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말은 이렇다. 괄호 안은 대답이다.
경찰입니다! 로시 씨이십니까? (카를라, 짐 꾸려!)
아니, 자기 팬티 안 입었잖아! (그걸 이제 알아차렸어?)
보아하니, 당신 10억 리라짜리 부도 수표에 서명을 하고 나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거 아니야? (당신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벌써 탑승이 끝났나요? (저기 하늘에 작은 점 보이시지요?)
뭐라고? 너희들 지금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군.) (112쪽)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싶은 사람은,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101쪽).”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재밌는 답변을 하고 싶은 사람은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106쪽)”라고 대답하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책을 읽든 독자는 저자에게서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은 배우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말을 통해서 보여 주는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이다. 내가 ‘비스듬히’라고 표현한 이 말은 세상을 정면에서만 보지 않기를 의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의 한 쪽의 시각만으로 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하나의 컵을 예로 든다면 머릿속에서 컵을 상상할 때 습관적으로 정면으로 본 컵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컵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볼 수 있다. 컵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 또 오른쪽에서 볼 때와 왼쪽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다. 여러 각도를 달리해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컵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여러 모습의 총합이 바로 ‘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 미국의 시각에서 보자면 ‘테러와의 전쟁’이지만 이슬람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문명충돌’일 뿐이다. 제삼의 시각으로 보면 또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쪽의 시각으로만 보는 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제대로 보려면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게 옳은가 하는 점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봄으로써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하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와 같이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를 통해서 가능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