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5
토마스 만 지음, 강두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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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 나와 닮은 사람의 슬픈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를 읽은 글쟁이들은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니’, ‘아니 이건 나잖아’하는 생각으로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이 작품은 한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자세히 보여 주는 성장소설로, 글을 쓰는 ‘토니오 크뢰거’가 그 주인공이다.


이문열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 준 소중한 소설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나와 나의 동족들을 보여 주고 정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독서목록에 의하면 이 작품을 처음 읽은 때는 1998년 6월이었다. 문학에 한참 빠져 살며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을 때였다.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금방 매료되어 ‘아니 이런 작품이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오다니!’하면서 단숨에 읽었었다. 그 뒤에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여러 번 읽어서 다섯 번 이상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주인공에게서 나를 보는 게 경이로웠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은 이유는 주인공 토니오에게서 나를 보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읽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사랑엔 여러 법칙이 있다. 그 중 슬픈 법칙은 둘 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자가 괴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에 민감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으며, 상대가 조금만 자신에게 소홀히 해도 심각해진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이 상대를 더 사랑하기에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와도 같은 것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토니오도 친구를 사랑하면서 그런 경험을 하였다.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는 패자이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 본문에서.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달콤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비해 사랑을 받는 일은 그저 인간이 가진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즐거움을 줄 뿐이다. 사랑에 빠진 토니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랑을 받는 것은 허영심을 위한 메스꺼운 만족감에 불과하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본문에서.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글 쓰는 일이 무조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글을 쓰며 사는 일이 세상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될 때가 있으리라. 가령 여름날 땡볕 속 아파트 공사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나, 겨울날 매서운 추위 속 재래식 시장에서 찬 생선을 손질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글 쓰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리라. 난 편안히 앉아서 ‘쓰지 않아도 될 글’이나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토니오는) 시를 쓴다는 것은 방종한 것이며 원래 옳지 못한 것이라고 자신도 느끼고 있어서, 이런 행위를 기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독특해서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는 일이 잦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고 사는 외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토니오도 그런 사람이어서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유별나 만사에 충돌하고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나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 너(한스 한젠)처럼 그렇게 눈동자가 파랗고, 또 너처럼 단정하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려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정신과 언어의 위대한 힘에 매료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토니오)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게 여겨지는 힘,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느낀 힘, 그에게 고귀함과 영예를 약속한 힘, 즉 무의적이며 말없는 인생 위에 미소 지으며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송두리째 몸을 바쳤다.” - 본문에서.


“그 힘(정신과 언어의 힘)은 그의 시선을 예리하게 했고 인간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허황한 언어의 정체를 간파하게 했으며 인간의 영혼과 그 자신의 영혼을 해명하게 해 주고 그에게 투시력을 부여해 세계의 내면과 또 언어와 행위의 배후에 있는 일체의 궁극적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본 것은 희극과 비참 - 그야말로 인생의 희극과 비참이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잘 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글을 쓴다는 것을. 그래서 우울한 그림자를 달고 사는 이들은 자신은 글을 쓰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기를 바라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토니오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스 한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한스 한젠, 너는 그 옛날 정원 문간에서 나에게 약속한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부디 읽지 말아다오! 이제 너에게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고독 때문에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음울한 시를 들여다보면서 그 맑은 눈동자를 흐리게 하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와 같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본문에서. (난 이 글이 제일 슬프게 느껴진다.)


토니오는 여자로서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친구로서는 한스 한젠을 좋아한다. 그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같은 아들을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식의 저주와 창조의 고뇌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평범성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그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어느 종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 본문에서.


그러므로 이 ‘길을 잘못 든 세속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서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살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고 부르고 또 세속인은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 본문에서.


평범한(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 속에 낄 수 없어서 필연적으로 고독한 사람들. 지금 이 시간에도 토니오와 닮은 이런 사람들은 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지 않아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 무엇을, 글로 쓰는 세계에 침잠해 있을 것이다.


그런 고독한 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게 만든다, 이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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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예사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아닐까 합니다. 예사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툭 부딪치고,
예사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꽥! 소리쳐서,
혼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가끔은 혼자서 빙긋이 웃기도 하는... 상처받기도 쉽지만 상처주기도 잘하는 그런 영혼...

페크pek0501 2010-02-24 16: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고수께서 하수의 방에 들르셨네요. 영광입니다. ㅋㅋ

작가란 그래서 외로운 존재이지요. 남들이 그냥 지나칠 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일기 일쑤... 마찰 있기 일수...그런데 그렇게 예민하지 않고 둔하면 글을 쓸 수 없겠지요.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 평범하다면 예술이 되겠습니까. 유별나도 예술가들을 사랑합니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니까요.

옹달샘 2010-02-2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어 왔지만 진정한 작가정신을 가진 분들을 보면 더럭 겁이 납니다. 저는 발끝도 따라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지요. 감동을 주는 글을 창작해 내는 작가들이 유별나다고 해도 좋습니다. 창작품을 남겨주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유익을 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작가들을 만나는 것보다 작품으로만 만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요?

페크pek0501 2010-02-26 11:24   좋아요 0 | URL
저도 비문학적인 데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들의 모습과 똑같이 않아요. 하지만 또 비문학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문학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이 세계 저 세계, 어느 세계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 들지요. 이 소설의 토니오처럼요.

작가들을 직접 보면 실망이 될 때가 정말 있어요. ㅋ
 


<연애칼럼> 환상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서로 사랑하던 연인들이 이별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변했든지, 상대가 변했든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헤어지는 이유 중 특히 상대에게 실망하게 되어 헤어지는 경우엔, 누구나 상대가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상대는 왜 변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대가 변한 게 아니라 변한 것처럼 보인 것일 뿐이다. 자신이 처음부터 상대에 대해 잘못 알았기 때문.


예를 들면, 단점이 많은 사람을 장점이 많은 사람으로 둔갑시켜 상상했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얘기다. 연인들 간에 “그가(그녀가) 내게 그럴 줄 몰랐어.”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상대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단점을 빨리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어서 시간이 지나야만 밝혀질 이런 오해는 충분히 일어날 만하다. 여기서 기억해 둘 것은 사람은 사고방식이든 성격이든 습관이든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상대가 변심을 했다고 판단된다면 반대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봐야 한다. 나의 어떤 점에 실망이 되어 내게 싫증이 났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상대가 나에 대해 엉뚱한 환상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연인들 사이에서 “이제 너를 만나는 게 하나도 즐겁지 않아.”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 말이 진심인 경우에 한하여 그 연애는 끝장이 난 것이다. 더 이상 상대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남자는 “클로이가(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하고 자문한다. 또 주인공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것일까? 그 답은 자기 확인적인 순환논법이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 클로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며, 클로이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속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싹트고 자라나는 것은 인간에게 상상력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성을 발견하게 되면, 상상력은 그 상대에게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히게 된다. 그래서 그리 아름답지 않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여기서 상상력의 다른 이름은 ‘환상’이다. 환상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사랑한 것도, 변심한 것도 무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감정이 환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탓할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환상이겠다.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조차 몰랐던 스칼렛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져 이 작품은 영화로 더 유명하다. 스칼렛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남북전쟁 직전의 시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위의 많은 남성들은 스칼렛의 매력에 반해 사귀고 싶어 했으나 애슐리만은 그녀에게 무관심하였는데, 그런 무관심한 애슐리에게 그녀는 끌리고 만다. 그리고 애슐리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으로 키워 가며 그 역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미 멜라니의 남편이 되어버린 애슐리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스칼렛은 레트와 결혼한 뒤에도 애슐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사랑을 더 키웠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애슐리의 아내 멜라니가 병을 얻어 죽게 되는 병석에서 애슐리는 멜라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을 들은 스칼렛은 그때서야 애슐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내 멜라니였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니 자신이 사랑한 사람도 애슐리가 아니라 자신의 남편인 레트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칼렛은 애슐리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착각을 하며 그에 대한 사랑을 품은 것이다. 그녀는 애슐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며 나름대로 애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으나, 그 이해는 결국 오해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진 셈이다. 결국 자신이 누굴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모른 채 사랑한 것을 보면, 사랑이란 비현실적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스칼렛이 입증한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던 소녀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여주인공인 소녀는 ‘허석’이란 이름의 젊은 남자를 예전에 염소 옆에서 하모니카를 불던 사람으로 알고 짝사랑하게 된다. 하모니카를 불던 그 모습을 그리며 그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잘못 알았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생긴다. 소녀가 짝사랑에 빠졌던 그 모습은 ‘허석’이란 멋있는 남자가 아니었고 초라한 낯선 아저씨였던 것. 어느 날 그 낯선 아저씨가 염소 옆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걸 보게 되었던 것.


“그날 하모니카를 불던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허석이 아니었다.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은 허석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내 사랑이 이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마땅히 허석이 아닌 이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를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거였다.” - <새의 선물> 중에서.


자신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이미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면 그 소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건 무엇이었을까. 역시 환상의 산물이 사랑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한 엘라


토마스 하디의 <환상을 쫓는 여인>이란 소설에서는 기혼 여성인 엘라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 트리위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 역시 환상이 빚어내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위의 시집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고 그의 시를 능가하는 시를 한 번 써 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총기 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이 생명을 빼앗기 위한 도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남편의 직업에 대해 더 이상 상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시각에선 본 남편은 그저 천박하면서도 물질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환상을 주지 못하는 그런 남편과 살면서 환상을 주는 한 시인을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 소설작품의 공통점은 환상이 사랑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아마 인간에게 환상이란 상상력이 없다면 사랑에 빠지는 일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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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마가렛 미첼 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은희경 저, <새의 선물>

토마스 하디 저, <환상을 쫓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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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 0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2-18 11:14   좋아요 0 | URL
급하지 않습니다. 이 달 안으로 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20권의 목록을 미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저도 오늘 도서관에 가고 바쁜 일 있어서 내일이나 모레에 이메일 보내놓고 댓글로 알릴게요.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0-02-19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제 하루의 방문자 수가 126명이나 되네요. 어떤 경로로 들어오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여기 들어오시는 모든 분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순오기 2010-02-1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블로거뉴스 특종 당첨이네요, 축하해요!
5권 추천하는 건 일도 아닌데요.^^ 다만 20권과 중복되지 않는 책을 추천하려고 알려달라 했지요. 어쨋든 조만간 페이퍼로 작성해서 올릴게요.

페크pek0501 2010-02-19 15:40   좋아요 0 | URL
매우, 퍽, 무척, 무지, 감사 드립니다. 저도 제 글이 당선된 것 지금 알았어요. 책을 구입할 게 있어 홈페이지 들어가서 책을 신청했는데 적립금이 들어와 있잖아요.ㅋ 여러 가지로 감사 드립니다. 아, 전 왜 이리 인복이 많은지요. ㅋㅋ

gimssim 2010-02-2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는 말씀에 공감^^
찬찬히 풀어서 쓰신 글 잘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페크pek0501 2010-02-20 10:35   좋아요 0 | URL
방금 중전님의 블로그에 댓글 남기고 왔어요. 반갑습니다. 글이 잔잔한 호수 같더군요. 좋은 글 많이 쓰세요.

페크pek0501 2010-02-2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간에 사소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중전님의 식탁풍경을 그린 글이 재밌어서? 제가 쓴 댓글을 여기에 옮깁니다.

"행복은 멀리서 보는 숲처럼 아름다운 것"-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236쪽.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입니다. 그 식탁퐁경을 저는 멀리서 보니까요. 그런데 숲 속에 있는 사람은 행복을 감지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숲 속에 있는 사람은 숲 안에 있는 벌레들과 쓰레기가 먼저 눈에 띄거든요. 좋은 방법이 있지요. 그 식탁퐁경을 먼훗날 회상하는 거지요. 그러면 거리가 생겨서 먼 숲을 보는 사람이 되어 멀리 보는 숲처럼 그 식탁풍경도 아름답게 보이고 행복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아, 재밌는 글입니다.

바밤바 2010-02-2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는 것만큼 제 자신의 욕망을 살피는 일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같은 사람이 4대 성인보다 위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욕망의 층위가 달랐을 수도 있지만 4대 성인은 조르바의 넉살 앞에선 초라해 진다고 봐요.^^

페크pek0501 2010-02-21 21: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칼럼을 쓸 적마다 '이렇게 써도 말 되나, 너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의 글이 아닌가'하고 자신이 없을 때가 있어요. 제 나름대로 알고 있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인데,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늘 오늘은 여기까지 배웠다, 내일은 더 배워야지, 하는 자세로 새로운 책을 찾아 읽습니다. '아는 만큼 글을 쓴다'는 것을 잘 아니까요.

바밤바님 덕분에 제 닉네임을 페크로 하겠습니다. 님이 처음 사용하신 이름인데 마음에 듭니다. 이것도 감사...

페크pek0501 2010-02-2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지인 덕분에 이 글의 어느 부분을 방금 고쳤습니다. 첫 문단의 끝문장에서 '상대에 대해 오해하며 인지했기 때문'이라는 부분입니다. '인지'라는 말은 심리학 용어라서 어색하니 다른 자연스러운 말로 바꾸는 게 좋겠단 말씀에 따라 '상대에 대해 잘못 알았기 때문'이라고 고쳤습니다. 글이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배웠으니 즐거운 날입니다.

지적해 주신 그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로, 예전에 문학강의에서 되도록 한자어보다 순수 우리말을 쓰는 게 더 좋다고 배웠는데, 글을 쓸 때 잊을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각성-보다는 깨닫다-라는 낱말을 쓰는 게 더 좋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도 보면 '인지'라는 말도 순수 우리말로 풀어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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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


동창생 모임에 참석을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고정관념이다.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진부하다. 나의 답은 이렇다. ‘동창생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유능한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일 처리를 다 하고 바쁜 티를 내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나 바빠서 그 모임에 못 나갈 것 같아’라고 말하며 바쁜 티를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에코’이다. 이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193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는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이자 저명한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다. 그리고 지독한 ‘공부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이런 대학자가 유머 있는 가벼운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될까? 이런 궁금증이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진짜 힘 있는 사람은 걸려 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는다. 늘 회의 중이라서 전화를 직접 받을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힘 있는 자이다. (203쪽)


이렇듯 휴대폰을 권력의 상징으로 과시하는 자는 오히려 자기가 말단 사원의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203쪽)


이것은 “긴급한 업무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온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 이를 테면 아무데서나 휴대전화로 큰 소리를 내며 통화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일침을 가한 것이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집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책이 많이 있는 걸 본 방문자는 이렇게 묻기 일쑤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나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아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있었는데,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세 가지의 대답을 소개해 놓았다.


질문 :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대답 1 :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 두겠어요?

대답 2 :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지요.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말입니다.

대답 3 :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학의 연구실에 놓아두지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혀 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많은 책들을 마주하게 되면 ‘지식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질문으로 자기 자신의 고뇌와 회한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253쪽)


책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며 사는 나로서도 서점에 있는 많은 책들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하질 않곤 했다. 세상엔 이렇게 책들이 많은데 그것에 비해 난 조금밖에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찜찜함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에코는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지식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


영화가 늑장을 부린다면 그건 포르노 영화가 맞다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의 소개는 참 신선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포르노 영화일까, 아닐까를 구분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단다.


“만일 배우들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 (174쪽)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오로지 그런 장면들(입에 담기 어려운 천한 장면들)만 본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공백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174쪽).”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가. 이 책엔 유쾌하게 또는 통쾌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책 속의 ‘차례’에 있는 제목들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하는 방법 /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 / <맞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 방법 /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앞으로 누군가가 묻는 말에 개성 없이 ‘맞습니다’로 대답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말은 이렇다. 괄호 안은 대답이다.


경찰입니다! 로시 씨이십니까? (카를라, 짐 꾸려!)

아니, 자기 팬티 안 입었잖아! (그걸 이제 알아차렸어?)

보아하니, 당신 10억 리라짜리 부도 수표에 서명을 하고 나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거 아니야? (당신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벌써 탑승이 끝났나요? (저기 하늘에 작은 점 보이시지요?)

뭐라고? 너희들 지금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군.) (112쪽)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싶은 사람은,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101쪽).”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재밌는 답변을 하고 싶은 사람은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106쪽)”라고 대답하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책을 읽든 독자는 저자에게서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은 배우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말을 통해서 보여 주는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이다. 내가 ‘비스듬히’라고 표현한 이 말은 세상을 정면에서만 보지 않기를 의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의 한 쪽의 시각만으로 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하나의 컵을 예로 든다면 머릿속에서 컵을 상상할 때 습관적으로 정면으로 본 컵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컵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볼 수 있다. 컵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 또 오른쪽에서 볼 때와 왼쪽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다. 여러 각도를 달리해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컵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여러 모습의 총합이 바로 ‘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 미국의 시각에서 보자면 ‘테러와의 전쟁’이지만 이슬람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문명충돌’일 뿐이다. 제삼의 시각으로 보면 또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쪽의 시각으로만 보는 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제대로 보려면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게 옳은가 하는 점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봄으로써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하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와 같이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를 통해서 가능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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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0-02-0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고 나서

이 글을 일주일 전에 써 놓고 이제야 글을 올렸다. 대충 써 놓은 초고이므로 다시 한 번 읽고 수정해서 올려야 하는데 늑장을 부린 것이다. 이유는 게을러서다. 좋게 말하면 느긋해서다.

글을 쓰면서 간혹 내 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관적인 생각에 치우쳐 억지를 부리며 글을 썼을 때가 그렇다. 사실 그런 글은 문제가 있는 글로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없으나, 알면서도 부족한 대로 글을 올린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사실, 옛날에 찍은 사진 속의 자신이 촌스럽고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세련되지 못한 내 글에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점점 글쓰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하는,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보낸다.



gimssim 2010-02-24 22:55   좋아요 0 | URL
제 주관적인 생각
'선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물론 예외도 있지만)
글은 그때, 그 순간의 생각의 모습이지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지만 세세한 지류는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겠지요.

페크pek0501 2010-0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남길 지인들에게

저를 잘 아는 분은 댓글을 남길 때 굳이 로그인 하지 않고 댓글을 써도 됩니다. 댓글을 쓴 뒤에 이름 쓰는 칸에 이름 적고 비밀번호는 아무거나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숫자 적으면 됩니다. 비밀번호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본인이 댓글을 삭제하고 싶을 때 그 비밀번호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삭제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저는 누가 들어오는지 모르니까 댓글을 남겨 주시면 무척 반가울 것입니다. (참고사항 : 남기지 않아도 됨)

옹달샘 2010-02-2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유머감각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말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 피곤하게 만드는 말, 상처주는 말,짜증스런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고 살잖아요.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유쾌해지는 말을 하면서 살면 세상살기가 한결더 즐거울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0-02-26 11:19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특히 불행하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유머감각으로 기분전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연애칼럼> 연인의 마음을 안다고 속단하면 바보다


할리우드 커플 브래드 피트(47), 안젤리나 졸리(35)의 결별설이 불거진 가운데 사실무근이라는 외신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입을 열지 않아 의혹이 커지고 있다(http://news.hankooki.com, 1월 26일). 이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연인들의 결별설은 꾸준히 보도된다. 서로 좋아해서 만난 사이임에도 왜 결별하게 되는 걸까.


사람들은 연애가 참 어렵다고 말한다. 왜 어려울까, 그냥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 것을.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애가 어려운 이유 중에는 아마도 사람과 사람 간의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인 것도 포함될 듯싶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건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히 알기가 쉽지 않아서다.


연인 사이, 남자가 다정하게 여자에게 묻는다. “지난 주말 잘 보냈어요?” 여자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주 잘 보냈어요.” 이 대답에 남자는 기분이 나빠진다. 남자는, ‘어떻게 나를 만나지 않고도 잘 보낼 수 있는 걸까,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말인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그리워해서 주말을 자신처럼 우울하게 보내길 바랐던 것. 여자는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자 역시 기분이 상한다. ‘나랑 함께 있는 게 싫은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진작 여자가 주말을 왜 잘 보냈는지를 남자에게 말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여자는 주말에 이 남자를 만날 때 입을 옷을 사느라 쇼핑하며 즐겁게 보냈던 것.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옷을 고르는 시간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소개로 몇 번을 만난 대학생 남녀,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 “우리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남자는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나와 애인이 되기는 싫단 말이군.’ 그런데 그녀의 진의는 그 남자를 신뢰하고 좋아해서 계속 만나고 싶다는 뜻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몰라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는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이 있다. 김유정 저, <동백꽃>이란 작품이다. 점순이(여자)는 ‘나(남자)’에게 굵은 감자 세 개를 주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점순이가) “느 집엔 이거(감자) 없지.”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가)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하고 말하며 그 감자를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리자, 점순이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나중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었다.)


점순이가 눈물까지 흘려도 ‘나’는 여전히 점순이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느 집엔 이거 없지.”하는 소리를 ‘나’는 “너네는 가난해서 감자 없지?”하는, 약을 올리는 정도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점순이가 ‘나’에게 감자를 준 것은 “내가 너를 좋아해서 너를 주려고 감자를 가져왔단다.”라는 의미였던 것.


“우리는 상대가 만일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행동하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다.” - 존 그레이 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중에서.


존 그레이는, 남자의 언어와 여자의 언어에는 똑같은 어휘라고 할지라도 그 어휘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나는 좀더 로맨틱한 기분을 느껴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남자는 “그럼 당신은 내가 로맨틱하지 못하다는 말이오?”로 해석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당신은 정말 로맨틱한 사람이에요. 이따금씩 불쑥 꽃다발을 내밀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데이트를 신청해 주지 않을래요? 그럼 나는 너무 행복할 거예요.”의 뜻이란다.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뜻을 안다 하오


<장자>, 추수편에 이런 얘기가 있다. 호숫가에서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나와서 한가롭게 놀고 있으니 이것이 물고기들의 즐거움이겠지.”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나?”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물고기가 정말 즐거운 것인지 장자가 모르는 것처럼 혜자 역시 타인인 장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실 우리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즐겁게 노는 것인지, 좋아하던 짝과 헤어져 슬퍼서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인지, 먹이를 먹고 난 뒤에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운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맘대로 해석할 뿐이다. 어디 물고기뿐이랴,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도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새들의 소리인지, 짐작은 할 수 있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에 비해 서로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물고기’나 ‘참새’에 비해 훨씬 쉬워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연인의 관계에서 서로의 진실을 알기란 헤엄치는 물고기나 짹짹거리는 참새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일찍이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말이란 오해가 생기는 근원”이라고 했으며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상대방을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해서 결국 현상만 보고 그 본질을 보지 못한 연인들은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잘못 알아듣고 서로 오해하고 상처 받고 다투고, 급기야 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그것이 정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마음엔 이미 고정관념과 편견이 들어 있는데다가 멋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인관계에선 항상 내가 짐작한 것과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연인의 마음을 안다고 속단하면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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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0-01-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칼럼을 쓰고 나서>

연애칼럼을 처음 써 보았습니다.

연애(또는 사랑)에 대해서 잘 쓰려면 그것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우선 연애 경험이 많을수록 좋겠지요. 그런데 제가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 직접 자신이 연애한 경험으로만 쓰자면 개인적인 일을 주관적으로 쓸 수밖에 없어서 연애에 대해 총체적으로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글과 같이 그동안 제가 읽은, 탁월한 여러 저작들을 바탕으로 쓴다면 차라리 연애에 대해 총체적으로 그리는 것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 써 봤습니다.

바쁩니다.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논문을 쓰는 학생으로서, 블로그 글쟁이로서, 주부로서, 1인 4역을 하고 있는데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고 있습니다. 그 중 그래도 제일 열심히 하는 것은 논술선생으로서 하는 일인데, 이것은 남(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너무 일찍(제 나이에 비해서가 아니라 제 역량에 비해서) 블로거가 된 것을 가끔 후회합니다. 논문이라도 끝내 놓고, 그리고 글을 많이 써 놓은 다음에 블로거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얌전한 사람도 막상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으면 망설임 없이 속도를 내듯이, 저도 블로그의 운전대를 잡은 이상 그냥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연애칼럼>을 얼마나 연재할 수 있는지 제 능력을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쓸 것입니다.

‘느림의 미학’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저처럼 유능하지 못한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말입니다.





바밤바 2010-01-31 18:16   좋아요 0 | URL
글 재미있네요. 앞으로도 기대할께요~ 화이팅!^^

페크pek0501 2010-02-0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 없는 집에 손님이 다녀가셨군요. 반갑고 고맙습니다. 방금 강준만 교수의 <전화의 역사> - 리뷰를 읽고 오는 길입니다. 잘 쓰셔서 신세집니다.

옹달샘 2010-02-0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문단에서 '굶은 감자'가 아니라 '굵은 감자'라고 써야 맞는 표현이지요? 처음으로 오타를 찾았네요. 오타 많이 찾으면 좋아하실지 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오타찾는 재미로 글을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0-02-02 14:14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고칠 게 있으면 당연히 가르쳐 주시는 게 좋죠. 언제든 환영합니다. 고칠게요. 인간은 왜 인간이겠습니까. 우린 신이 아닙니다. 혼자서 글 쓰고 교정,교열 보고 모니터 역할까지 하니 힘이 듭니다. 도와 주시면 감사하죠.

2010-02-07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2-07 13:06   좋아요 0 | URL
다른 블로그 들어가서 비밀댓글들을 보면 악성댓글인가 싶었어. 악플을 쓰는 사람은 본인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데 우리 혜수는 수줍음이 많아서 비밀댓글 쓴 모양이야. ㅋ 내 수업에 감탄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 가장 기분이 좋지. 그런 재미로 수업을 한단다.ㅋ 개인지도라서인지 내가 혜수에게 기대가 크네. 잘 해보자.

gimssim 2010-02-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준만 교수를 좋아하는데 바밤바님의 글을 찾아읽어보아야겠군요.
그리고...논술 선생님이시라니 부럽습니다.

페크pek0501 2010-02-24 10:43   좋아요 0 | URL
부러우시다니, 웃음이 납니다. 이 역시 멀리서 보기 때문인 것 같군요.

"행복은 멀리서 보는 숲처럼 아름다운 것"- 쇼펜하우어.

그래서 남의 떡이 커보이겠죠. 저도 만나서 수다를 실컷 떨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여기는 대구랍니다. 당연히 서울이라 생각하셨을 것 같군요. 서울에서 태어나 35년간 쭉 서울에서 산 서울토박이가 남편 따라 대구에 왔답니다. 제가 대구사람인지, 서울사람인지 저도 헷갈린답니다. 여전히 서울말을 쓰며 서울의 문화를 가지고 사는데, 두 발은 대구의 땅을 밟고 있으니...

강준만 교수는 총 169권의 저작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존경스럽습니다. 아마 매일 글을 쓰시나 봐요. 저도 <대중문화의 겉과 속 >1,2,3권을 다 가지고 있을 만큼 팬인데, 최근 개정판으로 나온 <대중매체 이론과 사상>이란 책은 대단?해서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바로 구입을 했어요. 많은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는 백과사전 같은 책인데, 거기다 재미까지 갖춘 책이랍니다. 서점 가시면 한 번 보세요. 강추합니다

gimssim 2010-02-24 23: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멀리서 보기 때문이라는 것...
저도 대구에서 오래 살았어요. 고향같다고나 할까요.
한달에 한두번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 나들이 합니다.
강준만 교수 땜에 그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도 있다잖아요.
추천해 주신 책 읽어볼께요.

페크pek0501 2010-02-2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준만 교수는 전북대 교수이고, 이곳 대구엔 경북대가 있지요.

저는 강준만 교수 같은 분이 서울 가시지 않고 지방에 계신 것에 대해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영남대에 계셨던 유홍준 교수는 지금 서울 모대학으로 옮기신 걸로 압니다. 인재를 서울에 뺏긴 기분이 들더라구요. 어느 분야든 탁월한 분들이 서울에 편중되지 않길 바랍니다.

박노자님, 진중권님, 강준만님은 제가 주목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들이 신작을 낼 때마다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봅니다. 촘스키, 하워드진 같이 소중한 분들입니다.

진지리진 2010-12-1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저에요!!
방갑죠?? ㅋㅋ
전 잘 지내고 있어요, 가끔씩 뇌가 기억하고 있는 일이 떠올라,
가슴이 쓰리기도 하는데~ 뭐 어쩌겠어요~ 다 제 팔자고, 제가 자처한 일인걸..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글 남기면 더 방갑고 좋으니까요^^
선생님^^ 혹시 김정운 교수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이 책에 대한 리뷰~
기대해도 될까요?? ㅋㅋ
너무너무 관심이 가는 분이시고,, 저서인데,, 제가 한참 인기 많을 때는 심드렁하다가,,
뒷북치는 경향이 있어서^^ 내년쯤 읽어볼까 하는데~ ㅋㅋ
선생님 리뷰로 양질의 맛좋은 요리로 미리 맛보고 싶어서요!!^^ 히히~
건강하시구여^^ 나중에 좋은 모습으로 뵈요!!♡

페크pek0501 2010-12-11 13:36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그런데 김정운 님의 책 리뷰는 요즘 곤란해요. 시간이 없어요. 이달 말일까지 끝내야 하는 작업이 있어서요. 저도 이 일을 빨리 끝내놓고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며 지내고 싶군요.
요즘 생각하는 것들... 누구나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각자의 진실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여 말해서 피해를 주는 것은 '악'이라는 것. 이 세상엔 무시해도 좋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 등을 생각하며 지내요.
젊은 사람이 팔자 운운하는 건 좀 웃긴데요 ㅋ. 그 정도면 제가 보기에 좋은 팔자이니 안심하시길... 이 세상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래서 자살이 일어나죠.
나중에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많은 얘기 나눠요. 반가웠어요.^^
 


단상(4) 둘 중 누가 옳을까요? - 두 사람의 논쟁



갑 : 나는 증권과 보험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많은 사람이라서 친구들이 나에게 자문을 구하곤 한다네. 친구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 위해 내게 증권이나 보험에 관해 자세히 물어서 지식과 정보를 얻지. 그럴 날이면 으레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점심을 함께 하는데, 내가 아는 것을 총동원하여 말하면 친구는 고맙다는 뜻으로 식사비를 지불한다네.


을 : 그렇다면 자네는 한 번도 식사비를 내지 않는다는 말인가?


갑 : 물론이네. 낼 필요가 없지. 그건 정당한 일이니까. 왜냐하면 나는 친구에게 지식과 정보를 주었으니 친구는 돈을 써야 하지 않겠나?


을 : 자네는 친구 사이에 주고받은 지식과 정보도 돈으로 계산하는 모양이지?


갑 : 물론이네. 친구 사이라도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네. 나는 그동안 증권과 보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많은 책들을 사 보면서 공부했다네. 거기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이 있었는데, 그 대가로 식사 대접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네.


누군가에게 점심을 사준다면 재화의 손실이 생기지만 지식은 누구에게 아무리 나눠주어도 재화의 손실이 없다


을 : 그래, 친구 사이라도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데엔 동의하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 같네. 왜냐하면 그동안 공부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은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래서 자네는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진 사람이 되었잖아. 그것으로 족하지. 또 지식이나 정보는 남에게 주어도 자신에게서 줄어드는 게 아니므로 손실이 없지만, 식사비를 지불한 친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에서 식사비만큼 액수가 줄었지 않았나. 그러니 식사비는 반씩 부담해야 옳은 것 같네. 친구가 점심을 한 번 사면 그 다음에 만날 땐 자네가 사야 한다고 생각하네.


갑 : 그런 친구를 만나러 나가기 위해 빼앗긴 시간과 교통비도 생각해야 한다네. 난 남의 옳은 선택을 위한 자문에 응하기 위해 내가 소비한 시간과 교통비를 한 끼의 식사로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네.


을 : 그 대신 자네는 즐겁지 않았는가? 자네는 친구에게 지식과 정보를 주면서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감을 마음껏 누렸을 걸세. 그뿐인가, 친구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흐뭇함과 흡족함으로 기분이 좋았을 것이네. 그것은 바로 그 친구가 자네에게 선사한 선물과 같은 것이네. 오히려 자네가 친구에게 고마워하며 밥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드네. 그러니 식사비는 똑같이 부담해야 된다네.


갑 : 내가 친구에게 지식과 정보를 주면서 우월감과 자신감과 흐뭇함과 흡족함을 느끼며 즐긴 것은 사실이라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공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니, 나는 돈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네.


둘 중 누가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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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터넷 신문을 유료화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광고 수입 급감으로 고전해 온 뉴욕타임스(NYT)가 내년부터 온라인 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부과하기로 했다(조인스 1월 21일).”고 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 뉴욕타임스는 “지난 1990년대에도 해외 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부과했었고, 2005~2007년엔 사설과 칼럼 등에 대해 구독료를 부과”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중국의 대표적인 신문인 인민일보가 전자신문의 구독을 이번 해부터 유료화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인터넷을 통해 얻는 정보에 대해 돈을 지불해야 사는 사회에 살게 될지 모릅니다. 만약 그런 사회에 살게 된다면, 자신이 타인에게 준 지식과 정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풍토가 조성될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도 무료가 아닌 ‘유료’라면 말입니다.


제도(사회)가 변하면 인간의 사고도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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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 2010-01-2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둘 다 옳지않다.뇌리에 어떤 신호가 왔을 때 찰나적인 판단에 의해서 행동하게 된다.이성적인 효과이냐.감성적인 인화인가에 따라 형이상과 형이하의 현실적인 비중을 노리게된다.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인듯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는 인생사라면 가장 호의적인 것이 으뜸일 것이다.이왕지사 나왔으면 밥을 사주면서 설명 해주는 것이 다가올 희망이기도 하니까 말이다.의무와보답을 따지고보면 공통분모라고 생각한다.모든 것은 평등에 기인한다는 말이다.

페크pek0501 2010-01-24 16:03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밥을 사주면서 지식과 정보를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다면 참 좋은 세상이 될 듯합니다. 주는 기쁨도 받는 기쁨 못지않음을 아는 것, 소중한 체험입니다. 흐뭇함과 흡족함이야말로 행복한 기분 아니겠습니까.

옹달샘 2010-02-0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관계가 너무 계산적이면 만나면서도 즐거움보다는 부담감과 실망감이 싹트게 되고 결국엔 만나고 싶지 않은 관계가 되고 말지요. 정보를 얻은 친구가 고마운 마음에 식사비를 지불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수 있지만 그걸 매번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올바른 친구관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친구를 만나는 건 무척 부담스러울 것 같네요.

페크pek0501 2010-02-02 14:0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들어 오셨네요. 반가워요. 옹달샘 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보를 주는 그 마음도 정말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아요.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도 선의가 없으면 불가능할 일이니까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 착한 것 같아요. 길에서 아무에게나 길 찾는 질문을 하면 열에 아홉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