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5
토마스 만 지음, 강두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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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 나와 닮은 사람의 슬픈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를 읽은 글쟁이들은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니’, ‘아니 이건 나잖아’하는 생각으로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이 작품은 한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자세히 보여 주는 성장소설로, 글을 쓰는 ‘토니오 크뢰거’가 그 주인공이다.


이문열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 준 소중한 소설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나와 나의 동족들을 보여 주고 정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독서목록에 의하면 이 작품을 처음 읽은 때는 1998년 6월이었다. 문학에 한참 빠져 살며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을 때였다.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금방 매료되어 ‘아니 이런 작품이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오다니!’하면서 단숨에 읽었었다. 그 뒤에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여러 번 읽어서 다섯 번 이상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주인공에게서 나를 보는 게 경이로웠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은 이유는 주인공 토니오에게서 나를 보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읽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사랑엔 여러 법칙이 있다. 그 중 슬픈 법칙은 둘 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자가 괴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에 민감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으며, 상대가 조금만 자신에게 소홀히 해도 심각해진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이 상대를 더 사랑하기에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와도 같은 것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토니오도 친구를 사랑하면서 그런 경험을 하였다.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는 패자이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 본문에서.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달콤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비해 사랑을 받는 일은 그저 인간이 가진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즐거움을 줄 뿐이다. 사랑에 빠진 토니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랑을 받는 것은 허영심을 위한 메스꺼운 만족감에 불과하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본문에서.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글 쓰는 일이 무조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글을 쓰며 사는 일이 세상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될 때가 있으리라. 가령 여름날 땡볕 속 아파트 공사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나, 겨울날 매서운 추위 속 재래식 시장에서 찬 생선을 손질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글 쓰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리라. 난 편안히 앉아서 ‘쓰지 않아도 될 글’이나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토니오는) 시를 쓴다는 것은 방종한 것이며 원래 옳지 못한 것이라고 자신도 느끼고 있어서, 이런 행위를 기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독특해서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는 일이 잦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고 사는 외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토니오도 그런 사람이어서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유별나 만사에 충돌하고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나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 너(한스 한젠)처럼 그렇게 눈동자가 파랗고, 또 너처럼 단정하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려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정신과 언어의 위대한 힘에 매료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토니오)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게 여겨지는 힘,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느낀 힘, 그에게 고귀함과 영예를 약속한 힘, 즉 무의적이며 말없는 인생 위에 미소 지으며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송두리째 몸을 바쳤다.” - 본문에서.


“그 힘(정신과 언어의 힘)은 그의 시선을 예리하게 했고 인간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허황한 언어의 정체를 간파하게 했으며 인간의 영혼과 그 자신의 영혼을 해명하게 해 주고 그에게 투시력을 부여해 세계의 내면과 또 언어와 행위의 배후에 있는 일체의 궁극적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본 것은 희극과 비참 - 그야말로 인생의 희극과 비참이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잘 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글을 쓴다는 것을. 그래서 우울한 그림자를 달고 사는 이들은 자신은 글을 쓰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기를 바라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토니오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스 한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한스 한젠, 너는 그 옛날 정원 문간에서 나에게 약속한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부디 읽지 말아다오! 이제 너에게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고독 때문에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음울한 시를 들여다보면서 그 맑은 눈동자를 흐리게 하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와 같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본문에서. (난 이 글이 제일 슬프게 느껴진다.)


토니오는 여자로서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친구로서는 한스 한젠을 좋아한다. 그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같은 아들을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식의 저주와 창조의 고뇌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평범성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그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어느 종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 본문에서.


그러므로 이 ‘길을 잘못 든 세속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서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살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고 부르고 또 세속인은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 본문에서.


평범한(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 속에 낄 수 없어서 필연적으로 고독한 사람들. 지금 이 시간에도 토니오와 닮은 이런 사람들은 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지 않아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 무엇을, 글로 쓰는 세계에 침잠해 있을 것이다.


그런 고독한 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게 만든다, 이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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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예사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아닐까 합니다. 예사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툭 부딪치고,
예사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꽥! 소리쳐서,
혼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가끔은 혼자서 빙긋이 웃기도 하는... 상처받기도 쉽지만 상처주기도 잘하는 그런 영혼...

페크pek0501 2010-02-24 16: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고수께서 하수의 방에 들르셨네요. 영광입니다. ㅋㅋ

작가란 그래서 외로운 존재이지요. 남들이 그냥 지나칠 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일기 일쑤... 마찰 있기 일수...그런데 그렇게 예민하지 않고 둔하면 글을 쓸 수 없겠지요.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 평범하다면 예술이 되겠습니까. 유별나도 예술가들을 사랑합니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니까요.

옹달샘 2010-02-2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어 왔지만 진정한 작가정신을 가진 분들을 보면 더럭 겁이 납니다. 저는 발끝도 따라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지요. 감동을 주는 글을 창작해 내는 작가들이 유별나다고 해도 좋습니다. 창작품을 남겨주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유익을 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작가들을 만나는 것보다 작품으로만 만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요?

페크pek0501 2010-02-26 11:24   좋아요 0 | URL
저도 비문학적인 데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들의 모습과 똑같이 않아요. 하지만 또 비문학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문학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이 세계 저 세계, 어느 세계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 들지요. 이 소설의 토니오처럼요.

작가들을 직접 보면 실망이 될 때가 정말 있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