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칼럼> 연인의 마음을 안다고 속단하면 바보다
할리우드 커플 브래드 피트(47), 안젤리나 졸리(35)의 결별설이 불거진 가운데 사실무근이라는 외신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입을 열지 않아 의혹이 커지고 있다(http://news.hankooki.com, 1월 26일). 이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연인들의 결별설은 꾸준히 보도된다. 서로 좋아해서 만난 사이임에도 왜 결별하게 되는 걸까.
사람들은 연애가 참 어렵다고 말한다. 왜 어려울까, 그냥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 것을.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애가 어려운 이유 중에는 아마도 사람과 사람 간의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인 것도 포함될 듯싶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건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히 알기가 쉽지 않아서다.
연인 사이, 남자가 다정하게 여자에게 묻는다. “지난 주말 잘 보냈어요?” 여자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주 잘 보냈어요.” 이 대답에 남자는 기분이 나빠진다. 남자는, ‘어떻게 나를 만나지 않고도 잘 보낼 수 있는 걸까,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말인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그리워해서 주말을 자신처럼 우울하게 보내길 바랐던 것. 여자는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자 역시 기분이 상한다. ‘나랑 함께 있는 게 싫은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진작 여자가 주말을 왜 잘 보냈는지를 남자에게 말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여자는 주말에 이 남자를 만날 때 입을 옷을 사느라 쇼핑하며 즐겁게 보냈던 것.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옷을 고르는 시간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소개로 몇 번을 만난 대학생 남녀,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 “우리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남자는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나와 애인이 되기는 싫단 말이군.’ 그런데 그녀의 진의는 그 남자를 신뢰하고 좋아해서 계속 만나고 싶다는 뜻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몰라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는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이 있다. 김유정 저, <동백꽃>이란 작품이다. 점순이(여자)는 ‘나(남자)’에게 굵은 감자 세 개를 주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점순이가) “느 집엔 이거(감자) 없지.”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가)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하고 말하며 그 감자를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리자, 점순이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나중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었다.)
점순이가 눈물까지 흘려도 ‘나’는 여전히 점순이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느 집엔 이거 없지.”하는 소리를 ‘나’는 “너네는 가난해서 감자 없지?”하는, 약을 올리는 정도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점순이가 ‘나’에게 감자를 준 것은 “내가 너를 좋아해서 너를 주려고 감자를 가져왔단다.”라는 의미였던 것.
“우리는 상대가 만일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행동하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다.” - 존 그레이 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중에서.
존 그레이는, 남자의 언어와 여자의 언어에는 똑같은 어휘라고 할지라도 그 어휘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나는 좀더 로맨틱한 기분을 느껴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남자는 “그럼 당신은 내가 로맨틱하지 못하다는 말이오?”로 해석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당신은 정말 로맨틱한 사람이에요. 이따금씩 불쑥 꽃다발을 내밀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데이트를 신청해 주지 않을래요? 그럼 나는 너무 행복할 거예요.”의 뜻이란다.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뜻을 안다 하오
<장자>, 추수편에 이런 얘기가 있다. 호숫가에서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나와서 한가롭게 놀고 있으니 이것이 물고기들의 즐거움이겠지.”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나?”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물고기가 정말 즐거운 것인지 장자가 모르는 것처럼 혜자 역시 타인인 장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실 우리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즐겁게 노는 것인지, 좋아하던 짝과 헤어져 슬퍼서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인지, 먹이를 먹고 난 뒤에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운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맘대로 해석할 뿐이다. 어디 물고기뿐이랴,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도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새들의 소리인지, 짐작은 할 수 있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에 비해 서로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물고기’나 ‘참새’에 비해 훨씬 쉬워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연인의 관계에서 서로의 진실을 알기란 헤엄치는 물고기나 짹짹거리는 참새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일찍이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말이란 오해가 생기는 근원”이라고 했으며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상대방을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해서 결국 현상만 보고 그 본질을 보지 못한 연인들은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잘못 알아듣고 서로 오해하고 상처 받고 다투고, 급기야 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그것이 정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마음엔 이미 고정관념과 편견이 들어 있는데다가 멋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인관계에선 항상 내가 짐작한 것과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연인의 마음을 안다고 속단하면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