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구절>로 쓴 칼럼
확신이 어리석은 이유
문학의 지혜란 뚜렷한 견해를 가지는 것과 상반됩니다. - 수전 손택 저, <문학은 자유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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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등학생들 중에는 여러 학원을 다니느라 독서할 시간도, 숙제할 시간도 부족하다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 뒤에는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이것저것 배워야 남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학부모가 있다. 아이의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여러 학원을 다니게 하여 아이가 병이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학부모들에게, 초등학생들은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충분히 휴식해야 키가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가 학원을 다니기 싫어한다면 집에서 독서습관을 길러 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라는 말도 소용이 없다. 공교육은 아이들 모두가 똑같이 받는 것이니, 개별적인 선택의 사교육이 중요하다고 확신하는 학부모들에겐 학원은 필수사항이다. 이런 학부모들은 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수가 곧 아이의 경쟁력이라고 믿는데, 그야말로 뚜렷한 견해를 가진 이들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로 인해 모자간 갈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대체로 아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는 가난한 집의 딸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결혼을 권하는 상대여자는 부잣집 딸이다. 이런 어머니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가난한 집의 딸보다 부잣집 딸이 좋다고 굳게 믿어 버린다. 그런데 이런 경우 대부분, 가난한 집의 딸은 대체로 착하고 부잣집 딸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시청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이기적으로 보이는 콧대 높은 부잣집 딸보단 착해 보이는 가난한 집의 딸이 더 좋은 신붓감으로 생각된다.
딸을 가진 어머니가,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내용의 드라마도 있었다. 그 이유는 그 남자가 사윗감으로서 조건이 좋다는 것과 자신의 딸이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 그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강한 집념마저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간과한 것은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딸이 행복할 가능성은 아주 적다는 사실이다. 이미 다른 여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남자가 사랑하지도 않는 자신의 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어야 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없었던 건 자신의 생각이 매우 뚜렷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는데도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데도 검사나 의사가 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 부모는 이렇게 덧붙이곤 한다.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그런데 이 말이 백 퍼센트 진실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혹시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에 부모 자신부터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자랑스런 자식을 두고 싶은 게 부모로서의 욕심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을 비난하기는 쉬워도 자신에 대해 반성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에 종종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뛰어난 판단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뛰어난 판단력이란 올바른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올바른 생각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고 독서를 하는 것도 결국 올바른 생각으로 판단력을 기르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경우든 결과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앞날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이니까.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의 오판 가능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이것이 확신이 어리석은 이유다.
수전 손택은 그의 저서 <문학은 자유다>에서 "문학의 지혜란 뚜렷한 견해를 가지는 것과 상반됩니다."라는 말로, 문학에서 '확신의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문학에만 적용되는 말이겠는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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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 이 칼럼을 쓰게 된 동기
중학교 일학년인 딸아이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며 연예인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곤 하였다. 난 그런 아이에게, “연예인이 되려는 길은 마음고생이 심하고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하니 공부에만 전념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넌 그런 쪽으로 재능없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아이는 섭섭하다는 눈빛으로, “엄마는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말해, 내가 잘 될 수도 있는데, 자식의 꿈에 격려해 줘야 좋은 엄마지.”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얘가 이렇게 컸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아이의 눈엔 내가, 위의 칼럼 속의 어머니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비판했던 어머니와 내가 다를 게 없다는 것. 이런 생각으로 이 칼럼을 써 봤다. 나는 <유형지에서>라는 소설 속 장교의 모습에서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거기엔 나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유형지에서>라는 소설은 내가 얼마 전 리뷰를 써서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으로 위의 칼럼을 쓴 것이다. 이미 이 소설의 내용을 넣어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으니 이 소설로 인해 세 편의 글을 쓴 셈이다. 그만큼 나로 하여금 할 말이 많게 만들었던 소설이다.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지…. 그래서 판단해야 할 어떤 일이 생기면 내 생각에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릴 때가 많다. 그럴 때 위안이 되는 것을 최근에 비로소 찾았다. 바로 수전 손택의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마치 무심코 길을 걷다가 반짝거리는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분으로 들떴다.
바로 이 문장이다. “문학의 지혜란 뚜렷한 견해를 가지는 것과 상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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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고 싶은, ‘수전 손택’의 저서
<문학은 자유다>, 이후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