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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 우리 시대의 악과 악한 존재들 ㅣ 이매진 컨텍스트 53
테리 이글턴 지음, 오수원 옮김 / 이매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이 ‘악’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에게 ‘악’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범죄자가 단순히 ‘악’으로 인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는 것은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닐까?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어떤 상황(또는 환경)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분노 조절 장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보호 또는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인터넷의 어떤 글을 읽고 악성 댓글을 쓴 사람은 남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악’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악성 댓글을 쓴 것은 문제의 그 글이 자신의 아픔을 건드렸거나 자신을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은 아닐까? 남의 행복에 시기심이 생겨서 그 행복을 방해하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악’ 때문이 아니라 ‘미성숙’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이런 것들을 나는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글을 써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2주일 전에 일간지를 통해 신간을 소개하는 글을 읽다가 테리 이글턴 저, <악>이란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악’에 대해 탐구하는 책이라니 얼마나 반갑던지 단번에 사기로 했다.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이 눈이 띌 때가 있다. 남의 흉을 잘 봐서 인심을 잃거나, 남에게 기분 상할 말을 해서 인심을 잃거나, 잘난 척을 많이 해서 인심을 잃거나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악해서 이런 걸까? 내가 보기에 이런 사람들은 악해서라기보다 단지 ‘삶의 요령’이 없어서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악인이라고 보여지는 사람도 혹시 ‘삶의 요령’이 부족해서 악인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결국 악한은 삶의 기술이 결여된 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삶이란 색소폰 연주하고 같아서 끝없는 연습을 거쳐 능숙해져야만 한다. 악한 자들에게 삶이란 요령부득의 문제다. 뭐, 우리 중 아무도 삶이란 문제에 관해 자신할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저 살인마 잭Jack the Ripper보다야 사는 요령을 좀더 터득한 정도랄까. (...)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삶의 기술에 엄청나게 무지하다면 나머지 우리들의 수준은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이런 의미에서 악은 매일 마주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관련이 깊다. (158~159쪽)
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심술궂은 쾌락을 보라. 독일인들은 이런 감정에 ‘샤덴프로이데’라는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인성론>에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타인의 즐거움뿐 아니라 고통에서도 쾌락을 끌어내며 타인의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거기에서 얼마간은 쾌락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상황은 삶의 진실일 뿐 악마의 괴팍함은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고 딱히 분개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을까.(159쪽)
콜린 맥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악하고 가장 닮아 있는 모습이 흔해 빠진 시기심이라고 본다. 최소한 우리가 세상을 정의해온 의미에서 말이다. 시기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보며 고통을 느낀다. 타인의 즐거움은 자기 존재의 결핍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159~160쪽)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건 ‘악’과 ‘악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일, ‘악(惡)’과 ‘부정(不正)’을 구별하는 일이 된다.
9 · 11 참사에는 서구가 아랍에 휘두른 기나긴 정치적 폭력의 역사를 향한 아랍 세계의 분노와 굴욕감도 한몫했다. (...) 테러리스트들을 몰지각한 괴물로 취급하는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이 폭력을 벗어날 유일한 해결책은 더 많은 폭력이다. 그리고 더 많은 폭력은 더 많은 테러를 낳고, 테러는 또 더 많은 죄 없는 생명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다. 테러를 악으로 규정하는 행동은 문제를 악화시킨다.(196쪽)
우리가 ‘악’에 대해 제대로 고찰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아주 위험한 사회로 만들 소지가 있음을 놓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악’에 대해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해 준다. ‘악’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로,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사회, 정치, 문화에 관한 많은 책을 펴냈다. <악>은 신학, 정신분석학, 역사, 문학 작품 등을 통해 다양한 악의 실체를 분석함으로써 윤리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글 하나.
권력이 나약함을 질색하는 이유는 나약함이 권력의 실체가 허약함이라는 은밀한 진실을 굳이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나치에게 유대인은 끈적거리는 무나 꼴사나운 혹 따위 가장 치욕스럽고 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역겨운 표식이었다. 유대인이야말로 나치라는 존재의 완전무결함을 보존하기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127쪽)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반에서 약해 보이는 학생만 골라서 괴롭히는 이유를 이해하게 만드는 글이다. 청소년을 보호해야 하는 어른으로서, ‘학교 폭력’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어른으로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을 짚어 준 글 같아 밑줄을 그어 놓았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여전히 ‘인간’에 대해서다. 인간의 본질, 인간의 특성 이런 건 앞으로 공부를 해도 해도 끝이 나질 않을 것 같다. 인간이란 존재는 끝없이 탐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나는 또 해 본다.
인간의 본질 또는 특성에 대해 성찰하는 책은 언제나 반갑다. 내가 궁금해 했던 것을 풀어 줄 열쇠를 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도 내가 가져야 할 열쇠 중 하나를 내게 던져 준 것 같다.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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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 연쇄 살인마의 순수한 악은 핵무기를 쓰자는 평범한 악보다 특별할까?
- 부도덕하고 무지한 이슬람 이데올로기 때문에 쌍둥이 빌딩은 무너졌을까?
- 테러리스트는 비뚤어진 판단을 하는 사람일까 머리 없는 괴물일까?
- 《실낙원》부터 《만들어진 신》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부터 이슬람 테러까지 어느 뛰어난 마르크스주의자가 흥미롭게 파헤친 우리 시대의 악과 악한 사람들
(이 책의 뒤표지에 있는 것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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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이 글은 여기까지...
아직 이 책의 리뷰를 올린 사람이 없네. 이 글이 이 책의 첫 리뷰로 기록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