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봤던 영화가 생각난다. TV를 통해서 본 외국 영화로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여주인공은 젊었을 때 무대가 있는 큰 술집에서 노래를 불렀던 가수이다. 노래를 잘 부르고 게다가 미인이어서 그곳에 모여든 남자 손님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러 무대에 설 때면 그녀의 손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여주인공은 늙고 병든 거지 신세가 되어 거리를 떠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내 기억으로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 가수였는데... 지금의 나와 달랐다고요.˝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 가수였는데... 지금의 나와 달랐다고요.˝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 가수였는데... 지금의 나와 달랐다고요.˝

 

 

이 말을 하루 종일 중얼거리며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로 취급하여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은 형편없이 돼 버렸지만 젊었을 때는 술집에서 ‘굉장히 인기 많은 가수’였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랬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절실한 절규로 들었다. 얼마나 측은했는지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그때 만약 그 거리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다면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의 화려한 역사는 세월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현재의 당신 속에 있다고. 다시 말해 당신 속엔 당신의 과거도 함께 들어 있다고. 처지, 상황,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자신은 딴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신일 뿐이라고. 예전의 사람 그 자신이라고.

 

 

그런데 정말 처지가 바뀌었다고 해도 ‘나’는 ‘나’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설령 그게 맞다고 해도 나도, 당신도 누구나 한 번쯤은 그녀처럼 슬픔에 젖어 이렇게 말하는 날이 있지 않을까?

 

 

˝옛날에 나는 지금보다 훨씬 멋졌다고요. 정말이에요.“

 

 

무엇이 우리를 예전과 다르게 만든 것인가?

 

 

시간이겠지.

 

 

 

시간은 그들을 태우고 멈추지 않고 나를 앞지른다. 건강, 능력, 기억, 사람, 중독……. 이들을 제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할 때 몸에 남아 병이 된다. 미련과 후회, 그리움이 지나치면 ‘떠나보내라’고들 한다.(68쪽)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삼라만상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간. 시간은 모든 것을 완전히 변질시킨다.(94쪽)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가끔 시간의 흐름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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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9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9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9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5-07-09 0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시겠지만, 저의 2015 새해 결심이 `과거에 대한 감사, 미래에 대한 희망, 현재에 대해 행복감을 느끼자`를 매주 1회 이상 외친다입니다.

요즘에는 한가지 더 추가되었습니다. `내일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은 오늘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자`

죽음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약화되니, 시간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약화되더군요.

페크pek0501 2015-07-09 12:48   좋아요 0 | URL
몰랐어요. 후후~~
님이 도덕 선생님과 같은 과의 분인 건 알았습니다만...

감사, 희망, 행복 그리고 최선이군요. 좋군요.

저는 아직... 죽음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졸업하지 못했어요.
저도 약화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거울을 보고 후진 내 얼굴에 깜짝 놀라곤 해요. 아, 이럴 줄 몰랐어... 이러면서요...

세실 2015-07-0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나혜석이 떠올랐어요.
능력있는 남편 만나 부유한 삶을 살면서 유럽여행을 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죽을땐 내 몸 누울 방 한칸 없었던.....
님 말씀처럼 과거가 모여 현재, 미래가 되지만.. 최소한 과거, 현재보다 미래에는 더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님이 언급하시는 책은 다 읽고 싶어요^^ㅎㅎ

페크pek0501 2015-07-09 12:4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보다 많이 읽으시는 분이 제가 언급하는 책을 다 읽고 싶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기분 째지잖아요.(요렇게 속되게 표현하면 재밌어요.ㅋ)

정희진처럼 읽기, 꼭 보세요. 추천합니다. 님처럼 연재하시는 분은 꼭 봐야 할 책이에요.
남들은 어떻게 리뷰를 썼는지를 보는 건 좋은 공부가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리뷰 읽기가 좋은 점은 제가 읽지 못한 책에 대한 정보와 느낌을 알려 주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잖아요. 그것의 대안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잘 쓴 책이에요. ^^

stella.K 2015-07-0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고, 죽을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다 버리고 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던 박경리 선생 같았으면 좋겠어요.
참, 박경리 선생이 정말 저렇게 말했던가요?ㅎㅎ
언니는 제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아실 줄 믿습니다.ㅋㅋ

페크pek0501 2015-07-09 16:35   좋아요 0 | URL
하하~~

늙고서도 웃을 수 있는 자, 행복한 사람이지요. 사실 나이들어 가면서 느껴지는 것 중 자신의 초라함 같은 게 있어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렇게 스스로 생각되는 부분이 있답니다. 그래서 늙으면 너그러워질 것 같지만 사실 속이 좁아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해요. 자신감이 상실되고 초라함을 느끼게 되면 서글픈 게 많아지고 섭섭한 게 많아지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반만 비운 것 같아요.
진행 중입니다...

cyrus 2015-07-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년 전에 있었던 일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제 모습을 보면 지나갔던 과거 일이 마치 꿈에서 본 듯한 장면처럼 느껴져요. 조금은 서글퍼져요.

stella.K 2015-07-09 18:42   좋아요 0 | URL
ㅎㅎ 너무했다. 아직도 젊은 청춘이면서...
너 진짜 60되고, 70될 땐 어쩔래?
사람의 나이를 24시간으로 환산하면 넌 아직 아침 시간에 해당할 거야.^^

페크pek0501 2015-07-10 14:30   좋아요 0 | URL
시루스 님은 서글퍼지는 연령은 아닐 듯해요. 헤헤~~
더 나이 들어 보세요. 서글픔을 달고 다녀요.
우울한 갱년기, 라고 이름은 들어 보셨는지요? ㅋㅋ

페크pek0501 2015-07-10 14:33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

사람 나이를 24시간으로 환산하면 저는 해질 무렵이 될까요?
딱 제가 좋아하는 시간인 걸요. 해질 무렵.
어제 해질 무렵에 (가까운 마트를 가지 않고 20분 이상 걸어서) 시장에 갔다 왔어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좋았어요. 산책 겸 운동 겸 장보기 겸 음악감상 겸.
이어폰을 꽂고 다녀요.
좋은 여름 보내자고요...

비로그인 2015-07-10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서재에서도 이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었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페크님..~~

페크pek0501 2015-07-10 14: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새벽숲길 님.
님의 어떤 글을 보고 댓글을 쓰다가 생각난 영화였어요. 댓글에서 글감을 얻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그러니까 남의 글도 많이 읽고 댓글도 많이 써야 하는 거예요.

잘 지내시죠?
이번 여름은 보내기가 수월한 것 같아요. 걱정했는데,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7월 중순이 다가오네요. 한 달만 견디면 무더위가 물러날 듯해요. 8월 중순이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할 테니까요.
저는 벌써 늦여름을 기다립니다.
시원한 여름만큼 매력적인 날씨가 또 있을까 싶어요.
여름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