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의 표절 논란

 

 

지난 6월 16일 이응준 작가는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 작가의 글(소설) 일부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기고했다. 요즘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표절 논란’이 시작된 이유이다.

 

 

다음의 글이 그 문제의 글이다.

 

 

A.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키오, 김후란 옮김, ‘우국’에서.

 

 

B.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 신경숙, ‘전설’에서.

 

 

A와 B의 글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2015년 06월 16일에 게시됨.)에서 가져온 글이다. (‘우국’과 ‘전설’은 단편 소설이다. 이 글 말고도 표절 의혹이 일고 있는 작품이 몇 더 있다.)

 

 

다음은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죽음의 미학>에서 가져온 글이다. (A와 C는 각각 번역자가 다르다.)

 

 

C.
두 사람 모두 실로 젊고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들이라 이들의 사랑 행위는 매우 격렬하였는데, 이것은 밤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에서 돌아온 중위는 먼지투성이 군복을 벗다가 그 틈도 참지 못해, 집에 돌아온 그 자리에서 새댁의 가는 허리를 꺾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꼬도 곧잘 이에 응하였다. 첫날밤으로부터 한 달이 채 될까말까 할 때, 레이꼬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 중위도 이를 알고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끼오, 황요찬 옮김, ‘우국’에서.

 


A와 B의 글을 비교해 보면 문장은 물론이고 문장의 순서까지 같아서 누가 봐도 표절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표절한 게 맞다고 본다.) 표절이 맞다면 그 무엇이 신경숙 작가로 하여금 표절하게 만들었을까?

 

 

그에게 묻고 싶다.

 

 

1) 위의 문장이 작가로서 해서는 안 될 표절을 하고 싶을 만큼 탁월한 문장인가?
2) 이 부분이 그 소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인가?
3)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여러 문학상을 휩쓴 작가로서 이 정도의 문장을 자기 식으로 쓸 능력이 당신에겐 없었는가?
4) 이 세상에 얼마나 눈이 많은데 표절이 발각되지 않을 줄 알았는가?
5) 끝까지 유지되는 비밀이 있다고 믿었는가?
6)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
7) 표절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는가?
8) ‘금각사’ 외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9) 만약 표절이 아니라면 왜 이응준 작가를 명예 훼손죄로 고소하지 않는가?
10) 이제 표절했음을 인정하고 반성 · 사과해서 그동안 안고 살았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신 작가의 표절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작가들이 침묵했음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봤다. 침묵하는 것은 자기 입장이 곤란해서,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아서, 막강한 문단 권력 때문에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런 문단을 향해, 그런 사회를 향해 어렵게 용기를 내어 혼자서 십자가를 진 이응준 작가가 앞으로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원하는 뜻으로 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신경숙 작가도 정직한 태도로 용서를 빌고 이 시련을 잘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2. 글을 잘 쓰려면 어떤 삶인가가 중요

 

 

신경숙 작가는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 작품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실일까?

 

 

성형 수술에도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표절에도 중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건 아닐까? 성형 수술을 한 번 하고 나서 얼굴이 예뻐졌다고 느끼면 한 번 더 성형 수술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듯이, 한 번 표절해서 글이 나아졌다고 느끼면 한 번 더 표절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말함이다.

 

 

작가든 아니든 누구든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표절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도둑질하듯 가져와서 제 것인 양 글을 쓰는 비양심적인 삶에서는 좋은 글을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격 없는 필자가 인격 있는 글을 쓸 수 없지 않겠는가? 옳지 않은 삶을 살면서 옳은 생각을 담은 글을 쓸 수 없지 않겠는가?

 

 

글을 잘 쓰려면 왜 쓰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260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그렇다면 좋은 삶을 살면서 어떤 글을 써야 좋은 글이 되는가?

 

 

글쓰기도 노래와 다르지 않다.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잘 쓴 글이다. 많은 지식과 어휘, 화려한 문장을 자랑한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독자가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기본이다. 기본을 지키기만 하면 최소한 못나지 않은 글은 쓸 수 있다. 여기에 나름의 개성을 입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면 훌륭한 글이 된다.(175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쉽게 쓰되 필자의 개성을 입혀라.’

 

 

말로는 쉬우나 이렇게 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3. 글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쓰느냐’이다

 

 

글감 선택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무엇에 대해서 쓸까? 하고.

 

 

재료 선택은 잘했는데 완성된 음식으로선 실패한 느낌이 드는 음식이 있다. 재료 선택은 잘하지 못했는데 선택을 잘하지 못한 것 치고 완성된 음식으로선 괜찮은 음식이 있다. 이 둘의 차이.

 

 

글감 선택은 잘했는데 완결된 글로선 실패한 느낌이 드는 글이 있다. 글감 선택은 잘하지 못했는데 선택을 잘하지 못한 것 치고 완결된 글로선 괜찮은 글이 있다. 이 둘의 차이.

 

 

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러러볼 것은 시시한 글감을 가지고 잘 요리한 듯한 느낌의 글일 듯. 즉 무엇에 대하여 쓰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일 듯.

 

 

좋은 글감을 찾는 데에만 주력하다 보면 소재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은 기억해 둘만 하다.

 

 

 

 

 

 

 

4. 무슨 글이든 만들어 내는 재능이 필요하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면 대략 세 가지 경우일 가능성이 많다.

 

 

첫째, 다른 일에 열중하느라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
둘째, 열중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경우.
셋째, 글쓰기에 열중하고 있지만 슬럼프에 빠져서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

 

 

어떤 경우가 되었든 ‘역시 난 타고난 글쟁이는 아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다만 글쟁이가 되고 싶은 것이겠지.)

 

 

요즘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 글을 자주 써서 올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느낀 것 하나.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 요즘 새롭게 느낀 것이다.

 

 

글쟁이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이것.

 

 

무슨 글이든 만들어 내는 재능. 이게 꼭 필요한 것 같고, 사실 이 재능이 글쟁이에게는 제일 필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글쟁이가 되고 싶다면 하루에 한 문단씩이라도 꼭 쓸 것. 하루에 한 문단이라도 글을 쓰고 있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목표를 향해 잘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글쟁이’란 말이 좋은 뜻을 담고 있지 않으나 나는 이 말을 좋아해서 즐겨 쓴다. 글쟁이의 뜻 :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글이 써지지 않더라도, 억지로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다른 일이 있으니. 바로 독서이다. 난 타고난 글쟁이는 아니지만 타고난 독서인인 것 같다.

 

 

(독서인(讀書人)의 뜻 : 책 읽기를 좋아하거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독서인이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독서인이다. 여기서 나는 전자의 뜻으로 썼다. 

 

 

독서인으로서 흥미롭게 읽은 책이 있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인데 지금 읽어도 재밌다. 홍세화 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이다.

 

 

 

 

 

 


5. 글쓰기는 수학과 관련이 있을까?

 

 

글쓰기는 수학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글쓰기를 잘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할까? 수학을 잘하지 못해도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홍세화 저자의 글을 보자.

 

 

토론은 주로 글쓰기에 필요한 논리력, 추리력, 분석력, 정확성의 추구 등이 수학교육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길러진다는 주장과, 수학적인 차가운 논리가 오히려 창조적 감성이나 미적 상상력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 사이에 벌어진다. 반론자들은 하나의 좋은 예로 괴테를 내세운다. 독일의 으뜸가는 시인인 괴테가 수학에는 아주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토론에는 한 가지 흥미있는 재치응답이 있다. 반론자가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예를 들어가며 수학과 글쓰기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라치면, 상대방이 “당신이 그렇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실은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응수하는 것이다.(192~193쪽)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당신이 그렇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실은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하하~~. 재밌네. 이런 말을 듣는다면 반론을 편 사람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네.

내 생각엔, 글을 쓸 때에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수학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쓸 때엔.

 

 

글을 쓰면서 글쓰기는 수학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6.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건 마음가짐

 

 

세상을 살다 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떤가?

 

 

프랑스엔 ‘비아제’라는 제도가 있다. 이 제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면 ‘내가 죽고 나면 내 집을 줄 테니 내가 죽을 때까지 내게 매달 생활비로 얼마씩 달라는 것’이 되겠다. 121살까지 생존하여 세계에서 나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잔 칼맹’이라는 할머니의 사연이 웃게 만든다.

 

 

121살까지 살았던 그녀.

 

 

그녀가 80여 세일 때 그녀보다 (당연히) 훨씬 젊은 공증인이 그녀와 비아제 계약을 맺었다. 할머니에게 매달 꼬박꼬박 연금을 지급했던 그 남자가 먼저 사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155쪽)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그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할머니가 당연히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 할머니보다 먼저 죽었다는 얘기다.

 

 

잔 칼맹 부인은 그 비아제 계약에 관해 코멘트를 요청받고, “사람이 살다 보면 손해볼 수도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세계 최고령이 될 사람과 비아제 계약을 맺었으니 그 남자는 말 그대로 재수없는 사람이었다.(155쪽)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저자의 말대로 그 남자는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이었을까? 할머니보다 먼저 죽어서 집을 차지하는 행운을 얻지 못했으니 불행한 사람일까? 아니면, 사는 동안 노후 대책에 대한 걱정 없이 편히 살았으니, 또는 집을 팔아서 멋진 자동차를 살 생각으로 희망에 부풀어 살았으니 행복한 사람일까?

 

 

만약 그가 “왜 이렇게 할머니가 빨리 죽지 않는 거야?”라고 불평하며 살았다면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겠고, “할머니가 언제 죽든 상관없어. 난 노후 대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참 다행이야.”라고 만족하며 살았다면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겠다.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

 

 

마음가짐.

 

 

그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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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6-20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절자에게 묻는 10가지 질문은 정말 꼼짝을 못하게 만드는군요.
신 신작가뿐 아니라 적지않은 작가들이 표절을 하는 거 보면
탐나는 건 내것으로 갖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과 같은 건가 봅니다.
예전에 시나리오 배울 때 강사님이 늘 그런 말씀하셨죠.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구.
글에는 감성과 논리가 함께 있으면 좋은데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아, 글쓰기는 넘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즘엔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요.ㅠ

페크pek0501 2015-06-21 15:02   좋아요 0 | URL
첫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첫 댓글에 감동?하는 경향이 있는 것 혹시 아시는지요?
표절 건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이, 누구나 어느 한쪽으론 나사가 풀려 있다는 거예요. 모든 면에서 훌륭하긴 힘들다는 거죠. 세종대왕도 잔인한 구석이 있었고, 이순신 장군도 인간미 없는 독한 구석이 있었죠. 그게 인간이라고 봅니다. 신경숙 작가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글쓰기, 어려운 것에 동의함. 오죽하면 10일만에 글을 올렸겠습니까? 캭캭~~

qualia 2015-06-2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작가(?)한테 이곳 알라딘은 비판 무풍지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선 유시민 작가도 ‘벼라별’ 비난을 다 얻어먹더군요.
인간성 측면에서요.
과연 유시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수 혹은 수구 쪽에서의 비난과 음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 혹은 민주 진영 쪽에서 나오는 극렬한 비난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고종석 작가도 유시민 비난의 선봉에 있을 겁니다.
글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시민과 고종석 두 분이
서로 적대관계라는 게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고종석 작가가 약간 더 이해가 가지 않기는 합니다만...

페크pek0501 2015-06-21 15: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어 보면 정말 인간성이 의심되는 것 있어요. 나쁜 글의 예를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뽑아 왔거든요. 그것도 실명을 거론하면서요. 그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얼마나 불쾌하겠어요.
좋은 인품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저자가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셈이죠.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는 책을 쓰다니...

이곳 알라딘에선 주로 책 이야기이니까 유시민 저자의 좋은 글을 발췌, 소개할 뿐이지 그렇다고 팬이 많다고 볼 순 없을 것 같아요. 님의 말씀처럼 그래도 이곳이 책 이야기하는 곳이라 비판 무풍지대일 수 있겠어요.
저는 이 책보다 더 좋은 게 <청춘의 독서>였어요. 독후감을 잘 썼어요. 무슨 정치인이 이렇게 글을 잘 쓰나, 하고 감탄했죠. 이젠 아예 글쟁이로 발 벗고 나섰다고 하네요. 잘 쓴 글에 대해선 우러러봅니다. 글만요...

댓글, 감사합니다.

cyrus 2015-06-2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글 한 편씩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조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작가들 중에는 다작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을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작가 체호프는 무명 시절부터 잡지에 글을 투고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도 제법 글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평가가 젊은 체호프의 다작에 쓴소리를 했습니다. 글 쓰는 재능은 있으나 필요 이상 다작을 하는 바람에 읽을 만한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요. 투입에 비해 산출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죠. 이 일을 계기로 체호프는 글을 쓰되, 좀 신중하게 쓰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그의 실력은 인정받았고 단편소설의 대가에 오르게 되었어요. 체호프는 몇 백 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남겼는데, 여기서 우리가 읽는 단편소설은 고작 수 십 편에 불과합니다. 체호프 말고도 다작에 능숙했던 다른 작가들도 그래요. 독자는 작가가 남긴 모든 작품들을 무조건 좋다고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은 오랫동안 읽혀지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나머지 작품들은 독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대표작에 비하면 인정을 못 받습니다. 한 사람이 매일 글을 써서 그 수가 100편 이상 되어도 100편 이상의 글이 모두 잘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페크pek0501 2015-06-21 15:10   좋아요 0 | URL
하하~~ 시루스 님이 저에게 위안을 주려는 댓글입니까? 위안은 일단~ 감사하게 접수합니당~~.
그러나 어쩌나요. ㅋ 님의 댓글에선 이미 제가 주장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걸요. 체호프가 단편 소설의 대가가 된 것은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 보내던 세월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그렇게 다작을 하던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체호프는 없었을 거라고 봐요.

님의 말씀이 맞아요. 다작을 해도 수작이 되는 건 몇 편에 불과해요. 그러나 몇 편의 수작을 건지기 위해선 다작을 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의 글에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 잘 쓰는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은 알라딘 서재를 둘러보니 정말 그랬기 때문이에요. 자주 글을 올리고 방문자 수가 많은 알라디너의 글을 보니 잘 쓰는 게 맞더라고요. (님도 포함됩니다.) 아마 통계를 내도 그럴 것 같아요. 글을 백 편 쓴 사람과 천 편 쓴 사람의 역량을 비교하면 제 생각이 맞을 듯해요.
저는 오히려 님의 댓글을 보니 체호프처럼 다작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으음~~ 다짐해야징...다작 다작!!)

시루스 님은 이 댓글로 하루에 한 문단 쓰기를 실천하셨습니다. 이 댓글도 좋은 글이에요. 페이퍼로 쓰셔야 할 글 같은데요...ㅋㅋ

cyrus 2015-06-22 20:52   좋아요 0 | URL
페크님의 답글을 읽은 뒤에 제가 쓴 댓글을 읽어 보니 제가 생각 정리를 안 하고 막 썼네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15-06-23 10:50   좋아요 0 | URL
ㅋㅋ 무슨 말씀을요...
시루스 님의 댓글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글 하나를 쓰더라도 제대로, 신중하게 써라. 여러 글을 쓸 생각 말고 하나의 글에 집중해서 깊게 파라. 이런 말이죠. 좋은 말씀입니다.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누구의 생각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의견 차이라고 보겠습니다.

독서로 말하면, 님은 정독이 좋다고 하고 있고 저는 다독이 좋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 권을 읽기보다 한 권을 잡고 제대로 깊게 읽어라. - 이것 중요하죠.
(저도 요즘 다독보단 정독을 하고 싶어요. 다독보다 정독으로 얻는 게 훨씬 많은 것 같거든요.)

오늘 아침 신문 펼치니 신경숙 작가 인터뷰 기사 실렸네요.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자주 뵙기를 ...


AgalmA 2015-06-2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관련해서 글을 썼습니다.
pek0501님에 대한 반론이라기 보다 언급된 작가들의 표현에 대한 몇 가지 의문사항입니다.

http://blog.aladin.co.kr/durepos/7606618

페크pek0501 2015-06-21 15: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글에 관심 가져 주셔서 우선 감사하단 말씀드립니다.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1. 괴테가 수학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저는 이해했어요. 맞습니까? 학창 시절에 수학 성적이 나빴던 괴테가 글은 잘 썼다, 는 것이죠.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수학 성적’과 ‘수학적 사고’의 차이에요. 이 둘은 같은 의미가 아니죠. 홍세화 저자는 괴테의 수학 성적을 언급한 것 같고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수학으로 길러지는 수학적 사고라는 것 같아요. 그런데 괴테는 학창시절에 수학을 못했어도 나이 들어서는 수학적 사고가 발달할 수 있겠죠. 삶에서 길러지는 것도 있으니까요. 또는 독서를 통해서 길러지기도 하겠죠. 정확히 말하면 괴테는 수학 과목은 잘하지 못했지만 훗날 나이 들어서는(책을 쓸 때는) 수학적 사고가 발달해 있었다, 고 볼 수 있죠. (학교를 다닌 적인 없는 할머니가 돈 계산을 잘하는 경우도 있죠.)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괴테가 수학을 못했어도 글은 잘 썼다고 말할 거예요. 글쓰기에 수학적 사고가 필요하니 수학 과목을 열심히 해 두는 게 좋다, 라고도 말할 거예요.

2 .저는 아이가 노래를 부를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입으로만 부르지 말고 온몸으로 불러 봐. 그러면 훨씬 잘 불러져.” 제가 표절한 걸까요?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 있다. 토끼가 깡충깡충 뛰었다. 이런 것도 이미 우리 뇌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말들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온몸으로’는 김수영 시인 전에 누군가가 먼저 썼을 가능성도 있다고 봐요.
유시민 저자가 문장 배열까지 똑같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는 님의 말씀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3. 홍세화 저자는 괴테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해야 한다? : 님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괴테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 글을 쓸 땐 생각나지 않았으니 저의 실수일 수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가는 많은 정보 중 어떤 것은 그냥 삭제합니다. 주제에 벗어나거나 주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서죠.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면 ‘썼어야 했어.’라고 아쉬워하게 될 때가 있죠.

4. 제가 위에 쓴 페이퍼의 제목이 ‘단상’이에요.
(단상의 뜻 :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 제가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는 것이죠. 요렇게 저는 빠져 나갑니다. 하하~~
이것저것 따져야한다면 결함 없는 글이나 책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우리는 말도 자유롭게 하지 못할 거예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가 맞으니까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도 오류가 많다고 합니다.

5. 님의 글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전문성이 느껴지는 유익한 글입니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오늘 공기가 맑네요. 좋은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5-06-2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글쓰기가 수학과 유사하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글쓰기에는 체계화시키는 능력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능력, 앞뒤 매락을 끌어가서 마무리짓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고, 머리에 아무리 좋은 착상이 있다는 것과 적절하게 표현해낸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라고 느끼면서 어릴 때 좌절감을 느끼곤 했었거든요. (제가 글쟁이가 되고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

그러나 그 이전에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묻어난다는 말씀이 더 와닿아요.
언니의 글을 늘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삶에 대한 성찰을 품고 있으셔서 좋아요. ^^

페크pek0501 2015-06-21 15:19   좋아요 0 | URL
마고 님의 말씀 모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마지막 멘트는 최고의 찬사네요. 늘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잊을 뻔한 한마디! 반가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