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의 표절 논란
지난 6월 16일 이응준 작가는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 작가의 글(소설) 일부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기고했다. 요즘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표절 논란’이 시작된 이유이다.
다음의 글이 그 문제의 글이다.
A.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키오, 김후란 옮김, ‘우국’에서.
B.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 신경숙, ‘전설’에서.
A와 B의 글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2015년 06월 16일에 게시됨.)에서 가져온 글이다. (‘우국’과 ‘전설’은 단편 소설이다. 이 글 말고도 표절 의혹이 일고 있는 작품이 몇 더 있다.)
다음은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죽음의 미학>에서 가져온 글이다. (A와 C는 각각 번역자가 다르다.)
C.
두 사람 모두 실로 젊고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들이라 이들의 사랑 행위는 매우 격렬하였는데, 이것은 밤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에서 돌아온 중위는 먼지투성이 군복을 벗다가 그 틈도 참지 못해, 집에 돌아온 그 자리에서 새댁의 가는 허리를 꺾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꼬도 곧잘 이에 응하였다. 첫날밤으로부터 한 달이 채 될까말까 할 때, 레이꼬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 중위도 이를 알고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끼오, 황요찬 옮김, ‘우국’에서.
A와 B의 글을 비교해 보면 문장은 물론이고 문장의 순서까지 같아서 누가 봐도 표절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표절한 게 맞다고 본다.) 표절이 맞다면 그 무엇이 신경숙 작가로 하여금 표절하게 만들었을까?
그에게 묻고 싶다.
1) 위의 문장이 작가로서 해서는 안 될 표절을 하고 싶을 만큼 탁월한 문장인가?
2) 이 부분이 그 소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인가?
3)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여러 문학상을 휩쓴 작가로서 이 정도의 문장을 자기 식으로 쓸 능력이 당신에겐 없었는가?
4) 이 세상에 얼마나 눈이 많은데 표절이 발각되지 않을 줄 알았는가?
5) 끝까지 유지되는 비밀이 있다고 믿었는가?
6)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
7) 표절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는가?
8) ‘금각사’ 외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9) 만약 표절이 아니라면 왜 이응준 작가를 명예 훼손죄로 고소하지 않는가?
10) 이제 표절했음을 인정하고 반성 · 사과해서 그동안 안고 살았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신 작가의 표절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작가들이 침묵했음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봤다. 침묵하는 것은 자기 입장이 곤란해서,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아서, 막강한 문단 권력 때문에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런 문단을 향해, 그런 사회를 향해 어렵게 용기를 내어 혼자서 십자가를 진 이응준 작가가 앞으로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원하는 뜻으로 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신경숙 작가도 정직한 태도로 용서를 빌고 이 시련을 잘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2. 글을 잘 쓰려면 어떤 삶인가가 중요
신경숙 작가는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 작품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실일까?
성형 수술에도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표절에도 중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건 아닐까? 성형 수술을 한 번 하고 나서 얼굴이 예뻐졌다고 느끼면 한 번 더 성형 수술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듯이, 한 번 표절해서 글이 나아졌다고 느끼면 한 번 더 표절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말함이다.
작가든 아니든 누구든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표절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도둑질하듯 가져와서 제 것인 양 글을 쓰는 비양심적인 삶에서는 좋은 글을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격 없는 필자가 인격 있는 글을 쓸 수 없지 않겠는가? 옳지 않은 삶을 살면서 옳은 생각을 담은 글을 쓸 수 없지 않겠는가?
글을 잘 쓰려면 왜 쓰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260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그렇다면 좋은 삶을 살면서 어떤 글을 써야 좋은 글이 되는가?
글쓰기도 노래와 다르지 않다.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잘 쓴 글이다. 많은 지식과 어휘, 화려한 문장을 자랑한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독자가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기본이다. 기본을 지키기만 하면 최소한 못나지 않은 글은 쓸 수 있다. 여기에 나름의 개성을 입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면 훌륭한 글이 된다.(175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쉽게 쓰되 필자의 개성을 입혀라.’
말로는 쉬우나 이렇게 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3. 글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쓰느냐’이다
글감 선택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무엇에 대해서 쓸까? 하고.
재료 선택은 잘했는데 완성된 음식으로선 실패한 느낌이 드는 음식이 있다. 재료 선택은 잘하지 못했는데 선택을 잘하지 못한 것 치고 완성된 음식으로선 괜찮은 음식이 있다. 이 둘의 차이.
글감 선택은 잘했는데 완결된 글로선 실패한 느낌이 드는 글이 있다. 글감 선택은 잘하지 못했는데 선택을 잘하지 못한 것 치고 완결된 글로선 괜찮은 글이 있다. 이 둘의 차이.
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러러볼 것은 시시한 글감을 가지고 잘 요리한 듯한 느낌의 글일 듯. 즉 무엇에 대하여 쓰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일 듯.
좋은 글감을 찾는 데에만 주력하다 보면 소재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은 기억해 둘만 하다.
4. 무슨 글이든 만들어 내는 재능이 필요하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면 대략 세 가지 경우일 가능성이 많다.
첫째, 다른 일에 열중하느라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
둘째, 열중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경우.
셋째, 글쓰기에 열중하고 있지만 슬럼프에 빠져서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
어떤 경우가 되었든 ‘역시 난 타고난 글쟁이는 아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다만 글쟁이가 되고 싶은 것이겠지.)
요즘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 글을 자주 써서 올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느낀 것 하나.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 요즘 새롭게 느낀 것이다.
글쟁이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이것.
무슨 글이든 만들어 내는 재능. 이게 꼭 필요한 것 같고, 사실 이 재능이 글쟁이에게는 제일 필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글쟁이가 되고 싶다면 하루에 한 문단씩이라도 꼭 쓸 것. 하루에 한 문단이라도 글을 쓰고 있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목표를 향해 잘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글쟁이’란 말이 좋은 뜻을 담고 있지 않으나 나는 이 말을 좋아해서 즐겨 쓴다. 글쟁이의 뜻 :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글이 써지지 않더라도, 억지로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다른 일이 있으니. 바로 독서이다. 난 타고난 글쟁이는 아니지만 타고난 독서인인 것 같다.
(독서인(讀書人)의 뜻 : 책 읽기를 좋아하거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독서인이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독서인이다. 여기서 나는 전자의 뜻으로 썼다.
독서인으로서 흥미롭게 읽은 책이 있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인데 지금 읽어도 재밌다. 홍세화 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이다.
5. 글쓰기는 수학과 관련이 있을까?
글쓰기는 수학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글쓰기를 잘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할까? 수학을 잘하지 못해도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홍세화 저자의 글을 보자.
토론은 주로 글쓰기에 필요한 논리력, 추리력, 분석력, 정확성의 추구 등이 수학교육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길러진다는 주장과, 수학적인 차가운 논리가 오히려 창조적 감성이나 미적 상상력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 사이에 벌어진다. 반론자들은 하나의 좋은 예로 괴테를 내세운다. 독일의 으뜸가는 시인인 괴테가 수학에는 아주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토론에는 한 가지 흥미있는 재치응답이 있다. 반론자가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예를 들어가며 수학과 글쓰기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라치면, 상대방이 “당신이 그렇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실은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응수하는 것이다.(192~193쪽)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당신이 그렇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실은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하하~~. 재밌네. 이런 말을 듣는다면 반론을 편 사람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네.
내 생각엔, 글을 쓸 때에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수학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쓸 때엔.
글을 쓰면서 글쓰기는 수학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6.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건 마음가짐
세상을 살다 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떤가?
프랑스엔 ‘비아제’라는 제도가 있다. 이 제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면 ‘내가 죽고 나면 내 집을 줄 테니 내가 죽을 때까지 내게 매달 생활비로 얼마씩 달라는 것’이 되겠다. 121살까지 생존하여 세계에서 나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잔 칼맹’이라는 할머니의 사연이 웃게 만든다.
121살까지 살았던 그녀.
그녀가 80여 세일 때 그녀보다 (당연히) 훨씬 젊은 공증인이 그녀와 비아제 계약을 맺었다. 할머니에게 매달 꼬박꼬박 연금을 지급했던 그 남자가 먼저 사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155쪽)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그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할머니가 당연히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 할머니보다 먼저 죽었다는 얘기다.
잔 칼맹 부인은 그 비아제 계약에 관해 코멘트를 요청받고, “사람이 살다 보면 손해볼 수도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세계 최고령이 될 사람과 비아제 계약을 맺었으니 그 남자는 말 그대로 재수없는 사람이었다.(155쪽)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저자의 말대로 그 남자는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이었을까? 할머니보다 먼저 죽어서 집을 차지하는 행운을 얻지 못했으니 불행한 사람일까? 아니면, 사는 동안 노후 대책에 대한 걱정 없이 편히 살았으니, 또는 집을 팔아서 멋진 자동차를 살 생각으로 희망에 부풀어 살았으니 행복한 사람일까?
만약 그가 “왜 이렇게 할머니가 빨리 죽지 않는 거야?”라고 불평하며 살았다면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겠고, “할머니가 언제 죽든 상관없어. 난 노후 대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참 다행이야.”라고 만족하며 살았다면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겠다.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
마음가짐.
그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