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행과 통찰력이 만나면
며칠 전에 이메일을 열어 보았더니 알라딘에서 보낸 이메일이 들어와 있다. (스팸 광고는 질색이지만 책에 관한 건 환영한다.)
‘[알라딘] "발터 벤야민" 의 신간 <모스크바 일기> 출간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이다.
<모스크바 일기>라는 책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겠다. 궁금해서 알라딘 메인으로 들어가 이 책을 검색해 봤다. (발터 벤야민의 딱딱한 이론서를 두 권 가지고 있는데 일기도 썼다니 궁금하잖아.) 그러고 나서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라는 문구 밑에 있는 책들도 검색해 봤다. 그중 하나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라는 책이다. 이 책을 ‘미리 보기’로 봤더니 이런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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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이가 일단 통찰력을 가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에밀 시오랑)
- 프레데리크 시프테 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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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기억해 둘 만한 글인 것 같아 일단 노트에 적어 두었다.
이렇게 뒤집어 쓴 글은 어떤가?
통찰력을 가진 이가 일단 불행해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찰력과 불행과의 만남이 아닌가. 이 두 가지의 만남으로 더욱 불행해진다는 것이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찰력’만큼이나 ‘불행(불행을 당하는 일)’도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중요한 요인이다. 다시 말해 통찰력이 없다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 듯이, 불행이 없다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
에밀 시오랑의 글을 보고 내가 낸 결론은?
‘불행한 만큼 성숙해질지어다.’
2. 불행의 악영향
그렇다고 불행을 찬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불행이 인간을 얼마나 망가지게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까닭이다. 서머싯 몸도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달과 6펜스>에서)라고.
서머싯 몸의 다른 작품 <면도날>에서 불행이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 주는 일화가 나온다.
결혼한 지 2~3년이나 지나 아기까지 있는데도 꼭 연인처럼 열렬히 사랑하는 부부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남편과 아기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내만 살아남는다. 아내의 이름은 ‘소피’이다.
“소피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죠. 온 동네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대고……. 그래서 밤낮으로 사람이 붙어 있었는데, 한 번은 정말 창문에서 뛰어내릴 뻔했대요.”(<면도날>, 326쪽)
소피는 갈비뼈가 한두 개 부러진 정도여서 병원에서 퇴원한 후엔 요양원에서 몇 달 지냈다.
“거기서 나온 다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술에 취하면 아무 남자하고나 자는 거예요. (...) 그러더니 깡패 같은 사람들하고 붙어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다음부턴 우리도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죠. 잔뜩 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어요. 뒷골목 술집에서 만난 스페인계 남자랑 같이 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 남자도 지명수배자였던 거예요.”(<면도날>, 326쪽)
소피가 이렇게 망가진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 속 인물 이사벨의 생각은 이렇다.
“(...) 소피가 그렇게 망가진 건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천성적으로 불안정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밥(남편을 말함.)에 대한 사랑도 좀 지나쳤잖아요. 만약 품성이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죠.”(<면도날>, 327쪽)
이 소설의 화자인 몸의 생각은 이렇다.
“남편과 아기가 죽었을 때 소피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술과 난잡한 성교라는 끔찍한 타락으로 스스로를 내몬 거지. 자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한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거야. 더 이상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얘기지.”(<면도날>, 328쪽)
아편을 즐기는 상태에까지 이른 소피.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면도날>, 370쪽)
불행이 아무리 정신적인 성숙을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불행을 환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행으로 겪을 고통도 싫지만 불행을 겪은 이후의 악영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3. 딱 요 정도의 불행만 필요한 게 아닐까
불행을 겪어야 행복의 진한 맛을 알 수 있는 건 맞는 얘기이긴 하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의 비교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쁘게 살아 본 자만이 한가함의 행복을 알듯이. 실패한 경험이 있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보다 성공의 기쁨을 더 크게 느끼듯이.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사는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탄광에서 일하다가 밖에 나오면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 내내 우중충한 탄광에 처박혀 있던 우리로서는 탁 트인 공기를 마시는 게 너무나 좋더라고요. 푸른 초원이 얼마나 가슴을 벅차게 하는지, 잎은 아직 돋아나지 않았지만 가지가 옅은 초록색 안개에 덮여 있는 듯한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면도날>, 179쪽)
나는 이 글을 ‘불행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글로 읽었다. 만약 그들이 탄광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탁 트인 공기를 마시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불행이 꼭 필요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불행이 없어도 행복을 느낄 순 있을 테니까. 또 자신뿐만 아니라 남이라도 불행을 겪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니까.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의 크기는 각자 다르다. 아무리 큰 불행이라도 잘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연인과의 이별로, 누군가는 사업의 실패로, 누군가는 아내를 잃은 일로 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불행이 필요할까?
각자 폐인이 되지 않을 만큼의 불행, 각자 삶의 의욕이 손상되지 않을 정도의 불행만 필요한 게 아닐까. 딱 요 정도의 불행만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수정한 것에 대하여
위의 글 1번의 인용문(에밀 시오랑의 글)은
<모스크바 일기>의 서문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의 서문에 있습니다.
여러 책을 검색해서 보았기에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고쳤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