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앎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알고 싶은 무엇이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관찰하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자신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일이다. 난 내 마음을 관찰 중에 있다.
마음과 관련해 내가 생각한 것들을 열거해 본다.
1. 몸과 마음이 분리될 때가 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이기에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반응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운동하고 돌아와 고단한 몸으로 침대에 눕고 나서 갈증을 느낀다. 몸은 물을 마시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마음이 귀찮다고 한다. 너무 고단해 몸을 움직이기 싫다.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는 일이 귀찮은 것이다. 이럴 때 물을 마시고 싶은 몸과 물을 마시기 싫은 마음이 충돌한다. 그 결과 몸이 마음을 이겨서 물을 마시든지, 아니면 마음이 몸을 이겨서 물을 마시지 않게 된다.
이것과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내 몸은 물을 마시기 싫다고 한다. 물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마음은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루에 몇 잔의 물을 마셔야 건강에 좋은데, 오늘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을 적게 먹으면 노화현상도 빨리 일어난다는 말이 생각나서 마음은 몸에게 빨리 물을 마시라고 재촉한다. 이럴 때 물을 마시기 싫은 몸과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한다. 그 결과 몸이 마음을 이겨서 물을 마시지 않든지, 아니면 마음이 몸을 이겨서 물을 마시게 된다.
이런 경우도 있다. 나는 사우나를 하고 싶다. 그런데 날씨가 춥고 밖에 나가기도 싫어서 사우나를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몸은 사우나를 간절히 원한다. 땀을 빼는 사우나가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럴 때 사우나를 원하는 몸과 사우나를 하기 싫은 마음이 충돌한다. 그 결과 몸이 마음을 이끌어서 사우나를 하러 갈 수도 있고, 반대로 마음이 몸을 이끌어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내 몸은 이미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새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이것에 대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2. 물건을 살 때 정확히 판단했는지 모를 때가 있다
만약 물건을 산 당신에게 누군가가 “당신이 방금 카드로 긁은 그 물건, 정말 꼭 필요한 거 맞느냐”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어떻게 나올까. 이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책이 있다. 마틴 린드스트롬 저,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정말 필요해서 물건을 샀을까, 하고 묻는다. 물건을 살 때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
이 책에 의하면, 기업은 소비자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얼마를 벌고, 뭘 잘 먹는지를 다 알고 있다. 하긴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으며, 자신의 소비를 기록하는 포인트 카드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자신에 대한 정보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대로 자신의 지갑을 조종당하는 일이 가능하겠다. 또 이 책은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은 비물질적인 것(성적이 올랐을 때의 성취나, 친구와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갔을 때의 유대감 등)을 좋아하는 반면,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물질적인 것(새 옷이나 아이팟 등)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나는 물건을 사고 나서 정확히 판단해서 잘 산 것인지를 모를 때가 있다. 특히 옷을 사러 다니는 것을 귀찮게 여겨서 옷을 살 땐 한꺼번에 여러 벌 사곤 하는데, 이럴 때 후회하곤 한다. 이건 왜 샀지, 하면서.
3. 누군가가 괴롭혔을 때 드는 생각
누군가의 ‘악’으로 인해 괴로워질 때 직접 복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괴롭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자신을 겨냥해서 모욕감을 주는 악성 댓글을 받았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두 가지의 생각으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 따윈 무섭지 않다. 나는 끄떡없다.’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의 악성 댓글의 위력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태도. 즉 당신은 헛수고를 했다는 걸 보여 주는 태도다. 또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로 인해 나는 정신적 타격이 심해 병원에 다닐 정도다. 그러니 당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야 마땅하다.’라는 태도.
앞으로 나는 후자 쪽을 따르려 한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혔다면, 그의 목적, 즉 그가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를 검토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해야겠다. 그러면 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만족할 테고, 그 만족이 있어야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방이 총을 빵, 하고 쏘면 총알을 맞지 않더라도 죽는 시늉을 해 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우선 통쾌함을 주고 싶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통쾌한 만족감만을 누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했으니 복을 받을 거야, 라고.
4.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똑같을까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훌륭한 가정 주부가 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요구 사항을 기입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그 강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저는 그런 요구 사항에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내가 고쳐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 여섯 가지를 적는 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도 제가 고쳐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수천 가지는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입하는 대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 아침에 대답을 하겠소’라고요.
다음날 아침, 저는 일찍 일어나서 꽃집에 전화를 걸어 붉은 장미 여섯 송이를 아내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꽃다발에는 ‘당신에게 고쳐 달라고 할 여섯 가지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소. 나는 지금 당신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오’라고 쓴 카드를 붙여 놓도록 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도착했을 때 누가 저를 문 앞까지 마중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눈물을 가득 담고 있는 제 아내였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저는 아내가 요구한 대로 비판하지 않은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 데일 카네기, <카네기 인간관계론>, 64쪽~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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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상대가 아무리 자신에 대해 비판해 달라고 해도 그 속마음은 칭찬을 바라고 있다는 것.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똑같을까.
5. 나는 나를 모르겠다
남을 아는 것이 지혜(智)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明)입니다.
- 노자, <도덕경>, 147쪽.
노자에 의하면, 남을 아는 게 지혜에 불과하다면, 자기를 아는 것은 사물의 깊은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는 얘기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다.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라는 말이 있는데, ‘주제 파악’처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싶다. 아마 난 죽는 날까지 주제 파악을 못하리라.
나는 물욕이 없는 편이어서 허영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을 읽고서다.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優越)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허영심(虛榮心)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자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우월성(優越性)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우월성이 있다고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483쪽~4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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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서 조금씩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나는 끝까지 나의 진실을 모를 수도 있겠다. 그냥 아는 데까지 알아볼 거야, 하고 생각해야겠다.
몇 년 전, 어떤 모임에 갔더니 누군가가 나에 대해 개성이 강하다고 했다. 튄다고도 했다. 놀라운 건 여러 사람들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평범한 내가? 기막히군. 그동안 없던 개성이 최근 갑자기 생긴 걸까?’
어쩌면 그들이 나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에 속한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점을 지적당하면 당황하게 되는 건 흔한 일이다. ‘내가 그런가?’ 하면서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우주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은 그 어느 별보다도 먼 것이다.”(체스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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