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로마의 정치가 · 철학자 · 문인이다. 그는 변호사로서 명성을 쌓았고 로마의 제일가는 웅변가가 된다. 그의 연설과 철학적 저술은 유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사상은 문명화된 가치 체계의 원천이 되었다.
‘노년에 관하여’는 아주 오래전에 키케로가 쓴 글이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치 있는 글로 평가되고 있다. 글은 ‘카토’라는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노년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키케로는 우선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열거해 놓는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든다. 둘째, 노년은 우리 몸을 허약하게 한다. 셋째, 노년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넷째, 노년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그는 노년의 단점이라 할 만한 점들을 열거해 놓고 나서 이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며 노년의 장점을 부각시킨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년에도 훈련과 절제를 통해 이전의 체력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고, 큰일은 체력이나 민첩성이나 신체의 기민성이 아니라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리고 이러한 여러 자질은 노년이 되면 대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난다는 것이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노년에 관하여’를 읽었고, 앞으로 ‘우정에 관하여’를 읽을 예정이다.)
이 책에서 노년에 관한 글 중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고 문장력이 뛰어나서 여러 번 읽을 만한 글을 글상자에 작성해 보았다.
(33쪽) 한창때의 젊은이들은 경솔하게 마련이고, 분별력은 늙어가면서 생기는 법이라네.
(44쪽) 인생의 주로(走路)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 번만 가게 되어 있지.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52~53쪽)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이성과 지혜로도 쾌락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에 욕망을 품지 않게 해주는 노년에게야말로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자네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네. 쾌락은 심사숙고를 방해하고, 이성에 적대적이고, 말하자면 마음의 눈을 멀게 하고, 미덕과는 함께하지 않기 때문일세.
(58쪽) 하나 노인들은 쾌락을 바라지도 않네. 그리고 바라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고통을 줄 수 없네. 이미 연로해진 소포클레스에게 어떤 이가 아직도 성적 접촉을 즐기느냐고 묻자 그는 “아이고, 맘소사! 사납고 잔인한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제 막 나는 거기서 빠져나왔소이다.”라고 적절하게 대답했다네. 그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아마도 혐오스럽고 괴로운 일이 되겠지만, 그런 것에 물리고 신물이 난 사람들에게는 즐기는 편보다는 없는 편이 더 즐겁다네.
(74쪽) 얼핏 하찮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노인에게는 명예를 의미하네. 아침 인사를 받는 것, 예방(禮訪)을 받는 것, 길을 양보받는 것, 이쪽에서 다가가면 사람들이 일어서는 것, 광장에 오갈 때 호위를 받는 것, 조언을 부탁받는 것 등등. 이런 관행은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도덕 수준이 높을수록 더 꼼꼼히 지켜진다네.
(75쪽) 하나 노인들은 고집이 세고, 불안해하고, 화를 잘 내고, 괴팍스럽다고들 하네. 그러고 보면 어떤 노인들은 인색하기까지 하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성격상의 결함이지 노년의 결함이 아닐세.
(78쪽) 이제 네 번째 이유에 관해 고찰할 일이 남았네. 그것은 우리 나이의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하는 것 같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말일세. 죽음이 노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토록 오래 살아오면서도 노인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왜냐하면 죽음이 영혼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고,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니까. 제3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