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에서 한 작품씩 골라 읽는 재미에 빠지곤 한다. 장편에 비해 짧게 매듭짓는 단편이라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같은 이야기라도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른 건 소설의 매력인 듯.
주제와 상관없이 내가 주목해 읽은 부분을 소개한다.
1.
자기 인생에서 진실한 사랑은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몇 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논쟁이 벌어진다.
『(...) 현실에 대한 관찰보다는 시적인 것에 기울어지는 부인들은 사랑, 참된 사랑, 위대한 사랑이라면 인간에게는 단 한 번밖에 주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벼락과도 같아서 이 사랑의 벼락을 맞은 마음은 타버리고 황폐하게 되어 어떻게나 공허해지는지 그 후로는 어떤 감정도 솟아날 수 없게 되고, 어떤 꿈마저도 다시 싹틀 수 없다고 단정했다.』
- <모파상 단편선> 중 ‘의자 고치는 여인’, 158~159쪽.
『사랑을 여러 번 해본 후작은 이런 신념을 맹렬히 공박했다.
“사랑은 있는 기력과 심혼을 다해 몇 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씀드리는 바요. 두 번 다시 사랑할 수 없다는 증거로 사랑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을 들지만, 바보같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하겠소. 자살을 했기 때문에 정열이 재발할 기회를 빼앗겨버렸던 거요. 그들은 다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사랑했을 거요. 사랑하는 인간이란 주정뱅이와 같소. 술도 마셔본 자가 마실 수 있고 사랑도 해본 자가 할 수 있소. 그것은 기질 문제죠.”』
- <모파상 단편선> 중 ‘의자 고치는 여인’, 159쪽.
내 생각엔 기회만 온다면 사랑은 몇 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사랑을 할 때마다 이번이 가장 소중하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여길 것 같다.
‘의자 고치는 여인’은 상대방에게 무시당한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2.
아내의 오랜 친구가 ‘나’의 집에 방문한다. 방문자는 맹인이었고 게다가 아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다. 방문자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방문자와 ‘나’를 인사 시켰고 두 사람은 악수를 한다. 『“어쩐지 전에 이미 본 사람 같구먼.”』 하며 방문자는 ‘나’에게 쩌렁쩌렁하게 말한다.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니 유머를 구사한 말이겠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란 소설집에 담긴 ‘대성당’. 이 소설을 읽으며 맹인인 데다 상처했음에도 천연덕스럽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음이 존경스러웠다. 그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직업도 있다. 그런 이는 불운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정신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불행에 발목을 잡히는 일이 없을 듯하다.
그런 사람이 소설 속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같은 처지에 있더라도 각기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법이므로.
이 소설을 읽고 내가 생각한 것.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떠할지 헤아릴 수 있다.’
3.
이 소설에서 내가 애절하게 느끼며 읽은 것은 다음 글이다.
『ㅡ엄마 있잖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을 뗐는데, 다음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할말이 너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년 제10회>,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89쪽.
누구에겐 중요한 것이 누구에겐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