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애인, 친구, 책을 비교한다면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맞히는 퀴즈가 있었다. 그중 재밌는 퀴즈가 있었는데 ‘평생 애인 없이 살기’와 ‘평생 친구 없이 살기’ 중에서 어떤 것이 낫다고 사람들이 선택하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답은 ‘평생 애인 없이 살기’였다. 조사한 사람들 중 70% 이상의 사람들이 애인보다 친구를 더 중요시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애인에 비해서 친구가 더 자신에게 잘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 같다. 애인과 싸우거나 결별할 때 위로해 주는 것은 친구인 경우가 많고 또 외로울 때도 위로를 해 주는 것은 친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애인은 가끔씩 적대적 관계에 있게 된다고. 그래서 애인은 늘 내 편일 수 없다고.
만약 사람들에게 애인, 친구, 그리고 여기에 책을 넣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평생 애인 없이 살기’, ‘평생 친구 없이 살기’, ‘평생 책 없이 살기’ 중에서 가장 끔찍한 삶을 고르라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이 중에서 ‘평생 책 없이 살기’가 가장 끔찍할 것 같다는 사람도 많을 듯하다. 나도 여기에 속한다. 내게 책이 없는 세상은 살맛 없는 세상이다.
애인은?
애인이 있어서 좋은 점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쁨과 달콤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쁜 점은 상대에 대한 의무가 따른다는 점이다. 연애를 하면 언제든 상대가 불러내면 아무리 외출이 귀찮은 날에도 만나러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나가지 않는다면 상대는 섭섭해 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또 생일같이 특별한 날은 꼭 챙겨 줘야 하고 아플 땐 더 마음을 써 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물론 사랑에 빠지면 그런 의무를 다하는 것이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여러 통계에 따르면 오래 사귈수록 달콤한 설렘도 점점 퇴색한다고 하니 오래 사귀면 애인으로 인해 귀찮게 여겨지는 일이 생길 듯하다. 결국 두 사람 중 더 좋아하는 쪽이 있기 마련이고, 더 성의 없는 쪽이 있기 마련이어서, 한쪽은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화를 풀어 줘야 하는 관계가 되기 쉽다. 혹자는 ‘연애’하면 떠오르는 게 ‘스트레스’라고 했다. 연인 관계에서는 싸움이 많아지기 때문이란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주는 게 애인이란 존재가 아닐까 한다.
친구는?
친구는 애인에 비해 기쁨을 덜 주지만 스트레스도 덜 준다. 애인에 비해 서로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관심이 많지 않으니 싸울 일도 많지 않다. 친구의 좋은 점은 늘 그 자리에 있어 준다는 점이다. 애인은 한동안 만나지 않으면 이별할 확률이 크지만 친구는 소원하게 지내다가도 언제든 만나면 예전의 친숙했던 친구 관계로 돌아가게 된다. 단점은 무관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구보다는 애인이나 가족을 더 챙기기 때문에 섭섭할 때가 생길 수 있다.
책은?
그러면 책은 어떠한가. 애인이나 친구를 만나는 일과 비교하면 책을 만나는 일엔 의무도 없고 섭섭함도 없다. 그저 흥미로운 책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이 생길 뿐이다. 싫증이 날 새가 없이 새 책은 매일 쏟아져 나와 설렘이 이어진다. 한번 책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자연히 책의 세계로 빠져 들게 된다. 독서만큼 값이 싸면서도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으며(몽테뉴), 독서하는 사람은 참된 벗, 친절한 충고자, 유쾌한 반려자, 충실한 위안자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M. T. 바로).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자질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자질이다. 나에게 그 자질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책을 읽으면 어떠한 잡념도 사라지고 책 내용에 곧장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길 것이다. 행복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해 시기하지 않고 너그러워진다는 점이다. 시기심이란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므로,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공연히 시기심을 갖지 않는다.
행복한 독서광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돈 많은 친구를 만나면, “넌 부자가 되거라, 난 책으로 행복할 테니.”라고. 옷을 멋지게 입는 친구를 만나면, “넌 멋쟁이가 되거라, 난 책으로 행복할 테니.”라고. 나에게 만약 ‘부자인 것’과 ‘책이 주는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책이 주는 행복’을 택하리라. ‘멋쟁이인 것’과 ‘책이 주는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책이 주는 행복’을 택하리라.
책이 넘쳐서 책장에 못 들어가고 있는 책들
책을 보면 참 잘생겼다고 느낀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볼 때면 또는 책이 방바닥에 쌓여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는 그것의 잘생긴 외양에 감탄하곤 한다. 이보다 더 잘생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전자책의 출현으로 인해 종이책의 종말을 논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한 장 한 장 넘기는 종이의 질감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에 의하면 독서의 두 가지 동기는 독서를 즐기려는 것과 읽은 책에 관해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책에 매료된 적이 있는 사람은 즐거움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랑거리를 갖게 하는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책과 관련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책과 관련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인터넷 서점에서 사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 새 책의 첫 장을 펼치는 것/ 새 책의 빳빳한 질감을 느끼는 것/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을 읽는 것/ 책에서 외우고 싶을 만큼 좋은 구절을 발견하여 연필로 밑줄을 긋는 것/ 책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것/ 독서광인 친구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책과 관련하여 내가 싫어하는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책이 구겨지는 것/ 내가 아끼는 책을 누군가가 빌려 달라고 하는 것/ 책을 재밌게 읽고 있는데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기는 것/ 아끼던 책이 오래되어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는 것/ 책 읽으며 안구건조증이 느껴지는 것/ 전자책의 편리성 때문에 종이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신문 기사를 보는 것.
* 어느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26번째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