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영화
토마스 엘세서.케이 호프만 엮음, 김성욱.하승희.이재연 옮김 / 한나래 / 2002년 4월
품절


토마스 엘세서, 우리 시대가 주목해야 할 영화학자와 그의 동료들이 엮은 이 중요한 책의 일부를 옮겨 본다. / 어떻게 영화를,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대중 오락의 지위를 여전히 고수할 수 있을까? 영화, 텔레비전, 디지털 미디어가 서로 관객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공적 공간과 사적 기회들에서 영화는 어떻게 그것의 토대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네마'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이런 점에서 예술 형식 혹은 사운드와 이미지의 복제 기술인 영화가 어떻게 혁신적일 수 있을까?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전에,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영(16)화, 텔레비전, 비디오, 디지털 미디어를 도대체 같은 부류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하나를 다른 것들과 비교할 것인가? 만일 이들 간에 가족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이들을 분리시키는 반목만큼이나 이들을 함께 묶어 내는 공통의 끈은 무엇인가? 1993년 11월, 헤이그에서 "카인과 아벨?"이란 제목으로 열린 회의의 논제가 바로 이런 문제였다. -16,17쪽

그러나 카인과 아벨이란 이름이 단지 물음표를 따라가는 것만은 아니다. 이 이름들에 따옴표를 부쳐야 하는 이유는 이 제목이 장 뤽 고다르의 말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네 멋대로 뛰어라>(1980)에서 고다르의 또 다른 허구적인 자아인 폴(자크 뒤트롱)이 칠판에(17)쓰는 표어인 '비디오와 영화 - 카인과 아벨'은 그가 작가이자 감독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나누는 대화의 한 부분이다. 추측컨대 이 순간 고다르는 자신의 작업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될 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중략)고다르의 변화가 암시하는 기술 경제적인 지평은 논의되고 있는 미디어 혈족 관계에 중심적인 것이다. 하지만 형제 간의 경쟁, 세대의 계승, 근친상간이나 살해 (이 모든 논의가 제시되는 논문에서 다뤄지고 있다)가 결국 그것을 지배하는지 어떤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비은유적인 영역에서, 수렴과 '시너지'의 힘은 경제적이고 통계학적인 것이다. -17,18쪽

다국적인 기업 정책과 전지구적인 관객 추구가 이것을 결정한다. 20세기 초부터 시청각 미디어는 (군사적인 내용을 제외한다면) 늘 대량 생산된 상품으로 발전해 왔다. 즉, 레저, 문화와 정보 산업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큰 폭으로 성장했으며, 지난 20년간 가속화된 발전을 걸어 왔다.이런 점에서 수렴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집중, 합병과 카르텔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산물이 1990년대의 거대 미디어 제국이다. -18쪽

뉴 미디어가 두 번째 세기로 진입하고 있는 영화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장기적인 시각을 지녀야만 한다. 각각의 매체는 자신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고고학'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의 초기 시절이 미디어 전송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해 선별하고 생략하는 '적절한 사실들'이 무엇인지, 혹은 그 반대로 '막다름'이 '시대에 앞선'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21쪽

영화 산업의 다른 부분은 영(24)화와 텔레비전을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하는 좀 더 전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 한 조각의 영화도 내줄 수 없다 not a single meter for television"는 말이 1960년대에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를테면 독일 영화 제작자들과 극장 소유주들은 관객들이 텔레비전으로 무정하게 발길을 돌려 버릴 것을 두려워했다. 1970년대에는,스크린의 크기와 화면의 질, 넋을 빼앗긴 주목과 정신 산만한 관람, 텔레비전 식품과 리모트컨트롤의 횡포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1980년대 이래로 적어도 유럽에서 이런 관계는 소형스크린을 무시하던 시대에서 180도로 변화하였다. 텔레비전의 직접 투자나 합작 투자, 혹은 판권 사전 구매를 통하지 않고 만들어진 영화는 지난 20년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미국 영화 산업은 수입의 60% 정도를 유료 텔레비전, 케이블 네트워크, 방송국 호근 비디오의 선매를 통해 얻고 있다. (중략) 심지어 박스 오피스에서 실패한 작품들도 케이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테크에서 흥행 만회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영화사들이 '비디오용 영화'를 만드는 데 전문화하고 있다.-24,25쪽

지난 25년 동안 영화가 텔레비전의 가장 명료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채택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 공생 관계에서의 교차로는 또한 다른 길로 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연속극 형식의 에피소드적인 스토리텔링과 열린 종결의 내레이션이다. 연속극 형식은 스타들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1910년대와 1920년대 영화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구조적인 기능은 텔레비전에 의해 더욱 견실히 개발되었다. (중략)1980년대 이래로 주류 할리우드 영화가 교대로 카피한 것은 열린(26)혹은 모호한 결말이었다. <스타워즈>,<인디애나 존스>,<백 투 더 퓨처>와 같은 영화들은 속편, 심지어 전편의 흥행 성공을 추구했다.-26,27쪽

영화와 텔레비전이 서로의 차이를 '해소'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라고 이 논문들이 제기하고 있음에도, 둘이 그럼에도 동거의 방식을 발견하고 있다는 데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세르주 다네는 일전에 영화와 텔레비전을 '오래 된 커플'이라 말했다.(28)/ 생태학적인 은유를 활용해, 우리는 이런 두 미디어가 기생 식물처럼 그리고 형제라기보다는 숙주처럼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중 시장의 출현이 예술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즉 혁신을 중단시키고, 창조성에 재갈을 물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기술적'인 주장은 사실 그 반대를 보여 준다. 돈을 벌 수 있기에, 그리고 거대한 시장이 워크맨, CD 플레이어, 비디오 게임 혹은 대여나 판매용 공 테이프 같은 종종 고도로 혁신적인 생산물과 서비스를 열망하고 준비했기에 시청각 산업은 혁신저긴 경기 부양을 겪을 수 있었다. 소비자 수요의 관점에서 볼 때, 위에서 논의된 수렴과 발산의 힘은 비록 창조성과 예술의 전통저인 개념에 비추어 보면 다소 기이해 보이지만 성장, 창조성, 그리고 재-28,29쪽

능의 전개를 자극했다. / (중략) 소비자 문화를 관통하는 경제적 압력이 초래한 미디어 수렴 뒤편에 놓여진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떠올릴 때, 이것은 더욱 적절한 것이다. 대량 시장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자 하는 충동은 테크놀로지가 실용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필요를 가공해 낼 때만이 성공적인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즉, 나는 물건을 산다, 그러므로 나는 표현한다. 비록 그러한 압력이 제품 표준화와 소수 제작자들의 독점을 초래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도처에서 자신을 표명하는 다양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29,33쪽

이미 암시되고 있듯이, 자동차 생산을 위해 재고를 줄이는 일본의 '적시 생산 시스템 JUST-IN-TIME'이나 베네통의 니트웨어 산업에서의 그 유명한 직접 매출 성향에 근거한 피드백 주문과 유통 시스템처럼,일종의 '포스트포디즘'이 시각 미디어에서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 '소비자'들이 다양성과 소비자 선택을 원하는 것일까? 영화 소비자가 물건이 아니라 경험, 특정한 종류의 '주체화'와 '말걸기'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 보기가 공유와 참여의 제스처인 협상화된 선택과 사회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영화는 다른 대량 시장 산출물과 구별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시공간에 위치해 '극장에 영화 보(33)러 가는 행위'는 수많은 물리적인 조건들에 의존하지만, 상품 혹은 예술품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자기 충족적인 시각 텍스트로서의 영화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컨텍스트'안에 영화를 구체화하는 실천이다. / 영화의 미래 : 수렴, 발산,차이 - 토마스 엘세서 中-33,35쪽

최근의 디지털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가상 현실, 인터랙티브, 원격 통신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더 오래 된 테크놀로지인 스크린이다. 사용자는 눈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잡은 평평한 직사각형의 표면인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가상 공간을 여행하고, 물리적으로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하거나 컴퓨터에 의해 호명되는 환상을 경험할 수 있다. -41쪽

오늘날 컴퓨터 스크린은 정지 이미지, 움직이는 이미지 혹은 텍스트와 같은 온갖 종류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날마다 신문을 읽고, 영화를 보고, 동료들과 소통하고, 일하는 데 스크린을 중요하게 사용한다(비행기 승무원, 슈퍼마켓 종업원, 비서, 엔지니어, 의사, 조종사 등이 사용하는 스크린과 ATM 기계, 슈퍼마켓 계산대, 자동차 계기판의 스크린들, 그리고 컴퓨터 스크린). 이 사회가 스펙터클 사회인지 시뮬레이션 사회인지에 대해 논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사회는 스크린 사회다.-42쪽

100년 전 쯤 새로운 유형의 스크린이 대중화되었다. 나는 그것을 '역동적 스크린 dynamic screen'이라 부를 것이다. 이 새로운 유형은 고전 스크린의 특징을 간직하면서도 시간 경과를 통해 변하는 이미지를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새로운 특징을 첨가했다. 이것이 영화,텔레비전, 비디오 스크린이다. 또한 역동적 스크린은 이미지와 스크린의 특정한 관계, 말하자면 특정한 시각 체제를 만들어 냈다. 이 관계는 이미 고전 스크린에 내재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완전히 표면화된다. 스크린의 이미지가 완벽한 환영과 시각적 충만함을 실현하는 동안, 관객은 의혹을 지연시키고 이미지와 동일시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스크린은 단지 관객의 물리적 공간 내부에 위치한 제한적인 차원의 창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재현된 것에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물리적인 바깥 공간을 무시하면서, 창문 내부에 보여지는 것들에 우리가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회화, 영화,스크린 혹은 텔레비전 스크린에서,단일한 이미지가 스크린을 완전히 채운다는 사실이 이 시각 체제를 가능케 했다. 극장에서 영사되는 이미지가 정확하게 스크린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가 불-43쪽

쾌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환상을 붕괴시키고, 재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정보를 제공하는 중립적인 매체라기보다 차라리 적극적인 매체이다.스크린은 프레임 바깥의 어떤 것이든 사라지게 만들고, 그것을 여과하고,솎아 내고, 대신한다. 비록 그 여과 정도가 영화 관람(영화를 관람할)(43)때 관객은 스크린 공간에 몰입된다)과 텔레비전 시청(여기서 스크린은 더 작고, 불이 켜져 있으며, 시청자들 간의 대화가 허용되고, 시청 행위가 종종 일상적인 다른 활동들과 통합된다)간에 서로 다르지만, 도처에서 이런 관람 체제는 지금까지 안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43,44쪽

주체가 감금된 것이다. 나는 이 이미지를 스크린에 기초한 서구적인 재현 기제의 일반적인 은유로 간주한다. 이런 전통에서는 관람자가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의 몸이 공간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르네상스 단안 원근법에서 현대적인 영화까지, 케플러의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19세기 카메라 루시다까지 몸은 정지된 채로 있어야 한다. -53쪽

영화 이론가들은 이러한 부동성을 영화 제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간주했다. 프리드버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보드리(그는 관객을 플라톤의 동굴에서의 죄수들과 비교했다)에서 무서까지 모든 영화 이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영화는 객석에 자리잡고 있는 관객의 부동성에 의존한다." 장 루이 보드리는 아마도 영화적 환영의 기초로서 부동성을 누구보다 더 강조한 사람일 것이다.-57쪽

보드리는 이 부동성과 감금이 죄수/관객들로 하여(57)금 지각과 재현을 오인하게 만들고, 그 둘이 식별 불가능할 때 유아로 퇴행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드리의 정신 분석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관객의 부동성은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차라리 영화적 쾌락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알베르티의 창문, 뒤러의 원근법 기계,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영화와 같은 스크린에 기반한 이 모든 기제에서 주체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만 한다. 사실 프리드버그가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성에서 이미지의 점진적인 동원은 관객의 점진적인 감금을 수반했다. / 컴퓨터 스크린의 고고학을 향하여 - 레브 마노비치 中-57,58쪽

사람들이 대규모로 영화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지 전자기적(나중에는 광전자적) 저장 기술의 출현 때문이었다.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가 출현하기 훨씬 전에, 재생 기계의 소유권은 상품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잠재적인 소유권을 포함하기 위해 확장되었다. 이것은 경제적인 관점뿐 아니라 문화적 관점, 즉 어떻게 시청각을 취급해야 하는가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전자적 또는 -비디오 디스크의 경우- 광전자적으로 저장된 영화 제작물이 그 때까지 문학적인 텍스트를 위해 지정된 방식, 즉 수용,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이용될 수 있었다. 시청각적 서적화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문학적 정전이라는 의미에서 소프트웨어의 분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 과정의 특성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널리 유행하는 비디오 프로그램과 대량 생산된 영화 상품을 위한 통과역으로서의 VCR의 광범위한 사용에 정면 대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도발하기 위한 것이다. -109쪽

1990년대 이래로, 비록 독신과 핵가족화된 집에서 '텔레비전방'이 이미 완전히 시대 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할지라도, 미래에는 가정 인테리어 디자인에 급진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다. 공간은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전통적인 시청각 미디어에서 파생된 특성이 점유하는 잡종적인 설계, 계획이 될 것이다. -113쪽

앞으로 제품은 양극화될 것이다. 한쪽은 더 실용적이며 소형화되는 이동 통신 기기이다. 다시 말하면 미적 특성은 점점 줄어들고 더 저렴한 가격에 덜 낭비적인 제작물이 생산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정적이고, 고정되고 고도로 개발된 오락 전자 기기와 같은 특별한 제품, 다시 말해 고품질의 특별한 미적 감각을 가진 사치스런 제품이 생산될 것이다. / 텔레비전 시대의 종말, 지그프리트 지린스키 中-114쪽

'카인과 아벨'이라는 제목은 영화와 텔레비전 간의 적대성을 함의하며, 그 사이에는 어떤 타협이나 화해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이런 식의 편견에 맞서, 두 매체 사이의 좀더 복잡한 관계에 주목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사고를 길잡이해 줄 반대편의 신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히브리적이고도 성서적인 기원 신화가 아니라, 가족의 삶을 다룬 그리스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정신 분석이 차용하기도 했던 신화, 곧 아들 오이디푸스와 아버지 라이오스에 관한 신화 말이다. -179쪽

텔레비전은 영화가 갖춘 매력을 필요로 한다. 영화가 우위를 점하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원한다. 즉, 영화가 누리는 문화를 갖추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영화는 텔레비전이 확보해 놓은 시청자들이 필요하며, 텔레비전을 통해 작품을 팔고자 한다.-180쪽

하지만, 받은 게 있으면 주어야 하는 법. 영화는 수 년 동안 텔레비전으로부터 상당량의 배상을 받았다. 잠시나마 엄격하게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교하는 것을 벗어나(여러분이 이미 충분히 그 비교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가 텔레비전으로부터 취한 두 가지 영역이 있다는 점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로, 텔레비전은 영화가 관객에게 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시청자를 세분화했다. 서양문화권에서 일반적인 시청각적 해독력 audio literacy 수준은 불과 20년 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지 안다. 즉, 어떻게 이미지가 취사 선택되는지, 그런 이미지들이 어떻게(일반 견해라고 불리면서)사물과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매체에서만 통용되는 조크에도 익숙해져 있다. 수 년 전만하더라도 영화 관객들을 혼란케 하였을 생략 화법이나 모호한 인물 설정, 건너 뛰기나 불연속적인 서사 등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시청각적 해독력의 덕을 본 것은 다름 아닌 영화였다. -184쪽

이런 사실의 주된 측면 가운데 하나로, 텔레비전이 영화의 방대하고도 뒤죽박죽인 저장고 역할을 해 온 방식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저녁 시간대나 심야 시간대 프로그램 편성은 종종, 앙리 랑글루와의 미치광이 유령이 짜 놓은 것처럼 보이곤 한다. 할리우드에서 네거티브를 보존한 영화들과, 영화 산업에서 파생된 오락물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한데 모인다. 그들 모두는 전파를 통해 텔레비전 화면에 상영되는 영광을 잠시나마 갖게 되었다. 마침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적 화법을 읽어 낼 줄 아는 관객들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텔레비전 덕택이다. -185쪽

텔레비전의 미학이란 특별한 순간의 미학, 직관과 통찰의 미학, 걸러진 감각 영역의 미학이라기보다는 평상의 미학, 세속적인 인간 존재의 미학인 것이다.(188)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견해에 좀더 다가가 볼 수 있다. 영화는 특별한 공간이다. 우리의 접근이 제한된다. 그 곳은 우리의 공간이 아니라, 통제가 가해지는 공공의 공간이다. 우리는 정해진 규칙- 돈을 지불하고, 상영 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하는 식의- 을 따르면서 입장하고, 극장 안에서도 여러 규칙들에 따라 행동할 것에 동의한다. 유럽의 경우,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잡담하지 않고 영화를 봐야 하지만, 이런 규칙들은 영화가 상영되는 특정 문화권에 따라 제각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이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과정은 정말이지 신성함 sacred 그 자체이다. 물론 그 스스로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적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규칙과 의례를 집단적으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개인적인 감상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영화는 이런 특별한 공간에서 요란하게 상(189)영되는 것이다.(190)-188,189쪽

반대로, 텔레비전은 전적으로 다른 공간을 차지한다. 신성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 공간, 텔레비전은 바로 우리 사회와 맞닿아 있다. (중략)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의 정상적인 인간 관계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된다. 그들은 요즘 세상사를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신문 기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지 못한다.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굴러간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 바로 텔레비전의 기본적이거도 중심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다. -190쪽

텔레비전을 둘러싼 어떠한 의례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건 일반적인 사실이다.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볼 때 극장에 있는 것처럼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예를 들면 조명을 어둡게 하고, 팝콘을 옆에 끼고,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벌인다는 심정으로, 특정한 시간에 감상하는 식), 텔레비전이 이런 식의 의식을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거기엔 어떠한 신성함도 없이게, 그만큼 판타지 속으로 빠져들 여지는 적다. 텔레비전은 생활 속에서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지,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190)성하다기보다는 세속적이다. / 영화와 텔레비전 :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존 엘리스 中-190쪽

그럼 미디어 사가들의 견해와 정면으로 맞서는 그 딜레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초기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초기 영화들에 관한 연구는 카메라 옵스큐라, 환등기, 사진 같은 장치들이 불가피하게 영화 카메라와 텔레비전으로 이끌리게 되었다는 오랜 계보학에 커다란 의문을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디지털 미디어를 위한 여지를 만들기 위해('영상 언어의 진화'나 '인류의 오랜 꿈의 실현'이라는 노선을 따르는) 새로운 목적론을 찾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는 또 테크놀로지적인 특수성을 하나의 매체를 정의하는 기준인 그 매체의 기구apparatus나 장치 disposif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295)으로 상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장치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예를 들어, '기계론적 모방'의 심급들을) 암시한다. 오직 다양한 유형을 가지는 사진 영상과의 친족적인 유사성만이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변화들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95,296쪽

블록버스터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듯 무엇보다도 관심, 즉 고인지 가치 high recognition value를 산출하며 시청각적 매체 시장에서, 출판과 음반 산업에서, '베스트 셀러'와 '톱 10'또는 '인기 차트'로 더 잘 알려진 짧은 이용 수명 exploitation spans이란 원칙을 포함하는 마케팅 개념이다. -297쪽

나는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가족적 유사함을 가진 형제라는 은유, 즉 디지털에게 막 종식되기 직적인 반목하는 두 형제들이란 은유로 이 논의를 시작했다. 나는 수렴이라는 또 하나의 질서로 이 모두를 결론짓고자 한다. 이 또 하나의 질서란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 두는 듯 보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가 결과하는 것들의 질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디지터른 그 자체로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오히려 현 시점에서 그리고 당분간은 영화와 텔레비전을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매체들에 대래 더욱 잘 알게 해 주는 매체이다. /디지털 영화 : 전송,이벤트, 시간 - 토마스 엘세서 中-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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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마케팅 - 시장의 새로운 우상들 예영 현대문화신서 4
노르베르트 볼츠 & 다비트 보스하르트 지음, 고재성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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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한 지식인 노르베르트 볼츠의 1995년도 저서 <컬트 마케팅>중 일부를 옮겨본다. /믿음이 사라지면 스타일의 차이가 흥미를 끈다. 삶은 예술작품의 한 재료가 된다. 자기 연출(Self-fashioning)기술이 중요하다.이 말은 니체가 '미국인의 신념'이라고 말하던 것인데,곧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말한다.삶은 소비를 고급예술로 보는 끊임없는 자신의 노래이다.이러다 보니 우리는 유행과 여가시간 활용과 육체 숭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제 가치의 변화는 오늘날 철학자나 계몽가들이 증오하던 이를,곧 의식주를 의미 있게 다루는 것을 일컫는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사상들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다. -42쪽

추세 연구가들은 명명(命名)하는 사람들이다.다수의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이름이 붙은 다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볼 수 있다.그래서 흔히 추세는 발명된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는데,실제로는 이름만 붙였을 뿐이다.오늘날 추세 연구는 벌써 역사가 되었고 지난 몇십 년 동안 추세 연구가들이 퍼트린 이름이 '추세용어사전'하나를 만들 정도다.-45쪽

추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상징적으로 축약되어야 한다.보여져야 한다.곧 어떤 프로그램도 포함하지 않아야 하고 불확실해야 한다.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반이 안정되어서 개인의 주관적인 차원을 떠나야 한다.결정적인 작용을 해야 하는데,이것이 추세가 유행과 다른 점이다.-48쪽

'길거리 패션'이나 '독립 프로덕션'은 끊임없이 귀중한 창의력을 제공할 수 있고 도회적 삶의 느낌을 표현하고 여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문화'와 '반문화'가 대중화하는 시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100쪽

어떤 초감각적인 것을 감각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은 종교적 상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사실 마르크스는 상품세계를 종교세계와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분석한다.이를 통해서 그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다.곧 상품의 비밀은 절대 그 상품의 사용가치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상품은 단순한 소비를 위한 물건이 아니다. 상품은 어떤 구체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보다는 토템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원의 무언가를 구현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상품시장에 나타나는 생산품을 사회적 '상형문자'(Hieroglyphe)라고 불렀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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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이해 - 전면2개정판
김창남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2월
구판절판


1세대 문화연구자 김창남 교수의 저서 <대중문화의 이해(2003년 전면개정판)>중 팬과 마니아의 개념 설명에 대한 구절을 일부 옮겨본다. / 팬은 누구인가: 대량생산되어 대중적으로 전파된 문화 생산물의 레퍼토리 가운데 특정한 연기자, 혹은 연주가, 혹은 특정 텍스트를 선택하여 자신의 문화속에 수용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서로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때 팬이라는 의미에 좀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을 그저 막연히 팬이라 부르는 관습에 익숙하지만, 그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의 취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팬이라고 할 수 있다. -300쪽

마니아의 두 측면 : 능동적 문화 주체 혹은 소비의 귀족주의 / 요즘 대중문화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체가 마니아라는 집단이다. 우리말로 한다면 무슨 무슨 광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마니아는 영화,음악,만화,스포츠 등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마니아들은 우선 특정한 문화 텍스트(그것이 영화일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또 특정한 스타일수도 있다)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상당히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준전문가 수준의 수용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의 주류적 분야, 즉 스타 시스템이 작동하는 분야는 팬이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상대적으로 소(307)외된 장르나 문화상품 자체에 관해서는 팬보다는 마니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307,308쪽

마니아의 등장은 일단 우리 대중문화가 그만큼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대중문화의 환경이 과거에 비해 상당 정도 민주화되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정치권력의 간섭이 극심했던 유신시대나 5공화국 시대에는 마니아가 많이 나올 수 없었다. 당시에도 마니아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의 문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뿐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마니아의 등장은 대중문화에 대한 정치권력의 입김이 줄어들고 그만큼 대중문화의 영역이 다양화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308쪽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마니아 집단은 꼭 그렇게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마니아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경우에 따라서 또 다른 의미의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데서 볼 수 있다. 특정한 문화 텍스트에 대해 광적인 애정과 집착을 보이고, 그래서 그만큼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마니아들은 때로 매우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애정과 정보를 과신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중략) 일부 마니아들이 추구하는 지식과 정보의 성격도 문제이다. 어떤 경우 마니아들은 매우 지엽적이고 앨범 제목과 무슨 무슨 구석진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으며 그것이 자신의 마니아적 취향을 대변하는 것인 양 우쭐해한다.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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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지음, 박상규 옮김 / 시각과언어 / 1998년 7월
구판절판


유명한 미이라 콤플렉스 비유가 나오는 앙드레 바쟁의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조형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시체의 방부보존 관습이 조형예술 발생의 기본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산될 수가 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이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었을 것이다. 이집트 종교는 인간심리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죽음은 시간의 승리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인간의 육신의 외관을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그것을 떼어내는 것, 곧 그것을 생명권 내에 안치시키는 일이다.그러니까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 자체에 직면하여 그의 살과 뼈를 보존함으로써 이러한 외관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3쪽

초상화(영상)의 제작은 온갖 인간중심적인 공리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이다. 더 이상 인간 사후의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고 좀더 일반적으로,그것 자체로서 자율적으로 지상적인 운명을 띠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근사한 어떤 이상적인 우주의 창조 그것이 문제로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만일 우리가 회화작품에 대한 인간의 더할 수 없는 찬탄 밑에서, 외형의 영속성을 통해 시간을 이겨낸다고 하는 이 원초적 욕구가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회화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만일 조형예술의 역사가 단지 그 미학의 역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심리학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사성의 역사,(혹 이렇게 불리기를 원한다면) 리얼리즘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14) 이렇게 사회학적 시야에서 본 사진과 영화는 지난 세기 중엽에 발생한 근대회화의 정신적, 기술적인 중대 위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설명해줄 것이다. -14,15쪽

인간의 손이 개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상 위에 어떤 의혹의 그림자를 던지게 한다. 실제로 바로크 회화로부터 사진으로의 이행에 있어 본질적인 현상은(모방의)단순한 물리적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색채의 모방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사진은 오랫동안 회화보다 열등한 채로 남을 것이다).(사진이)인간을 배제한 기계적인 재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의 착각에의 욕구가 완전히 만족되어진다고 하는,하나의 심(17)리적 사실에 있는 것이다.-17,18쪽

양식과의 모델에의 유사성과의 사이의 갈등이 비교적 근대적 현상이어서, 사진건판의 발명 이전에는 그 갈등의 흔적이란 거의 발견되지를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샤르댕의 그 매력적인 관객성이 사진과의 객관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피카소를 오늘날 신화가 되게 하고 조형예술의 형식적 존재성을 규정하는 여러 조건과 동시에 이것들의 사회학적 기반을 모두 의문에 부치게 한 리얼리즘의 위기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바로 19세기이다. 유사성의 콤플렉스에서 해방된 근대 화가는 그것을 대중의 손에 넘겨주었고 대중은 그 때부터 유사성을 한편에선 사진과,또 한편에선 오로지 사실에만 전념하는 류의 회화와 동일시하려고 했다. -18쪽

사진가의 개성은 피사체의 선택, 그것은 어떤 각도에서 잡는가, 또 그 사상의 교시능력이 어느 만큼 있는가 하는 데 의해서만 작동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 개성이 최후의 작품에 눈에 뛸 만치 반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화가의 개성과 똑같은 자격으로 거기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은 인간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바, 오직 사진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쪽

회화는 동시에 더 이상 유사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사진보다 열등한 기법의 하나, 몇 가지 재현방법의 대용수단ersatz의 하나에 불과하다.우리의 무의식의 저 근저에는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대강 전사한것이 아닌, 그 사물 자체의, 그러나 일시적인 우연성으로부터 해방된 그 사물 자체를 좀더 완전하게 무언가에 의해 대체시켜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바, 이러한 욕구를 충분히 발산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사물의 화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사진 렌즈밖에 없다. 사진의 영상도 핀트가 안맞았거나 형이 왜곡되었거나 혹은 색이 변해 자료적 가치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모델의 본체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모델 그 자체인 것이다. 앨범 사진의 매력은 거기에서 유래한다.-20쪽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유령 같은 회색 또는 갈색의 저 그림자들, 그것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가족 초상화가 아니다.그것은 예술의 마술적인 효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정한 기계장치의 효과에 의해 자신의 시간 속에 정지되어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생명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현존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처럼 영원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방부처리를 행하여 다만 시간을 그 자신의 부패로부터 지킬 뿐이기 때문이다. -20쪽

초현실주의는 그 조형상의 번태론을 창출키 위해 사진건판의 젤러틴 감광막에 도움을 구했을 때 이미 그같은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에게는 미학적 목표가 우리의 정신에 대한 영상의 기계적인 효과와 분리될 수 없음이 이런 까닭에서이다.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논리적인 구별은 초현실주의가 출현한 이래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다. 모든 영상은 사물로 느껴지고 모든 사물은 영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중략)해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완성이기도 한 사진은 서양회화가 사실에의 집념을 결정적으로 떨어버리고 그 미학적인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게했던 것이다. -23쪽

<완전영화의 신화>중 일부를 옮겨본다 / 영화는 관념론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갖는 관념은 영화가 실현하기 이전부터 그들의 두뇌 속에서 순전히 이념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극히 확고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술이 탐구자들의 상상력에 준 시사보다도 관념에 대한 물질의 강인한 저항 쪽에 있다. 더구나 영화는 과학적 정신의 도움을 거의 받은 바가 없다.-25쪽

영화는 산업상의 발견에 거의 항상 선행하여 존재하는 관념이 대략 근사하게 그리고 복잡화한 형으로 실현시킨 것에 다름 아니요. 산업상의 발견은 그런 관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여 영화가 그 가장 초보적인 형태에서조차 투명하고 유연하며 내구력이 있는 지지체와 순간적인 상을 포착할 수 있는 건조한 감광유제를(그밖의 것이라곤 18세기의 시계보다도 훨씬 구조가 간단한 기계장치였을 뿐이다)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영(26)화의 발명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들은 모두가 그같은 필요조건이 충족되기 이전에 벌써 도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26쪽

영화가 스스로에게 첨가해가는 온갖 개량은 모두가,역설적으로 말하면, 영화를 그 기원에로 근접케 하는 것일 따름이다.요컨대 영화는 아직 발명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발견들이나 산업적인 기술들은 영화의 발전에 있어 대단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으나 그것들을 영화 발명의 제일 원인으로서 위치시킴은 적어도 심리학적인 견지에 서서 보면 인과관계의 구체적인 순서를 뒤집는 일이 될 것이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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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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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30 0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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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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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의 비극 또는 시간낭비의 불가능>중 일부를 옮겨본다 / 이 자유시간의 질, 리듬, 내용 등 - 자유시간이 노동이라고 하는 강제 후의 잔여의 시간이든 아니면 '자율적인' 시간이든 -모든 것이 또 다시 개인간의,사회범주간의, 사회계급간의 차이표시기호가 되고 있다. -228쪽

어쨌든 대부분의 사물은 이론적으로는 교환가치와 분리할 수 있는 일정한 사용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시간은 어떠한가? 어떤 객관적 기능이나 특수한 용도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시간의 사용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시간에 그 사용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시간을 비어 있는 차원으로 해방시켜서 개인의 자유로 가득 채우는 것이야말로 '자유'시간의 근저에 있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체계에서 시간은 사물로서,즉 각 사람이 '의향에 따라서' 투자해야 하는 해,시,일,주 등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적 자본으로서만 '해방'될 수 있다.시간은 계량된다고 하는 점에서 생산체계의 추상성이라고 하는 완전한 추상성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진정으로 '자유로울'수 없다. -230쪽

소유되고 소비되는 하나하나의 사물에서와 같이, 자유시간의 일분 일분 속에서도 각각의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거나 아니면 만족시켰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소유된 사물 및 실현된 충족 속에도, '자유롭게 처분하는' 시간 속에도 욕망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소비'된 욕망의 잔재에 불과하다.-231쪽

시간이 사물인 것과 똑같이, 모든 생산물은 결정화된 시간으로 간주(232)될 수 있다(그것들의 상품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기술혁신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 사용자의 시간을 '절약해'주어, 이 절약이 구매대상이 되는 한에서는 여가시간의 결정이기도 한 것이다. 주부에게 있어서 전기세탁기는 자유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매될 수 있도록 사물로 변형된 잠재적 자유시간이다(이 자유시간을 주부는 텔레비전을 보는 데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전기세탁기의 선전을 보는 데 쓸지도 모른다!)-232,233쪽

교환가치 및 생산력으로서의 시간의 이러한 법칙은 여가 전체에 침투한다. 여가만이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모든 강제와 구속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생산체계의 법칙은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 법칙은 계속해서 또 어디에서나(도로에서든,해수욕장에서든,클럽에서든) 시간을 생산력으로서 재생산한다.시간을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으로 분할하고 후자를 자유의 초월적 공간의 시작으로 삼는 피상적인 견해는 신화에 불과하다.-233쪽

시간을 여봐란 듯이 헛되이 보내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캉스라고 하는 자유시간은 여전히 휴가를 얻은 자의 사유재산이며, 1년간 땀을 흘려서 얻은 하나의 재이다. -234쪽

따라서 여가와 바캉스에서,노동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목적달성에서의 도덕적,이상주의적 집념,즉 강제의 윤리를 볼 수 있다. 여가는 완전히 소비의 일부이지만,소비와 똑같이 충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충족을 위한 행위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햇볕에 살을 그을리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탈리아와 에스파냐로의 관광여행 및 각지의 미술관 순례, 의무적이 된 해변에서의 일광욕 및 체조, 특히 피곤(236)한 줄 모르는 '미소'와 '사는 즐거움' 등은 모두 사람들이 의무와 희생 그리고 금욕의 원칙에 맹종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다. 이것이 리스먼이 말하는 '오락 도덕'이며, 여가와 쾌락 속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순수하게 윤리적인 차원-다른 목적달성의 기준에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모르되 -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면죄될 수 없는 차원이다. -236쪽

오늘날에도 평균적인 인간이 바캉스 및 자유시간을 통해서 요구하는 것은 '자기실현의 자유'(어떠한 자기를 실현하고, 어떤 숨겨진 본질을 나타낸다는 것인가?)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용성, 즉 흥청망청 쓸 수 있는 자본(부라고 해도 좋다)으로서의 여분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유를 그는 우선 요구하는 것이다. 여가의 시간은 소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극히 중요한 사회적 시간이 된다. -240쪽

여가의 근본적인 의의는 노동시간과의 차이를 나타내라고 하는 강제이다. 따라서 여가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시간의 부재에 의해 규정된다. 여가의 본질적 가치를 만드는 이 차이는 도처에서 그 내포된 의미가 나타나고 있으며, 과장되고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 여가의 모든 기호,(241)태도,실천 속에서, 또한 여가가 화제가 되는 모든 언설에서 여가는 그러한 과시와 끊임없는 과장으로 살아가며, 자기선전에 의해서 성립하고 있다. 여가에서 모든 것을 탈취할 수 있는데, 이 사실만은 삭제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여가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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