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영화
토마스 엘세서.케이 호프만 엮음, 김성욱.하승희.이재연 옮김 / 한나래 / 2002년 4월
품절


토마스 엘세서, 우리 시대가 주목해야 할 영화학자와 그의 동료들이 엮은 이 중요한 책의 일부를 옮겨 본다. / 어떻게 영화를,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대중 오락의 지위를 여전히 고수할 수 있을까? 영화, 텔레비전, 디지털 미디어가 서로 관객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공적 공간과 사적 기회들에서 영화는 어떻게 그것의 토대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네마'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이런 점에서 예술 형식 혹은 사운드와 이미지의 복제 기술인 영화가 어떻게 혁신적일 수 있을까?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전에,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영(16)화, 텔레비전, 비디오, 디지털 미디어를 도대체 같은 부류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하나를 다른 것들과 비교할 것인가? 만일 이들 간에 가족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이들을 분리시키는 반목만큼이나 이들을 함께 묶어 내는 공통의 끈은 무엇인가? 1993년 11월, 헤이그에서 "카인과 아벨?"이란 제목으로 열린 회의의 논제가 바로 이런 문제였다. -16,17쪽

그러나 카인과 아벨이란 이름이 단지 물음표를 따라가는 것만은 아니다. 이 이름들에 따옴표를 부쳐야 하는 이유는 이 제목이 장 뤽 고다르의 말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네 멋대로 뛰어라>(1980)에서 고다르의 또 다른 허구적인 자아인 폴(자크 뒤트롱)이 칠판에(17)쓰는 표어인 '비디오와 영화 - 카인과 아벨'은 그가 작가이자 감독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나누는 대화의 한 부분이다. 추측컨대 이 순간 고다르는 자신의 작업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될 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중략)고다르의 변화가 암시하는 기술 경제적인 지평은 논의되고 있는 미디어 혈족 관계에 중심적인 것이다. 하지만 형제 간의 경쟁, 세대의 계승, 근친상간이나 살해 (이 모든 논의가 제시되는 논문에서 다뤄지고 있다)가 결국 그것을 지배하는지 어떤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비은유적인 영역에서, 수렴과 '시너지'의 힘은 경제적이고 통계학적인 것이다. -17,18쪽

다국적인 기업 정책과 전지구적인 관객 추구가 이것을 결정한다. 20세기 초부터 시청각 미디어는 (군사적인 내용을 제외한다면) 늘 대량 생산된 상품으로 발전해 왔다. 즉, 레저, 문화와 정보 산업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큰 폭으로 성장했으며, 지난 20년간 가속화된 발전을 걸어 왔다.이런 점에서 수렴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집중, 합병과 카르텔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산물이 1990년대의 거대 미디어 제국이다. -18쪽

뉴 미디어가 두 번째 세기로 진입하고 있는 영화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장기적인 시각을 지녀야만 한다. 각각의 매체는 자신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고고학'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의 초기 시절이 미디어 전송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해 선별하고 생략하는 '적절한 사실들'이 무엇인지, 혹은 그 반대로 '막다름'이 '시대에 앞선'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21쪽

영화 산업의 다른 부분은 영(24)화와 텔레비전을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하는 좀 더 전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 한 조각의 영화도 내줄 수 없다 not a single meter for television"는 말이 1960년대에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를테면 독일 영화 제작자들과 극장 소유주들은 관객들이 텔레비전으로 무정하게 발길을 돌려 버릴 것을 두려워했다. 1970년대에는,스크린의 크기와 화면의 질, 넋을 빼앗긴 주목과 정신 산만한 관람, 텔레비전 식품과 리모트컨트롤의 횡포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1980년대 이래로 적어도 유럽에서 이런 관계는 소형스크린을 무시하던 시대에서 180도로 변화하였다. 텔레비전의 직접 투자나 합작 투자, 혹은 판권 사전 구매를 통하지 않고 만들어진 영화는 지난 20년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미국 영화 산업은 수입의 60% 정도를 유료 텔레비전, 케이블 네트워크, 방송국 호근 비디오의 선매를 통해 얻고 있다. (중략) 심지어 박스 오피스에서 실패한 작품들도 케이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테크에서 흥행 만회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영화사들이 '비디오용 영화'를 만드는 데 전문화하고 있다.-24,25쪽

지난 25년 동안 영화가 텔레비전의 가장 명료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채택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 공생 관계에서의 교차로는 또한 다른 길로 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연속극 형식의 에피소드적인 스토리텔링과 열린 종결의 내레이션이다. 연속극 형식은 스타들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1910년대와 1920년대 영화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구조적인 기능은 텔레비전에 의해 더욱 견실히 개발되었다. (중략)1980년대 이래로 주류 할리우드 영화가 교대로 카피한 것은 열린(26)혹은 모호한 결말이었다. <스타워즈>,<인디애나 존스>,<백 투 더 퓨처>와 같은 영화들은 속편, 심지어 전편의 흥행 성공을 추구했다.-26,27쪽

영화와 텔레비전이 서로의 차이를 '해소'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라고 이 논문들이 제기하고 있음에도, 둘이 그럼에도 동거의 방식을 발견하고 있다는 데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세르주 다네는 일전에 영화와 텔레비전을 '오래 된 커플'이라 말했다.(28)/ 생태학적인 은유를 활용해, 우리는 이런 두 미디어가 기생 식물처럼 그리고 형제라기보다는 숙주처럼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중 시장의 출현이 예술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즉 혁신을 중단시키고, 창조성에 재갈을 물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기술적'인 주장은 사실 그 반대를 보여 준다. 돈을 벌 수 있기에, 그리고 거대한 시장이 워크맨, CD 플레이어, 비디오 게임 혹은 대여나 판매용 공 테이프 같은 종종 고도로 혁신적인 생산물과 서비스를 열망하고 준비했기에 시청각 산업은 혁신저긴 경기 부양을 겪을 수 있었다. 소비자 수요의 관점에서 볼 때, 위에서 논의된 수렴과 발산의 힘은 비록 창조성과 예술의 전통저인 개념에 비추어 보면 다소 기이해 보이지만 성장, 창조성, 그리고 재-28,29쪽

능의 전개를 자극했다. / (중략) 소비자 문화를 관통하는 경제적 압력이 초래한 미디어 수렴 뒤편에 놓여진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떠올릴 때, 이것은 더욱 적절한 것이다. 대량 시장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자 하는 충동은 테크놀로지가 실용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필요를 가공해 낼 때만이 성공적인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즉, 나는 물건을 산다, 그러므로 나는 표현한다. 비록 그러한 압력이 제품 표준화와 소수 제작자들의 독점을 초래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도처에서 자신을 표명하는 다양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29,33쪽

이미 암시되고 있듯이, 자동차 생산을 위해 재고를 줄이는 일본의 '적시 생산 시스템 JUST-IN-TIME'이나 베네통의 니트웨어 산업에서의 그 유명한 직접 매출 성향에 근거한 피드백 주문과 유통 시스템처럼,일종의 '포스트포디즘'이 시각 미디어에서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 '소비자'들이 다양성과 소비자 선택을 원하는 것일까? 영화 소비자가 물건이 아니라 경험, 특정한 종류의 '주체화'와 '말걸기'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 보기가 공유와 참여의 제스처인 협상화된 선택과 사회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영화는 다른 대량 시장 산출물과 구별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시공간에 위치해 '극장에 영화 보(33)러 가는 행위'는 수많은 물리적인 조건들에 의존하지만, 상품 혹은 예술품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자기 충족적인 시각 텍스트로서의 영화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컨텍스트'안에 영화를 구체화하는 실천이다. / 영화의 미래 : 수렴, 발산,차이 - 토마스 엘세서 中-33,35쪽

최근의 디지털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가상 현실, 인터랙티브, 원격 통신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더 오래 된 테크놀로지인 스크린이다. 사용자는 눈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잡은 평평한 직사각형의 표면인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가상 공간을 여행하고, 물리적으로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하거나 컴퓨터에 의해 호명되는 환상을 경험할 수 있다. -41쪽

오늘날 컴퓨터 스크린은 정지 이미지, 움직이는 이미지 혹은 텍스트와 같은 온갖 종류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날마다 신문을 읽고, 영화를 보고, 동료들과 소통하고, 일하는 데 스크린을 중요하게 사용한다(비행기 승무원, 슈퍼마켓 종업원, 비서, 엔지니어, 의사, 조종사 등이 사용하는 스크린과 ATM 기계, 슈퍼마켓 계산대, 자동차 계기판의 스크린들, 그리고 컴퓨터 스크린). 이 사회가 스펙터클 사회인지 시뮬레이션 사회인지에 대해 논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사회는 스크린 사회다.-42쪽

100년 전 쯤 새로운 유형의 스크린이 대중화되었다. 나는 그것을 '역동적 스크린 dynamic screen'이라 부를 것이다. 이 새로운 유형은 고전 스크린의 특징을 간직하면서도 시간 경과를 통해 변하는 이미지를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새로운 특징을 첨가했다. 이것이 영화,텔레비전, 비디오 스크린이다. 또한 역동적 스크린은 이미지와 스크린의 특정한 관계, 말하자면 특정한 시각 체제를 만들어 냈다. 이 관계는 이미 고전 스크린에 내재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완전히 표면화된다. 스크린의 이미지가 완벽한 환영과 시각적 충만함을 실현하는 동안, 관객은 의혹을 지연시키고 이미지와 동일시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스크린은 단지 관객의 물리적 공간 내부에 위치한 제한적인 차원의 창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재현된 것에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물리적인 바깥 공간을 무시하면서, 창문 내부에 보여지는 것들에 우리가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회화, 영화,스크린 혹은 텔레비전 스크린에서,단일한 이미지가 스크린을 완전히 채운다는 사실이 이 시각 체제를 가능케 했다. 극장에서 영사되는 이미지가 정확하게 스크린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가 불-43쪽

쾌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환상을 붕괴시키고, 재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정보를 제공하는 중립적인 매체라기보다 차라리 적극적인 매체이다.스크린은 프레임 바깥의 어떤 것이든 사라지게 만들고, 그것을 여과하고,솎아 내고, 대신한다. 비록 그 여과 정도가 영화 관람(영화를 관람할)(43)때 관객은 스크린 공간에 몰입된다)과 텔레비전 시청(여기서 스크린은 더 작고, 불이 켜져 있으며, 시청자들 간의 대화가 허용되고, 시청 행위가 종종 일상적인 다른 활동들과 통합된다)간에 서로 다르지만, 도처에서 이런 관람 체제는 지금까지 안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43,44쪽

주체가 감금된 것이다. 나는 이 이미지를 스크린에 기초한 서구적인 재현 기제의 일반적인 은유로 간주한다. 이런 전통에서는 관람자가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의 몸이 공간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르네상스 단안 원근법에서 현대적인 영화까지, 케플러의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19세기 카메라 루시다까지 몸은 정지된 채로 있어야 한다. -53쪽

영화 이론가들은 이러한 부동성을 영화 제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간주했다. 프리드버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보드리(그는 관객을 플라톤의 동굴에서의 죄수들과 비교했다)에서 무서까지 모든 영화 이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영화는 객석에 자리잡고 있는 관객의 부동성에 의존한다." 장 루이 보드리는 아마도 영화적 환영의 기초로서 부동성을 누구보다 더 강조한 사람일 것이다.-57쪽

보드리는 이 부동성과 감금이 죄수/관객들로 하여(57)금 지각과 재현을 오인하게 만들고, 그 둘이 식별 불가능할 때 유아로 퇴행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드리의 정신 분석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관객의 부동성은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차라리 영화적 쾌락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알베르티의 창문, 뒤러의 원근법 기계,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영화와 같은 스크린에 기반한 이 모든 기제에서 주체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만 한다. 사실 프리드버그가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성에서 이미지의 점진적인 동원은 관객의 점진적인 감금을 수반했다. / 컴퓨터 스크린의 고고학을 향하여 - 레브 마노비치 中-57,58쪽

사람들이 대규모로 영화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지 전자기적(나중에는 광전자적) 저장 기술의 출현 때문이었다.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가 출현하기 훨씬 전에, 재생 기계의 소유권은 상품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잠재적인 소유권을 포함하기 위해 확장되었다. 이것은 경제적인 관점뿐 아니라 문화적 관점, 즉 어떻게 시청각을 취급해야 하는가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전자적 또는 -비디오 디스크의 경우- 광전자적으로 저장된 영화 제작물이 그 때까지 문학적인 텍스트를 위해 지정된 방식, 즉 수용,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이용될 수 있었다. 시청각적 서적화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문학적 정전이라는 의미에서 소프트웨어의 분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 과정의 특성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널리 유행하는 비디오 프로그램과 대량 생산된 영화 상품을 위한 통과역으로서의 VCR의 광범위한 사용에 정면 대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도발하기 위한 것이다. -109쪽

1990년대 이래로, 비록 독신과 핵가족화된 집에서 '텔레비전방'이 이미 완전히 시대 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할지라도, 미래에는 가정 인테리어 디자인에 급진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다. 공간은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전통적인 시청각 미디어에서 파생된 특성이 점유하는 잡종적인 설계, 계획이 될 것이다. -113쪽

앞으로 제품은 양극화될 것이다. 한쪽은 더 실용적이며 소형화되는 이동 통신 기기이다. 다시 말하면 미적 특성은 점점 줄어들고 더 저렴한 가격에 덜 낭비적인 제작물이 생산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정적이고, 고정되고 고도로 개발된 오락 전자 기기와 같은 특별한 제품, 다시 말해 고품질의 특별한 미적 감각을 가진 사치스런 제품이 생산될 것이다. / 텔레비전 시대의 종말, 지그프리트 지린스키 中-114쪽

'카인과 아벨'이라는 제목은 영화와 텔레비전 간의 적대성을 함의하며, 그 사이에는 어떤 타협이나 화해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이런 식의 편견에 맞서, 두 매체 사이의 좀더 복잡한 관계에 주목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사고를 길잡이해 줄 반대편의 신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히브리적이고도 성서적인 기원 신화가 아니라, 가족의 삶을 다룬 그리스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정신 분석이 차용하기도 했던 신화, 곧 아들 오이디푸스와 아버지 라이오스에 관한 신화 말이다. -179쪽

텔레비전은 영화가 갖춘 매력을 필요로 한다. 영화가 우위를 점하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원한다. 즉, 영화가 누리는 문화를 갖추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영화는 텔레비전이 확보해 놓은 시청자들이 필요하며, 텔레비전을 통해 작품을 팔고자 한다.-180쪽

하지만, 받은 게 있으면 주어야 하는 법. 영화는 수 년 동안 텔레비전으로부터 상당량의 배상을 받았다. 잠시나마 엄격하게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교하는 것을 벗어나(여러분이 이미 충분히 그 비교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가 텔레비전으로부터 취한 두 가지 영역이 있다는 점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로, 텔레비전은 영화가 관객에게 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시청자를 세분화했다. 서양문화권에서 일반적인 시청각적 해독력 audio literacy 수준은 불과 20년 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지 안다. 즉, 어떻게 이미지가 취사 선택되는지, 그런 이미지들이 어떻게(일반 견해라고 불리면서)사물과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매체에서만 통용되는 조크에도 익숙해져 있다. 수 년 전만하더라도 영화 관객들을 혼란케 하였을 생략 화법이나 모호한 인물 설정, 건너 뛰기나 불연속적인 서사 등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시청각적 해독력의 덕을 본 것은 다름 아닌 영화였다. -184쪽

이런 사실의 주된 측면 가운데 하나로, 텔레비전이 영화의 방대하고도 뒤죽박죽인 저장고 역할을 해 온 방식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저녁 시간대나 심야 시간대 프로그램 편성은 종종, 앙리 랑글루와의 미치광이 유령이 짜 놓은 것처럼 보이곤 한다. 할리우드에서 네거티브를 보존한 영화들과, 영화 산업에서 파생된 오락물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한데 모인다. 그들 모두는 전파를 통해 텔레비전 화면에 상영되는 영광을 잠시나마 갖게 되었다. 마침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적 화법을 읽어 낼 줄 아는 관객들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텔레비전 덕택이다. -185쪽

텔레비전의 미학이란 특별한 순간의 미학, 직관과 통찰의 미학, 걸러진 감각 영역의 미학이라기보다는 평상의 미학, 세속적인 인간 존재의 미학인 것이다.(188)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견해에 좀더 다가가 볼 수 있다. 영화는 특별한 공간이다. 우리의 접근이 제한된다. 그 곳은 우리의 공간이 아니라, 통제가 가해지는 공공의 공간이다. 우리는 정해진 규칙- 돈을 지불하고, 상영 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하는 식의- 을 따르면서 입장하고, 극장 안에서도 여러 규칙들에 따라 행동할 것에 동의한다. 유럽의 경우,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잡담하지 않고 영화를 봐야 하지만, 이런 규칙들은 영화가 상영되는 특정 문화권에 따라 제각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이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과정은 정말이지 신성함 sacred 그 자체이다. 물론 그 스스로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적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규칙과 의례를 집단적으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개인적인 감상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영화는 이런 특별한 공간에서 요란하게 상(189)영되는 것이다.(190)-188,189쪽

반대로, 텔레비전은 전적으로 다른 공간을 차지한다. 신성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 공간, 텔레비전은 바로 우리 사회와 맞닿아 있다. (중략)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의 정상적인 인간 관계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된다. 그들은 요즘 세상사를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신문 기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지 못한다.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굴러간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 바로 텔레비전의 기본적이거도 중심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다. -190쪽

텔레비전을 둘러싼 어떠한 의례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건 일반적인 사실이다.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볼 때 극장에 있는 것처럼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예를 들면 조명을 어둡게 하고, 팝콘을 옆에 끼고,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벌인다는 심정으로, 특정한 시간에 감상하는 식), 텔레비전이 이런 식의 의식을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거기엔 어떠한 신성함도 없이게, 그만큼 판타지 속으로 빠져들 여지는 적다. 텔레비전은 생활 속에서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지,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190)성하다기보다는 세속적이다. / 영화와 텔레비전 :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존 엘리스 中-190쪽

그럼 미디어 사가들의 견해와 정면으로 맞서는 그 딜레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초기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초기 영화들에 관한 연구는 카메라 옵스큐라, 환등기, 사진 같은 장치들이 불가피하게 영화 카메라와 텔레비전으로 이끌리게 되었다는 오랜 계보학에 커다란 의문을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디지털 미디어를 위한 여지를 만들기 위해('영상 언어의 진화'나 '인류의 오랜 꿈의 실현'이라는 노선을 따르는) 새로운 목적론을 찾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는 또 테크놀로지적인 특수성을 하나의 매체를 정의하는 기준인 그 매체의 기구apparatus나 장치 disposif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295)으로 상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장치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예를 들어, '기계론적 모방'의 심급들을) 암시한다. 오직 다양한 유형을 가지는 사진 영상과의 친족적인 유사성만이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변화들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95,296쪽

블록버스터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듯 무엇보다도 관심, 즉 고인지 가치 high recognition value를 산출하며 시청각적 매체 시장에서, 출판과 음반 산업에서, '베스트 셀러'와 '톱 10'또는 '인기 차트'로 더 잘 알려진 짧은 이용 수명 exploitation spans이란 원칙을 포함하는 마케팅 개념이다. -297쪽

나는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가족적 유사함을 가진 형제라는 은유, 즉 디지털에게 막 종식되기 직적인 반목하는 두 형제들이란 은유로 이 논의를 시작했다. 나는 수렴이라는 또 하나의 질서로 이 모두를 결론짓고자 한다. 이 또 하나의 질서란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 두는 듯 보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가 결과하는 것들의 질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디지터른 그 자체로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오히려 현 시점에서 그리고 당분간은 영화와 텔레비전을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매체들에 대래 더욱 잘 알게 해 주는 매체이다. /디지털 영화 : 전송,이벤트, 시간 - 토마스 엘세서 中-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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