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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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내세우는 중립성의 신화가,실제로는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규범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세속주의 이외에 미국 내외의 관용 담론을 연결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자유주의 관용 담론의 중핵에 위치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이다.도덕적 자율성의 관념은 미국의 안팎 모두에서 관용할 수 있는 주체와 관용 불가능한 주체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자유주의와 문명 담론을 은밀히 결합시킨다.-27쪽

근대 초기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오늘날 인종주의적 법률의 입법화를 저지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관용 담론이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하지만 역으로 관용에 대한 호소가 반드시 폭력과 종속을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예컨대, 오늘날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 평등의 완전한 실현 대신에 이들에 대한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동성애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항하여 이들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후자가 관용을 잔인함과 폭력,공적인 배제와 대립시키는 데 반해, 전자는 관용과 평등을 대립시키년서,관용을 통해 동성애자의 종속적인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33쪽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것들에 대한 행동이나 발언을 참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그것은 사회적,정치적,종교적,문화적 규범들을 부과하는 행위이며,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하는 일인 동시에,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하는 기제이다.더 나아가 정치적 담론으로서 관용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생산 그 자체에 관여하며,문화를 종족 혹은 인종과 뒤섞고,믿음과 신념의 문제를 유전적 형질과 결합시키는 데 일조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탈정치화함으로써,자연스럽게 정체성 그 자체를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한다.-38쪽

탈정치화의 공통된 방식 중 하나는,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40)어, 그 현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현상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이다.-40,41쪽

두 번째 탈정치화 방식도 존재한다.이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정치적 언어를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들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관용으로 대체될 때,타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존중의 문제로 대체될 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통들이 단순히 차이와 공격성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고통이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여겨질 때, 정치적 투쟁과 변혁의 문제는 특정한 행동과 태도,인정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접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긴 하겠지만,불평등과 배제 같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관용을 제시하는 것은,정치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물화하는 것일 뿐더러, 정의의 추구를 단순한 감수성 훈련 혹은 로티가 태도의 개선이라 이름붙인 해결책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정의의 추구는 이제 태도와 행실을 치료하고 개선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42쪽

정리하자면 오늘날 "정치의 문화화"는 비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삶 전체를 소위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며,이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문화와 무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논리 속에서,관용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의 일부로서 문화적 영역-즉, 섹슈얼리티에서 종족성에(53)이르기까지 모든 본질화된 정체성들을 포괄하는 영역이자 현대 자유주의 체제내에서 차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영역-에 적용된다.즉, 관용은("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스스로를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충하는 도구로,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3,5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요소를 주인 안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그 대상의 타자성otherness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바로 이 점이 관용을 한편으로는 동화,흡수와 다른 한편으(62)로는 배제,부정과 구분시켜준다.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채 남아 있다.관용의 대상은 주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거나 주인 속으로 용해되지 않기 때문에,이것이 가진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특성은,주인의 신체 내부에서 계속 유지된다.-62,63쪽

관용이 차이에 대한 적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관리할 뿐인 한, 관용은 각종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다.관용이 무엇에든 적용되는 이데올로기이자 통치의 요소가 된 오늘날,이 심리적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오늘날 관용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주변적 대상으로 표지됨과 함께, 시민과 비시민 혹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자리 잡게 된다.이와는 반대로,관용을 실천하도록 종용받는 이들은,시민윤리와 평화,진보의 이름하에,적개심과 분노를 억눌러야만 한다.-6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관용 대상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정치화된 정체성이면 추구하기 마련인 인식론적,정치적 입장과 충돌할 뿐 아니라,"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비표지된 문화,종족,인종,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계층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 속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와 원칙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88쪽

근대적 주체 형성은,한편으로는 표지된 주체의 차이를 존재론화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이 표지된 주체가 유사한 주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민족-국가의 추상적인 시민권 담론이,여타의 다양한 주체 생산 담론들-즉 기독교인,부르주아,백인,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존재들을 분류하고 규제하는 담론들-과 긴밀히 결합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배제되어 온 이들을 추상적 시민권 담론을 통해 내부로 편입시키는 과정-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일탈적 성격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과정-은, 곧바로 이러한 지위를 재기입하기 위한 좀 더 강력해진 규제와 표지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124쪽

타자의 종속과 비체화abjection가 이러한 종속의 사사화나 경제 영역에서의 종속의 제도화를 통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즉 더욱 완전한 평등이 시급한 문제가 되는 곳에서,관용은 종속과 배제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소환된다.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따라서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전자의 종속적 차이는 이성애적 사회 질서와 가족 질서에 의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130쪽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통치는 만약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저 비생산적으로 남아 있었을,개인과 대중 그리고 초국적인 신체의 힘들을 이용하고 조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더 나아가 주체들의 욕구와 능력,욕망 역시 통치성에 의해 관리되고 지도된다.따라서 통치는 푸코가 "행위의 지도"라고 부른 것,즉 개인의 신체와 사회적 신체,정치적 신체의 행위를 지휘하고 지도하는 것과 관련된다.둘째,행위의 지도로서 통치성은,개인에서부터 인구,신체와 정신의 특정한 부분에서부터 윤리와 노동,시민적 실천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지점을 통해 작동한다.셋째,통치성은 법이나 여타의 가시적인 권력에 한정되지 않으며,광범위하게 펼쳐진 비가시적 권력들을 통해 작동한다.푸코는 사목권력을 통치성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부는 전형적인 예로 보았다.-140쪽

넷째,통치성은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국가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담론에 침투해,이러한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여기에는 범죄학,교육학,심리학,정신의학,인구학,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 담론과 종교 담론,그리고 여타의 대중 담론이 포함된다.이와 같이 통치성은 집중화나 단일화,체계화에 기대는 것이 아(140)니라,근대 사회에 분산된 광범위한 권력과 지식을 통해 작동한다.-140,141쪽

정치적 갈등의 원인을 불관용에서 찾는 관용 담론은,불평등과 지배 같은 문제를 개인적인 편견과 증오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화하고,그 원인을 특정한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탈정치적 접근이다.개인과 그 태도가 갈등의 이유로 제시되자마자,권력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진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의 원인은 편견을 가진 개인이고,관용적 개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233쪽

주체나 사회의 법칙이 문화와 종교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는 이제 유기체적 사회와 동일시되며,자율적 개인의 등장은 이러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것으로 간주된다.여기서 사실상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란,바로 문화와 종교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극복 과정을 거친 자유주의 주체에게 문화란,먹을 거리,의복,음악,라이프스타일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과거 권력으로서의 문화는,이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로 대체된다.자유주의 사회에서 사적 공간이 "비정한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안식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개인을 억압하던 문화는 이제 개인의 즐거움과 안식의 원천으로 변화한다.과거 지배와 비합리성의 원천이었던 종교 역시, 이제 개인의 위안과 자기 충족,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한 주체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변형되어야 한다.-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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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절판


사전들과 아카데믹한 글들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특정한 학문적 용어들이,마치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레 살롱의 총애를 받게 되는 노처녀처럼 갑자기 시대의 너른 들판으로 뛰쳐 나와 공론에 부쳐지고,광고와 텔레비전,신문 등에 실리고,심지어 정부의 담화에까지 언급되기에 이르는 행운 또는 불행을 갖는다.희랍어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윤리라는 용어,또는 아리스토텔레스(유명한 베스트셀러인 <니코마코스 윤리학>!)를 언급하는 철학에서의 윤리학 강의는 오늘날 무대의 조명을 한몸에 받고 있다.-7쪽

윤리는 개인적이건 집합적이건 간에 한 주체의 실천들에 대한 판단 원리이다.-8쪽

오늘날 '윤리로의 회귀'-물론 윤리라는 단어의 의미가 거기에서 엄격하게 사용되지는 않지만 - 는 헤겔(결정의 윤리)보다는 칸트(판단의 윤리)쪽에 더 가깝다. 사실상 오늘의 윤리는 '벌어지고 있는 것'에 관계하는 원리,즉 역사적 상황들(인권의 윤리),기술-과학적 상황들(생명체의 윤리,생명 윤리),'사회적'상황들(함께 모여 있음의 윤리),매체적 상황들(의사 소통의 윤리)등에 관계하는 우리의 논평들에 대한 어렴풋한 조절이다. 논평등과 의견들의 이러한 규범은 제도들에 기대어 있고,자기 고유한 권위를 갖는다. 즉 국가에 의해 임명되는 '국립윤리위원회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인권의 윤리'라는 이름하에 해외 파병을 행하기도 한다. -8쪽

사실상 '인간의 죽음'이라는 테마 체계가 반란,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불만족,상황들의 현실 속으로의 완전한 개입과 부합하는 반면,윤리와 인권이라는 테마는 서양 부자들의 만족에 찬 이기주의,위력의 행사,광고에 부합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사실이 바로 그러하다.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해명은 '윤리적'정향의 토대들에 대한 검토를 거칠 것을 요구한다.-14쪽

이때 윤리란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왜냐하면 윤리의 현대적 용법에 있어서는 악-또는 부정적인 것-이 우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야만적인 것에 대한 합의를 전제한다)이자 동시에 판단의 궁극적 원리, 특히 정치적 판단의 궁극적 원리로 간주한다.이때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이다.-15쪽

정치는 윤리에 종속된다. 사물을 이처럼 바라보는 시각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정황들에 대한 구경꾼의 동정적이며 분노에 찬 판단이기 때문이다.-16쪽

윤리적 '합의'가 악에 대한 식별에 기초한다면,선의 정립적 관념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려는 모든 시도는,게다가 더욱이 인간을 그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악 그 자체의 진정한 원천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21쪽

악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으로 인해 윤리는 상황들의 개별성을 사고할 수 없다.-22쪽

사실상 윤리적 이데올로기하의 관료적 의학은 무차별적 또는 통계적 피해자로서 '환자들'을 필요로 하지만, 실질적이고 개별적인 요구 상황에 의해 곧장 포화된다.그 결과 '행정적이고''책임 있으며''윤리적인'의학은,'프랑스 의료 체계'가 어떠한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고,또 재정과 여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어떠한 환자들을 킨샤사의 빈민굴 속에서 죽어가도록 돌려보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타락 상태로 환원된다.-24쪽

문제는 '차이의 존중'과 인권의 윤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차이들에 대한 존중은, 그 차이들이 그러한 정체성(결국은 부유한,그러나 명확히 기울어져 가는 '서양'의 정체성에 불과한)에 제법 동질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34쪽

우리는 '윤리'이데올로기와 그 사회화된 변이들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 '윤리'의 이데올로기의 사회화된 변이들이란 인권의 교리, 인간에 대한 피해자적 관점, 인도주의적 개입,생명 윤리,일정한 형태가 없는 '민주주의주의',차이의 윤리, 문화적 상대주의, 도덕적인 이국 취향 등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러한 지적 경향들이 기껏해야 고대적인 도덕적,종교적 강론들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 보수주의와 죽음의 충동의 위협적인 혼합이라는 것을 드러냈다.-107쪽

진리들의 윤리학은 세계를 권리의 추상적 지배하에 예속시키려고 하지도 않으며, 외적이고 근본적인 악에 대해 투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진리들의 윤리학은 진리들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충실성을 통해 악-진리들의 이면 또는 어두운 면으로 파악된 악-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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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명령 동문선 현대신서 48
포르셍연구소 지음, 우강택 옮김 / 동문선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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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적이고 미래 전망적인 제도로서 경제주의는 효과를 나타내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지닌,우리는 '도덕에 대한 자각의 시대'로 들어왔다.도덕욕은 매스 미디어와 여론의 결합된 압력뿐만 아니라,사업 세계에 규칙을 도입하려는 필요성에 답하기 위해서 나타나고 있다.(도덕 사업)-38쪽

제품 판매가 더 이상 유일한 종극 목적이 아니며, 기업은 동등하게 도덕과 국민의 주체이어야 한다.자신의 환경 안에서 기업은 점차 자신의 불투명성을 버리고,점점 더 국민과 책임자로서 위치하게 되고,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고 선언하며,사회적 사명(예를 들어 다논)(43)(과 건강을 위한 다논재단)을 이어받는다. 기업은 계약권 부여에 있어 정당과의 관계 쇄신 의지를 투명한 출자와 일반적으로 자신의 활동에 더 큰 공명정대를 드러낸다.-43,44쪽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소비에 반해서 제품 선택에 개인의 진실한 참여의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파급 효과를 알아보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 관심을 가진 시민의 책임 있는 소비를 위해서, 시민 제품의 좋은 선택과 구매의 도덕적 가치를 위한 소비자의 열망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51쪽

이 '진실성'의 추구는 거짓의 껍질에서 해방된 '투명한'제품의 유행에서 재발견되고,이 제품은 자신의 투명함에서 안전하게 순수의 상징, 즐거움의 약속을 보게 한다.-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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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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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심리 단위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정은 문화 단위이자 사회 단위이다. 곧 감정이 표현되는 장소는 구체적 , 즉각적 관계이되 항상 문화적,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관계이며, 이로써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됨 personhood의 문화 규정들을 구현enactment하게 된다. 요약해보자면, 감정이란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15)관계들이며, 감정이 에너지를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덕분이다(감정이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이 반성 이전pre-reflexive상태, 때로 반의식semi-conscious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감정이 행동의 여러 측면 중에 고도로 내면화되어 있고 비반성적인 측면인 이유는,감정에 문화와 사회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5,16쪽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행동을 "안"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학적 사회학은 행동의 감정적 색조에, 그리고 실제로 무엇이 행동을 추동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16쪽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 주장을 펴겠다. 첫째, 자본주의가 형성된 과정은 고도로 특화된 모종의 감정 문화가 형성된 과정과 궤를 같이 했다. 둘째, 자본주의의 여러 차원 중에서 바로 이 감정의 차원에 초점을 두게 되면, 자본주의의 사회조직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7쪽

실용서는 1920년대에 영화와 함께 문화산업으로 부상했고, 나중에는 심리학의 개념들을 유포하고 감정 규범들을 설명하는 가장 튼튼한 발판이 된다. 실용서는 여러 가지 요건들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야만 한다. 첫째, 실용서란 일반적인 어법을 사용해야 한다.다시 말해 법칙 비슷한 언어로 법칙 비슷한 명제를 진술해야 한다. 그래야 실용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다양한 내용의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일정하게 소비되는 상품이 될 수 있다. 셋째, 초 윤리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나 사회관계에(31)서의 처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중립적 관점을 제공해야 한다.그래야 가치와 시각을 달리하는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다.끝으로 신용할 수 있는 적법한 출처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31쪽

엘튼 마요는 두 가지 점에서 경영이론에 혁명을 일으켰다. 첫째, 자아됨이라는 윤리의 언어를 심리학이라는 냉정한 학문의 용어로 개조했고, 둘째, 한창 기세등등하던 합리성이라는 엔지니어들의 수사를 "인간관계"라는 새로운 어휘로 대체했다. -40쪽

많은 사회학자들은 기업에서 심리학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을 새로운 노동 통제 방식, 곧 교묘하고 따라서 더 강력한 통제방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심리학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 이유는, 그것이 권력 관계였던 노동자-경영자 관계를 민주화하고,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인성이 사회적,경영적 성공의 열쇠라는 새로운 믿음을 주입했기 때문이다.-45쪽

언어학적 소통모델은 (문화도구지아 문화 레퍼토리로서)행위주체들이 외적 관계(동등한 존재로 간주되며 동일한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및 내적 관계(외적 관계들의 조율에 필요한 복잡한 인지 장치 및 감정 장치)를 조율하게 해준다는 용도를 갖는다. 요컨대 "소통"이란 자기관리의 테크놀로지로서, 언어와 올바른 감정관리에 광범위하게 의존하며, 대인적 감정inter-emotion의 조율과 내부적 감정intra-emotion의 조율을 모두 포함하는 감정 조율의 엔지니어링을 목표로 삼는다.-50쪽

감정 자본주의는 여러 감정 문화들을 재배치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적이 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들을 좀 더 도구적 행위에 종속되게 만들었다.-55쪽

친밀성의 문화 모델에는 20세기에 여성적 자아를 구성한 두 가지(곧 심리학과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문화 설득 담론)의 핵심 동기들과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 곧 근대적 친밀성의 이상은 평등, 공정,중립적 절차,감정 소통,섹슈얼리티, 감춰진 감정의 극복과 표현, 언어적 자기표현의 중시 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65쪽

치료학이라는 설득 담론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행복의 문제를 의학적 은유를 동원해서 표현했으며 평범한 삶들을 병리화했다.(94) / 건강한 관계는 친밀한 관계였고, 친밀성은 건강함이었다. 이렇듯 친밀성 개념이 건강한 관계의 규범 내지 기준으로 설정된 후에는, 친밀성의 부재가 새로운 치료학적 자아 내러티브의 편성 틀이 될 수 있었다. 곧 이런 내러티브에 따르면, 친밀성이 없는 사람은 이제 감정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친밀성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94,96쪽

감정 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병리의 영역을 구축,확대하는 것과 감정건강의 영역을 상품화하는 것이 하나이고,이른바 감정능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능력에 대한 접근권을 규제하는 것이 또 하나다. 곧 문화 장이 문화능력-문화물과 관계할 때 내가 상층계급에 의해 승인된 고급문화에 정통해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 장은 감정능력-심리학자들이 정의,판촉하는 감정양식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규제된다.-126쪽

치료 내러티브는 특화된 시장을 창출한다. 시청자는 잠재적 환자 겸 소비자로 정의된다. 치료학관련 직업,출판 산업,텔레비전 토크쇼는 "너무 사랑하는"사람(105)들 혹은 "옛사랑을 못 잊는"사람들을 소비자 겸 환자로 구성한다.둘째, 치료 내러티브는 감정-이 경우에는 죄의식-을 공적 대상, 곧 발현의 대상, 토론의 대상, 논쟁의 대상으로 만든다. 주체는 "사적"감정들을 구성,발현함으로써 공적 영역에 참여한다. 셋째,내가 내 인생의 이야기를 치료 내러티브로 다시쓰기 하는 원동력은 바로 이야기의 목표이다.-105쪽

이렇듯 감정지능은 자아수행을 경제적 수행의 핵심으로 하는 경제에서 요구되는 능력일 뿐 아니라 심리학자들의 강도 높은 전문화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심리학자들은 감정 생활을 정의하고 규제할 자격을 독점해왔으며, 이로써 감정생활을 장악하고 관리하고 계량하기 위한 새로운 척도를 세워왔다.-131쪽

마이클 왈처나 수전 오킨 같은 페(133)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한 것처럼,정의의 이론은 각각의 생활 영역들의 가치를 설명하고 존중해야 하며, 시장에서 중요한 재화들과 가정에서 중요한 재화들을 구분해야 한다.우리가 가족과 사랑을 자율적인 의미 및 행동 영역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이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윤리적 재화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아와 행복의 내용이다-로 분석할 수 있게 된다. -133,134쪽

다시 말해 부르디외의 모델을 거꾸로 적용할 때 우리는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특정한 감정 아비투스 쪽으로 사회화되는 방식들, 그리고 특정한 감정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이 친밀한 관계의 영역에서 특정한 형태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행복,웰빙)에 도달하는 방식들을 탐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친밀성과 우정이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분배되고 할당되는 방식들을 탐구할 수 있다.-134쪽

전통적인 비판론, 특히 문화연구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비판론은 이른바 "순수성에 대한 갈망"을 그 특징으로 한다.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문화를 그토록 중시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문화를 아름다움,도덕성,정치의 이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발견해야 하는)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순수한 비판론은 문화를 정치 영역 안에 포섭하는데, 그러다 보니 순수한 비판론이 결국 하는 일은 문화가 어떻게 해방의 수단이 되거나 억압의 수단이 되는지, 문화가 어떻게 "쓰레기"를 만들어내거나 "보물"을 만들어내는지 그 방법들을 열거하는 일이 되어왔다.이러한 입장은 우리의 문화 분석을 자칫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175쪽

문화를 정치로 포섭하려 할 때 발생하는 마지막 문제는 비평가가 신의 자리와도 같은 머나먼 자리로 쫓겨나게 된다는 데 있다. 문화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이러한 비평적 거리는 점점 그 근거를 잃고 있다. 아도르노가 재즈를 거부했던 것도 문화의 토양인 구체적(178)경험과 의미로부터의 급진적(그리고 잘못된)거리두기의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비판론이 위력을 발휘하는 때는 신적인 순수성을 버리고 평범한 작용주체들의 구체적 문화 실천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모색할 때이다.그러다 보면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비평가는 고도로 상품화된 전장을 비판하면서도 비평가 자신도 (선택이든 필연이든)전장 안에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런 만큼 순수성은 더욱 훼손돼야 한다.19세기 지식인은 자본주의가 미치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물러서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오늘날의 비판론 가운데 자본주의 제도들 및 기구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178,179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판론을 포기하고 온갖 사회 영역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맞서고자 하는 시장 세력 못지않은 교묘한 해석 전략들을 계발해야 한다. 비판론의 힘은 대상에 대한 친밀한 이해에서 나온다. 이는 비판론을 없애자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오히려 우리는 비판론이 필요하다. 요컨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비판론은 문화가 일정한 정치적 아젠다(평등,해방,가시화)를 어떻게 증진하는가(혹은 증진하지 못하는가)를 "열거"하는 비판론이 아니다.-179쪽

약속날짜를 합리적으로 결정하려는 이 환자를 나는 초합리적 바보hyperrational fool라고 부르겠다. 초합리적 바보란 판단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선택을 내리는 능력이 비용편익 분석(통제를 벗어나는 비교 대상들을 합리적으로 계량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손상되어 있는 사람을 뜻한다.-211쪽

지(212)금의 문화는 판타지를 끊임없이 엔지니어링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는 전에 없이 풍요롭고 다양하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는 판타지를 점점 현실에서 유리시켜 초합리적 시장 세계(시장과 관련된 선택 및 정보로 구성되는 세계)내부에서 조직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판타지가 오히려 빈약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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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절판


플리커 같은 도구들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은 그룹 활동의 구질서를 뒤집어 놓는다."모인 다음 공유하자"에서 "공유한 다음 모이자"로 바꿔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서로를 찾아낸 다음 인연을 이어 갈 수 있었다.-46쪽

인터넷이 제시하는 미래상은 출판에서 대중의 아마추어화가 일어나 "이런 걸 왜 출판하지?"에서 "왜 안 되는데?"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시대다.-71쪽

언론 조직이 어느 한 종류에서 다른 종류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뉴스의 개념 자체가 바뀌는 변화다. 조직의 특권이던 뉴스가 정식 조직, 비공식 집단, 개인이 한데 섞여 있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일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76쪽

미디어 환경에 국한해 보자면 개인 커뮤니케이션 영역과 언론의 영역이 서로 겹쳐지고 있다.-92쪽

UGC는 단순히 일반인이 워드프로세서나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 같은 창작용 도구를 이용해 만든 결과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런 창작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유포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들,즉 플리커, 위키피디아,블로그 같은 재창작용 도구re-creative tools 또한 이용할 수 있어야 UGC다.-95쪽

우선 걸러 낸 다음 출판하는 '선여과 후출판'방식은 그것의 장점이야 어떻은 미디어의 희소성에 의존하는데, 문제는 그 희소성이 이제 과거 유물이 돼 버렸다는 사실이다. 소셜 미디어가 확산되면 '선출판 후여과'방식만이 유일하게 현실성 있는 시스템이 된다. 이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와 방송 미디어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선이 사라졌다.-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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