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을 시각 세계의 남용이나, 이미지들의 대량유포 기술의 산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으로 번역된 세계관이다. 그것은 대상화된 세계관이다.-11쪽
스펙타클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반박 불가능하고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겉으로 보인다"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수동적 수용인데, 실은 스펙타클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겉보이기 방식에 의해서, 즉 외양의 독점에 의해서, 이같은 수동적 수용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 -14쪽
스펙타클은, 경제가 살아있는 인간들을 완전히 예속시키는 정도만큼, 살아있는 인간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킨다. 스펙타클은 자신을 위해 발전하는 경제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생산의 참된 반영이며, 생산자들의 허위적인 대상화이다.-15쪽
스펙타클은 활동을 관찰이라는 범주의 견지에서 파악하고자 한 서구 철학체계가 지닌 모든 취약점들을 상속받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이 사유로부터 자라나온 정밀한 기술적 합리성의 끊임없는 확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지 못한 채, 현실을 철학화한다. 각 개인의 구체적 삶은 사변적인 우주로 격하되었다.-17쪽
스펙타클이 번쩍거리며 다양하게 바뀌는 중에도, 진부함이 현대 사회를 지배한다. 이것은 전세계에 걸쳐서, 그리고 상품소비의 발전 덕분에 선택할 만한 역할들과 대상들이 증가한 듯이 보이는 모든 지점에서 그러하다. 종교 및 가족의 잔존물들(계급권력의 주요 세습유물들)과 그것들에 의해 보장되는 도덕적 억압은, 이 세계의 즐거움이 긍정될 때에는 언제든지 서로 한 몸이 된다.- 이 세계는 억압적인 사이비 즐거움에 불과한 것이 된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점잖은 순응도, 순전히 스펙타클적인 반란과 한 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 풍요가 생산을 확대시켜 이같은 원재료들을 가공하는 과정에 이르게 되면 곧바로, 불만족 그 자체도 상품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반영한다.-42쪽
유명인사 소비하기는 각기 다른 유형의 개성들을 피상적으로 대변하고, 이런 각 유형들이 소비의 총체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갖고 있으며, 거기서 유사한 행복을 찾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자신의 인격 속에 체제 자체를 구현하고 있다고 칭송받는 인물들은 그들의 실제 모습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사소한 개인적 삶의 현실을 은폐함으로써 위인이 된 것이고,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44~45쪽
풍요한 소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주로 청년과 기성세대 사이의 스펙타클적 대립이 허위적인 역할들 중에서도 맨앞에 등장한다. 이것이 허위적인 까닭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의 기성세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것에 대한 변혁자로서의 젊음이란 것도 현재 청년기에 있는 사람들의 /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의 역동성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지배하고, 사물들이 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들이 서로 대결하고 서로를 대체한다.-45~46쪽
헤겔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변혁을 해석해야만 했다. 그러나 헤겔은 그 변혁을 단지 해석하기만 함으로써, 철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형성하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유는 아직 항상 너무 늦게 등장하는, 사실을 뒤쫓아가며 그 사실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오로지 사유 속에서만 분리를 초월하였다. 모든 현실의 의미는 그 역사적 완성에 의존하는 동시에 이 의미는 현실이 자신을 역사의 완성으로 만드는 동안 드러난다는 역설은, 17세기와 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을 사유한 이들이 헤겔철학에서 이들 혁명의 결과와 화해만을 찾아내려 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유래한다.-57쪽
이데올로기가, 절대권력의 소유를 통해 절대적 존재가 된 후, 부분적 지식에서 벗어나 전체주의적 허위성으로 바뀔 때, 역사에 대한 사유는 역사 자체가, 심지어 가장 경험적인 지식의 차원에서조차, 더이상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된다. 전체주의 관료제 사회는 영속하는 현재 속에 사는데, 이 중단없는 현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관료제를 위해 관료제의 경찰이 접근할 수 있는 장소로만 존재한다. 나폴레옹이 이미 천명한 적이 있는 "기억의 에너지를 지도하는 통치자"라는 웅대한 기획은 과거의 부단한 조작, 즉 그 의미와 사실 자체 양자 모두의 조작에서 총체적으로 구현된다.-88쪽
파시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계엄상태이며, 이를 수단으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를 사회관리에 대규모로 개입시킴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또한 자신에게 미봉적인 합리화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같은 합리화 자체는 그 수단들이 엄청나게 비합리적이라는 부담을 지고 있다. 비록 파시즘이, 공황으로 인해 파산하거나 사회주의 혁명의 무력감에 기만당한 프티 부르주아지와 실업자들을 재규합함으로써, 이미 보수화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거점들(가족, 재산권, 도덕질서,국가)의 방어를 돕고 있긴 하지만, 파시즘 자체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즉, 인종,혈통, 지도자 등의 케케묵은 사이비 가치들이 규정하는 특정 공동체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신화의 폭력적 재생이 그것이다. 파시즘은 기술적으로 장비를 갖춘 복고주의이다. -89쪽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겪은 개별적인 악에서는 물론 개별적인 악의 교정에서도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악들의 교정에서도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삶의 변두리로 추방되었다는 절대적 악 속에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97~98쪽
시간의 사회적 전유, 즉 인간노동에 의한 인간의 생산은 계급들로 분할된 사회 내에서 발전한다. 순환적 시간의 사회가 처해 있는 빈궁함 너머에 확립되어 있는 권력, 즉 사회적 노동을 조직하여 제한된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적 시간의 조직에서 나오는 시간 잉여가치도 수탈한다. 즉, 그 계급은 살아있는 것들의 불가역적 시간도 독점한다.-108쪽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현대의 경제적 생존의 소비시간이자, 증대된 생존의 소비시간으로, 이 시간 속에서 나날의 삶은 계속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자연질서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 속에서 발전된 사이비 자연에 속박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간은 자연스럽게 전산업사회의 생존을 조정했던 고대의 순환적 리듬을 재구축한다.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순환시간의 자연적 잔존물에 의지하며 아울러 그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동질적인 조합들, 즉 밤과 낮, 노동과 주말 휴식, 휴가의 정기적 반복을 편재한다. -127쪽
집중된 자본주의는, 가장 발달한 부문의 경우, 방향을 "완전히 구색을 갖춘" 시간 블럭들을 판매하는 쪽으로 정한다. 그리고 블럭 각각은 많은 다양한 상품들을 통합하는 단일한 통일된 상품이다. "서비스"와 여가가 팽창하는 경제에서, 이것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계산된 지불의 정식을 낳는다. 즉, 스펙타클적 환경, 휴가의 집단적인 사이비 대체, 예약을 통한 문화적 소비, 그리고 "열정적인 대화들"과 "명사와의 만남"이라는 형태의 사교성 자체의 판매등이다. 이런 종류의 스펙타클적 상품은, 오로지 그것에 상응하는 현실들의 심화된 빈곤때문에 유통될 수 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마치 신용으로 지불될 수 있음으로써 현대화된 판매기법의 시험적 품목에 적합한 것이 분명한 한 것과 같다.-128쪽
소비성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좁은 의미로는 이미지들의 소비 시간으로서, 그리고 넓은 의미로는 시간소비의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시간이다. 이미지 소비의 시간, 즉 모든 상품들의 매개체는 불가분 스펙타클의 각종 수단이 힘을 쏟는 장이며, 또 그것들의 목표이며, 모든 구체적 소비의 장소와 그것의 주요형태이기도 하다. 자동차의 속도든 건조된 수프의 활용이든 어느 것에서든, 현대 사회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시간절약은, 미국인구의 경우에는 TV의 단순시청이 하루 평균 3시간부터 6시간을 점하고 있다는 / 사실로 구체적으로 번역된다. 시간소비의 사회적 이미지는 모든 스펙타클적 상품처럼, 여가와 휴가의 계기들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의상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되는 계기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지배된다. 여기서 이 상품은 명시적으로 현실적 삶의 계기로 제시되며, 중요한 점은 그것의 순환적 복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을 위해 마련된 계기들에서조차, 스펙타클은 여전히 더욱 더 강도높은 것이 되면서 관망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진정한 삶으로 표상되었던 모든 것은 단순히 더 진정으로 스펙타클적인 삶으로 드러난다. -128~129쪽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역사를 포기하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허위적인 시각의식이다. -131쪽
관광, 즉 소비라고 간주되는 인간의 유통, 상품유통의 부산물은, 근본을 보면, 이미 진부화된 것을 관람하러 가는 여가활동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장소들로 가는 것을 담당하는 경제조직은 이 / 미 그 자체로 장소들의 등가성에 대한 보증이다. 여행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한 바로 그 동일한 현대화는 또한 그것으로부터 공간의 현실성을 제거했다. 169번 : 환경의 모든 것을 조형하는 사회는 바로 그 자신의 영토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 이같은 과제들의 집적의 공고한 기반을 발전시켜 왔다. 도시주의는 자본주의가 자연환경과 인간환경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논리적으로는 절대적인 지배로 발전하면서 이제 자본주의는 공간의 총체성을 그 자신의 틀 속에서 재창조할 수 있고 재창조해야만 한다. -170번- : 도시주의에 의해 삶의 가시적인 동결의 형태로 충족되는 그 자본주의적 욕구는 헤겔적인 용어로서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의 쉼없는 생성"에 대한 "공간의 평화로운 공존"의 절대적 지배로 표현될 수 있다. -136~137쪽
"농촌은 정확한 모순, 즉 고립과 분리를 보여준다"(독일 이데올로기)도시주의는 도시를 파괴하고 다시 사이비 농촌을 재건하지만, 그 사이비 농촌은 그 역사적 도시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전받았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는 물론이고 옛 농촌의 자연적 관계 또한 결여하고 있다. 새로운 인조농민들이 오늘날의 "조직화된 영토"안에서 주택과 스펙타클적 통제의 조건에 의해 다시 창조되고 있다. 늘상 농민들로 하여금 독립적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했고 창조적인 역사적 세력임을 자임하지도 못하게 했던 그 산재성과 협소성이 오늘날 또다시 생산자들의 특성이 되고 있다.(중략) 기술공학적 사이비 농민들로 구성되는 "신도시들"은 풍경에다 자신들이 입지하고 있는 역사적 시간과의 결렬을 뚜렷하게 새겨넣는다. 따라서 그들의 모토는 "여기서는 언제까지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역사적 부재의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풍경을 꾸미기 시작하는 것은 도시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역사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142쪽
스펙타클이라는 비판적 개념은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사항을 설명하고 추상적으로 부인하는 사회학적 및 정치적 수사학의 케케묵은 알맹이 없는 공식으로 속화될 수 있고, 그리하여 스펙터클적 체계를 방어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제 명백한 점은 어떤 사유도 현존하는 스펙타클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펙타클을 둘러싸고 현재 존재하는 사유들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데 요망되는 것은 실천적 힘을 작동시키는 인간들이다.-161쪽
피터 마샬 작,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 중에서 : 상황주의자들은 다다, 초현실주의, 문자주의 Lettrism에 의해 영향받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및 지식인들의 소규모 모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와 음악을 융합시키고 도시경관을 변형시키고자 했던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은 1957년 잡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창간했던 집단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 처음에 그들은 주로 "예술의 폐지"에 관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이전의 다다이스트들과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분리된 활동으로서의 예술과 문화라는 범주를 대체하여 그것들을 일상적인 삶의 부분으로 변형시키고 싶어했다. 문자주의자들처럼 그들은 노동에 반대하고 완전한 여흥을 옹호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창조성은 엉뚱한 곳에 소모되고 억압받으며 사회는 배우들과 구경꾼들, 생산자들과 소비자들로 분할된다. 그들은 일단의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력이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했고 모든 이들이 시와 예술을 창작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선언했다. 노동이나 권태따위는 지옥으로나 가라!-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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