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는 신곡 지옥의 7곡에서 ‘재화는 운명의 손에 들려 있건만, 우리 인간들은 그 때문에 처절히도 싸운다(p.71, 신곡, 민음사)’고 했다. 돈은 어차피 운명의 여신(포르투나)이 관리하니 인간이 아무리 아등바등 해봐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오는 죽음은 그 시기도, 형태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은 그냥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가? 죽음의 종류와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태초의 인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이 각자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면 아마 우주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한다.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아직은 두렵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후세계, 그저 많은 이미지로만 축적된 어둠의 세계에 혼자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다. 어쩌면 모든 것은 허상이고, 인간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죽음은 온전히 자신만이 직면해야 하는 것이기에 인간을 외롭게 한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는 짧은 시간에 엄청 많은 얘기를 들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화자는 암 투병하는 친구와 그녀를 도와주는 자신 사이에 여러 다른 에피소드와 나(화자)의 생각을 뒤섞어 놓는다. 이 이야기들이 확실히 연결되지는(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않지만 멈춰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의 주된 소재는 늙음과 죽음이지만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머러스한 표현들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아, 정말 맞는 말이야!’라며 크게 공감한 부분도 많다. 물론 슬프기도 하다.
작가인 잉그리드는 사인회에서 친구를 만나고, 그들의 친구인 마사가 암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곧바로 병원을 찾아간 잉그리드는 마사를 위로하고 자주 병문안을 간다. 마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하지만 암은 다른 곳으로 전이된다. 마사는 병원에서 고통을 겪을 만큼 겪고 결국 자신이 암에 굴복하며 죽어가야 하는 현실을 거부한다.
마사는 불법 사이트에서 안락사를 위한 약을 구해놓고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실행할 때 옆방에 있어 달라고 잉그리드에게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부탁을 부담스러워한다. 잉그리드는 마사와 병원에서, 또는 다른 장소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마사가 살아온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뉴욕 타임즈 종군기자로서 전 세계의 전쟁터를 누빈 마사는 딸에게 충실할 수 없었다. 딸에게는 처음부터 아빠도 다른 곳에 있었다. 마사와 그녀의 딸은 서로 없는 존재처럼 살아간다.
많은 고민 끝에 친구를 이해하게 된 잉그리드는 마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두 시간쯤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의 멋진 집을 대여해 그 곳에서 마사의 죽음을 준비한다. 죽음을 실행해야 할 마사와 죽음을 발견해야 할 잉그리드는 괴롭고 힘들지만 잘 극복해낸다. 마사는 옆방에 친구를 둔 채로의 죽음이 아닌, 잉그리드가 외출한 사이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은 죽음을 선택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잉그리드와 마사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든 건 알지만 외롭게 죽기 싫어하는 마사가 이기적인 것 같았다. 죽음을 준비하고 목격해야 하는 고통을 친구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했다. 마사의 부탁을 선뜻 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마사를 위로하고 도와주는 잉그리드의 의도도 의심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엄청난 부탁을 순수한 마음으로만 들어줄 수 있는지, 혹시 잉그리드가 작가여서 나중에 글을 쓸 소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도 나를 우울하게 했다. 계속 영화의 내용과 장면이 생각났다. 그러다 문득 잉그리드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 ‘착하다’가 아닌, 자신이 받아들이고 결정한 것에 책임을 다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잉그리드였다. 그것은 타고 나거나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고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이타심은 각성으로 생겨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 방해를 많이 받는다. 책의 인물들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와 겹쳐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과 영화는 서로를 상호 보완해주어 이해가 더 잘되게 해주었다. 배우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의 캐스팅도 절묘했다. 영화는 <어떻게 지내요>의 내용 중 친구와 화자만을 압축해서 다루었고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이라는 병에 걸리면, 투병생활이 시작된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한다. ‘환희와 우울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신을 원망하기도 하며 살아있는 세포까지 죽이며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암에 패배한 채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고문을 사서 겪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구토, 설사, 피로-끔찍해, 끔찍해-그리고 결국엔-
늙고 쇠약해진 게 아니잖아. 나는 평생 내 건강을 잘 챙겨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건강을 챙기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건강식을 먹어온 탓에 오히려 상황이 더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의사 말이 심장이 아주 튼튼하대. 그게 내 몸이 계속 싸워 나갈 거라는 말이 아니면 뭐겠어? 숨이 끊길 때까지 내가 시달리고 또 시달리게 될 거라는 뜻이지. -p86~87]
이런 아이러니가 허탈하다. 건강을 잘 챙겨왔지만 암에 걸렸고, 몸은 끝까지 암과 싸울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만이 아니다. 주변에서는 잘 싸울 수 있다고, 온 힘을 다하고, 애를 써서 암과 싸우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다. ‘암을 선물이자 정신적 성숙의 기회, 자기 자신도 몰랐던 자질을 발달시킬 기회로 생각해라, 최고의 자아에 이르는 여정의 한 단계로 생각하라(p.132)’고 부추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암에 걸렸다고 무조건 포기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완치되는 사람도 많다.
어쨌든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병에 걸리거나 죽을 때, 우리는 철저히 ‘타자화’ 된다는 것이 팩트인 것이다.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가 다소 두서없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런 ‘타자화’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라고 물어봐 주는 것, 그것만 해줘도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p.122]
소설의 끝은 영화와 달리 명확하지 않다. 화자는 그저 ‘어떻게 지내요’를 계속 실천중이다. 전 남친에게 비난받아도 그저 묵묵히 ‘정말 딱 당신’답게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를 유지하고 있다. 그냥 그것으로, 그 정도면 된 거다. 더할 나위 없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쳐다본다. 마사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중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을 암송한다. 소설에서는 조이스의 다른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눈은 어두워진 중앙 평원 전역, 나무 없는 언덕들, 앨런 습지에 부드럽고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더 멀리 서쪽으로 소란스럽게 흘러가는 시커먼 섀넌 강의 물결 위에도 조용하고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외로운 교회 묘지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었다. 눈은 비뚤어진 십자들과 묘석들, 작은 문의 창살들, 앙상한 가시나무들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눈이 부드럽게 살포시 전 우주에, 살포시 부드럽게,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 하듯이, 모든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영혼도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더블린 사람들’, 중 '죽은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열린책들]
『죽은 사람들』에는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 게이브리얼은 30년 동안 연말 파티를 열고 있는 두 이모에게 다가올 죽음을 본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육욕의 대상자인 아내 그레타의 마음에 오랫동안 죽은 남자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도 망령이 되고 이 세상 모든 것과 심지어 죽은 것들에게도 ‘관용’이 적용되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의 눈과 평판을 의식하고 위선을 떨며 사는 것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빈 껍데기일 뿐이다. 게이브리얼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하는’ 내 삶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중요한가?
만약 친구가 나에게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실행하기 위해 옆방에 있어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견디며, 최선을 다해 병과 싸워 이겨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친구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그런데 옆방에 있어주지는 못할 것 같다. 난 무섬을 많이 타는 편이다. 너무 무서울 것 같다. ‘친구야, 미안해, 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