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한 가운데에서 오랫동안 잠영을 하다 물 위로 올라왔을 때 예상하지 못한 폭풍을 만날 수 있다.그럴 때 우리는 안전한 배로 다시 돌아가거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폭풍 속의 혼돈에그냥 자신을 머물게 할 수도 있다.‘ (p2)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20년의 결혼 생활을 접고 다시 혼자로 돌아간 사람이 자신의 ‘살림비용‘을 들려주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책이라는 매체로 독자에게 전하는 것이라면.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 듯 하다.책이 줄 수 있는 의미와 기능이 아쉽다.난 이 책에서 어떤 감동을 받지 못했고불끈 의지가 솟지도 않았다.내 시간을 투자해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지인이나이웃의 재미없는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방해받는 것 같다.
글쓰기란 어떤 면에서 보면 세계 속에 던져진 자신의 모습을‘언어‘에 투영하여 작업하는 일이다. 그런데 모국의 언어가 아닌타국의 언어로 글쓰기를 지속해온 작가는 어떨까?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손에 들고 나는 누구이며 내가 속한 곳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끊임없이 직면하지 않을까? - P7
울지도 않았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유난히눈자위가 하얗게 보였다. 아이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침을 삼켰다. 그 애의 눈에 문득 눈물 한 방울이 맺히는가 싶었다. 하지만그 애는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조오센징노 바까!(조선인, 바보!)" - P25
그는 따뜻해 보이는이불 속에 발을 넣고 목을 움츠려 보였다. 나에겐 그 모습이 더없이 애처롭게 보였다. 그 애의 눈은 빛나고 입가에는 살짝 웃음이번졌다. 완전히 나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그의 마음 속 세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감추어져 있었다니!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도 어찌 이 소년에게만 없겠는가? 그것은 그저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통받고 배척당한 한 동족 부인을 상상했다. 그리고 일본인의 피와 조선인의피를 함께 받은 한 소년 안에 존재하는 조화롭지 못한 이원적인것의 분열과 비극을 생각했다. - P37
그렇다면 일시적인 감상이나 격정으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이다. 하고 외치는 오뎅 바의 남자와 너는 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또 나는 조선인이 아니라고 외치는 야마다 하루오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머리 색이 다른터키인의 아이조차 이곳 아이들과 씨름을 하며 순진하게 놀고 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왜 조선인의 피를 받은 하루오만은 그것이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 P42
작은아버지는 한 군(郡)의 수장이 조선어를 사용해서야 위신이서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코풀이 선생님을 앞세워 본인의 일본어를 조선어로 통역하게 했다. 인식은 이곳에 와서 작은아버지가 일본어 따위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첩에게까지 너무나 의기양양하게, 그것이 또 대단한 일본어인 양 떠드는 것을 몇 번이나보았던 터다. 그런 작은아버지가 누구 한 사람 일본어를 알 턱 없는 산민들을 향해 일부러 통역까지 세워가며 불쌍할 만큼 우스꽝스러운 연설을 한다는 사실이 특별히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인식은 뚱뚱하게 살찐 작은아버지 옆에 코풀이 선생님이 쭈뼛쭈뼛 서서 얼굴이 빨개지거나 코를 항케치로 누르거나 하는 광경을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 P144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면 한 줌의 흙, 한 다발의 풀조차 새롭게 느껴져 가슴 설레는 그였다. 그렇지만 타고나기를 소박한, 감수성 넘치는 젊은 인식에게는 조사라는 역할보다 오히려 쫓겨 가는 화전민과 함께 울겠다는, 어쩌면 다소 감상적인 생각이 너무 앞섰는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이처럼 가장 황폐한 고향의 품에 돌아와, 뭔가 알 수 없는 자연의위용에 약한 마음을 질타당하고 채찍질당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경성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 합승버스로 준령과 협곡을 넘어 이 오지까지 오면서 그는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고동쳤는지를기억하고 있다. 불타버린 험산 하늘가에서 화전민들의 시커먼 오두막집을 바라보던 때는 자신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그곳으로 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 무슨 비참한 고향의 모습인가! - P157
하지만 지금처럼 비극적인 광경을 보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까지 가여운 산민들의 무리 속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다. 그는 그런 자신의 기분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종의 체념과도 통하는 감상이랄까, 그저 의욕을 잃고 극도의 가난에 허덕이는 화전민 사이로 들어가면 마음만이라도 가벼워질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작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그제서야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이 감상적 에고이즘인걸까, 인식은 눈시울을 적시며 생각했다. - P158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아버지께도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한가. (마태복음 6장 26절)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태복음 6장 28절)하물며 너희들에게 있어서랴. 하지만 이곳에는 수고하고 씨뿌리려 하나 땅이 없고, 거두려 하나 거둘 것이 없고, 먹으려 하나먹을 것이 없는, 공중을 나는 새보다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마태복음 6장 30 절 구절 중 일부)‘보다도 못한 백성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은 무도한 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고그 생활조차 끊임없이 위협 당한다. - P182
이윽고 나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 어린애들의 탐스러운 가죽구두 두 켤레를 사들고 돌아왔다.메고 갈 륙색의 짐을 덜어 고향에 보낼 헌 옷 꾸러미를 만들고, 이 속에 어린애들의 물건을 차곡차곡 넣어 묶어 놓았다. 공교롭게도 이 다음날 아침 일곱 시 차로 R여사가 귀국하기로 되어 일이 더욱 순조로웠다.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무량한 감개 속에서 몇 장의편지를 쓰게 되었다. 떠날 때의 암호대로 ‘여불비(餘不備禮의 준말. 나머지는 예를 갖추지 못한다는 뜻으로, 옛 편지 말미에 격식 있는 인사로 쓰는말 - 옮긴이)라고 상서하여 드디어 떠나게 된 사정을 알게 한 것이다. 그리고 떠나는 날짜와 시간도 내박았다. ‘여불비‘라고 쓴 편지가 마지막 편지인 줄 알라고 아내에게 이르고 떠난 것이었다. - P216
드디어 발차를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히 울리기 시작하였다. 뜨거운 악수를 교환하고 나는 열차에 올라섰다."베이징이여, 잘 있거라!"
이 유년 시절에 관한 작가들의 한탄과,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내가 어렸을 땐‘이라는 주제만 나왔다 하면 그 즉시 시작되는 모든 인간의 봇물 같은 토로 외에 또 어떤 매력을 부여할 수 있을까? 아마 잃어버린 절정의 무책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무책임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한 무책임을 느꼈다. - P19
심장이 똑같이 옥죄어드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이게 다인데, 이건 결코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겠지. 이 여잔 날 떠날거야? 이 순간에 어떻게 다른 머리칼을,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분명 오직 이 돌이킬 수 없는 기분에 달려있었다. - P68
"삶에요. 남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에요. 샤를, 그러니까 인간은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걸까요, 불행한 열정을 가져야 하는걸까요? 존재하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벌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걸까요?" - P103
그는 정말이지 그녀가 혼자서 삶을헤쳐 나갈 수 없으리라 여겼고, 그 순간 그녀는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그에게 안전감 이상의 애착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무책임을 받아들였다. 15년 전 그녀의 무의식적 선택, 영원히 청소년기에 머물겠다는 그 결정을 인정해주었다. 똑같은 결정에 앙투안은 틀림없이 분노하리라. 어쩌면 그녀가 되고 싶은 사람과 샤를이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완벽한 일치가 그 모든 열정보다 더 강력하고, 그녀에게 그 모든 열정을 부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 P106
그러니까, 루실, 언젠가 나한테 돌아와요. 난 당신을 당신 자체로 사랑해, 앙투안은 자기 짝으로서 당신을 사랑하지.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은 걸 거고, 그 나이엔 그게 맞아. 하지만난 당신이 나와 무관하게 행복하기를 바라오. 기다리겠소,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니까.""게다가 앙투안은 머지않아 당신이 당신인 걸로, 그러니까 당신이 향락적이고 무사태평하고 비겁한 걸로 나무랄 거요, 아니면 벌써 나무랐을지도 모르고, 틀림없이 그가 당신의 약점 혹은 결점이라고 부를 것들에 대해 당신을 지탄할 거란 말이지.그는 여자를 힘 있게 만드는 게 뭔지 아직 모르거든 남자들이여자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 설사 그것이 최악의 것을 가린다 하더라도 말이오. 아마 앙투안은 당신을 통해 그걸 배우게 될 거요. - P179
나는 모든 존재가 행복할 숙명이라는 걸 알았다.행동은 삶이 아니라 어떤 힘을 허비하는 방식, 무기력이다.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P195
루실은 필시 재앙이 될 미래, 앙투안의 분노를 유발하고, 신뢰를잃고, 그 둘 모두 그녀가 그가 제안한 이 정상적이고 안정적이며 비교적 쉬운 이 삶을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서, 스스로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잠정적으로 숨기는 것이 이 상황을 만회하려는 의지를 의미하는 건 전혀 아니라는 걸 정확히 인식했다. - P216
많은 사람들이 다 듣지 않고 암시만으로 이해한 것을 잊지만, 완전한 침묵은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부조리한 걸 의미할수 있다는 것 또한 잊는다. - P224
그들은 싸늘했고, 서로에게 몸이 닿는 걸 피했다. 이 넓은 침대에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기분이었다. 고독한 저녁시간, 궁핍한 경제 사정,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보였다. 화염의바다 속에서 원자폭탄이 발사되는 것이 보였다. 힘겹고 적대적인 미래가 보였고, 서로가 없는 삶이, 사랑 없는 삶이 보였다. 앙투안은 만일 루실이 스위스로 떠나게 내버려 둔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루실을 원망할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사랑의 끝이 되리라고 느꼈다. - P237
루실은 걸어서 돌아왔다. 집으로, 샤를에게로, 고독에게로,그녀는 자신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삶으로부터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박탈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P255
"퇴각의 북소리라는 표현은 어디서 온 겁니까?"한 식자가 대답했다."리트레 사전에 따르면 패배를 알리기 위해 울리는 신호죠." - P256
정치가 어디 있냐고?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있고, 태어난 바에야 올바르게 살고 싶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노력해보지만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니 합의가 필요하고, 합의 하려니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합의했는데도 합의는 지켜지지 않고, 합의 이행을 위해 규제가 필요하고, 규제를 실천하려니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 남용을 막으려니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를 보장하려니 재산이 필요하고, 재산을마련하니 빈부격차가 생기고, 빈부격차를 없애자니 자원이 필요하고, 개혁을 감행하자니 설득이 필요하고, 설득하지니 토론이 필요하고, 토론하자니 논리가 필요하고, 납득시키려니 수사학이 필요하고, 논리와 수사학을 익히려니 학교가 필요하고, 학교를 유지하려니 사람을 고용해야 하고, 일터의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하고,노동하다 죽지 않으려면 인간다운 환경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고민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외국이 침략할 수도 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많고 쉬운 일은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말하기가 너무 기니까, 싸잡아 간단히 정치라 부른다. - P23
그러나 인구 1000만이 넘는 현대 도시와 국가에 살면서 익명으로 숨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정치는 권력욕을 주체못하는 중늙은이들에게 맡겨놓은 채 애착 인형을 끼고 그저 숨이나쉬고 있기란 얼마나 편한 일인가. 짙어진 풀냄새를 맡으면서 아무도 없는 산책길을 고적하게 걷는 일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조용히은거하면서 자기 삶의 안위와 쾌락만 도모하다가 일생을 마치는일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그러나 폴리스 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탈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한다." - P29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은 기존 질서와 그에 기생해서 거들먹거리는 기득권자들이 고까워서 차라리 자연 상태를 원했던 편의점 점원을 상기한 바 있다."나는 트럼프가 마음에 들어요. ……그는 판을 흔들어놓을 겁니다. 사과 수레를 엎어버릴 인물인 거지." 스티븐 킹은 말한다. "과일 수레를 발로 차서 엎어버린 다음에 그냥 자리를 떠버리고 싶은 욕망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길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주워 담아야 할 겁니다." 정치는 과일 수레를 엎어버리고 싶은 원한이 애당초 생기지 않게 하는 일, 쏟아져굴러다니는 사과를 차근차근 주워 담는 일, 그리고 제풀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과들 간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다. 비록 엎어진 수레를 방관하거나 과일을 밟고 다니거나 등 뒤에서 과일을 깍아 먹거나 굴러다니는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이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 P38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앞서 존재했던 위대한 군주들은 사람들이 귀찮아하고 해이해지고 물러나기만 할 뿐, 나아가려 들지 않을 것임을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아름답게 수와 문양을 놓은 옷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 등으로써 사람들의 귀를 유혹하고, 관직과 편의로써 사람들의 몸을 유도하고,두드러지는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영탄함으로써 사람들의 기개를 인도하였다. 박지원, <명론> 중 -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