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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 갇힌 여인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편인 ‘갇힌 여인’은 마르셀 프루스트 사후 일 년 만에 출간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전 편에 비해 약간 정제되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발베크에서 화자는 알베르틴의 고모라적 성향을 의심해 그녀를 파리로 데려온다. 그녀를 독점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데려와 칩거 생활을 시작한다. 화자는 알베르틴의 친구인 앙드레와 운전기사를 통해 감시하게 하는데도 그녀의 거짓말은 계속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선물해주지만 끝내 알베르틴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질투와 의심, 육체에 대한 욕망으로 그들의 사랑은 위태로워 보인다. 가을부터 다음 해 봄이 시작될 때까지 육 개월 동안의 화자와 알베르틴의 동거는 고전 비극에서 전개되는 다섯 개의 막처럼 구성되어 있다.
[이 다섯 날은 다시 화자 집에서의 알베르틴의 정착, 베르뒤랭 집에서의 연회, 알베르틴의 떠남이라는 삼분법적인 구조로 요약된다. 지극히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한정된 행동이 고전 비극의 삼일치의 법칙을 환기한다
-p. 386, 작품 해설 중에서]
플라톤의 《향연》에서 ‘천상의 아프로디테에 속하는 에로스’에 영감을 받은 자들은 본성상 더 건장하고 지성을 더 많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 남성에게로 사랑이 향한다고 했다.
[바로 소년 사랑 그 자체에서도 순수하게 이 에로스에 고무되어 있는 자들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네. 그들은 그냥 소년들이 아니라 이미 지성을 갖기 시작할 때의 소년들을 사랑하거든.....내 생각에 이때부터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전 생애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과 함께 삶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네.
-‘향연’, 플라톤, 이제이북스, 강철웅 옮김, p.79]
프루스트는 순수하게 에로스에 고무되어 있었던 옛 그리스의 관습은 사라졌으며, 샤를뤼스와 알베르틴으로 표현되는 소돔과 고모라는 ‘비의지적이고 신경증적인 동성애, 타인에게 숨기고 자신에게 위장하는 동성애(p.23)만이 증식되고 있다고 한다. 수치스럽고 퇴색한 동성애만이 살아남아 있다. 자신의 실제 생활과는 다르게 프루스트는 동성애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샤를뤼스에게는 조롱을, 알베르틴에게는 금지 혹은 멈춤을 바란다. 화자는 알베르틴에게 끊임없는 질투와 의심을 한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안 알베르틴은 화자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한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을 한다, 또는 그녀와 결혼까지도 생각한다는 모순적이고도 상반되게 변화하는 화자의 정신은 극도로 불안정하다. 바깥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코르크마개로 벽을 막은 채 칩거하며 글을 써내려간 결과로 얻은 프루스트의 문장은 인간의 오감과 모든 세포를 다 열어놓은 듯하다. 보통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각으로 알베르틴을 표현하고,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봤기 때문인지 두 사람의 사랑은 어렵다.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랑과 욕망의 경계에서 아찔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그들의 사랑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까지 포함하고 있어 비판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알베르틴과 화자의 사랑은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The Lovers)'과 흡사하다. 베일로 가려진, 위장된 두 사람의 사랑은 진실하지 못하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와의 관계 역시 여러 겹의 가면이 존재한다. 베르뒤랭 부인은 자신의 사교모임에 참여했던 회원이 죽었거나 위독할 때, 슬픔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슬픔을 고백하는 순간, 쾌락을 포기(p.83)'할 용기가 없으므로, 연회를 취소하지 않기 위해 무관심을 선택한다. 모든 사교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스완이었지만, 그의 죽음역시 조용히 파묻힌다. 자신의 쾌락과 자존심을 위해 타인에 대한 음모도 자행된다. 어쩌면 화자의 ‘미필적 고의’적인 그물망에 알베르틴도 걸려 들었는지 모른다. 겨울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사랑이 부담되고 지루해진 화자는 더 두꺼운 베일로 자신을 가려버린다. 봄이 되는 시점까지 계속된 알베르틴에 대한 질투와 집착은 화자를 피곤하게 한다. 이 세상 모든 아담들의 욕망도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알베르틴은 떠남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는 현실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서로에게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두 존재가 마주할 때면 언제나 이런 식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부분을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해도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며, 그래서 둘 다 자신에게서 가장 개인적이지 않은 부분만을 표출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상을 전하려 하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그런 인상을 전하려 하며, 또 내게서 그 생각은 집에 돌아온 알베르틴을 예전처럼 온순한 상태로 간직하여, 그녀가 화를 내며 더 큰 자유를 요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p. 266~267]
화자는 베르뒤랭 부인의 저택에서 ‘뱅퇴유의 7중주’를 들으며 인간의 사랑과 관계보다, 예술, 특히 음악을 더 우위에 둔다. 타자와의 관계는 불완전하고 이기적이다. 그에 비해 ‘빛의 찬란한 부동성(p.108)’인 음악은 , ‘지속적이고 행복한 움직임인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것이다. 글과 그림보다 음악은 순간적이다. 음악은 듣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악기나 인간의 소리에 의해 재생되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뭔가를 떠올리고, 생각하고 이미지로 저장할 뿐이다. 프루스트는 이것이야말로 영혼의 소통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고, 최고의 예술이라 정의한다.
프루스트는 이 책에 뱅퇴유, 베르고트, 엘스티르라는 세 인물을 등장시켜 음악, 글, 그림에 대한 자신의 예술론을 펼친다.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하는 서사도 흥미롭지만 프루스트가 표현하는 예술에 대한 글은 너무 아름답고 깊이 몰입하게 한다. 작가의 예술에 대한 조예가 존경스럽다. 프루스트의 악명놓은 긴 문장의 글은 읽기가 쉽지 않고, 특히 ‘갇힌 여인’ 편의 사랑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가 내놓는 이런 예술론은 매혹적이다.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책표지가 무척 예쁘다. 각 권마다 연상적으로 언급되는 중요한 식물, 나무, 꽃 등의 이미지를 모티프로 하여 디자인했다. 기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이미지를 반영하여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흩날리는 패턴을 시각화시켰다(민음사 편집부 제공)
이미지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2권- ‘스완네 집 쪽으로’~~ 월계수 잎
3, 4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라일락
5, 6권-‘ 게르망트 쪽’~~ 장미
7, 8권- ‘소돔과 고모라’~~ 난
9, 10권-‘ 갇힌 여인’~~ 제라늄
11권- ‘사라진 알베르틴’~~ 산사나무
마지막 12, 13권은 준비 중이라고 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전체적인 흐름과 세부적인 상황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둘 것인가?’를 고민한다. 물론 어떤 책은 전체인 숲이 보이고, 또 다른 책은 숲보다는 나무가 선명하게 각인될 때도 있다. 책에 따라 의미를 두는 곳이 다르므로,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자의 취향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 이번에는 화자와 알베르틴의 관계에 더 많이 머물렀다. 그래서 혹시 다른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도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편인 ‘갇힌 여인’은 예술에 대한 뛰어난 묘사는 좋았지만, 화자와 알베르틴의 비틀린 사랑은 아쉬웠다. 내가 두 사람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끝내 거기에서 아름다움이나 완성된 합일을 볼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 단 하나의 ‘청춘’의 샘은 새로운 풍경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고, 타자의 눈을 통해 다른 수백 명의 눈을 통해 우주를 보며, 그들 각각이 보고 그들 각각이 존재하는 수백 개의 우주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우리는 한 사람의 엘스티르, 한 사람의 뱅퇴유, 그들의 동류인 예술가들과 더불어 할 수 있으며, 정말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다닌다.
-p.11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