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주식 얘기를 하는 불장의 시대에 난 아직도 문학을 읽고 있다. 여전히 책이 좋아서 그럴 것이다. 아니 관성으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뭔가 다른 것을 할 엄두도 안 나고 사실 귀찮기도 하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떠 있는 섬처럼 외롭게 책을 읽고 있지만 라비 알라메딘불필요한 여자같이 책 속에 책이 많이 나오면 반갑기보다 좌절을 더 하게 된다. 여기에 들어있는 책 중 읽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태껏 읽은 것들을 이 책의 주인공인 알리야처럼 적시적소에 인용하며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느냐면, 그러지도 못한다. 외로운 섬은 작은 바람에도 사라지고 마는 작고 허술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보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다고 말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어떻게 살면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요즘 몸과 함께 마음도 늙어버린 느낌이 많이 들어서인지 불필요한 여자의 소설 속 여러 얘기 중, 알리야의 노년이 더 눈에 들어왔다. 72세의 알리야가 움직이는 공간에서 그녀가 느끼는 미세한 고통과 좌절이 이해되고 심지어 그 감각마저 내 몸에 전달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세상과 단절한 채 혼자 살아가는 알리야의 삶은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 주, 3개월 동안 전주에서 근무하는 딸아이에게 다녀왔다. 밤늦게 도착해 피곤한 것 같아 식탁위에 있는 쏠라 c를 먹고 자겠다고 했다. 다른 비타민처럼 이 약도 물로 삼키면 될 줄 알았는데, 딸아이가 이건 씹어 먹는 거고 두 알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두 알을 씹어 먹고 물을 마시고 잤다. 다음 날, 간단한 요기를 하고 딸아이와 나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딸아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역시나 피곤할 수 있으니 비타민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식탁 위의 쏠라 c 두 알을 한꺼번에 삼키고 물을 마셔버렸다. 알약 두 개가 목에 딱 걸리는 순간, 그제야 이 약은 씹어 먹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목에 걸린 알약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 가슴을 치고 물을 마시며 넘어가기를 기다렸고, 그 사이 병원에 갈까도 생각했다. 5분쯤 사투(?)를 벌이니 알약은 서서히 목을 지나 식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목이 많이 아팠다.

 

이 겁나는 상황에서, 나는 내 몸만 걱정해야 하는데도 머리에서 계속 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나를 내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자꾸 잊어먹고, 되풀이되는 황당한 일이 단순한 실수로 인정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럴까? 왜 이리 멍청한 사람이 되는 걸까?’라고 계속 푸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음만은 청춘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도 덩달아 초췌해지고 쪼그라들며 작아진다. 노년이란 자신을 명쾌하게 설득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여자도 나의 경우와 비슷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알리야는 노안으로 설명서를 잘못 읽어 염색용 샴푸를 정량보다 10배나 더 많이 사용해 머리색이 그만 파란색으로 변해버렸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멀티태스킹에 약한 알리야는 72세의 혼자 사는 여성이다. 50년 동안 서점에서 근무했으며, 새해 첫 날에 새 책을 번역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37권의 책을 번역했다. 하지만 번역된 원고는 출간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쌓아두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자신이 정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이혼당하고 난 뒤에 그녀는 서점, , , 음악만을 선택한 은둔의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은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그녀에게 평화로운 고립의 삶을 허용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지만, 다행히 수차례 위기를 넘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알리야는 평생 문학과 함께 살아왔다. 바깥세상의 관습에 순종하지 않고 문학에 파묻혀 칩거하며 산다. 유일하게 한나와 교류하며 살았지만, 한나가 죽고 다시 혼자만의 삶을 이어간다. 문학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기에 그녀에게 모든 것은 문학으로 인용되고 표현된다. 알리야에게 책은 운명이다. 책은 그녀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며 세상과 단절해도 좋은 이유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많이 든 그녀에게 고립은 위험하고도 힘들다. ‘이 나이가 되니 삶은 계속되는 패배의 인정이다. 노년과 패배는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피를 나눈 형제이다(p.78~79)’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불필요한 여자라고 인정한다. ‘가까스로 작동하는몸으로 인해 힘들지만 그럼에도 읽는 사람인 알리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언제나 그 정체성을 사랑한다.

 

이 책에는 알리야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혼란스러운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것(최근에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는 또 레바논에 미사일을 날렸다), 알리야가 읽은 책과 음악에 관한 얘기도 많고, 여성과 우정이 엮어내는 슬픔도 있다. 특히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알리야의 현재의 모습과 생각이 다른 책의 문장으로 인용되며 유머러스하고도 애잔하게 표현된다. 책 속에 이렇게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좋다. 생각이 많아지며, 내 삶을 여기에 대비시키기 좋기 때문이다. 레바논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 가지게 되었다.

 

알리야는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결코 녹록치 않았던 그녀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빼고, 나머지 모두는 알리야가 자신의 인생을 주도한다. 쉽지 않았을 알리야의 선택, 고집과 묵묵함이 멋있었다. 거기에 담겨있는 회한과 허무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좋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웃기게도 와장장창 깨져버리는 알리야의 은둔 생활도 재미있었다. 이웃 여자들에게 발견된 숨겨진 번역 원고도 어떤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뭔가 많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알리야가 혼자가 아닌, 조금은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바랄 수조차 없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는 온 세상의 꿈이 다 있다.

-알바로데 캄포스, p.409]


벚꽃이 만발한 봄날에, 도라야키(밀가루, 달걀, 설탕을 섞은 반죽을 넣어 둥글납작하게 구워 두 쪽을 맞붙인 사이에 팥소를 넣은 화과자-위키백과) 가게에 한 할머니가 찾아온다.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쪽지를 보고 자신이 이 가게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76세의 요시이 도쿠에(키키 키린)’는 손에 상처가 많고 손가락이 불편하지만 아무 문제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가게의 점장인 센타로는 도쿠에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자신이 만든 도라야키 하나를 도쿠에에게 준다.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지만 단것을 싫어하고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얼굴에 세상의 모든 비애를 짊어진 것 같은 사장 센타로는 사실 빚을 많이 져 이 가게에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있다. 마치 지옥에 있는 사람처럼 그는 재미없이 하루하루를 견뎌나가고 있다. 이 가게에는 단골인 여중생 와카나가 자주 온다. 젊고 철없는 엄마와 함께 사는 와카나는 가난하기에 학원도 다니지 않고, 엄마에게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우울한 소녀이다. 그렇지만 와카나는 불만스러운 삶을 살기보다 센타로의 말벗이 되어주고, 보다 더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사는 학생이다.

 

며칠 후 다시 찾아온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자신이 만든 단팥소를 먹게 한다. 그 맛에 반한 그는 도쿠에를 고용한다. 여태껏 업소용 팥을 사용했던 센타로는 도쿠에와 함께 이제 새벽 일찍부터 팥을 삶고 으깨고 설탕을 넣어 소를 만든다. 그들이 합작해 만든 도라야키는 너무 맛있어졌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 문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줄을 선다. 모처럼 센타로의 얼굴은 밝아졌고 웃게 된다. 그러나 벚꽃이 지고 파란 잎이 무성해진 어느 날 , 가게 주인이 와서 전하는 말은 충격적이다. 도쿠에는 한센병 환자라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소문이 퍼져 가게엔 손님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도쿠에는 더 이상 가게에 오지 않는다.

 

다시 얼굴에 그늘이 지고 침울해진 센타로는 와카나의 제안으로 단풍이 든 가을에, 도쿠에를 찾아간다. 사실 소문은 와카나가 그녀의 엄마에게 얘기해서 나기 시작한 것이었고, 센타로는 도쿠에를 지켜주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와카나와 비슷한 나이에 병을 앓게 되어 한센병 격리 시설에 들어간 도쿠에는 그때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고 갇혀 살아야만 했다. 결혼하고 임신도 했지만 아이는 낳을 수 없었다. 평생 그곳에서 팥을 이용해 과자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가게 주인이 자신의 조카와 같이 일하라고 해 더 곤란해진 센타로는 와카나와 다시 도쿠에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녀는 저 세상으로 간 상태였다. 센타로는 도쿠에가 자신에게 남긴 말에 용기를 얻어 가게에서 독립한다. 다시 벚꽃이 만발한 봄날에 사람들이 봄을 즐기는 한가운데에서 도라야키를 판다 그는 큰소리로 미소 지으며 도라야키 사세요! 도라야키 왔어요!’라고 외친다.

 

소설 불필요한 여자와 영화 : 단팥 인생 이야기70대 여자의 이야기다. 둘 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지나왔지만, 한 사람은 자발적 의지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켰고, 다른 사람은 타의에 의해 자유를 잃었다는 큰 차이가 있다. 소설의 내용도 좋았고 나 역시 알리야와 같은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로망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알리야보다 도쿠에에 연민과 정이 갔고 더 따스함을 느꼈다. 책에 파묻혀 책 속의 문장에서 세상을 들여다보기보다, 세상과 직접 만나며 그 모든 것에 말을 걸며 극진히 모시는 도쿠에의 품위와 정성을 닮고 싶었다. 센타로와 와카나에게도 선하고 좋은 영향을 주는 노년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모처럼 영화 보면서 펑펑 울었다.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것은 팥이 보아 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일까? 지난밤에 울타리를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 보라고 속삭이는 듯 느껴졌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어.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 이런 인생 이야기도 들려줄 걸 그랬어. 언젠가는 사장님이 사장님만의 특별한 도라야키를 만들어 낼 거라 믿어. 스스로 개척한 길을 걸어가야 해. 사장님은 해낼 수 있어.

 

주중 행사인 산책 중 달콤한 냄새에 끌린 날이었지. 사장님을 처음 보았는데 너무나 슬픈 눈빛이었어. 뭐가 그리 슬프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슬픈 눈을 하고 있었지. 그것은 예전의 내 눈이었어. 평생 담장 밖으로 못나간다고 인정했을 때의 내 눈이었지. 그래서 난 이끌리듯 가게 앞까지 갔던 것 같아. 내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사장님 정도의 나이가 됐겠지. 우리 사장님, 그 날 보름달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어. ‘네가 봐 주길 바랐단다. 그래서 빛나고 있었던 거야.” 우리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센타로에게 들려주는 도쿠에의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