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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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알’, 신화가 지니는 힘

- 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지역과 무관하게 이야기의 보편성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구비설화 탐색자 겸 연구자로 소개하고 있는 신동흔의 신화, 치유, 인간을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호모 사피엔스의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언급한 바 있다. ‘허구’, 곧 만들어진 하나의 서사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신화야말로 인간의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서사다. ‘최초의 인간들을 이어준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양과 서양의 신화를 아우르며 광대한 인류의 정신세계를 촘촘한 사유로 풀어내었다.


 

저자는 신화가 인간의 실존을 보여준다고 언급한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미력한 자기를 부여안고 한없이 흔들리는 일”(113)이기도 하다는 것. 바로 나와 세계가 관계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는 괴테가 일생동안 수정한 역작 파우스트가운데 한 마디,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파우스트, 전영애 옮김, (도서출판), 2019)란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노년의 대문호가 애정과 연민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았을 법한 구절이라 생각했는데, 신화를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에서도 우리 인간의 모습을 비춰주는 표현을 만났다.


 

신화 속에서 인간의 모습, 나아가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은 세계가 나와 만나는 일이다. 이는 자연 만물과 인간이 연결되는 순간이다. (개인)와 사회(집단)서사적 연대를 이루는 접점이 신화라 할 수 있다. 개개인은 신화에서 수많은 를 발견할 수 있다. 신화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안에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가 있는 것처럼 티탄족과 외눈박이 거인과 백수 거인과 제우스가 우리 안에 있다.”(42)

 


따라서 저자는 세계의 신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과 인간의 생명적 연결성’(72)을 말한다. 지금 전 세계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기능적으로 지구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나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개개인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신화를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끊은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는 우리 안의 자기서사에 주목하는 일을 언젠가부터 소홀히 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우리가 세계와 다시금 이어나갈 수 있는 해법이 신화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저자는 나를 세계와 연결해주는 신화가 치유의 힘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화와 만남으로써 신화를 되새기고 나를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변혁의 길, 거듭남을 꾀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변혁, 거듭남을 거쳐 결국 나 자신을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신화는 이 과정에 필요한 역치를 넘어갈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신화는 자기 재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신화적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기 전에는 신화가 단순하고 원초적인 이야기의 모음인 줄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 신화, 치유, 인간에서 저자는 신화의 서사가 지닌 강렬한 생명력, 치유의 힘과 자기 변혁의 힘을 독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저자는 신화의 사례를 들어 노아의 방주어머니의 자궁태초의 알이라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보니 신화야말로 인류에게 삶을 견디게 해주고 치유의 힘을 건네는 태초의 알이 아닌가 싶다.    



[1] "우리 안에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가 있는 것처럼 티탄족과 외눈박이 거인과 백수 거인과 제우스가 우리 안에 있다."(43)

[2] "그 홍수는 태초의 물이며, 방주는 태초의 알이라고 할 수 있다."(55)

[3] "결국 신화를 완성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58)

[4] "신화는 자연 만물과 인간의 생명적 연결성을 말한다. 무엇하나 귀하지 않는 것들의 신령한 연결이다."(72)

[5] "마음 깊은 곳의 신명을 이끌어내서 사람들과의 서사적 연대를 더욱 강화해 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오래 흘러온 신화가 전해주는 본원적 해법이다."(107)

[6] "관계는 존재의 분리로부터 시작된다."(177)
- 사랑의 원형에 대한 언급

"존재하는 일이란 관계하는 일이다."(178)
-끝없는 부딪침과 밀어냄의 역학을 신화는 이야기한다.

[7] "시바의 파괴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창조를 향한, 새 생명을 향한 파괴다. (...) 지금의 나를 죽임으로써 시바의 서사로 나아가는 것이 내가 찾아가야 할 서사적 길이었다. 달리 말하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적 초극이다."(234)

[8] "현실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깊은 동굴에 가둘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신화로 읽는다. 그러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스스로 동굴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지 않은지를."(251)

[9] "덧붙여 깨닫는 것은 그러한 살아냄이 제대로 된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다시 나를 죽여야 할 때다. 일어서서 거듭나기 위하여."(257)

[10] "그 우주적 연결의 중심점이 어디인가 하면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이다. 그 연결성을 오롯이 인지하고 구현해낼 때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나 자신의 존재성은 세상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다. 설령 그가 신이라 하더라도!"(270)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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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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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 거대한 부조리에 맞섰던 여인

-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 長江日記를 읽고

 



몇 년 전 정동의 한 극장에서 본 연극 한 편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노드라마였다. 그녀의 이름은 정묘희.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태어난 그녀는 열 살이던 1910, 동년배인 김의한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라를 잃었다. 독립운동을 하러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간 후에는 정정화로 개명했다. 나는 여사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전하는 연극을 통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녀가 남긴 회고록 녹두꽃(후에 장강일기로 바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정화 여사는 처음부터 빼앗긴 조국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집안의 며느리로서 시댁 어른을 모시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이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26년 간 이어진 그녀의 독립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했으며, 시댁 식구와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임정의 안살림을 맡았던 여사의 삶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이기도 했다. 장강일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임시정부의 속내뿐만 아니라, 이런 여건에도 항일 저항 활동을 이어간 임정 요인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곳곳에 담겨있다. 저자의 기억에는 무장활동을 지휘하던 꿋꿋한 모습의 백범과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라며 아이와 놀아주던 백범의 격의 없는 모습까지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발걸음을 머나먼 타향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릴 때 어른들은 우리가 미국의 도움으로’, 혹은 일본이 원자폭탄에 항복하여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곁에는 국내 및 해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일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이 개인의 안위에 앞서 무엇이 옳고 그른 길인지 먼저 헤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옳은 길로 향하고자 했던 여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디나 저항의 장이자 삶의 장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세계사 속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던 이들을 증언하고 있다.


회고록에서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저자가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한 대목이다.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의 장으로 뛰어들었던 이들이다. 양복점을 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비밀 연락을 맡은 이세창, 한인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다 전장으로 나간 김철,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정을 찾아온 박재희나 고구마라는 별명을 가졌던 윤씨 같은 이들이었다. 저자는 임시정부의 어머니들과 아내들의 이름도 호명했다. 이들은 쫒기는 길 위에서도 임정의 살림을 돕고 서로를 보살폈으며 자녀들을 가르쳤다.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문제와 싸우며 가족과 임시정부를 지켜낸 이들 역시 독립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장강일기는 우리의 독립이 결코 외세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저자는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223)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많은 이들이 일제에 부역하며 변절해갈 때, 어떤 이들은 승산 없어 보이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분연히 저항했다. 후자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당당히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묵묵히 나아갔던 이름 없는 영웅들에 빚지고 있음을 말이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되찾아주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1] "첫 아이를 잃은 갓 스물 아낙네의 말 못할 심정, 남편없는 시댁에서의 고달픈 시집살이, 며느리를 늘 친딸처럼 감싸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시아버님의 구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망명. 이 모든 조건이나 상황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안개였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방으로 둘러쳐진 장막이었다."(45)

[2] "이 길은 한 여인의 길이다. 열 한 살에 시집와 세상 문을 닫고 규방에 갇히고, 열 아홉에 첫아이를 낳아 잃고, 남편을 떠나보낸, 가슴 얼어 오는 그 모든 사연을 십대의 나이에 모두 치른 한 여인의 길이다."(49)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49)

[3] "상해에 발을 붙인지 달포 남짓 지났을 때였다. 좋게 말하면 대담하고, 아무리 잘 봐준다 해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내 기질이 또 한번 살아나기 시작했다. (...) 국내에 들어가서 돈을 구해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55)

[4] "열차에 오르기 직전 친오라버니같은 그분이 미소를 띠며 거센 평안도 사투리로 내게 한 말을 되씹어 볼수록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60)

[5] "밤의 강 소리는 사람을 위협한다. (...) 전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서도 사방에서 사람을 옥죄고 들었다. (...) 방향을 알 수 없는 이 곳 저 곳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물소리는 좌우편에서 속삭이듯 달려들어 양어깨를 짓누르다가도 어느새 뒷덜미를 파고들곤 했다. 목청높은 협박이 아니라 사람을 은근히 겁에 질리게 하는 고요한 위협이었다."(64)
- 처음 어두운 밤에 압록강을 건넌 여사의 소회

[6] "1924년 12월에 나는 다섯번째로 본국에 들어오게 됐는데, 이 다섯번째의 본국행에서는 임정의 공적인 임무는 띠지 않았다. (...) 이 기간 중에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책을 늘 손에 잡고 있었는데, 학교 교육의 부족을 메우느라 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89)

[7]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하면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집으로 온다.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암요. 해드려야죠. 아직 점심 안 하셨어요? 애 좀 봐주세요. 제가 얼른 점심 지어드릴께요.‘"(96)
- 임정의 어른 백범을 가까이 모신 여사가 기억하는 백범의 소탈한 모습

[8]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안휘, 강서, 호남, 광동,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에 이른 장장 5천 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난 만리장정과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 행각을 만리장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68)

[9] "상해에서 시아버님을 모시던 일, 독립운동자금을 품에 감추고 가슴조이며 거룻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일, 일본군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상해를 빠져나와 기강까지 허겁지겁 도망왔던 일. 그 20년은 숨어 산 20년이었고 쫓겨다닌 20년이었다."(173)

[10] "우리의 독립이 세계질서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우리들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는 않다는 것이 냉엄하고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열강들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결국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223)

[11] "조국의 독립이라는 절대 절명의 대명제 아래 항일투쟁에 뜨거운 피를 뿌려 식혀 가며 몸을 불사른 혁혁한 이름의 투사들에서부터 성명 삼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이름모를 낯선 골짜기에서 항일이라는 돌덩이 하나만을 머리에 베고 숨을 거둔 무명열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 순간이 있었을까? 이름이 났건 이름이 없건간에 그들의 의기와 그들의 피가 없었더라면 결코 8월 15일은 오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233)

[12] "토교로 돌아온 후 중경으로부터 전해 듣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안타깝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들이었다. 남쪽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의 앞잡이들을 그대로 관리로 임용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울분이 복받쳐 올랐다."(236)

[13] "불혹이라는 사십의 나이에 비로소 조국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이역에서 산화한 이들을 동정호 물에 흘려보내면서 조국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 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255)

[14] "간다. 돌아간다. 이제야 나 살던 산천에 간다. 전쟁난민이라고 미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어떠랴. 돼지우리같은 엘에스티 난민선을 타면 어떠랴. 거룻배라도 좋다. 주낙배라도 좋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일엽편주인들 어떠랴.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그렇게 추방당했다."(265)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우리를 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귀국이었고, 참담한 귀향이었다."(269)

[15] "인간만사 새옹지마. 이 한마디는 아흔 살 가까이 살아온 내가 지금 늘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말이다. 사람의 일이란 잘 되고 잘못되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되지 않을까."(287)

[16] "백범은 갔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라고 말했던 백범은 갔다."(294)

[17] "6.25라는 거목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회한의 잔뿌리를 내려 박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마저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런 6.25는 내게 처참하거나 극악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슬그머니 성엄(남편)을 빼앗아 갔고, 맹랑하게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 넣었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315)

[18] "올해 들어서 갑자기 몸이고 정신이고 예전같지가 않으니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가 보다. 그래도 그나마 머리 속에 박혀 있고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길래 없는 글 재주며 부족한 소견으로 원고지를 메웠다."(323)

[19] "아범이 성엄의 일지와 사진들,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을 따로 정성들여 싸놓았다.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들이다. 성엄의 일지 안에는 시아버님을 비롯해서 임정에 몸 담았던 혁명투사들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다. 내가 본국을 드나들던 때의 기록도 빼놓지 않았다. 그 일지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이다."(325)

[20] "비록 셋방이었지만 집안의 흔적이 묻어나는 짐들을 차곡차곡 꾸리는 게 참 보기좋다. 나도 거들어야겠다. 이 아침에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에게 내 손길을 주어야겠다.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그들에게."(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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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30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말들입니다!
 





파인먼 평전과 제임스 글릭의 교양과학서 4부작




 

어렸을 때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이 무척 아쉬운 일이다. 학창 시절에 읽은 책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성인이 되어 블로그와 온라인 서재를 통해 읽고 쓰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싶다. 책을 읽지 않은 아이였기에, 위인전 역시 좋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그림이 들어간 장영실 위인전은 좋아했던 기억이 얼핏 나긴 한다. 하지만 이것도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위인전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위인전을 읽을수록 이들이 나와는 동떨어진,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만 굳어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한 사람의 일생을 제3자가 갈무리한 평전 류의 도서들을 읽게 되었다. 평전이라면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작가의 숭배비판 혹은 평가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작가 연보가 아닌 이상 사실만 나열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평전들은 상당수가 숭배의 대상으로만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우리나라의 위인들만 완전무결한 존재일 리 없는 것이다. 반면 외국 인물에 대한 평전은 꽤나 솔직하다. 개인적인 치부도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건 무엇보다 인물에 대한 개인사가 출간물에서 허용되는, 혹은 터부시되는 영역이 문화권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다. 위인의 모습과 성격이 어떠했는지 간에 그건 그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일 뿐이다. 평전에서는 인물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예를 들면, 수전 손택에 대한 평전 수전 손택(다니엘 슈라이버, 글항아리, 2020)이 바로 떠오른다. 이 책에는 제3자가 바라본 손택의 면모가 다층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손택의 천재적인 능력과 활동가적 지성인의 면모 등이 다루어져 있으면서도, 그녀의 인간적인 미숙함과 단점들(거짓말 잘하기 등), 심지어 찌질해 보이는 면모까지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문화계의 정서로는 익숙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이다. 손택 개인의 치부가 평전에 담겨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나, 독자로서 나는 그녀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그녀의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그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상처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에서 겪고 느꼈을 고통들에 맞선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위인에 대한 평전이라면 어땠을까? 기술되는 위인의 치부까지 노출되어 있는 평전이라면, 아마 그 저자는 후손들의 줄이은 소송제기로 곤란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문화권의 차이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삶의 이해에 관한 관용도의 차이, 문화권마다의 정처 차이로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정답이란 없는 문제다. 하지만 숭배로만 일관된 평전보다 독자에게 인물에 대해 보다 입체적으로 인물의 면모를 제시해주는 것이 평전의 역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새해가 시작되고 첫 평전을 만나게 되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삶을 다룬 평전이다. 사실 절판되었던 천재가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파인먼 평전제목으로 새로 나오게 되었다. 십 수년 전에 나오고 절판되었는데, 다시 출간된다는 문구를 어느 책의 소개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이제야 나오게 된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난주에 파인먼의 강연 몇 가지를 모은 책 과학이란 무엇인가?(승산, 2008)를 읽었는데, 마침 파인먼의 평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새로 출간된 평전의 저자는 제임스 글릭이다. 미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된 교양과학서의 전설 카오스를 쓴 저자이다. 나에게도 그랬지만, 전 세계에 카오스’, ‘나비 효과라는 용어를 각인시킨 인물이 바로 제임스 글릭이지 싶다. 



































 

지금 다시 보니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제임스 글릭의 저서 4권을 출간한 셈이다. 카오스를 비롯하여 인포메이션,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파인먼 평전이렇게 제임스 글릭 4부작이 완성되었다. 이번에 평전이 나온 김에 이 4부작을 다시 역주행을 해볼까 한다. 파인먼 평전을 시작으로, 학창시절에 읽고 나서 기억도 안 나던 카오스, 그리고 읽다가 멈추었던 인포메이션를 이어서 읽어봐야지 싶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일 텐데, 저자가 역사적으로 시간을 이해하려던 인물들의 이야기 조사를 엄청나게 했다는 인상만 남아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파인먼 평전은 번역자도 바뀌었다. 내가 믿고 구매하는 양병찬 번역가가 참여한 결과물이다. 올 초에는 파인먼 평전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제임스 글릭은 기본적으로 저널리스트다. 영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문학을 전공한 기자이자 작가가 과학 분야에 대한 방대한 교양과학서를 쓰고, 과학자에 대한 평전을 써낸 셈이다. 파인먼 평전의 구판인 천재를 읽어보았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대강의 흐름만 기억이 난다. 하지만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의 폭넓은 자료조사와 글쓰기를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것은 나뿐일까 싶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고등학교 때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후 파인먼의 교양서 몇 권을 읽어보았기에 파인먼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 파인먼에 대한 애정을 듬뿍 이야기하는 김상욱 교수도 학창 시절에 파인먼을 만난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학창 시절의 나는 처음에 그의 엉뚱하고 특이한 행동들에 흥미를 느꼈을 테지만, 이런 점들은 파인먼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방송이나 기타 매체에서 파인먼이란 상품을 팔기 위한 표제로 파인먼의 기이한 행동들을 언급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일생 전체를 따라가는 일이다. 그 인물의 장점과 단점, 업적과 치부까지 모두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파인먼은, 어느 누구의 삶도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기이한 행동들로 단정하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특이한(?) 방식으로 물리학에 진정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평전은 인물의 천재성을 충분히 보여주겠지만, 이와 더불어 실수투성이의 인간관계와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함도 아울러 보여준다.


 

나에게 한 인물의 평전을 읽는 일이란 묘사되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숭배비판모두를 접하는 일이다. 평전을 썼던 제임스 글릭의 입장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물에 대해 글을 쓰는 이는 대상에 대한 비판 이전에 대상에 대한 애정, 숭배가 전제된다. 내가 평전을 읽는 이유는 세계에 의도치 않게 내던져진,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의 살아감그 자체가 내게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때론 기술되는 인물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도,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에 공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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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29 2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만이라고 했었는데 뭐가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어요.
평전을 거의 못 읽고 있긴 합니다만 울나라에선 그런 경향이 있긴하죠.
성인용 위인전기. ㅋ 소송 골치 아프죠.
읽어보고 싶긴하네요.
김상욱 교수도 파인먼을 그렇게 좋아하던데..ㅋ

초란공 2023-01-29 20:57   좋아요 2 | URL
아 김상욱 교수도 있었네요. 저도 ‘파인만’이 익숙한데 언제부터 ’파인먼‘이 되었을까요^^;;

고양이라디오 2023-02-10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언제부터 파인먼이 된거죠?
파인먼씨 좋아하는데 이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ㅎ

제임스글릭의 책들도 기대가 됩니다ㅎ
 
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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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꿈꾸며 생()의 관성 넘어서기

- 검은 바이올린




 

검은색은 흔히 죽음과 애도의 색으로 여겨진다. 문명의 관습으로 장례식 때 검은 옷을 입기도 한다. 이에 검은색은 필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여 존재의 부재혹은 결핍의 의미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 자연에서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처럼, 검은색은 색채의 무, 나아가 대상의 식별불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결여와 무지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검은색은 신비스러움과 매혹을 품고 있기도 하다.


 

색채를 키워드로 하여 전개되는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에는 이야기 곳곳에 검은색이 등장한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 검은망토나 검은 흙, 검은 암말과 검은 여왕, 그리고 검은 바이올린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주로 18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리 출신의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카렐스키와 크레모나 출신의 바이올린 제작 명인 에라스무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운명적으로 만난다. 요하네스가 군대에 징집되어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은 요하네스는 몇 달간 회복기간을 거친 후, 마침내 베네치아에 입성한다. 이 때 어느 민가에 6개월 간 머물게 되는데, 이 집의 주인이 바로 에라스무스였다.


 

소설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부와 3부는 요하네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반면, 2부에서는 주로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준다. 에라스무스는 세 가지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우선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 음악과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결국 베네치아 최고의 바이올린 장인이 되었다. 두 번째 열정은 증류주 제조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특한 증류주를 제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번도 장기에서 진 적이 없을 정도로 장기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이 가운데 요하네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라스무스의 집 벽에 걸려 있던 검은 바이올린뿐이었다.


 

에라스무스가 검은 바이올린을 만들게 된 것, 크레모나 출신의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 베네치아에 살게 된 이유, 또 평생 장기두기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까닭은 모두 한 여인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베네치아에 있는 페렌치 공작의 딸 카를라였다. 젊은 시절 신분 차이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눈이 먼 에라스무스는 무모한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카를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바이올린을 제작하겠노라 맹세했던 것이다. 검은 바이올린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신비함과 매혹을 지닌 이 악기는 불행도 가져왔다. 악기가 카를라의 목소리를 소유하게 되자, 에라스무스가 사랑한 여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검은색은 언제든 돌아온다


 

소설 중반에 이르면 30대의 청년 요하네스가 에라스무스에게 고민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밤에 작곡한 노트가 다음 날이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삶을 경험하고 노년에 이른 에라스무스는 청년의 고뇌를 알아차리고는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법이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영혼은 자신의 꿈을 갖고 있기에 네 안에서 꿈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청년의 열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화답한 것이다. 이때 요하네스의 눈에 들어온 검은 바이올린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검은색은 곧 인식의 구멍, 미지의 영역이었다. 청년은 꿈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물었을 때, 노인의 대답은 간결했다. “꿈을 부숴야겠지.”(75)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고자 했던 한 사람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 두 사람이 검은바이올린을 두고 나누던 대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게 검은 바이올린은 열망이 지나쳐 집착하게 된 꿈처럼 여겨진다. 나는 이를 검은 욕망이라 이름 붙였다. ‘검은 바이올린은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끊임없이 존재를 소모해버리는 욕망을 표상한다. 대상 혹은 대상에 대한 지배권을 소유하길 바라는 욕망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꿈이 현실이 되거나, 이루지 못할 꿈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급속히 늙어가기도 할 것이다. 베네치아의 페렌치 공작처럼 말이다. 그는 말년에 딸 카를라와 좋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 같다. 공작이 순식간에 늙고 병들어 보였던이유도 그가 끊임없이 일에 매몰되어 스스로 소진된 삶을 살아갔기 때문일 테다. 그는 언제나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이 때가 바로 꿈을 부술 때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꿈을 부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소설은 내게 두 가지를 일러준다. 하나는 검은 욕망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이를 부순 이들이라면 또다시 꿈을 꾸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꿈이 현실이 되거나 꿈을 부술 때 존재가 해방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해방의 과정은 존재에게 절망과 허무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에라스무스의 스승 프란체스코처럼 말이다. 프란체스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전설적인 명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아들이었다. 이미 최고 수준의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슬픔과 고통으로 생의 나날을 보냈다. 정작 바이올린 제작은 도제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이 때가 바로 프란체스코가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부수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였다.


 

인간의 삶은 존재가 품은 열정만으로 완성되긴 어렵다. 열정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에 이르는 길이 고통스러워도 집착으로 변질된 열정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기도 하다. ‘검은 욕망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든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꿈을 부수고 또다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끊임없이 꿈을 꾸며 생()의 관성을 극복해나가는 것.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내게 귀띔해준 지혜다.



 

삶의 정수는 사랑과 밤의 시간을 필요로한다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의 집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불편한 곳이었지만, 가장 잘 단련된 영혼의 집이기도 했다(54). 집주인은 이 영혼의 집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세 가지 열정, 곧 바이올린 제작, 증류주 제조, 장기 두기에 취한 듯 살았다. 요하네스는 이 영혼의 집에서 검은 바이올린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증류주 만드는 일이 재미있는지 물었다. 집 주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요하네스의 질문에 무심한 듯 화답하는 장인의 말이었다.


 

한 방울 증류주를 얻으려면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네.”(57)

 

그러자 요하네스가 다시 물었다. “많이 필요한가요, 사랑과 시간이?”(58)


 

사랑과 시간이 꿈을 부순 사람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일 것이다. 삶은 욕망과 결핍그리고 때론 욕망이 지나쳐 광기의 형태로 이들이 혼재한 모양새를 띠곤 한다. 비단 소설에 등장하는 두 천재를 떠올리지 않아도 말이다.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검은 욕망은 불현 듯 삶에 뛰어들어 우리를 유혹한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세 가지 열정을 제대로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어느 정도 미쳐야 했다. 그는 54년 동안 매일 저녁 상상의 맞수와 장기를 두었다. 삶의 굴곡을 지나 온 장인에게 한 방울의 증류주란 삶이 일구어낸 정수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에는 젊은 날의 검은 욕망과 광기, 고통과 절망, 허무도 한 방울씩 들었을 테다. 그러니 에라스무스가 한 방울의 증류주를 얻기 까지는 그만큼의 사랑과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럼 도대체 얼마만큼의 사랑과 시간이 필요한지묻자, 바이올린 장인은 이렇게 응답했다.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지. 해마다 다르다네.”(58) 에라스무스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시간에는 적절한 거리감 혹은 균형감도 필요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 삶이 지닌 모습도 그렇다. 결핍을 전제한 욕망과 이것이 넘쳐난 광기가 이루는 긴장은 언젠가 해소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꿈들을 꾸고 살아가는데, 으레 꿈에는 한계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꿈이 현실이 되면 존재가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 이는 에라스무스였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때는 우리 안의 검은 욕망과 광기가 만들어낸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일 것이다. 해방과 허용의 시간은 모든 이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 할 수 있는 밤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시간은 꿈이 현실이 되어 돌아오는 허무감이나 꿈이 부서질 때 찾아오는 절망감, 그리고 이 때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일 것이다. ‘한 방울의 증류주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의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듯, 우리는 욕망으로 인한 영혼의 긴장이 해소되고 해방이 되는 밤의 시간도 필요하다.


 

모든 이가 해방감을 공유할 수 있는 밤의 시간은 베네치아의 사육제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기간에 가면과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참여한다. 축제의 기간 동안은 신분과 계급이 식별불가능하게 무화된다. 삶에서 생겨난 꿈 또는 검은 욕망이 광기와 뒤섞이는, 거대한 밤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견고하고 모든 것이 드러난 에 입은 상처와 고통을 보듬고 견디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의 사육제는 공동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경직된 욕망을 해방시키는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저자는 검은색이 부재와 결핍, 불확실성과 식별불가능성, 불길함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면서 신비함과 매혹의 힘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검은색은 이야기 전반에 등장하며 소설의 지배적인 정서와 주제에 스며들어 있다. 에라스무스가 전하는 그의 인생 이야기는, 진정한 삶이란 눈에 보이는 꿈 혹은 목표의 성취나 대상의 소유에 있기보다 이 꿈들 사이에 머물 때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구멍처럼인식되지 않는 이 사이의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꿀 수 있는 밤의 시간일 테다. 나아가 사이의 시간은 나와 대상을 진심으로 긍정하고 바라보며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 우리는 삶의 슬픔이나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의 시간, 모든 존재가 생의 관성을 극복하고 살아가고자 지속할 수 있는 힘, 사랑의 시간이 되어 준다. 우리가 삶에서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할 이유다




[1] "꼬마야, 너의 열중하던 눈빛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주었단다."(15)

"매일 조금씩 더 바다로 가라앉는 베네치아. 그 고요한 뗏목에는 음악적 영혼들이 많았다."(49)

[2] "한 방울 좋은 증류주를 얻으려면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네."(57)

"많이 필요한가요, 사랑과 시간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지. 해마다 다르다네. 자, 장군일세!"(58)

[3] "맛보게, 요하네스! 첫 모금은 불이지! 두 번째는 비로드같네! 세 번째 모금은 꿈이라네!"(58)

[4] "장기를 제대로 두려면 약간 미쳐야 하네. (...) 광기를 요구하는 유일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59)

"자네가 나처럼 54년 동안 매일 밤 상상의 맞수와 장기를 둔다면 그렇게 되겠지."(59)

[5] "너의 오페라 말이야, 쓰기 전에, 살아야해."(73)

[6] "꿈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꿈을 부숴야겠지."(74)

[7] "알다시피, 천재들의 그 영혼과 광인들의 그 영혼은 거의 같은 것이지."(86)

"매일 밤 같은 꿈이 잠 속으로 돌아오곤 했어."(99)

[8] "한 마디로 베네치아는 꿈과 광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벌이는 거대한 무대였지."(112)

"인생은 연극이야. 단 한 번 공연하는."(127)

[9] "카를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내가 당신 목소리를 소유하겠어요."(138)

[10] "자신의 일생의 작품이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됐어. (...) 이제 이야기와 결별했다."(159)

[11]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천재나 광인에게만 더해지는 영혼을, 자신의 오페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날 밤, 요하네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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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20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3-02-20 20:19   좋아요 1 | URL
저보다 먼저 아셨네요^^ ㅋㅋ 감사합니다~
 
인섹타겟돈 - 곤충이 사라진 세계, 지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까
올리버 밀먼 지음, 황선영 옮김 / 블랙피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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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마저 사라진 실낙원을 상상하며

- 인섹타겟돈(The Insect Crisis)


올리버 밀먼(Oliver Milman) 지음 | [블랙피쉬] | (2022)

 



많은 사람들처럼 봄에 연초록 잎과 함께 피어나는 꽃을 좋아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각별한 기억이 있는 꽃은 아카시아 꽃이다. 입영 통지서를 받고 훈련소에 갔던 때가 5월이었다. 부대 담장을 둘러싸고 흐드러지게 피어 흩날리던 아카시아 꽃과 진한 향기를 아직도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의 사랑과 아카시아 향기는 멋모르고 시작했던 훈련소 생활을 견디게 하고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기억과 함께 맡던 아카시아 향기의 기억이 한낱 과거 속 사건으로 영원히 끝나게 된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 당장 변해버린 현실을 상상해내기란 어렵다. 그런데 요즘 주변을 보면 이 상상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 언젠가부터 규모는 작지만 양봉을 하시던 친척의 벌집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꿀벌의 군집이 겨우내 모두 죽어버리거나 벌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꿀벌의 이상 행동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피부로 실감한 것은 바로 친척이 관리하던 벌집 소식이었다. 그러던 중에 지난 달 신문기사를 보고 그 심각성을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 관련 주소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2212270936001#)


 

이 기사는 지방의 한 지역에서 꿀벌 대량 폐사 및 실종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꿀벌에게 먹이를 공급할 수 있는 숲을 축구장 4700개 면적에 조성한다는 계획을 소개하고 있었다. 물론 꿀벌이 대량으로 죽거나 사라지는 사례는 최근 1-2년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카시아 향기와 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카시아 꿀을 구하는 일이 예전만큼 쉽지 않게 되어버린 변화를 조심스럽게 감지하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걸까? 미디어에서는 전자파의 피해라고 하기도 했다. 또 어느 곳에서는 기후 온난화를 주범으로 들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너무나 흔해보였던 꿀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유가 정말로 궁금했다. 특히 최근에 환경과 인간의 운명에 관한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콜버트의 책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읽은 후여서 그런지 이 현상은 내게 더욱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손에 쥐게 된 책이 바로 인섹타겟돈이다. 이 책은 환경 전문 기자 올리버 밀먼이 곤충이 사라지는 현장과 관련 연구자들을 만나 기록한 보고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섹타겟돈이란 용어는 곤충을 가리키는 인섹트insect'대량 멸종을 시사하는 아마겟돈amageddon’이 더해진 표현이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곤충의 집단 폐사 혹은 소멸 현상을 가리킨다. 과연 곤충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인류가 유입되기만 하면 대형 동물이 사라져버린 사실을 떠올려보면 짐작이 가는 원인 제공자는 있다. 바로 인간 자신이다.


 

그동안 곤충은 작고 미약하면서도 너무나 개체수가 많기에 큰 우려를 자아내지 못했다. 이에 비해 환경 위기를 알리는 대표적 동물인 고래, 북극곰과 같이 카리스마 있는 대형 동물은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효과적으로 언급되던 존재였다. 수십 억 마리로 추정될 정도로 많았던 북아메리카의 나그네 비둘기가 수십 년 만에 멸종했던 역사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인간의 수명으로 한 두세대면 가능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까지 이야기하던 파리나 모기마저도 지구 위의 생태계에서 각자 나름의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저자는 여러 연구자들과 그 결과물을 빌어 일깨워 준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관심사였던 꿀벌의 운명에 대한 정보도 더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현재 전 세계에서 대규모로 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미 미국 전역에서는 4종의 호박벌(bumblebee) 96%가 감소했다고 한다(57). 그럼 과학자들은 꿀벌들의 대량 폐사 원인이 무엇이라고 지목하고 있을까. 자연 생태계는 그 구성원들의 선형적 관계망이 결코 아니다.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을 만큼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유지되는 영역이다. 그 원인을 한 가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기후 변화와 서식지 파괴, 그리고 무분별한 살충제의 사용을 들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거대 제약회사 바이엘이 인수한 몬산토는 라운드업 RoundUp'이라는 제초제로 유명한 기업인데, 전 세계에 이 화학약품을 공급했다. 이 약품의 주요 성분은 글리포세이트인데, 연구에 의하면 벌의 장내 박테리아를 방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꿀벌이 걸릴 수 있는 노제마(장내 기생충)병에 취약하게 만든다.


 

벌을 비롯한 곤충을 집적 겨냥한 살충제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현재 가장 효과가 좋은 살충제 성분은 니코틴과 유사한 새로운 살충제’(168)라는 의미를 지닌 네오니코노이드. 이 약품은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이 만든 제품으로, 지난 30여 년 간 전 세계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 약품의 위험성은 레이철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으로 사용 금지된 살충제 DDT보다 7000배 더 해롭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도 큰 문제다. 유충일 때 이 약품에 노출된 벌은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 비정상적으로 쪼그라든 벌이 된다고 한다. 화학물질 때문에 영구적인 뇌손상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는 꿀벌의 먹이 활동에 실패하고, 그 결과 꿀벌 집단은 치명적인 운명 앞에 놓이게 된다.


 

물론 이런 상황은 꿀벌에게만 해당하는 현상은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해충이라고 분류한 곤충뿐만 아니라 꿀벌, 그리고 나비, 딱정벌레를 비롯하여 결국 우리 인간에게로 돌아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나비가 대량으로 사라졌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쇠똥구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생명력 강하다고 알려진 잠자리마저 핀란드에서는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대형동물뿐만 아니라 이 작고 미약한 곤충들에게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이 와중에도 살충제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회사들은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약품을 꼭 사용해야 한다고 홍보한다.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이들의 위험한 이기심이 인류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권에 로비를 벌이고, 제초제와 암과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려는 과학자들을 비난하며 이들의 결과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직장에서 쫓아내며 방해하기도 한다. 생물학 교수 데이브 굴슨이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보고 인간이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187)라고 말하지만, 이는 분명히 실수가 아니다. 이들의 위험한 행보와 일반인들의 무지는 결코 실수가 아닌 것이다. 앞으로 더 이상의 실수가 반복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인류에게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있을까. 이제는 우리가 생태계에 저지른 잘못을 만회할 기회가 남아있기나 한지조차 의문스럽다.


 

이 책은 곤충이란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곤충은 작고 미약해보여도 우리 생태계를 지탱하는 먹이그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주요 구성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곤충은 우리 생태계의 근본을 이룬다.’(211) 이 책은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곤충들이 사라졌을 때 인류를 기다리게 될 것은 재앙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기후변화나 동물 서식지의 파괴, 살충제와 같은 독성 물질의 사용으로 꿀벌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맞게 될까. 그때야말로 모든 이들 앞에는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들이 생존을 위한 무분별한 투쟁 앞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정말로 이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면, 타락한 인간 세계에 남은 최후의 인간, 5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어땠는지 기억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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