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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ㅣ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평점 :
끊임없이 꿈꾸며 생(生)의 관성 넘어서기
- 《검은 바이올린》
검은색은 흔히 죽음과 애도의 색으로 여겨진다. 문명의 관습으로 장례식 때 검은 옷을 입기도 한다. 이에 검은색은 ‘필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여 존재의 ‘부재’ 혹은 ‘결핍’의 의미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 자연에서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처럼, 검은색은 ‘색채의 무’를, 나아가 대상의 식별불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결여와 무지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검은색은 신비스러움과 매혹을 품고 있기도 하다.
색채를 키워드로 하여 전개되는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에는 이야기 곳곳에 검은색이 등장한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 검은망토나 검은 흙, 검은 암말과 검은 여왕, 그리고 검은 바이올린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주로 18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리 출신의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카렐스키와 크레모나 출신의 바이올린 제작 명인 에라스무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운명적으로 만난다. 요하네스가 군대에 징집되어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은 요하네스는 몇 달간 회복기간을 거친 후, 마침내 베네치아에 입성한다. 이 때 어느 민가에 6개월 간 머물게 되는데, 이 집의 주인이 바로 에라스무스였다.
소설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부와 3부는 요하네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반면, 2부에서는 주로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준다. 에라스무스는 세 가지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우선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 음악과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결국 베네치아 최고의 바이올린 장인이 되었다. 두 번째 열정은 증류주 제조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특한 증류주를 제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번도 장기에서 진 적이 없을 정도로 장기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이 가운데 요하네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라스무스의 집 벽에 걸려 있던 검은 바이올린뿐이었다.
에라스무스가 검은 바이올린을 만들게 된 것, 크레모나 출신의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 베네치아에 살게 된 이유, 또 평생 장기두기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까닭은 모두 한 여인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베네치아에 있는 페렌치 공작의 딸 카를라였다. 젊은 시절 신분 차이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눈이 먼 에라스무스는 무모한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카를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바이올린을 제작하겠노라 맹세했던 것이다. 검은 바이올린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신비함과 매혹을 지닌 이 악기는 불행도 가져왔다. 악기가 카를라의 목소리를 ‘소유’하게 되자, 에라스무스가 사랑한 여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검은색은 언제든 돌아온다
소설 중반에 이르면 30대의 청년 요하네스가 에라스무스에게 고민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밤에 작곡한 노트가 다음 날이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삶을 경험하고 노년에 이른 에라스무스는 청년의 고뇌를 알아차리고는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법’이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영혼은 자신의 꿈을 갖고 있기에 네 안에서 꿈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청년의 열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화답한 것이다. 이때 요하네스의 눈에 들어온 검은 바이올린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검은색은 곧 인식의 구멍, 미지의 영역이었다. 청년은 ‘꿈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노인의 대답은 간결했다. “꿈을 부숴야겠지.”(75)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고자 했던 한 사람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 두 사람이 ‘검은’ 바이올린을 두고 나누던 대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게 ‘검은 바이올린’은 열망이 지나쳐 집착하게 된 꿈처럼 여겨진다. 나는 이를 ‘검은 욕망’이라 이름 붙였다. ‘검은 바이올린’은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끊임없이 존재를 소모해버리는 욕망을 표상한다. 대상 혹은 대상에 대한 지배권을 소유하길 바라는 욕망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꿈이 현실이 되거나, 이루지 못할 꿈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급속히 늙어가기도 할 것이다. 베네치아의 페렌치 공작처럼 말이다. 그는 말년에 딸 카를라와 좋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 같다. 공작이 순식간에 ‘늙고 병들어 보였던’ 이유도 그가 끊임없이 일에 매몰되어 스스로 소진된 삶을 살아갔기 때문일 테다. 그는 언제나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이 때가 바로 ‘꿈을 부술 때’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꿈을 부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소설은 내게 두 가지를 일러준다. 하나는 ‘검은 욕망’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이를 부순 이들이라면 또다시 꿈을 꾸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꿈이 현실이 되거나 꿈을 부술 때 존재가 ‘해방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해방’의 과정은 존재에게 절망과 허무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에라스무스의 스승 프란체스코처럼 말이다. 프란체스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전설적인 명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아들이었다. 이미 최고 수준의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슬픔과 고통으로 생의 나날을 보냈다. 정작 바이올린 제작은 도제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이 때가 바로 프란체스코가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부수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였다.
인간의 삶은 존재가 품은 열정만으로 완성되긴 어렵다. 열정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에 이르는 길이 고통스러워도 집착으로 변질된 열정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기도 하다. ‘검은 욕망’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든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꿈을 부수고 또다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끊임없이 꿈을 꾸며 생(生)의 관성을 극복해나가는 것.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내게 귀띔해준 지혜다.
삶의 정수는 사랑과 밤의 시간을 필요로한다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의 집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불편한 곳이었지만, 가장 잘 단련된 ‘영혼의 집’이기도 했다(54). 집주인은 이 영혼의 집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세 가지 열정, 곧 바이올린 제작, 증류주 제조, 장기 두기에 취한 듯 살았다. 요하네스는 이 영혼의 집에서 ‘검은 바이올린’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증류주 만드는 일이 재미있는지 물었다. 집 주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요하네스의 질문에 무심한 듯 화답하는 장인의 말이었다.
“한 방울 증류주를 얻으려면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네.”(57)
그러자 요하네스가 다시 물었다. “많이 필요한가요, 사랑과 시간이?”(58)
이 ‘사랑과 시간’이 꿈을 부순 사람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일 것이다. 삶은 ‘욕망과 결핍’ 그리고 때론 욕망이 지나쳐 ‘광기’의 형태로 이들이 혼재한 모양새를 띠곤 한다. 비단 소설에 등장하는 두 천재를 떠올리지 않아도 말이다.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검은 욕망’은 불현 듯 삶에 뛰어들어 우리를 유혹한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세 가지 열정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어느 정도 미쳐야 했다. 그는 54년 동안 매일 저녁 상상의 맞수와 장기를 두었다. 삶의 굴곡을 지나 온 장인에게 ‘한 방울의 증류주’란 삶이 일구어낸 ‘정수’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에는 젊은 날의 ‘검은 욕망’과 광기, 고통과 절망, 허무도 한 방울씩 들었을 테다. 그러니 에라스무스가 ‘한 방울의 증류주’를 얻기 까지는 그만큼의 사랑과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럼 도대체 얼마만큼의 사랑과 시간이 필요한지’ 묻자, 바이올린 장인은 이렇게 응답했다.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지. 해마다 다르다네.”(58) 에라스무스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시간’에는 적절한 거리감 혹은 균형감도 필요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 삶이 지닌 모습도 그렇다. 결핍을 전제한 욕망과 이것이 넘쳐난 광기가 이루는 긴장은 언젠가 해소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꿈들을 꾸고 살아가는데, 으레 꿈에는 한계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꿈이 현실이 되면 ‘존재가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 이는 에라스무스였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때는 우리 안의 ‘검은 욕망’과 광기가 만들어낸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일 것이다. 해방과 허용의 시간은 모든 이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 할 수 있는 ‘밤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시간은 꿈이 현실이 되어 돌아오는 허무감이나 꿈이 부서질 때 찾아오는 절망감, 그리고 이 때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일 것이다. ‘한 방울의 증류주’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의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듯, 우리는 욕망으로 인한 영혼의 긴장이 해소되고 해방이 되는 ‘밤의 시간’도 필요하다.
모든 이가 해방감을 공유할 수 있는 ‘밤의 시간’은 베네치아의 사육제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기간에 가면과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참여한다. 축제의 기간 동안은 신분과 계급이 식별불가능하게 무화된다. 삶에서 생겨난 꿈 또는 ‘검은 욕망’이 광기와 뒤섞이는, 거대한 ‘밤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견고하고 모든 것이 드러난 ‘낮’에 입은 상처와 고통을 보듬고 견디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의 사육제는 공동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경직된 욕망을 해방시키는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저자는 검은색이 부재와 결핍, 불확실성과 식별불가능성, 불길함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면서 신비함과 매혹의 힘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검은색은 이야기 전반에 등장하며 소설의 지배적인 정서와 주제에 스며들어 있다. 에라스무스가 전하는 그의 인생 이야기는, 진정한 삶이란 눈에 보이는 꿈 혹은 목표의 성취나 대상의 소유에 있기보다 이 꿈들 사이에 머물 때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구멍처럼’ 인식되지 않는 이 ‘사이의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꿀 수 있는 ‘밤의 시간’일 테다. 나아가 ‘사이의 시간’은 나와 대상을 진심으로 긍정하고 바라보며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 우리는 삶의 슬픔이나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의 시간’은, 모든 존재가 생의 관성을 극복하고 살아가고자 지속할 수 있는 힘, 사랑의 시간이 되어 준다. 우리가 삶에서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할 이유다.
[1] "꼬마야, 너의 열중하던 눈빛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주었단다."(15)
"매일 조금씩 더 바다로 가라앉는 베네치아. 그 고요한 뗏목에는 음악적 영혼들이 많았다."(49)
[2] "한 방울 좋은 증류주를 얻으려면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네."(57)
"많이 필요한가요, 사랑과 시간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지. 해마다 다르다네. 자, 장군일세!"(58)
[3] "맛보게, 요하네스! 첫 모금은 불이지! 두 번째는 비로드같네! 세 번째 모금은 꿈이라네!"(58)
[4] "장기를 제대로 두려면 약간 미쳐야 하네. (...) 광기를 요구하는 유일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59)
"자네가 나처럼 54년 동안 매일 밤 상상의 맞수와 장기를 둔다면 그렇게 되겠지."(59)
[5] "너의 오페라 말이야, 쓰기 전에, 살아야해."(73)
[6] "꿈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꿈을 부숴야겠지."(74)
[7] "알다시피, 천재들의 그 영혼과 광인들의 그 영혼은 거의 같은 것이지."(86)
"매일 밤 같은 꿈이 잠 속으로 돌아오곤 했어."(99)
[8] "한 마디로 베네치아는 꿈과 광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벌이는 거대한 무대였지."(112)
"인생은 연극이야. 단 한 번 공연하는."(127)
[9] "카를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내가 당신 목소리를 소유하겠어요."(138)
[10] "자신의 일생의 작품이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됐어. (...) 이제 이야기와 결별했다."(159)
[11]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천재나 광인에게만 더해지는 영혼을, 자신의 오페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날 밤, 요하네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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