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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평점 :
압록강을 건너 거대한 부조리에 맞섰던 여인
-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 長江日記》를 읽고
몇 년 전 정동의 한 극장에서 본 연극 한 편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노드라마였다. 그녀의 이름은 정묘희.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태어난 그녀는 열 살이던 1910년, 동년배인 김의한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라를 잃었다. 독립운동을 하러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간 후에는 정정화로 개명했다. 나는 여사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전하는 연극을 통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녀가 남긴 회고록 《녹두꽃》(후에 《장강일기》로 바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정화 여사는 처음부터 빼앗긴 조국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집안의 며느리로서 시댁 어른을 모시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이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26년 간 이어진 그녀의 독립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했으며, 시댁 식구와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임정의 안살림을 맡았던 여사의 삶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이기도 했다. 《장강일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임시정부의 속내뿐만 아니라, 이런 여건에도 항일 저항 활동을 이어간 임정 요인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곳곳에 담겨있다. 저자의 기억에는 무장활동을 지휘하던 꿋꿋한 모습의 백범과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라며 아이와 놀아주던 백범의 격의 없는 모습까지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발걸음을 머나먼 타향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릴 때 어른들은 우리가 ‘미국의 도움으로’, 혹은 ‘일본이 원자폭탄에 항복하여’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곁에는 국내 및 해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일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이 개인의 안위에 앞서 ‘무엇이 옳고 그른 길인지 먼저 헤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옳은 길로 향하고자 했던 여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디나 저항의 장이자 삶의 장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세계사 속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던 이들을 증언하고 있다.
회고록에서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저자가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한 대목이다.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의 장으로 뛰어들었던 이들이다. 양복점을 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비밀 연락을 맡은 이세창, 한인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다 전장으로 나간 김철,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정을 찾아온 박재희나 ‘고구마’라는 별명을 가졌던 윤씨 같은 이들이었다. 저자는 임시정부의 어머니들과 아내들의 이름도 호명했다. 이들은 쫒기는 길 위에서도 임정의 살림을 돕고 서로를 보살폈으며 자녀들을 가르쳤다.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문제와 싸우며 가족과 임시정부를 지켜낸 이들 역시 독립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장강일기》는 우리의 독립이 결코 외세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저자는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223)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많은 이들이 일제에 부역하며 변절해갈 때, 어떤 이들은 승산 없어 보이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분연히 저항했다. 후자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당당히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묵묵히 나아갔던 ‘이름 없는 영웅’들에 빚지고 있음을 말이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되찾아주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1] "첫 아이를 잃은 갓 스물 아낙네의 말 못할 심정, 남편없는 시댁에서의 고달픈 시집살이, 며느리를 늘 친딸처럼 감싸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시아버님의 구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망명. 이 모든 조건이나 상황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안개였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방으로 둘러쳐진 장막이었다."(45)
[2] "이 길은 한 여인의 길이다. 열 한 살에 시집와 세상 문을 닫고 규방에 갇히고, 열 아홉에 첫아이를 낳아 잃고, 남편을 떠나보낸, 가슴 얼어 오는 그 모든 사연을 십대의 나이에 모두 치른 한 여인의 길이다."(49)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49)
[3] "상해에 발을 붙인지 달포 남짓 지났을 때였다. 좋게 말하면 대담하고, 아무리 잘 봐준다 해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내 기질이 또 한번 살아나기 시작했다. (...) 국내에 들어가서 돈을 구해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55)
[4] "열차에 오르기 직전 친오라버니같은 그분이 미소를 띠며 거센 평안도 사투리로 내게 한 말을 되씹어 볼수록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60)
[5] "밤의 강 소리는 사람을 위협한다. (...) 전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서도 사방에서 사람을 옥죄고 들었다. (...) 방향을 알 수 없는 이 곳 저 곳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물소리는 좌우편에서 속삭이듯 달려들어 양어깨를 짓누르다가도 어느새 뒷덜미를 파고들곤 했다. 목청높은 협박이 아니라 사람을 은근히 겁에 질리게 하는 고요한 위협이었다."(64) - 처음 어두운 밤에 압록강을 건넌 여사의 소회
[6] "1924년 12월에 나는 다섯번째로 본국에 들어오게 됐는데, 이 다섯번째의 본국행에서는 임정의 공적인 임무는 띠지 않았다. (...) 이 기간 중에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책을 늘 손에 잡고 있었는데, 학교 교육의 부족을 메우느라 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89)
[7]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하면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집으로 온다.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암요. 해드려야죠. 아직 점심 안 하셨어요? 애 좀 봐주세요. 제가 얼른 점심 지어드릴께요.‘"(96) - 임정의 어른 백범을 가까이 모신 여사가 기억하는 백범의 소탈한 모습
[8]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안휘, 강서, 호남, 광동,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에 이른 장장 5천 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난 만리장정과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 행각을 만리장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68)
[9] "상해에서 시아버님을 모시던 일, 독립운동자금을 품에 감추고 가슴조이며 거룻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일, 일본군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상해를 빠져나와 기강까지 허겁지겁 도망왔던 일. 그 20년은 숨어 산 20년이었고 쫓겨다닌 20년이었다."(173)
[10] "우리의 독립이 세계질서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우리들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는 않다는 것이 냉엄하고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열강들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결국 독립은 독립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223)
[11] "조국의 독립이라는 절대 절명의 대명제 아래 항일투쟁에 뜨거운 피를 뿌려 식혀 가며 몸을 불사른 혁혁한 이름의 투사들에서부터 성명 삼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이름모를 낯선 골짜기에서 항일이라는 돌덩이 하나만을 머리에 베고 숨을 거둔 무명열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 순간이 있었을까? 이름이 났건 이름이 없건간에 그들의 의기와 그들의 피가 없었더라면 결코 8월 15일은 오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233)
[12] "토교로 돌아온 후 중경으로부터 전해 듣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안타깝고 가슴 답답한 이야기들이었다. 남쪽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의 앞잡이들을 그대로 관리로 임용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울분이 복받쳐 올랐다."(236)
[13] "불혹이라는 사십의 나이에 비로소 조국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이역에서 산화한 이들을 동정호 물에 흘려보내면서 조국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 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255)
[14] "간다. 돌아간다. 이제야 나 살던 산천에 간다. 전쟁난민이라고 미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어떠랴. 돼지우리같은 엘에스티 난민선을 타면 어떠랴. 거룻배라도 좋다. 주낙배라도 좋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일엽편주인들 어떠랴.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그렇게 추방당했다."(265)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우리를 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귀국이었고, 참담한 귀향이었다."(269)
[15] "인간만사 새옹지마. 이 한마디는 아흔 살 가까이 살아온 내가 지금 늘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말이다. 사람의 일이란 잘 되고 잘못되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되지 않을까."(287)
[16] "백범은 갔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라고 말했던 백범은 갔다."(294)
[17] "6.25라는 거목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회한의 잔뿌리를 내려 박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마저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런 6.25는 내게 처참하거나 극악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슬그머니 성엄(남편)을 빼앗아 갔고, 맹랑하게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 넣었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315)
[18] "올해 들어서 갑자기 몸이고 정신이고 예전같지가 않으니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가 보다. 그래도 그나마 머리 속에 박혀 있고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길래 없는 글 재주며 부족한 소견으로 원고지를 메웠다."(323)
[19] "아범이 성엄의 일지와 사진들,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을 따로 정성들여 싸놓았다.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들이다. 성엄의 일지 안에는 시아버님을 비롯해서 임정에 몸 담았던 혁명투사들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다. 내가 본국을 드나들던 때의 기록도 빼놓지 않았다. 그 일지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이다."(325)
[20] "비록 셋방이었지만 집안의 흔적이 묻어나는 짐들을 차곡차곡 꾸리는 게 참 보기좋다. 나도 거들어야겠다. 이 아침에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에게 내 손길을 주어야겠다.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그들에게."(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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