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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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란 사람은 참 대단하다
어쩜 이렇게도 관심 분야가 다양한지 모르겠다
단순히 책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평전까지 쓸 수 있는 그 열정과 능력이 놀랍다
비록 주류 해석과는 다르고 (아마 기존 해석에 대한 반발심으로 책을 쓴 거겠지만) 전문적이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그가 읽은 방대한 분량의 참고 서적을 생각하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법대 교수라면 자기 전공과도 별 상관이 없는데, 이런 열정으로 사시 도전했으면 분명히 합격했을 것 같다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강의하면서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것도 그의 지적 세계를 한층 넓혀줬을 것이다
역시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결정짓는가...

지난 번 카프카나 까뮈는 작품 해설에서 좀 어려웠는데 이번 에리히 프롬은 사상가라서 그런지 쉽고 간결하다
에리히 프롬이라면 유명한 저서 "사랑의 기술" 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우리들의 천국" 에서 홍학표를 좋아하는 염정아가 밑줄 그으며 읽던 책이다
그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뜻이다
박홍규는 프롬이 이 책 때문에 단지 수필가 정도로 인식된 것 같다면서 불만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프롬은 아나키스트적 혁명가다!!

그는 유태인인이지만 마르크스처럼 반유태주의를 표방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건국에 따른 폭력성을 비판한다
또 무종교인이기도 했다
비록 그의 사상적 토대가 엄격한 윤리 의식에 기초한 탈무드였지만 말이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억압한다고 본 프롬이 종교의 권위를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박홍규는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까뮈나 카프카도 마찬가지다

프롬은 정신분석학자인데 미국으로 건너간 뒤 임상 실험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학문으로서의 정신분석이 연구된 반면, 미국은 치료 위주였기 때문에 의사가 아닌 프롬에게 제재를 가한 것이다
결국 그는 그에 대한 반발로 멕시코로 간 뒤 20여년을 산다
유럽의 지식인이 미국 대신 제 3세계로 갔다는 게 좀 의아하면서도 그의 자유로움을 반증하는 예처럼 느껴진다
프롬은 정신분석을 교사나 간호사, 사회 복지사 등에게까지 확대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당연하지 않은가?
정신과 의사들이 자기 영역을 내줄 리가 없다

프롬의 핵심 사상은 주체성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꼭 프롬 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 사상가들은 자기 머리로 사유하는 주체적 의식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인간 소외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까?
소외란 나라는 존재 대신 주변 환경에 의해 내가 지배당하는 것을 말한다
매스 미디어에 휩쓸려 유행을 쫒는 것도 소외의 한 양식이다
프롬은 모든 종류의 권위를 거부한다
혈연, 지연, 학연, 종교, 국가, 심지어 부모의 권위도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곧 자유라고 말한다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부모에 의한 독립은,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어렵다
우리나라처럼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에서는 특히 그럴 것이다
프롬은 애착을 좋지 않은 것으로 봤다
그는 성숙한 사랑의 기본 조건을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종류의 보호로부터 독립되기를 주장했다

권위로부터의 진정한 독립, 과연 가능할까?
사실 주위를 둘러 보면 꼭 파시스트 국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행동을 규제하는 권위들이 널려 있다
사회적 관습이나 도덕적 규범 역시 권위의 일종이고, 대중 매체나 유행 등도 하나의 권위다
인간 사회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동안 과연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긴 전체로부터의 자유는 불가능할지라도 가능한 많이 자유로운 걸 추구할 수는 있겠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사랑에 대한 정의였다
"사랑의 기술" 을 읽어 봐야겠다
프롬은 사랑의 조건으로 배려, 존경, 지식, 책임 등을 들었다
"Flow" 에서도 똑같이 설명된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연인의 성장을 돕는 것 이게 바로 사랑의 핵심이다
배려란 파트너가 성장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것이고, 책임이란 성장에 공헌하는 것이며, 존경이란 그 성장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지식이란 상대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환상을 깨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연마와 정신 집중, 인내 등이 필요하다
기술 습득은 플로우와 비슷하다
노력을 해야 얻는다는 얘기다
한 눈에 반할수는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절대 자연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철학자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읽으면 육체적 사랑은 그저 하위 개념에 지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상대방이 사회적,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대단히 고차원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가족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할까?
이을테면 엄마, 아빠는 나를 대단히 사랑한다
그들은 내 성장 발전을 누구보다 적극 지지하고 나에게 최고의 관심을 보인다
내 성장이 곧 그들의 기쁨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는 그렇지 않다
친밀한 관계이긴 하지만 그 애는 나의 성장보다 다른 것을  더 원한다
한 가족이 되면 변할까?
결혼에 대해서도 그렇다
난 모든 것을 아빠에게 미뤄 버린다
즉 아빠의 권위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아빠가 하라고 한 거니까 좋은 거겠지, 잘못되도 아빠 탓이라고 책임돌릴 데가 있겠지 이런 심리로 말이다
적어도 결혼에 대해서는 보다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 것 같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란 말은 당연한 얘기다
연애와 결혼은 격이 다른 문제다
평생 함께 사는 것과 좋을 때만 만나는 연애가 같을 수 있겠는가?

죽음애적 성향은 새로운 개념이었다
파괴 본능이나 공격성 같이 네거티브한 성격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자기애적 성향도 주변에 무관심하고 자신에게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프롬은 단순히 파괴적 본능 때문에 공격적일 때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공격은 부정적이지 않다고 했다
이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곧 휴머니즘을 말한다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주체성을 갖고 타인과 사회에 대해서는 휴머니즘을 지향하라는 얘기다
진정한 개인주의의 성립이랄까?
주체성을 가진 개인이 모여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것, 권위주의와 민족주의, 모든 형태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게 요즘 주류를 이루는 탈근대적 사고 방식 같다

프롬은 모든 권위와 현상에 대해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 하라고 설파하다
이 말은 3천년 전 소크라테스도 한 얘기다
상식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네 머리로 직접 판단한 뒤 끊임없이 의심해 보고 옳은지 그른지 결정하라고 가르쳤다
서양 사상은 확실히 수용적인 동양 사상과 다르다
훨씬 회의적이고 공격적이라고 할까?
민주주의가 서양에서 태생된 배경이 이해된다
프롬은 불복종이 반드시 비폭력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간디는 비폭력을 불복종의 한 형태로 사용했을 뿐이다
불복종이란 권위에 대한 거부,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자유도 그런 적극적인 개념이다
단순히 타인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권위로부터 벗어나 내 머리로 사고하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다
이 때의 권위는 국가와 가족, 종교까지도 포함한다
애국심이나 가족애, 신앙 등도 인간을 억압하는 권위의 한 형태라면 진정한 자유란 참 획득하기 어려운 것 같다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프롬은 홀로 있기를 연습하라고 했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과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느낌은 삶의 행복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감정이다
프롬도 행복을 자기 자신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단순히 쾌락만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쾌락이 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념과 합치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게 바로 행복이다
프롬은 홀로 있기를 연습하고 자기 연마를 하라고 충고한다
삶이나 사랑도 공부처럼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술이니까

프롬이 정의한 희망이 참 마음에 든다
희망이란 "공허한 상태를 무엇인가로 채우고자 하는 충동으로, 물질의 획득이 아닌 비전의 실현을 향한 능동적인 감정" 이라고 정의했다
희망의 목표는 충실감에 가득찬 상태로 비참한 존재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아마 칙센트미하이가 정의한 플로우와 같은 개념일 것이다
물질의 획득이 아닌 비전의 실현을 향한 능동적인 감정!!
충실감에 가득찬 상태가 되기 위한 노력!!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희망이란 어찌나 비루하고 유치했던지 모르겠다
내가 품은 희망은 기껏해야 물질적이고 안정적인 눈에 보이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물질의 획득은 희망이 아니라고 했다
대체 나에게 비전이라는 게 있었나?
그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능동적인" 감정이란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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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수수께끼 - 역사 속으로 떠나는 우리말 여행
시정곤 외 지음 / 김영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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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좌절을 안겨 준 책
사실 나는 맞춤법이라든가 우리말 문법 같은데 관심이 많은데 쉽게 읽을 수가 없다
국문학과 안 가길 잘했다고 해야 하나?
어렵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이 책은 한글 창제나 외래어 표기 등 좀 흥미있는 주제를 다룬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재미없다
솔직히 잘 이해도 안 간다
아무래도 밑줄 그으며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세종대왕이 음성학자였음은 당연하다
일단 글자 창조 자체가 획기적인 발상 아닌가?
본인이 음성학에 관심이 없었다면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어쩜 발음 기관을을 본따 만들 생각을 다 했을까?
신숙주는 그 옛날에 요동땅으로 중국인 음성학자를 만나기 위해 일곱 번을 왕래했다고 하니, 귀한 몸이 참 고생 많이 했겠다
최만리의 상소를 읽으며 숭유가 곧 사대이고 당시의 가장 중요한 가치였음을 새삼 느꼈다
지금 눈으로 보면 중국에 예속된 정신적 식민지 상태지만, 서양에서도 민족국가란 개념이 겨우 근대에 생긴 걸 생각해 보자
과거 우리는 중국과 같은 공동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과 개념 자체가 다른데 현재의 기준으로 그들을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현전에서 한글 창제에 동참한 신숙주나 성삼문 등도 중국 발음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숭유나 사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받아 들였고, 주체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얘기다
최만리나 신숙주 등은 그저 어디에 중점을 두냐의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한 것이다
그러니 성삼문 등이 사육신의 난을 일으켰지

한글과 가림토나 신대문자의 관계는 사실 별 게 없다고 한다
속이 좀 시원하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글이 생각할수록 고마운데,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깍는 것 같아 가림토 등의 출현이 불편했다
그런데 지은이는 그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다
왜 무관한 것인지 밝혀야 할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저자들이 참 글을 못 쓴다
교수들이라고 하는데 어쩜 이렇게 글을 못 쓰는지...

한글 맞춤법을 제정할 때 최현배는 품사과 형태를 중요시 했는데 박승빈은 소리나는 그대로 쓸 것을 주장했다
소리나는 대로 쓰면 편하긴 하겠지만 왠지 글자 모양이 어색할 것 같다
기존의 방식에 익숙해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어 자체의 모양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현재의 형태주의가 더 좋다

향찰이나 이두에 대한 얘기는 정말 너무 지루해서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중국과 달리 우리 말순으로 한자를 풀어 쓴 게 이두라고 하는데, 향가 해석에는 손발 다 들었다
국어학자들 꽤나 머리 아프겠다
음운론이나 통사론 말고 국문학이나 역사가 훨씬 재밌다
맞춤법에 대한 책을 한 권 구입해 참조하고 교양으로 읽는 건 포기해야겠다
너무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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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메튜 베틀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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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책 빌릴 때는 몇 장 읽어 보고 판단하자
정말 실망스럽다
지루한 역사적 사실이 나열,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다
도서관에 대한 개인적 애정, 책에 대한 열정 뭐 이런 수필류였는데 정말 우울하다
도서관의 역사만 길게 나열한 이런 책은 필요없는데...
결국 1/3 읽다가 덮어 버렸다
좋든 나쁘든 일단 집어든 책은 다 읽고 싶은데 이번 주에 벌써 두 권이나 못 읽었다
앞으로는 꼭 미리 보고 판단할 것!!

사실 나는 도서관이 너무 좋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전부 사려고 들면 돈도 돈이지만 책 보관할 곳도 없을 것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읽기는 참 어렵다
아무리 감동을 받아도 또다시 펼쳐 들기는 어렵다
읽고 싶은 책이 무한히 많은데 다시 들춰 보기 어렵다
물론 바쁘면 도서관 가는 대신 사서 읽겠지만 말이다
난 정말 도서관이 좋다
세금 내는 게 고맙다

가끔 사서하면 어떨까 싶기도 한다
신간 많이 사는 곳에 사서로 근무하면 원없이 책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긴 막상 일이 되면 스트레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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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2-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알라딘에서 보고 사려고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오프라인에서 보고 포기했다지요.

marine 2004-12-07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랑 똑같네요 전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했는데 어찌나 재미없던지 도서관에 미안할 정도였답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 평전 프로그래시브 에듀케이션 클래식 2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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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이 책 제목을 듣고 김혜자 에세이집이라고 생각했을까?
왠 착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김혜자가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운동 하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연관을 시켰던 것 같다
간혹 착각은 우리를 황당하게 만든다

교사인 엄마 말에 따르면 요즘 교육계에서는 이 책 제목이 유행이라고 한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페레가 한 말인지 박홍규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체벌 논란이 한창인 요즘 정답을 주는 말 같다
체벌은 폭력 문화를 낳는다
인권이 발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될수록, 또 박홍규가 꿈꾸는 아나키즘적인 세상이 될수록 모든 종류의 폭력과 억압이 사라지리라 믿는다
체벌이 교육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아이를 어른이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에서도 읽은 말이지만, 나는 본성을 더 믿는 편이다
과연 교육의 효과가 얼마나 될까?
결국 근대의 교육이란 지배와 복종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학교는 규율을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고 근본적으로 국가와 사회, 모든 종류의 기득권과 권위에 복종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지식 전달의 창구로 작용한다
대안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간다

페레가 주장하는 교육이란 간단히 말해 주체성을 가지고 모든 권위에 저항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성 양성이다
지식 전달이나 사회화는 목표가 아니다
한국 교육계를 봐도 지식 전달은 학원에서 훨씬 잘 한다
사회화도 굳이 학교에서 체험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의미로 보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은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학연이라는 인맥을 위한 것 같기도 하다
나도 그랬지만 고등학교만 가면 수업 시간에 자고 학원에서 배운다
한국의 학교는 대학 진학을 위한 중간 거점 역할 밖에 못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목적에도 부합되지 못한다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3년 동안 배울 내용을 2년 만에 끝내고 고 3 때는 수업 시간에도 문제집만 푼다
음악, 미술, 체육 같은 예체능 과목은 아예 1학년 때 다 끝내 버린다
지금도 이런 기형적인 시스템으로 학교가 운영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은 학생들의 자율성이 많이 신장되고 어지간 하면 대학은 다 가니까 좀 바뀌었을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연예인이 선망 직종 1위에 오를 만큼 다양화 되었으니까

만약 내 아이라면 나는 어떤 학교로 보낼까?
대안 학교도 사실은 불안하다
주류에서 벗어난 시스템이 인정을 받으려면 주류보다 두 배는 더 훌륭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 정도로 효율적인 시스템이 쉽게 존재할까?
솔직히 페레의 교육 시스템도 신뢰감이 잘 안 간다
뭐, 지금까지 자유 학교가 유지되는 걸로 보면 지속성을 가질 정도로 견고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성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
페레는 완전히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교재도 그저 부수적인 역할 밖에 안 하고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교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교사는 학생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평등한 관계다
또 학부모와 지역 사회 역시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다
교사가 학생에게 전권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학생과 상의하면서 교육 방향을 결정한다
과연 10여 세의 어린이들에게 이것이 가능할까?

페레의 자유 학교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린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 때 목표는 지적인 인간 혹은 도덕적이거나 규범적인 모범생 양성이어서는 안 된다
상벌의 폐지는 당연한 얘기다
평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기 때문이다
페레처럼 자유 학교 시스템으로 아이를 교육시키면 정말 그 애가 완전히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의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 진정한 휴머니즘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이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유토피아는 불가능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살기 좋아질지 모른다

사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들이 살아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업 교육을 통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지식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필요한 사람만 배우는 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페레가 말하는 그 "자유로운 인간상" 인지도 모른다
미적분이 사는 데 얼마나 필요할까?
국어나 영어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페레는 과학 교육을 대단히 중시한다
과학은 과거의 무지와 교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합리적인 눈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 방식이다
그러므로 일반 학교에서 열심히 외우는 과학 이론의 나열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가르친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세상이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남아 있다
과연 이렇게 배운 아이들이 과연 경쟁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자유 학교 아이들이 기득권층에 편입할 수 있다면 이 학교는 곧 주류로 승격할 것이다
인간은 편견과 어리석음에 차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익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유 학교가 기득권 획득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당장 아이들들 이 곳으로 보낼 것이다
아무리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판단한다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획득에 실패한다면, 즉 생각없는 부자 대신 지각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은 대부분이 거부할 것이다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유 학교가 통할 수 있을까?
구조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자유 학교는 그저 꿈으로만 존재하든가, 아니면 소외 계층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다
자유 학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할까?

페레는 끔찍하게도 사형당하고 만다
바스크 민족에 대한 발포를 거부한 군사 반란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언도받는다
가히 스페인의 박정희 시대라 할 만 하다
체포 한 달 만에 사형당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그 전에 자유 학교 문제로 당국에 찍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전에도 모던 스쿨의 사서가 국왕 암살을 기도해 체포된 적이 있다
그 일로 모던 스쿨은 문을 닫는다
그렇지만 페레의 자유주의 교육은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 오늘날에도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다
특히 영국의 섬머 힐이 대표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교육의 다양화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대는 탈권위주의와 다원화로 대표되는 시대다
한 가지 방법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시대 정신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다양한 형식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저자 박홍규는 정말 대단하다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어쩜 이렇게 다양한 인문학적 관심을 유지하고 글을 쓰는지...
강준만 보다 한 수, 아니 몇 수 위다
글도 전체적으로 다 수준있다
자유주의 교육을 역설하는 자리에서 전교조 선생들에게 날린 한 마디
교사들의 인권을 주장하려면 학생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체벌도 폭력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참교육 운운하는 전교조 선생들도 아이들 통제하려면 체벌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단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위선과 착각이 인간의 본래 모습은 아닐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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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대하여
마이클 왈쩌 지음, 송재우 옮김 / 미토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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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란 무엇인가?
흔히 중용의 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보다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개념이라는 느낌이 든다
제목을 그럴싸 하게 번역하지 않고 원저 그대로 딱딱하게 번역한 것부터 만만치 않은 책임을 보여준다
겨우 200페이지 짜리인데도 내용이 녹녹치 않다
강의록을 출간한 거라고 그런지 문체가 건조하고 어렵다
상당한 집중을 요한다
어제 졸면서 봤더니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약하면서 읽으니까 좀 낫다
역시 집중이 중요하다

홍세화 책에서 처음 들은 톨레랑스의 진짜 뜻을 알게 된 기분이다
그 때는 단순히 타인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태도 정도로만 알았는데 진정한 의미의 톨레랑스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적극적이고 심지어 전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야 단일 민족 국가로 오래 살아 와서 특별히 부각된 적이 없지만, 소수 민족이나 이민자 문제는 유럽에서 심각한 것 같다
당장 미국만 해도 전형적인 다민족 국가가 아닌가?
새뮤얼 헌팅턴은 이들에 대해 지나친 관용이 미국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하지만, 저자의 책을 읽으면 지배 계층의 억압 논리라는 생각이 든다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적극적 의미의 관용은 내전이나 전쟁을 막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유태인이지만 소수 민족의 정체성 유지는 늘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나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으로서의 관용은 용인되지만 집단으로서의 관용은 억압하는 것이 국가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민족 국가는 종교나 혈연으로 구성된 단체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다
프랑스는 이민자 사회이면서도 동화가 워낙 잘 되서 특별히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프랑스는 공화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기 위해 소수 민족들이 집단으로 권리 행사하는 것을 저지한다
대신 개인으로서의 차이는 얼마든지 용인해 준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닐까?
로마 제국이 세금만 내면 각 민족의 자치성을 보장해 준 것처럼 말이다
물론 현대 국가는 집단의 자치성은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혹시 조선도 중국과 공존하기 위한 관용의 형태로써 사대주의를 표방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이 조선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다
이처럼 관용은 권력 관계가 내제되어 있다
관용을 베푸는 쪽은 힘이 있는 쪽이고 관용을 받는 쪽은 힘이 약한 쪽이다
지배 계층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약자들에게 차이를 인정해 준다
다양한 양식의 관용이 존재하지만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과감히 배제해야 한다

다민족 국가가 연방제에서는 집단을 대상으로 관용을 베푼다
이 집단은 자치권을 갖고 있고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해 이탈자를 응징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집단이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작용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난다
그러나 다수에게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주장하려면 집단으로 대항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완벽한 동화가 옳은지, 아니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게 옳은지...

관용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허용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게임에 경쟁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방해꾼은 추방해야 한다
즉 나와 다른 타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룰 자체를 깨는 사람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비인도주의적인 관습도 당연히 비관용의 대상이다
이슬람의 여성 차별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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