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전작보다는 좀 떨어지는 책이다
사랑, 혹은 남녀 관계에 대한 그의 뛰어난 성찰이 돋보이는 두 권의 책들보다는 실망스럽다
그래도 평작은 된다
작가의 필력이 워낙 상당하니까
그는 여행하면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들을 유명한 사람들의 기행문과 섞어서 글을 전개키신다
그래서 다소 산만한 면도 있다
아무래도 철학을 공부해서인지 위인들의 저술에 관심이 많고 또 그들을 신뢰하는 것 같다

그는 특히 플로베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드 보통의 삶의 철학 산책" 에서도 "보봐리 부인" 에 관해서 긴 글을 썼는데 여기서도 플로베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플로베르는 특이하게도 프랑스 사회를 혐오하고 이집트를 동경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이집트도 동양으로  불린다
그러니 우리나라나 일본을 극동이라 하겠지
어쨌든 미개하다고 알려진 19세기의 이집트를 동경해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평생을 두고 그리워 한다
플로베르가 혐오하는 프랑스 사회의 특징은 부르주아의 위선이었다
있는 척, 고상한 척 하는 허위 의식에 염증을 내면서 차라리 이집트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의 순박함을 편하게 느꼈다
정작 본인도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아 부르주아 계급에 합류했으면서도 말이다

드 보통은 특정한 문화권이 마음에 드는 이유를 자신의 기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동의하는 바다
이국적인 정서가 호기심을 끌고 특정 문화권의 가치 체계와 내 기질과 일치하다고 느끼면, 자신이 속한 사회에 더욱 염증을 느끼면서 타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커져 갈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은 얻기 어려울 것 같다
경쟁적인 한국 사회가 싫다고 호주나 미국 등지로 이민간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혹시 60년대처럼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릴 때라면 몰라도 사람 사는 곳은 다 엇비슷 할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는 타 문화권에 대한 환상이 강하다는 얘기다
플루베르 역시 이집트에서 평생을 살게 된다면 프랑스 못지 않은 수많은 문제점에 부딪칠 것이다
여행과 거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저자는 자연이 주는 숭고미를 여행의 의미 중 하나로 꼽는다
이 번역된 단어가 올바른 느낌을 전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랜드 케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등의 대자연 앞에 서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면서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단순히 볼거리를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른바 "관광" 이라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외로울 때는 오히려 고속도로의 휴게소 같은 쓸쓸한 장소로 떠나야 한다는 저자의 충고에 동의한다
원래 군중 속의 고독 같은 상대적 외로움이 더 견디기 힘든 법이다
나 뿐만 아니라 타인도 혼자 있다면 내가 겪는 외로움은 평범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다들 즐겁게 어울리는데 나만 소외되어 있다면 나는 훨씬 더 큰 외로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모텔이나 주유소 그림 등을 통해 보여 주는 이러한 충고는 참으로 적절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는 순간 현대인의 고독 같은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는데, 남들도 다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우리는 소유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단지 사진 속에 풍경을 가두는 것만으로는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러스킨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직접 그리고 글로 묘사하라고 권한다
그는 데생이 외국어나 수학처럼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라고 누구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을 직접 묘사하면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관찰력도 향상될 수 밖에 없다
즉 사진을 찍는 것은 자연을 수동적으로 대하는 것이지만 (셔터만 누르면 되니까), 직접 그린다고 생각하면 풀잎에 맺힌 이슬 방울까지도 주의깊게 보게 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것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좋은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겠지만 데생하면서 자연을 보다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 특징을 잡아 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자신있는 것은 글로 묘사하는 것이다
여지껏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그저 감탄할 줄 밖에 몰랐는데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해 보도록 애쓰겠다
기행문이란 단순히 여정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행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자세히 서술하는 과정임을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고흐가 살았던 프로방스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팡세는 풍경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그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고는 감탄한다고 비웃었지만, 화가란 자연을 모방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저자는 반론을 편다
즉 화가는 자연을 똑같이 묘사할 필요가 없다
그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또 그 감정에 대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제일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흐일 것이다
(현대 추상 미술은 제쳐 두고)
고흐는 프로방스의 자연을 그릴 때 강렬한 원색을 썼다
말하자면 그는 프로방스의 밀밭이나 교회 등을 볼 때 격렬하고 화려한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흐의 그림을 통해 프로방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호기심일 것이다
훔볼트는 아메리카 적도 지역을 여행한 후 자연 생태계 보고서를 쓴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의 마드리드 여행과 훔볼트의 아메리카 여행을 비교하면서 호기심이 여행의 질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설명한다
훔볼트는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호기심의 소유자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자연 환경과 인간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표한다
저자는 마드리드의 문화에 대해 별 흥미가 없다
그의 스페인 여행이 지루한 것은 당연하다
반면 훔볼트는 여행지의 모든 풍경에 대한 관심이 왕성하다
그가 흥분하면서 여행기를 쓰는 것도 당연하다
저자는 훔볼트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마드리드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여행을 시작한다
예술품처럼 여행도 심미안이 있어야 진짜 맛을 알게 되는 모양이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내용은 여행에 대한 기대 부분이었다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역시 드 보통이군,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여행지로 떠난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환경은 며칠만 머물러도 금방 식상해진다
우리의 감각은 쉽게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적응한다고 해야 하나?
기대감이 사라지면 일상의 불편함을 더욱 분명히 느끼게 된다
사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은 지루하고 식상하긴 하지만, 적응된 곳이다
여행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락한 곳이다
여행지의 기대감이 사라지면, 즉 실체를 접하고 나면 결국 집 떠나온 불편함만 남을 것이다
익숙한 곳으로의 회귀라고 할까?

마지막으로 "자기 방으로의 여행" 에 대해 언급하겠다
어찌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한데, 자신의 주변 환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들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익숙한 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끔 새로운 시각으로 주위를 둘러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물론 얼마나 호기심이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생활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아주 재밌지는 않았다
또 워낙 바빠서 띄엄띄엄 읽어 산만했다
그렇지만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
제목 그대로 여행에 대한 새 기술을 습득한 기분이다
풍경을 그림이나 글로 묘사하라던가,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을 갖으면 다르게 보인다는 말 등이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가까운 곳을 여행하더라도 반드시 기행문, 혹은 감상문을 쓰겠다
그래야 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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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Flow -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최인수 옮김 / 한울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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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히 최고라 할 만 하다
책이라고는 자기 계발서 밖에 안 읽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앤서니 라빈스 책도 퍽 인상적이었는데, 이 책은 한 수 위다
가히 자기계발서 중에서 최고라 할 만 하다
아니, 이건 자기 계발서도 아니다
심리학 책이다
칙센트마하이의 책은 "몰입의 기술" 을 처음 접했는데 솔직히 그 때는 별 감동이 없었다
연구 결과가 너무 많아 평범한 독자의 흥미를 떨어뜨린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번 책은 나 같이 결론만 필요한 독자들을 위해 복잡한 데이터는 다 빼고 간단히 결론만 언급하고 있어서 정말 읽기 편하다
그 사이 책을 많이 써서 쓰는 기술이 늘었나?
아니면 번역을 잘 해서인가?
이런 교수에게 사사받으면 존경심이 장난 아닐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꼭 읽히고 싶은 너무 멋진 책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인생의 행복을 알려 주는 비서라고 할까?

자기 통제감에 관한 욕구는 무척 컸지만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완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히 나 자신에게 적용할 생각은 못하고 이상적인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상상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나 자신의 완벽함을 상상했다면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될텐데, 아쉽다
늘 내가 아닌 보다 완벽한 나의 대리인이 세상과 멋지게 싸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니 나는 더욱 작아서 그 대리인 뒤에 숨을 뿐이다
나는 어쩌면 몇 년 동안 이상향과 현실의 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 채 살았는지도 모른다

일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감정과 욕구들을 전혀 다스릴 수가 없었다
몸은 그렇다 쳐도 최소한 기분 정도는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게 엉망이었다
일도 힘들고 생활이 엉망이 되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사실 쉬려고 했던 것도 나 자신을 추스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쉬면서 완벽해지기 위한 연습을 하리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자기 통제란 가능하며 또 필수적이다는 걸 알았다
즉 완벽해지기 위해 애쓸 게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통제와 완벽함은 다르다
완벽은 이룰 수 없는 집착이지만 자기 통제는 누구나 노력해야 할 덕목이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기쁨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요즘은 그 행복한 느낌을 찾기 위해 애쓴다
행복과 불행은 독립적인 것이라 행복하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한다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책을 읽을 때 내 지식이 넓어지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작가의 생각에 동의할 때다
마음에 맞는 책을 만나면 평생 책만 읽으면서 살아도 될 것 같다
독서는 가장 일반적이고 또 중요한 플로우의 일종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독서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 즐거움을 찾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내 현실은 늘 극복하고 탈출해야 하는 감옥이었으므로 도망칠 방법만 연구했다
바보같이 자기계발서만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독서도 기술이 있어야 하는지, 시간이 가니까 나중에는 어려운 책은 아예 읽지를 못했다
한글로 쓰여졌다고 다 책을 읽는 건 아니라는 김영하의 말에 깊이 동감한다
요즘 같아서는 평생 책만 읽고 살아도 만족감에 빠져 살 것 같다

제목을 참 기가 막히게 지었다
번역서들 보면 제목이 원작 보다 훨씬 세련되고 자극적이다
아마 이 책의 원저는 "Flow" 가 아니었을까 싶다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정말 환상이다
플로우의 원리를 깨닫고 내적 가치로 자신을 판단한다면 정말 매일 매일이 미치도록 행복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플로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을까?
저자는 외과 의사의 수술을 예로 든다 자신이 수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면, 즉 집도의가 되고 수술방 안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말을 따르고 수술의 전 과정이 완전히 숙련된 상태라면 그는 플로우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환자 상태가 안 좋고 수술이 서투르고 무엇보다 자신이 총책임자가 아닌, 단지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면 플로우를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수술방의 긴장감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집도의 역시 환자 상황이 나빠지면 몹시 예민해진다
아마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자 당황해서일 것이다


일에서 플로우를 느끼는 사람은 거의 워커 홀릭 수준일 것이다
저자는 워커 홀릭과 플로우는 다르다고 말한다
워커 홀릭은 일을 안 하면 불안해지고 강박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플로우를 경험하는 사람은 일하고 있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고 일을 쉰다고 해서 초조해 하지 않는다
즉 플로우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일에 몰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일단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주어진 과제와 자신이 가진 기술이 조화를 이룰지 생각해 봐야 한다
과제가 내 능력 이상이면 불안감을 느끼고, 능력 이하면 지루함을 느낀다
내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권태감 말이다
그런데 기술과 과제의 난이도가 일치하더라도 낮은 수준 보다는 높은 수준에서 더 큰 플로우를 느낀다고 한다
즉 인간은 좀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할 때 더 큰 희열을 느낀다
하긴 취직 시험 합격하는 것과 기말고사 잘 보는 것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목표가 주어지면 기술을 연마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이 필수다
피드백이 없다면 잘 진행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목표 달성에 흥미를 잃게 된다
비록 중요한 목표라 할지라도 싫증을 내게 된다
피드백은 우리 몸의 호르몬이 작용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스템이다
이 피드백을 잘 활용하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목표도 지겨워 하지 않고 잘 달성할 것 같다
피드백을 달리 말하면 상벌 체계, 즉 보상과도 같다
그런데 보상이 즉시 주어져야 효과과 있지, 행동과 보상 사이의 간격이 길면 뇌에서 둘과의 관계를 인지하기 어려워진다
원하는 행동을 하면 즉시 자신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실은 뭘 보상으로 줘야 할지도 제대로 파악을 못하겠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에게는 신경쓰면서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인데, 이 책에서 그 해결책을 얻었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주위로 돌리라는 것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를 고민할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가지면 나에 대한 걱정을 잊게 된다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엔트로피, 즉 무질서 상태라고 규정한다
사실 그렇다
마음이란 것에 얼마나 많은 상념과 감정들이 떠다니는가?
하루에도 수십번 바뀌고 또 생각한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딱 맞다
그러므로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차라리 나를 잊고 내 주변 환경에 주의를 돌리면 마음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서를 갖게 된다
어차피 크고 작은 고민들은 인생을 살면서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차라리 잊어 버리는 게 편하다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다
걱정을 잊으려면 주의를 딴 데 돌리는 수 밖에 없다
즉 내 주위 환경으로 말이다

주위에 관심을 돌리면 외로움도 극복할 수 있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전에 할 일을 만든다
주의를 한 군데 집중하면 외로운 감정을 잊는다
사실 일할 때 보다 특별한 일이 없는 여가 시간에 더욱 권태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휴일에 약속이 없으면 더 그렇다
그러므로 노는 것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가족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정말 소중했다
가족이란 공통의 목표가 있는 집단이다
결혼을 하는 순간 배우자의 목표를 중요시 하고, 내 습관을 영구적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같이 사는데도 그의 목표에 무관심 하고 혼자 살 때처럼 내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들면 그 관계는 파탄나고 말 것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높은 이혼률을 당연하게 본다
생산력이 부족할 때야 경제 활동은 남자가, 양육은 여자가 하는 식으로 서로 의존했지만 요즘은 굳이 먹고 살기 위해 결혼할 필요가 없다
하긴 일부일처제가 만고의 진리는 아니다
과거 조선 시대만 해도 일부 다체제가 당연시 되어 왔다
배우자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는 그만두기 쉬워진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커플은 그만큼 서로의 관계에 많은 투자를 하는 바람직한 커플이란 결론이 난다

솔직히 나는 많은 반성을 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계급간의 결합이라는 말을 한다
나 역시 경제적, 사회적 안정의 수단으로 결혼을 고려했다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결혼 정보 회사 내지는 마담뚜 아닌가?
그렇지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배우자 결정에 많은 고민을 하고 신중해야 함을 알았다
단순지 사회적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면 그 인생은 너무나 불행할 것이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가정을 이룰 수는 없다
저자가 이상적으로 보는 부부는 서로의 목표를 격려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습관을 바꿀 의지가 있는 경우다
저자는 습관을 대대적으로 또 영구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다면 아직 결혼해서는 안 된다

가족은 또 공통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아이들도 이 공통의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애를 안 키울 생각이지만 저자의 양육 방식에는 적극 동의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 것 같다
특히 자녀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가족 보다는 또래 집단의 가치를 내제화 시킬 때, 즉 반항이 시작될 때 더욱 유용하다
자녀에게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따라 할 모델이 생길 테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배우자가 생겼을 때처럼 자신의 삶을 변형시켜야 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만 아이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부모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와 부모 사이에 공통의 목표가 생기고 이것을 위해 각 구성원이 노력할 때 비로소 함께 사는 의미가 생긴다
가족 관계 역시 혈연으로 그냥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여가를 즐기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예술 활동을 직접 하는 것이다
단순히 관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독서 대신 글쓰기, 음악 감상 대신 직접 연주하기, 전시회장에 가는 대신 직접 그리기 등등
즉 수동성 대신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가장 큰 기쁨을 얻는다
취미 역시 기술 연마를 필요로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스포츠 중계 방송에 열내는 것 보다 직접 공을 들고 뛰는 길거리 농구가 훨씬 낫다

이 책의 결론은 뭐든지 주체성을 가지고 직접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몰입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삶은 도전이라고 했던가?
당연한 관계라 생각했던 우정이나 가족 관계, 감정의 조절 등도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들이다
내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는 책이다
두고두고 탐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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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신드롬
제임스 트위첼 지음, 최기철 옮김 / 미래의창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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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명품에 열광하는가?
그보다는 왜 사치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어울린다
사치스러운 생활이 삶의 질을 높혀 줄까?
단순히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우월감 때문에 원하는 것은 아닐까?
50여년 전만 해도 냉장고, TV, 가스레인지, 심지어 상하수도관까지 사치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면 사치가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가방 하나에 1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명품을 갖는다고 정말 삶이 행복해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명품을 소유하면 남이 나를 대단하게 보고, 나는 그 부러움을 즐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타인의 선망을 위해 물건 가치에 비해 턱없이 비싼,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일까?

명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비웃었지만 나 역시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나는 합리적인 소비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명품을 갖기 위해 직접 지갑을 열지는 않지만, 대신 선물을 받으면 좋아했다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들고 다님으로써 내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심리야말로 유치하고 속물적인 근성 아닐까?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바라는 지적 스노비즘 내지는 위선 같은 감정은 아닐까?

인터넷에 널려 있는 명품 가방들을 고르면서 나 역시 그들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사품이란 소수가 갖고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법인데,  인터넷에서 대량 판매되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들은 브랜드 네임 밸류를 높이기 위해 애를 쓰고 마치 특별한 사람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한다
그리고 나서 좀 더 저렴한 제품을 대량으로 판매한다
100만원 짜리 가방은 쉽게 못 사지만 30-40만원 정도 하면 나도 한 번?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바로 내가 그 경우였다
인터넷에서 수백개 널려 있는 판매 리스트를 읽으면서 명품 산다고 우쭐한 것이다
나 같이 순진하고 속물적인 소비자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절대 소비를 나쁜 것만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각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필수 요소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많이 쓰라고 부추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호사품에 대한 열광을 단순히 어리석은 대중의 속물적 취향이라고 넘길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런 이론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제대로 모른다는 증거다

호사품이 나오면 부자들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 그것을 소비한다
그들이 내는 돈 덕택에 생산자들은 더 많은 호사품을 만들어 내고 가격은 계속 떨어져 결국 호사품은 대중품으로 변신해 누구나 싼 값에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부자들의 호사품 소비를 나쁘게 볼 수만 없다
호사품을 만드는 근로자들을 위해 특별 소비세를 폐지할 수 밖에 없는 미국의 정책을 보면 이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자동자, 텔레비젼, 냉장고 등의 호사품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소비가 생산을 촉진하고 결국 전체 부를 증가시킨다는 이론은 사실이다
교회는 부자들에게 사치를 줄이고 빈민들에게 적선하라고 가르치지만, 실제로 교회는 비판만 할 뿐 빈민을 구제할 재화는 만들지 못한다
아이러니컬 하지만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부자들의 사치스런 소비 행태다
적은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 보다 파이 크기를 키워 할당량을 높이는 게 더 현명하다는 얘기다
비록 나보다 훨씬 많이 먹는 사람을 시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 봐야 하지만 말이다
볼링을 혼자 치면 재미없지만 아예 못 치는 것 보다는 낫다는 저자의 비유가 딱 들어 맞는 상황이다

사실 우리가 부자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비판하는 건 그들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들에게 사치할 자유를 주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사치품이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남이 그것을 가지고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호사품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취향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즐기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저자는 성별, 인종, 가문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는 것보다 돈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성별이나 가문 등이야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태생적인 것이지만, 돈이야 벌면 된다
가능성 면에서 보면 돈 벌 확률이 적든 많든 일단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부와 가난의 세습을 지적하지만, 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중세에는 아예 바꿀 가능성조차 없지 않았는가?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는 럭셔리 신드롬을 파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합리적 소비를 한다고 배우는데, 호사품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합리적 소비를 한다
즉 물건의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호사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 만든 후 광고에 의해 결정된다
구찌나 페레가모 가방이 아무리 좋은 천으로 만들어진다고 백만원을 호사하는 가격을 매길 만큼 가치 있을까?
명품의 가격은 그것이 주는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 공급 법칙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대를 이어 쓴다면서 질이 틀리고 품격이 다르다는 식의 명품 예찬론자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광고의 미사여구를 충실히 재생해 주는 어리석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면 격이 틀려 보일 거라는 광고의 황당하기까지 한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명품을 사기 위해 빚을 지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가엾다

디더롯 효과라는 게 있다
하나를 제대로 갖추면 또 다른 하나도 갖춰야 하고 결국 전체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
최강희가 인터뷰 한 걸 보면 자기는 명품을 안 입는데, 하나만 갖추면 조화가 안 되니까 전부 갖춰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한 말이다
가방만 번지르하고 옷은 후줄근 하면 그것도 꼴불견일 것이다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갖춰야 제대로 입었다고 느낄 것이다
명품 회사들은 이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품목을 만들어 낸다
시계, 가방, 옷, 악세사리, 심지어 헤어핀, 지갑, 열쇠고리, 썬글라스 등등 그들이 손을 안 대는 분야가 없다

물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학자들조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물건만 사려고 한다
하루키의 "슬픈 외국어" 에서도 본 거지만 교수라면 하이네켄을 마시고 볼보를 몰아야 한다는 식으로 집단 나름의 내제된 규칙이 있다
그들이 단지 비싼 물건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얘기지, 물건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절대 아니다
물건을 그 가치로만 평가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이미지로 판단하는 건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사회 생활을 하는 이상 불가능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미술품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치품 역할을 했다
오늘날처럼 대중 매체가 없는 시대에 그림은 소유자의 품격을 드러내는 호사품 중 하나였다
영주와 교황 등이 그 호사품의 소비자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네덜란드에서 한 때 튤립이 호사품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호사품이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를 알려 준다
그래도 그림이 사치품인 건 괜찮다
아무리 시대가 지난다 해도 명품이 예술품으로 둔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광고에서는 그들의 장인 정신 어쩌고 운운하지만 말이다

명품을 구입하는 것이 하드웨어를 사는 거라면, 명품이 실린 잡지를 사는 것은 소프트 웨어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잡지를 열면 수많은 광고들과, 그 물품을 소비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패션 잡지를 볼 때마다 모델들이 입은 옷과 구두를 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결국 모델처럼 완벽하게 다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 판매를 위한 전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잡지에 나온 그대로를 따라 한다는 건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은 잡지 따위에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잡지를 통해 물건에 대한 도달할 수 없는 욕구만 느낄 뿐이다
그 욕구가 폭발하면 적당한 가격의 (물건 가치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비싸지만) 명품을 하나라도 구입하려고 애쓴다
한 달치 월급을 털어서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이처럼 세상을 보는 올바른 시각을 키우기 위해서다
내가 500페이지 남짓한 이 두꺼운 책을, 다소간의 지루함을 무릅쓰고 읽었으면서도 여전히 명품에 대한 헛된 환상을 갖는다면 대체 내가 책을 읽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카프카의 말처럼 내면의 얼어붙은 정신을 깨는 도끼가 되지 않는 책은 실은 별 가치가 없다
그는 단순히 읽는 재미를 주는 책이라면 남이 써 놓은 걸 읽을 게 아니라 직접 쓰고 말겠다고 했다
감동을 넘어서 내 가치관과 시각에 변화를 주는 것이 바로 책이다
이제 호사품에 대한 내 관점을 바꾸겠다
물건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는 물건의 진짜 가치만으로 판단하겠다
대신 사치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하겠다
나는 사치품 대신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에서 기쁨을 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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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카프카, 역시 어렵다
아직 내 수준이 이런 책을 읽을 만큼은 아닌 것 같다
박홍규는 비교적 쉽게 평전을 쓰는 사람인데 만만치 않은 걸 보면 카프카의 작품 자체가 어려운 것 같다
카프카의 일생에 대해 나온 부분은 재밌었는데, 작품 인용한 부분은 솔직히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오늘 컨디션이 나빠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우리나라야 단일 민족 국가로 복잡할 게 없지만 유럽은 그 다양성 때문에 그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그 나라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났으나 유태인이었고, 당시 체코를 지배하던 독일어를 구사한 사람으로 정체성이 모호하다
유태인이란 그 나라에 태어나도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람들인가?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밖에 없던 그들의 설움이 이해가 간다

카프카의 사진을 보면 무척 잘 생겼다는 느낌이 드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다
젊어서 죽어서인가?
노년의 사진이 없고 젊은 시절 사진만 있어 더 멋있게 보인다
나름대로 인텔리 계층이었을 것 같다
대단한 벼슬은 아니더라도 법대 졸업 후 관리로 일했으니 나름대로 지식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산업 재해 보험 공단에서 공무원으로 일한다
작가와 공무원이라...
혹시 배수아도 카프카를 본뜬 건 아닐까?
카프카는 스피노자를 본받았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렌즈알을 갈면서 밤에 글을 썼다고 한다
카프카는 당시 유명한 작가도 아니었고,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다른 직업을 구했다
나는 늘 전업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스러워 했는데 카프카를 보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

카프카에게 있어 글이란 내적 고백, 바깥 세상에 대한 투쟁의 방법이었다
치열한 작가 정신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아마추어리즘도 이 정도의 의식을 갖고 있으면 프로패셔널 못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내면의 얼음을 깨는 도끼와 같은 책이 아니라면 왜 시간을 투자해 독서를 하겠냐고 반문한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직접 글을 쓰겠다고 했다
깊이 공감하는 바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현대 사회에서 굳이 책 읽기만이 유일한 즐거움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이유는 우리 정신의 각성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상을 공유하고 비판하고 내 앞날을 다시 설계하는, 또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찰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나는 독서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 욕구라고 생각한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성공한 유태인으로 유태주의를 혐오해서 가능하면 독일인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그는 독재적이고 가부장적인, 또 속물 근성이 농후한 인물이었다
평생을 권력과 싸운 아들과 당연히 반목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평생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정말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면 관리가 된 후 독립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그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부모와 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그의 집은 여러 식구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때문에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카프카는 오후에 자고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생활을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독립했어야 하지 않을까?

카프카의 두 남동생은 어려서 죽고 세 명의 여동생이 태어나지만 불행히도 2차 대전 때 나치 수용소에서 죽는다
그의 마지막 사랑인 밀레나 역시 수용소에서 죽은 걸 보면 1차 대전 후 요절한 게 더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수용소로 끌려 갔으면 건강 때문에 일찍 죽었겠지만 그 안에서 치열한 갈등을 겪었을 것 같다
어쩌면 그의 문학이 한층 성숙할 기회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41세의 젊은 나이로 결핵에 걸려 죽는다
당시 결핵은 이미 치료제가 나와 불치병이 아니었는데도 원래 몸이 약해서인지 죽고 만다
남동생의 죽음 때문에 의사를 불신했던 카프카는 특이한 식이요법을 좋아하고 채식주의자였다고 한다
건강하지 못한 건 그의 책임 같다

박홍규는 카프카가 일찍 죽긴 했지만 병약하거나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약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직접 카프카를 안 만나 봤으니 뭐가 옳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박홍규식 해석은 신선하다
그는 위인에게 덧씌워진 신비화나 이상화를 걷어내려고 한다
평범한 인간으로 대한다고 할까?
지나친 상징과 의미 부여는 위인의 실체를 가리고 오히려 그의 업적을 퇴색시킨다
그래서 박홍규식 해석은 새롭고 읽기 편하다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박홍규에 따르면 카프카는 보험 관리 공단에서 이사까지 승진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려고 애썼다
또 카프카는 데생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김나지움이 미술에 대한 안목을 뺏어 버렸다고 한탄하면서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의 그림을 보고서에 자주 첨부했다
그림 실력이 있으면 사물을 더욱 명확하게 관찰할 것 같다
지나친 비약 같지만 카프카의 뛰어난 관찰력이 삶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했을 것 같다
카프카는 노동을 신성시 하고 수영이나 보트타기 갖은 운동도 좋아했다
그는 자본주의 기업이 사라진 평등한 노동 공동체를 꿈꾼다
그래서 말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갈 생각도 한다

물론 그는 유태주의도 싫어했다
권력을 싫어했던 만큼 민족주의도 혐오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역시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박홍규는 카프카를 아나키스트로 본다
박홍큐는 까뮈 역시 아카니스트로 간주했다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로 번역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반권력주의자 뭐 이런 게 아닐까?
규제와 억압을 철폐하고 인간 본연의 자유를 추구하는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 정도?
작가들이 아나키즘에 경도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사회주의 보다 좀 더 그들의 속성과 어울린다

카프카는 여성과의 섹스를 혐오한다
감수성 예민해 보이는 이 친구는 사진만 봐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자위를 금기시 하는 분위기 때문에 사창가에서 성욕을 해결하기도 했다
카프카는 첫 약혼녀 펠리체와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다
솔직히 부럽다
나는 아무래도 글 쓰는 사람을 만나야 하려나 보다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연애도 바로 이런 형태다
넘쳐 오르는 생각들을 격렬하게 편지에 적어 보낼 수 있는 사랑, 또 상대로부터 나만큼의 끓어 오르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답장으로 받을 수 있는 바로 그런 관계를 원했다
그런데 펠리체는 카프카 보다는 현실적인 인물이라 수십장에 걸친, 거의 소설 수준인 카프카의 편지에 대해 가벼운 글로 답장했다고 한다
아마 좀 예민한 사람이라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카프카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한 덕에 무명 작가로 죽은 카프카 사후 활발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옛 애인의 편지는 절대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가 위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나 보다
펠리체는 카프카의 편지를 출간해 병원비를 댔으니까

자신만큼 열정적인 밀레나를 만난 후 카프카는 또 많은 편지를 주고 받는다
당시 그는 율리에와 약혼한 상태였고 밀레나는 유부녀였다
간단히 말하면 부적절한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섹스를 혐오하고 정신적 사랑을 추구한 사람이었으니 이 둘 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고 편지로만 격렬한 사랑을 나눴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남편과 헤어질 것을 강력히 권했으나 결국 그녀는 유태인인 남편을 떠나지 않고 2차 대전 때 수용소에서 죽는다
밀레나는 카프카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다

카프카의 작품은 어렵지만 그의 일생은 퍽 흥미롭다
무엇보다 전업작가가 아니면서도 치열하게 글을 썼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롤 모델을 만난 기분이랄까?
글쓰기나 독서에 대한 그의 태도도 정말 마음에 드다
나 역시 그렇다
내 정신 세계를 깨뜨리는 도끼로서 책을 읽고 싶고 외부 세계에 대한 투쟁의 일부로써 글을 쓰고 싶다
카프카가 공무원이라는 비교적 안정되고 시간이 많은 직업을 얻어 생계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안정된 직업을 가져서 다행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승진하는, 절대 잘릴 리 없는 공무원이 더 부럽다
내가 책에 대해 이렇게 강렬한 애정을 갖는지 알았다면 차라리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걸 그랬다
인문대에 진학해서 원하는 공부 마음껏 하고 공무원 시험 합격해서 적은 돈이지만 쫒겨날 리 없는 안정된 직장에서 책 읽고 글 쓸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
배수아는 관세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인데 그녀처럼 유명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자기 만족감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텐데

그렇지만 내 직업도 나쁘진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나아갈 바를 확실히 깨달은 기분이다
나는 돈을 많이 버는 것 보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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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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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이라는 작가는 그다지 호감이 안 가지만 그의 소설에는 깊이 감동한다
강준만이 비판하는 그 서구식 교영주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그의 미려한 문장에 늘 감탄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을 읽을 때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어찌나 아까운지 밑줄 긋는 심정으로 읽었다
그가 만연체를 쓰고 장중하고 화려하게 미사여구를 동원해 가끔은 읽기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문장은 눈에 쏙쏙 꽂힌다
모름지기 소설가라면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의 문체를 보여 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배수아나 김영하 같은 가벼운 작가의 소설은 왠지 신뢰가 안 간다
자꾸 기본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대 문학의 특성상 가볍고 빠른 문체를 수준 낮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말 기본적인 수준은 되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배수아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이렇게 함부로 글을 쓰다니, 얘 문학 수업 한 거 맞나?
그런데 왜 이런 애들 글이 팔리지?
신기하다...

이문열이 누리는 문화 권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서 새롭지도 않은 주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소재다
이 당연한 전제가 과연 논리적으로 합당한지 알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강준만의 진짜 전공은 신문 방송학이 아니라 인물 비평인 것 같다
"대중문화의 겉과 속" 에서는 나를 몹시 실망시키더니, 그래도 이문열 비판은 시원시원 하다
이문열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그래서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하게 챙긴 것 같다
그는 아무래도 학자 타입은 아닌 것 같다
교수 직함은 글 쓰는 자격으로 가지고 있고 진짜 직업은 정치 비평가로 나가야겠다

김용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서 1권만 빌렸다
이문열은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비판가들로부터 가장 형편없는 작품으로 꼽히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마저도 나는 너무 재밌게 읽었다
이문열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어쩜 그렇게 맛깔스럽게 얘기를 잘 하는지...
그 문장의 질과 더불어 플롯 구성이 탄탄하다
특히 중단편들을 보면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편과 달리 짧은 분량에서 완성된 구조를 보여 주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의 중단편은 장편 못지 않게 탄탄한 구조가 돋보인다
적어도 그를 문학성만 가지고 깍아 내릴 수는 없으리라

문학적으로는 훌륭하다
그냥 글만 쓰는 작가였다면 오늘날의 위상도 얻지 못했겠지만 이 정도의 비난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왜 문화 권력을 탐하는가?
강준만이 지적하는 대로 그는 권위주의와 가부장제로 뭉친 사람이다
조선 시대 큰 선비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전통 문화에 대해 얼마나 큰 애착을 갖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애틋한 면이 많았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문장 곳곳에 묻어나 마음이 쓸쓸했다
매잡이도 그렇고 갓 만드는 노인도 그랬다
더 이상 가치를 얻지 못하는 것들을 붙들고 있는, 그것도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로써 붙잡고 있는 구시대의 장인들에 대한 묘사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제와 족보, 문중, 권위주의 등에 대해서도 강한 애착을 보인다
역설적으로 가부장제가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문열이 굳이 욕먹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취향 내지는 신념의 다양성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21세기 한국 사회는 가부장제에 꽁꽁 묶여 있을 뿐더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다
즉 가부장제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문학을 통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 내고, 그 댓가로 문화 권력을 얻는다
비판자들은 이것을 공격한다

이문열은 아버지가 월북한 후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 줘야 했다
고시에도 실패하고 젊은 시절을 불행히 보낸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대한민국 사회의 중심 인물이 됐을까?
강준만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신해 자기가 당했던 그 방식을 답습한다고 지적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할 때 더 무섭고 위선적이며 철저한 법이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을 핍박하는 지배 체제에 반항하기 나름인데, 이문열은 영리하게도 그 지배 체제 200 % 동의해 그들보다 더 완벽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제화 시킨다
사실 이것은 자기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원래 이문열은 공산주의 속성이 없다
아버지가 월북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빨갱이 자식이라고 차별받지 않았더라도 그는 공산주의를 혐오했을 것 같다

그가 실은 민주주의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딱히 꼬집어 증명할 수는 없지만 강준만의 이 느낌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박정희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 어리석은 대중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권위주의 사회다
그는 대중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야 말로 문중과 더불어 그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 같다
이러한 이문열의 성향과 가장 대조적인 사람이 바로 마광수가 아닐까?
마광수는 문학의 다양성, 더 나아가 다원주의 사회를 꿈꾼다
"즐거운 사라" 가 법정으로 간 것은 황당한 사건이다
하긴 "천국의 신화" 도 검찰에 출두했으니 할 말도 없지마 말이다
왜 사법 당국은 자신들이 국민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마광수 소설이 문학적으로 우수한지 비열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가 간통 같은 부도덕적인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좀 야한 소설 몇 권 썼을 뿐인데 구속까지 시키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
나도 그의 소설을 읽어 봤지만 요즘처럼 인터넷에 성이 넘쳐 나는 시대에 그 정도면 별 문제도 아니다
연세대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문제가 된 걸까?
글쎄, 명문 사립대 교수는 반드시 정숙한 소설만 써야 하는 건가?
어쨌든 이런 마광수와 가장 배척되는 사람이 바로 이문열이니, 그가 마광수를 작가로 인정조차 안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문열의 진짜 적수는 진중권이다
여당과 시민 단체의 관계를 이문열과 젖소 부인 관계로 비유한 그의 글발은 놀랍기 그지 없다
강준만 보다도 한 수 위 같다
미학을 전공했다더니만, 확실히 정곡을 찌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앞으로 진중권 책도 읽을 생각이다
이문열은 진중권과의 직접 대결을 피한다
이길 수 없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신문과 문학의 문언유착이다
신문은 TV 보다는 덜 상업적이고 더 수준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강준만은 신문 역시 철저하게 상업주의를 표방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TV 광고에서 만큼은 책을 팔지 않게 되길 바란다는 이문열의 바램을 비웃는다
왜? 그의 소설은 신문에서 엄청나게 팔아 주니까 말이다
강준만은 일제 시대부터 신문이 문학을 지배해 왔다고 말한다
식민지 치하였으니 사회 비평이나 역사 평론 같은 것은 못하고, 가장 원만한 형태의 문학만이 신문에 제대로 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신문은 문학을 장악하고 문단에 등단하기 위해서 신춘문예는 필수 코스가 됐다

이 신춘문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심사위원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문열만 해도 여러 신춘문예의 심사위원을 겸하고 있다
새롭고 참신한 인재를 개발해 줄 신문에서 예비 작가들에게 심사위원의 입맛에 맞출 것을 강요하는 꼴이니 기존 문학의 답습 밖에는 되지 않는 셈이다
그러므로 신문이 진정으로 문학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 이외의 여러 등단 루트를 열어 주고 심사위원 역시 특정인에게만 집중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21세기를 지배하는 원리는 다원성 같다
권위주의와 반대되는 말,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바로 다원주의 같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이문열의 문화 권력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철저한 상업주의에 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속 그가 먹히는 이유도 바로 돈을 벌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평역한 "삼국지" 까지 합치면 천만권 이상을 판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다
천만권이라니, 상상이 안 가는 부수다
그의 작품은 늘 대중에게 먹힌다
심지어 이문열이 선정한 고전이라는 전집도 나오고 그의 중단편은 끊임없이 끼워 넣기 식으로 재출간 된다
이것은 우리 문단의 스타 시스템과 관련이 크다
즉 신문으로서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만 띄워 준다
영화나 드라마 캐스팅 때 스타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일단 이문열 작품이 어느 정도 먹힌다고 생각되니까 신문에서는 안전제일주의로 그의 작품을 계속 띄운다

강준만은 그가 철저히 상업적인 작가임을 지적하면서 마광수에게 상업성 운운하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고 비웃는다
적어도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설마 자신이 상업주의와 무관하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하긴 그렇다고 대놓고 나 돈 벌려고 글 쓰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문열이 간접적으로 위선을 떠는 반면 김용옥은 대놓고 말하는 스타일이다
어쨌든 둘은 튀길 좋아하고 기본적으로 문화 권력 내지는 지식 권력을 원한다
특히 미디어의 지배를 통해 권력을 휘두르고자 한다
김용옥은 관심없는 사람이라 이만 각설한다
"신들메를 고쳐 매며" 를 쓰던 그 자세로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말년의 대작을 위해서 정진했으면 좋겠다
수십년 간 누려온 그 문화 권력을 내려 놓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쓰길 기대한다
우리 문학사에도 자랑할 만한 큰 작품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문열이 그 작품을 써 주길 바란다
그는 충분히 역량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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