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가지 철학 체험 거리의 인문학 1
로제 폴 드르와 지음, 이기언 옮김 / 샘터사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생각만큼 재밌지만 않지만 그래도 생각할 꺼리는 준다
영원성의 문제...
우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해결될까?
혹은 삶이 부질없다는 것을 부정하게 될까?
그 영원성은 무엇을 통해 획득되는 것인가?
종교를 통해? 아니면 자식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통해?
나는 구원받았다고 믿는데, 여전히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순일까?
죽고 나면 나를 위해 예비한 곳이 존재하는데도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인상 깊은 책은 아니다
솔직히 겉멋만 부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사물을 다르게 대하기라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인정한다
일상적인 것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보다 풍성해질 것이다

단식에 관한 이야기가 눈을 끈다
배고픔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데 이것을 억제할 때의 기분은 과연 어떠할까?
폴 오스터의 소설에는 늘 의도적인 굶기가 등장한다
그의 에세이 "굶기의 예술"을 보면 노르웨이 소설가 함순이 쓴 "굶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의도적인 굶주림, 그것을 통해 욕망을 절제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 그로 인해 더욱 명료해지는 의식, 그러나 결국 육체에 굴복하고 마는 정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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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참 재미있는 책이다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은 훨씬 더 실감있게 느껴진다
문화의 차이란 시간이 갈수록 거부할 수 없는 큰 힘인 것 같다

한국 남자란 어떤 종족인가?
한국 남자를 동양 남자라고 치환시킬 수 있을까?
저자의 분석을 빌리면 단순히 유교 문화에서 성장한 남자라고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시점이 있다
같은 유교 문화권에 한자를 쓰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또 다르다는 얘기다
이런 걸 보면 유럽과 미국을 단순히 서양이라고 분류하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분류인지 알 만 하다
민족성이란 이처럼 타자와 구분되는 거의 본질적인 특징 같다

나는 이 책의 저자와 세대가 다르다
그 보다는 훨씬 더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권위에 함몰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 역시 권위주의 환경에서 자랐다
지금 아이들은 나 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환경에서 클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의 자유와 평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요원한 문제 같다
개개인은 수평적일지라도 사회를 관통하는 주요 원리가 아직은 권위주의이기 때문이다

"동굴 속의 황제"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적절한 비유다
윤리 교과서에서 인용한 베이컨의 이 철학 용어를 그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굴 속의 황제에 걸맞는 예시를 묻는 윤리 문제를 늘 틀렸던 것 같다
아마 단순히 우상이라고 외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의미는 몰랐다
우상이라니? 동굴 속의 황제 하고 우상하고 무슨 의미가 있어?
사실은 그 우상이란 뜻 자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우상이란 단어를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흔히 등장하는 우상은 늘 관념적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겠다
동굴 속의 황제 근성은 허위나 위선 의식과도 통한다
일상 생활에서 내가 화를 쉽게 내는 이유도 바로 이 황제 근성 때문이다
모든 일은 내 위주로 풀려야 하므로 장애물이 생기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내 의견은 무조건 옳기 때문에 타인의 비평을 비난과 동일시 여겨 견디지 못한다
의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것일 뿐 실상 내 마음에서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나는 지적 우상에 사로잡혀 내가 믿고 추구하는 것이 타인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나만 옳다는 이 독선적이고 위험한 생각은, 실상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오직 하나의 진리 뿐이라는 이 명제가 곧 권위주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한국적이고 눈물겹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모성은 늘 신화로 덧칠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어머니란 거의 절대적인 존재다
권력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 전 삶을 던질 수 있을 만큼 희생적이고 절대적인 애정을 보인다는 얘기다
저자는 아들이 어머니를 성적으로 독차지 한다고 지적했다
다 커서도 여탕에 목욕을 시키러 다니는 아줌마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자식이 태어나면 남편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리고 여자는 온갖 사랑과 정성을 아들에게 쏟는다
아들과 어머니의 이 밀착된 관계는 나이가 들어서도 흔들리지 않고 고부 갈등을 낳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요즘은 여자들이 자아 찾기에 나서면서 자식에게 매달리는 면이 많이 줄긴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기형적이기까지 하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여자가 한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서 기를 펴는 것은 순전히 아들을 낳았을 때 뿐이다
그 집안의 대를 이었다는 명분과 함께 노후를 의탁할 근거가 마련된다
자신의 미래를 맡긴다는 의미에서 보면 어머니들의 딸 차별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식들은 더 이상 노후 보험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여자들 역시 경제력이 생기면서 아들이나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줄고 있다
여전히 한국 어머니들은 자식의 출세를 자아 실현과 동일시 하긴 하지만, (그래서 그 출세 방편인 교육에 열을 올리지만) 사회가 다원화 되면서 이 분위기도 변하리라 기대해 본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란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불쌍한 양면적인 존재다
60년대는 특히 그랬겠지만, 부권이란 거의 절대적인 권위였다
저자의 고백처럼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전적으로 가정 경졔를 도맡아 오기도 했고, 가문의 계승이라는 관념적인 측면에서도 그랬다
권위를 세우는 대신 자식과의 친밀함이 줄어 드는 건 필연적인 수순이다
아버지는 워낙 높은 존재였기 때문에 가족에서 소외되어 갔다
오늘날 고개 숙인 남자들의 현실은 그들의 가엾은 처지를 잘 반영한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 내에서도 소외되는 이 땅의 가장들이 갈 곳은 많지 않다
요즘 같은 탈권위 시대에 더 이상 가부장제는 의미가 없다
아버지, 혹은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계속 매고 있어 봤자 알아 주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들이 평등한 관계로 내려서지 않으면 그들은 돈 버는 기계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권위주의의 대안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기득권층은 흔히 권위가 사라지면 무질서가 온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권위주의 대신 쌍방간의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일방적인 관계는 닫힌 사회의 특징이고 폭력성과 경직성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요즘 같은 개방화 시대에 권위주의는 어울리지 않는 지배 원리다
과거 학교가 폭력의 온실이었다는 것은 권위주의와도 연관이 깊다
교사들에 의한 폭력 생산을 교육의 일부로 당연시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그런데 학생들끼리의 교내 폭력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공과 사를 구분하라는 말이 사실은 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공적인 부분에만 신경쓰라는 의미임을 밣히는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정말 공과 사의 구분을 확실히 한다면, 회사일을 위해 가정을 팽개치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공이 사를 완전히 대신하는 전체주의 사회였다
요즘은 사적 영역이 제 위치를 찾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요원하다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열린 사회를 원하지만 과연 이러한 쌍방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언제쯤 제대로 시행될지 모르겠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일단 나부터 동굴 속의 황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지적 우상에 사로잡혀 무조건 내 의견만이 절대선이라 믿는 어리석음에서 탈피하자
그리고 다양성을 인정하자
가치 기준이란 절대적이지 않다
나에게 옳은 것도 남에게는 그를 수 있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
더불어 쌍방간의 수평 관계를 인정하자
우월 의식을 갖는 것은 그만큼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저자는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하므로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비평에 민감하다고 했는데, 내가 당당하고 떳떳하다면 그만큼 포용력이 생길 것이다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그 다양성의 원리를 가르치고 싶다
더불어 권위란 결국은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부모의 권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비록 권위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사회는 갈수록 탈권위화 되어 가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을 원한다
현대 사회에 적응하려면 권위주의형 인간에서 탈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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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이은희 지음 / 궁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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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는 글을 참 쉽고 맛깔스럽게 잘 쓴다
본인 지식이 아주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자신이 이해한 범위 내에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번 책은 그리스 신화를 도입부로 삼아 호기심을 먼저 끈다
사실 책 수준이 아주 높은 건 아니다
그래서 혹시 내가 동굴 속의 황제 컴플렉스에 빠진 건 아닌가 끊임없이 자책했다
즉 의사라든가, 대학 교수가 썼으면 금방 공감했을 얘기를, 평범한 연구원이 썼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을 깍아 내리고 있지 않나 스스로를 검열했다
솔직히 어떤 내용들은 (특히 의학적인 부분) 상식 수준이라 전체적인 수준은 좀 낮다
그렇지만 이런 수준의 쉽고 재밌는 과학 에세이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과학의 세기니까 말이다

유전 공학은 참 대단하다
돼지 인슐린 대신 대장균에 인슐린 복제 유전자를 집어 넣은 후 누구나 쉽게 인슐린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걸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돼지 인슐린 1kg을 얻으려면 돼지 수백마리를 잡아야 한다고 하니, 유전 공학이 인류에게 끼친 혜택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도 종교 윤리 측면에서 유전 공학의 응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하긴 지나친 상업성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악의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노화의 방지는 가능할까?
냉동 상태가 되면 대사가 느려져 수명이 길어질 수 있다고 한다
냉동 인간은 아예 생체 활동이 정지된 상태다
체온을 높히면 다시 생명 활동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냉동 인간을 깨운 예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어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이론대로 완벽하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엄청난 돈을 주고 냉동 인간이 됐는데, 불치병을 고친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깨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 십년 후에 깨워 보는 게 어떨까?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가 현실에서 벌어지다니, 과학은 참 놀랍다

솔직히 저자가 너무 부럽다
나보다 한 살 위인데, 어떻게 이런 대중적인 글을 쓰게 됐을까?
인터넷에 칼럼을 개설하고 그것이 인기를 얻어 본격적인 저술로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을 해냈다는 게 참 대단해 보인다
그녀는 그저 연구원에 불과한데 이 정도 평가를 얻어냈다는 게 참 부럽다
생물학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그녀의 열정도 부럽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학교에서 재밌게 공부할 수도 있었는데 대체 뭣 때문에 늘 괴로웠는지 모르겠다
생화학을 공부할 때는 가끔 재밌다는 생각도 했다
유전학 가르치는 교수님이 대학원에 진학한 후 생화학 교과서를 일곱 번 읽었다면서, 그 동안 왜 이런 원리를 모르고 살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때로 공부가 놀랍도록 재밌고 신나는 경우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고 싶다
진화란 개체가 종의 보존을 위해 택한 방식이고, 이것은 가장 이기적인 조건으로 유전자 내에 코딩되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자연 법칙으로만 본다면 이기적인 유전자는 당연한 얘기다
도덕적, 사회적 관점의 반박은 주제를 빗나간 것 같다
매트 매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도 읽어 봐야겠다

멜라토닌은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인데 빛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유럽 여행 당시 3주간 머물렀는데, 시차 적응의 어려움 같은 건 없었다
워낙 피곤해서 그랬을까?
바로바로 잠들고 아침이면 금방 깼다
하긴 요즘 가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새벽 2-3시면 깬다
오늘도 새벽 3시에 깨서 겨우 30분 누워 있고 결국 일어났다
밥 먹고 책 좀 보면 5시 넘어서 잠이 온다
정말 나이가 들면 예민해지는 걸까?

멜라토닌이 부족하면, 즉 겨울처럼 일조량이 적을 때는 우울증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겨울에 우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현상 같다
우울증에 빠지면 자살률이 15%에 이른다고 하니, 보통 정신병은 아닌 모양이다
푸로작(SSRI) 개발 이후 우울증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하는데,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미국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듯 하다
세로토닌이 과도하면 공격 성향이 강하고, 반대로 부족하면 우울증이 심해진다고 한다
도파민이 많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부족하면 우울증에 빠진다
엔돌핀은 고통 상태를 완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체내 마약인데 몰핀의 100배에 이르는 효과를 보인다
러너스 하이는 바로 이 엔돌핀 분비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몸은 힘든데 계속 달리고 싶은 최고의 기분, 혹시 오르가즘과 비슷한 건 아닐까?
호르몬은 많이 연구해 볼 분야 같다
인체의 호르몬 조절은 정말 신비롭다

성장 호르몬 분비가 많아지면 키가 크고 대사율이 활발해 지방 분해가 촉진된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많이 먹어도 대체적으로 살이 안 찌는 이유가 그 때문인 것 같다
이 호르몬을 어른에게 주입하면 역시 살이 빠진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싼 값에 판매된다고 하니, 앞서 가는 나라답다
GH은 인슐린과 길항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게 많아지면 인슐린 분비가 줄어 들어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이 줄어들 것이다
혈당은 올라가겠지만 일단 축적되는 건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살이 빠지는 모양이다
현재도 폐경이 되면 hormon therpy를 하는데 호르몬의 적용 범위는 계속 넓어질 것 같다

사후 피임약 노보레도 흥미롭다
교과서에도 실린 RU-486이 자궁내막을 탈락시킴으로써 착상된 수정란을 죽이는 것인데 비해, 노보레는 착상 자체를 방해하는 말 그대로의 사후 피임약이다
RU-486은 임신이라고 확인된 후, 즉 성관계 3-6주 후에 복용하는데 노보레는 성관계 후 3일 이내에 먹는다고 한다
혹시 정자와 난자가 나팔관에서 수정됐을 경우 자궁으로 못 가도록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신이 걱정된다면, 어쩌다 한 번 섹스를 하는 여자들이 이용하면 편할 것 같다
예기치 못한 성관계로 임신이 되서 낙태하는 것 보다는 한 백만배 쯤 낫지 않을까?
산부인과 학회에서는 이 피임약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최근 읽은 기사에 의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적극 찬성한다고 들었다
낙태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남아 선호 사상도 문제지만, 제대로 된 피임 교육이 우선 아닐까?
사실 미혼 여성의 경우 매일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피임약을 계속 복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관계 때마다 남자들이 콘돔을 끼면 좋으련만, 성감도가 떨어지네 어쩌네 하면서 싫어하니까 사후 피임약을 먹으면 안전할 것 같다

이 피임약은 의사 처방이 있어야 하는데, 산부인과 의사가 쓴 글에 의하면 당연히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야 한다고 했다
산부인과 진료 기록이 남는 걸 원치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학적인 측면의 안정성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지간하면 일반 의약품으로 풀리는 게 좋지 않을까?
성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또 우리나라처럼 혼전 성관계를 도외시 하는 곳에서 나 어제 섹스했소, 라고 고백하는 건 아무리 의사라 해도 꺼림칙 할 것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아 단숨에 읽었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데 내용이 쉬워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과학 에세이들이 많이 나와 대중의 과학 지식이 높아졌음 좋겠다
자기 계발류 보다 얼마나 가치있는 책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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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 씨, 춤 보러가다
제환정 지음 / 시공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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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이 예술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림이나 문학에 비해 그 위치가 열등한 건 사실이다
일단 수능 성적만 봐도 그렇다
고등학교 때 무용반이라고 하면 수능 성적은 거의 바닥을 긴다고 보면 된다
머리 나쁘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그래도 요즘은 춤에 대한 인식이 좀 나아지고 있다
누구나 강수진을 알고 그녀를 예술가로 생각한다

저자가 무용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무용수들의 애환에 대한 얘기가 많다
평론가가 썼으면 현장 얘기 보다는 작품 분석이 많을텐데, 그건 좀 아쉽다
그래도 무용가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같다
제일 공감이 가는 건 역시 다이어트다
다이어트에 대한 놀라운 집착은 놀라울 뿐이다
내 동생도 체형이 말랐다는 이유로 한국 무용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랩을 감고 무용을 해야 했다
온 몸을 드러내는 무용 의상을 소화시키려면, 저자의 표현대로 도대체 살집을 숨길 곳이 없을 것이다
가엾은 작은 새들...
아멜리 노통브는  "로베르트 인명사전"에서 무용수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날아 오르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려고 애쓰는 건 분명하다

무용 자체의 칼로리 소비는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럴 것 같다
저강도로 오래 지속되는 유산소 운동이 지방을 태우는데, 무용은 단 몇 분을 위해 고강도의 동작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순간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무산소 운동에 가까울 것 같다
한 시간 내내 연습해도 칼로리 소비는 겨우 200에 불과하다니, 그들이 요구르트 하나에도 벌벌 떠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저자가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날씬하고 예쁘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당당하게 표지 모델로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자기 전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일까?
강수진처럼 세계적인 무용수가 되고 싶었을텐데
그래도 이화여대를 나와서 기자도 하고 책도 쓰는 것 같다
이대라면 무용계 최고의 권력 기관 아닌가?

저자는 무용에 덧씌워진 지적이지 못하다는 평가에 무척 예민하다
사실 무용수들의 수능 성적은 체육학과 생들과 같다
그래서인지 무용학과는 체대 소속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운동과 무용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왜냐면 저자의 말대로 무용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몸으로 표현해 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무용이 인간과 떨어져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학이나 음악은 배우기 어렵기라도 하지만 (그래서 더 상부 구조를 차지하지만), 춤은 누구라도 몸만 흔들면 출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표현 양식이다
잘 추고 못 추고의 차이는 있을 망정, 장애인이 아닌 이상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춤을 출 수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체적인 것을 천시해 왔기 때문에 무용의 역사도 매우 일천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댄스가 유행하고 있지만, 상위 예술로 대접받지는 못한다
또 발레나 모던 댄스가 문학만큼 대중에게 친숙하지도 않다
서구화가 곧 세계화를 의미하게 됐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발레가 지니는 대중성을 보면 참 부럽다
오페라에 관한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볍게 영화 보는 기분으로 오페라 극장이나 발레 공연장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예술을 두고 서양이냐, 동양이냐를 나누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 본다
발레나 오페라 같은 고급 예술을 마치 영화 한 편 보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지젤"은 워낙 유명한 발레라 학교 다닐 때 비디오로도 보고 자주 듣는 이름이다
낭만 발레가 고전 발레 뒤에 올 것 같은데, 반대로 낭만 발레가 먼저이고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춘 것이 고전 발레라고 한다
"지젤"은 2막으로 구성된 낭만 발레이고 "호두까기 인형"이나 "백조의 호수" 등은 고전 발레다
지젤의 줄거리를 보면, 시골 아가씨 지젤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데 실은 약혼녀가 있는 귀족이었다
말하자면 잠깐 사냥하러 나왔다가 지젤과 불장난을 벌인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살한다
처녀 귀신으로 죽으면 윌리가 되서 마을을 떠도는데, 남자가 그 근처를 지나가면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든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 나오는 계모도 이 벌을 받는 걸 보면 서양에서 널리 퍼진 전설 같다
지젤이 사랑했던 남자도 그 숲을 지나가자 윌리들이 그를 에워싼다
물론 지젤은 그를 보호해 아침에 보내 준다
죽어서도 남자를 지켜 준 것이다
이 정도 이야기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인데, 뜻밖에도 안무가들은 바보 같은 지젤을 정신 병원으로 보내 버린다
고전을 비트는 것이다
사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젤은 지고지순하기 보다는 어리석다
약혼녀가 있는 남자에게 희롱당한 셈인데, 그에게 분노를 터뜨리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공격해 자살을 하는 것이나 죽어서도 그의 영혼을 지켜주는 맹목적인 사랑을 선보인다
그래서 현대 안무가들은 지젤을 정신 병원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무용의 매력이 단순히 테크닉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무용수들이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이 느끼길 바란다
관객과의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고난이도의 동작을 선보이는 것은 가능하면 많은 것을 몸으로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다
연습으로 험악해진 강수진의 발을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강수진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위대한 것은 고난이도의 연기를 선보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 정신의 전달 방식에 있다

앞으로 발레 공연에 자주 가 보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은 모든 예술에 다 통용되는 것 같다
이제 발레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지식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무용수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도록 애쓰고 싶다
몸이야 말로 가장 정직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아닌가?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그들의 몸짓이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나는 제대로 된 감상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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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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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에 일어나서 읽은 책이다
세 시간 동안 300페이지를 읽었으니까 비교적 빨리 본 셈이다
일찍 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리하라의 생물학 까페"처럼 내용이 아주 쉽거나, 아니면 이 책처럼 지루해서 대충 읽거나 둘 중 하나다
"동물원의 탄생"이 아니라 차라리 "칼 하겐베크 일대기"라고 제목을 붙이는 게 낫겠다
동물원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겼는지, 서양에서 동물원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실제 야생 동물을 포획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등등에 관해 알고 싶었는데 궁금증의 절반 밖에 못 푼 기분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겐바크 얘기만 한다
물론 그가 근대 동물원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사실 동물원에 가면 이중적인 느낌이 든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어쩌면 평생 못 보는 밀림 속의 동물들을 관람하는 신기한 감정과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동물들을 학대한다는 감정이 교차한다
사자나 기린, 침팬지, 하마 등등을 보는 건 좋은데 과연 동물원 환경이 그 안에 갇힌 동물들에게 우호적인가는 확신할 수 없다
우호적이라는 개념 자체도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므로 엄격한 의미로 따지자면 동물원은 아무리 미화를 해도 동물 학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환경주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좀 더 나아졌다
이제 울타리에 가두기 보다는 해자를 판 후 보다 넓은 공간에서 동물들을 수용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부유한 국가의 대도시 동물원에나 해당되는 얘기지, 광주만 해도 여전히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물들을 자연적으로 수용할 경제적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일정 기준에 못 미치는 동물원은 인가를 안 내 준다면, 지방 사람들의 문화 체험을 박탈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동물원에 가서 신기한 동물들에 열광하는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라

하겐바크는 19세기 후반에 부업으로 동물 사업을 시작했는데, 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큰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다
하겐바크가 운영한 동물 사업의 내용은 다양하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동물을 잡아 전시하는 것부터 시작해 서커스, 동물 도매업, 심지어 사람쇼까지 동물을 잡아서 돈 벌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어떻게 사람쇼 할 생각을 다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저 엽기라고 밖에 안 느껴지는데, 당시에는 인류학회의 지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19세기 말이면 독일이 한창 식민지를 늘려 갈 때다
유럽인들은 식민지인들을 문명화 시킨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고, 사람쇼는 이것에 대한 증거물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동물을 잡아다 유럽 동물원에 파는 사업이 지지부진해지자, 하겐바크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원주민들을 데려다가 전시하는 것이었다
TV나 영화가 없던 시절에 이들의 삶은 대단히 이국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하겐바크는 이들이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유럽으로 옮겨 그저 관객에게 보여 줄 따름이라고 하면서, 절대 비인간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인류학적 연구를 한답시고 아무 꺼리낌없이 나체 사진을 찍어 대는 행위가 과연 인간적이라 할 수 있을까?
골반 검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생식기를 비교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자행됐다
스튜디오에서 나체 사진을 찍는 원주민 여자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이 안 간다
인류학자들은 직접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갈 필요없이 유럽으로 온 그들을 편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겐바크가 복잡한 일을 대신 해 주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치켜 세웠고, 그들의 권위를 이용해 하겐바크는 자기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인류 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자부심까지 가지고 자행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긴 그 전에는 아프리카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는 처지였으니, 그나마 돈 주고 전시하는 건 좀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아프리카 동물들을 포획하는 과정은 야만 그 자체다
누가 그들을 문명인이라고 칭했던가?
새끼 코끼리 한 마리를 얻기 위해 어른 코끼리 수십 마리를 죽이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다섯 마리의 새끼 코끼리를 잡으려고 60마리의 성인 코끼리를 죽이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그나마 절반 정도는 유럽까지 가다가 죽어 버렸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프리카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심지어 555마리의 코끼리를 죽인 사냥꾼도 있다고 한다
이 숫자를 부끄러워 하는 게 아니라 능력의 척도로 여긴다는 사실도 놀랍다
숌부르크라는 사냥꾼은 죽은 코끼리 시체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엽기적인 사진을 출판했다
죽은 어미 코끼리 옆에서 외로이 서 있는 아기 코끼리 점보의 사진도 사냥 능력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제시했다
그는 사냥꾼이야 말로 진정한 동물의 친구이고,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이들을 감상주의자로 몰아 세웠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논리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사냥꾼들이 동물의 친구라고?
살인자를 친구라 명명하나 보지?

제일 인상깊은 대목은 자연적으로 꾸미는 현재의 동물원 역시 동물들에게는 절대 자연스럽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하겐바크를 비웃지만 도대체 우리가 그 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가?
20세기 사람들은 울타리를 거북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치웠을 따름이다
즉 울타리에 가두나 해저를 파서 풀어 놓으나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는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의미다
요즘 유행하는 해양 동물 공원 역시 끔찍하게 남획되고 있다
열대어를 잡기 위해 필리핀의 한 바다에서는 독약을 살포하기까지 한다
관상용으로 즐기기 위해 그들을 멸종 위기로 몰아 넣어도 괜찮은 걸까?
채식주의자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워 육식을 거부하지만, 차라리 육식은 먹기 위해서라는 정당한 목적이 있는 행위다
타당한 이유도 없이 그저 눈으로 즐기기 위해 동물들을 이런 식으로 학살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릴 권리를 주었으나 그들을 보호하는 책임도 뒤따른다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사라져 가는 동물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민족과 성별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듯, 이제 생명의 존엄성도 지구상에 숨쉬고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이 위대하다고?
위대하다는 개체가 함께 사는 동료들을 이렇게 끔찍하게 학살할까?
동물들의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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