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신드롬
제임스 트위첼 지음, 최기철 옮김 / 미래의창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왜 명품에 열광하는가?
그보다는 왜 사치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어울린다
사치스러운 생활이 삶의 질을 높혀 줄까?
단순히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우월감 때문에 원하는 것은 아닐까?
50여년 전만 해도 냉장고, TV, 가스레인지, 심지어 상하수도관까지 사치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면 사치가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가방 하나에 1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명품을 갖는다고 정말 삶이 행복해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명품을 소유하면 남이 나를 대단하게 보고, 나는 그 부러움을 즐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타인의 선망을 위해 물건 가치에 비해 턱없이 비싼,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일까?

명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비웃었지만 나 역시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나는 합리적인 소비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명품을 갖기 위해 직접 지갑을 열지는 않지만, 대신 선물을 받으면 좋아했다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들고 다님으로써 내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심리야말로 유치하고 속물적인 근성 아닐까?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바라는 지적 스노비즘 내지는 위선 같은 감정은 아닐까?

인터넷에 널려 있는 명품 가방들을 고르면서 나 역시 그들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사품이란 소수가 갖고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법인데,  인터넷에서 대량 판매되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들은 브랜드 네임 밸류를 높이기 위해 애를 쓰고 마치 특별한 사람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한다
그리고 나서 좀 더 저렴한 제품을 대량으로 판매한다
100만원 짜리 가방은 쉽게 못 사지만 30-40만원 정도 하면 나도 한 번?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바로 내가 그 경우였다
인터넷에서 수백개 널려 있는 판매 리스트를 읽으면서 명품 산다고 우쭐한 것이다
나 같이 순진하고 속물적인 소비자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절대 소비를 나쁜 것만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각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필수 요소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많이 쓰라고 부추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호사품에 대한 열광을 단순히 어리석은 대중의 속물적 취향이라고 넘길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런 이론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제대로 모른다는 증거다

호사품이 나오면 부자들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 그것을 소비한다
그들이 내는 돈 덕택에 생산자들은 더 많은 호사품을 만들어 내고 가격은 계속 떨어져 결국 호사품은 대중품으로 변신해 누구나 싼 값에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부자들의 호사품 소비를 나쁘게 볼 수만 없다
호사품을 만드는 근로자들을 위해 특별 소비세를 폐지할 수 밖에 없는 미국의 정책을 보면 이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자동자, 텔레비젼, 냉장고 등의 호사품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소비가 생산을 촉진하고 결국 전체 부를 증가시킨다는 이론은 사실이다
교회는 부자들에게 사치를 줄이고 빈민들에게 적선하라고 가르치지만, 실제로 교회는 비판만 할 뿐 빈민을 구제할 재화는 만들지 못한다
아이러니컬 하지만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부자들의 사치스런 소비 행태다
적은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 보다 파이 크기를 키워 할당량을 높이는 게 더 현명하다는 얘기다
비록 나보다 훨씬 많이 먹는 사람을 시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 봐야 하지만 말이다
볼링을 혼자 치면 재미없지만 아예 못 치는 것 보다는 낫다는 저자의 비유가 딱 들어 맞는 상황이다

사실 우리가 부자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비판하는 건 그들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들에게 사치할 자유를 주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사치품이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남이 그것을 가지고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호사품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취향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즐기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저자는 성별, 인종, 가문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는 것보다 돈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성별이나 가문 등이야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태생적인 것이지만, 돈이야 벌면 된다
가능성 면에서 보면 돈 벌 확률이 적든 많든 일단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부와 가난의 세습을 지적하지만, 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중세에는 아예 바꿀 가능성조차 없지 않았는가?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는 럭셔리 신드롬을 파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합리적 소비를 한다고 배우는데, 호사품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합리적 소비를 한다
즉 물건의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호사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 만든 후 광고에 의해 결정된다
구찌나 페레가모 가방이 아무리 좋은 천으로 만들어진다고 백만원을 호사하는 가격을 매길 만큼 가치 있을까?
명품의 가격은 그것이 주는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 공급 법칙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대를 이어 쓴다면서 질이 틀리고 품격이 다르다는 식의 명품 예찬론자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광고의 미사여구를 충실히 재생해 주는 어리석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면 격이 틀려 보일 거라는 광고의 황당하기까지 한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명품을 사기 위해 빚을 지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가엾다

디더롯 효과라는 게 있다
하나를 제대로 갖추면 또 다른 하나도 갖춰야 하고 결국 전체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
최강희가 인터뷰 한 걸 보면 자기는 명품을 안 입는데, 하나만 갖추면 조화가 안 되니까 전부 갖춰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한 말이다
가방만 번지르하고 옷은 후줄근 하면 그것도 꼴불견일 것이다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갖춰야 제대로 입었다고 느낄 것이다
명품 회사들은 이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품목을 만들어 낸다
시계, 가방, 옷, 악세사리, 심지어 헤어핀, 지갑, 열쇠고리, 썬글라스 등등 그들이 손을 안 대는 분야가 없다

물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학자들조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물건만 사려고 한다
하루키의 "슬픈 외국어" 에서도 본 거지만 교수라면 하이네켄을 마시고 볼보를 몰아야 한다는 식으로 집단 나름의 내제된 규칙이 있다
그들이 단지 비싼 물건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얘기지, 물건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절대 아니다
물건을 그 가치로만 평가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이미지로 판단하는 건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사회 생활을 하는 이상 불가능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미술품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치품 역할을 했다
오늘날처럼 대중 매체가 없는 시대에 그림은 소유자의 품격을 드러내는 호사품 중 하나였다
영주와 교황 등이 그 호사품의 소비자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네덜란드에서 한 때 튤립이 호사품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호사품이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를 알려 준다
그래도 그림이 사치품인 건 괜찮다
아무리 시대가 지난다 해도 명품이 예술품으로 둔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광고에서는 그들의 장인 정신 어쩌고 운운하지만 말이다

명품을 구입하는 것이 하드웨어를 사는 거라면, 명품이 실린 잡지를 사는 것은 소프트 웨어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잡지를 열면 수많은 광고들과, 그 물품을 소비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패션 잡지를 볼 때마다 모델들이 입은 옷과 구두를 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결국 모델처럼 완벽하게 다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 판매를 위한 전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잡지에 나온 그대로를 따라 한다는 건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은 잡지 따위에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잡지를 통해 물건에 대한 도달할 수 없는 욕구만 느낄 뿐이다
그 욕구가 폭발하면 적당한 가격의 (물건 가치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비싸지만) 명품을 하나라도 구입하려고 애쓴다
한 달치 월급을 털어서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이처럼 세상을 보는 올바른 시각을 키우기 위해서다
내가 500페이지 남짓한 이 두꺼운 책을, 다소간의 지루함을 무릅쓰고 읽었으면서도 여전히 명품에 대한 헛된 환상을 갖는다면 대체 내가 책을 읽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카프카의 말처럼 내면의 얼어붙은 정신을 깨는 도끼가 되지 않는 책은 실은 별 가치가 없다
그는 단순히 읽는 재미를 주는 책이라면 남이 써 놓은 걸 읽을 게 아니라 직접 쓰고 말겠다고 했다
감동을 넘어서 내 가치관과 시각에 변화를 주는 것이 바로 책이다
이제 호사품에 대한 내 관점을 바꾸겠다
물건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는 물건의 진짜 가치만으로 판단하겠다
대신 사치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하겠다
나는 사치품 대신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에서 기쁨을 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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