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이은희 지음 / 궁리 / 200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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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는 글을 참 쉽고 맛깔스럽게 잘 쓴다
본인 지식이 아주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자신이 이해한 범위 내에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번 책은 그리스 신화를 도입부로 삼아 호기심을 먼저 끈다
사실 책 수준이 아주 높은 건 아니다
그래서 혹시 내가 동굴 속의 황제 컴플렉스에 빠진 건 아닌가 끊임없이 자책했다
즉 의사라든가, 대학 교수가 썼으면 금방 공감했을 얘기를, 평범한 연구원이 썼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을 깍아 내리고 있지 않나 스스로를 검열했다
솔직히 어떤 내용들은 (특히 의학적인 부분) 상식 수준이라 전체적인 수준은 좀 낮다
그렇지만 이런 수준의 쉽고 재밌는 과학 에세이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과학의 세기니까 말이다

유전 공학은 참 대단하다
돼지 인슐린 대신 대장균에 인슐린 복제 유전자를 집어 넣은 후 누구나 쉽게 인슐린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걸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돼지 인슐린 1kg을 얻으려면 돼지 수백마리를 잡아야 한다고 하니, 유전 공학이 인류에게 끼친 혜택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도 종교 윤리 측면에서 유전 공학의 응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하긴 지나친 상업성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악의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노화의 방지는 가능할까?
냉동 상태가 되면 대사가 느려져 수명이 길어질 수 있다고 한다
냉동 인간은 아예 생체 활동이 정지된 상태다
체온을 높히면 다시 생명 활동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냉동 인간을 깨운 예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어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이론대로 완벽하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엄청난 돈을 주고 냉동 인간이 됐는데, 불치병을 고친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깨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 십년 후에 깨워 보는 게 어떨까?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가 현실에서 벌어지다니, 과학은 참 놀랍다

솔직히 저자가 너무 부럽다
나보다 한 살 위인데, 어떻게 이런 대중적인 글을 쓰게 됐을까?
인터넷에 칼럼을 개설하고 그것이 인기를 얻어 본격적인 저술로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을 해냈다는 게 참 대단해 보인다
그녀는 그저 연구원에 불과한데 이 정도 평가를 얻어냈다는 게 참 부럽다
생물학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그녀의 열정도 부럽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학교에서 재밌게 공부할 수도 있었는데 대체 뭣 때문에 늘 괴로웠는지 모르겠다
생화학을 공부할 때는 가끔 재밌다는 생각도 했다
유전학 가르치는 교수님이 대학원에 진학한 후 생화학 교과서를 일곱 번 읽었다면서, 그 동안 왜 이런 원리를 모르고 살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때로 공부가 놀랍도록 재밌고 신나는 경우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고 싶다
진화란 개체가 종의 보존을 위해 택한 방식이고, 이것은 가장 이기적인 조건으로 유전자 내에 코딩되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자연 법칙으로만 본다면 이기적인 유전자는 당연한 얘기다
도덕적, 사회적 관점의 반박은 주제를 빗나간 것 같다
매트 매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도 읽어 봐야겠다

멜라토닌은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인데 빛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유럽 여행 당시 3주간 머물렀는데, 시차 적응의 어려움 같은 건 없었다
워낙 피곤해서 그랬을까?
바로바로 잠들고 아침이면 금방 깼다
하긴 요즘 가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새벽 2-3시면 깬다
오늘도 새벽 3시에 깨서 겨우 30분 누워 있고 결국 일어났다
밥 먹고 책 좀 보면 5시 넘어서 잠이 온다
정말 나이가 들면 예민해지는 걸까?

멜라토닌이 부족하면, 즉 겨울처럼 일조량이 적을 때는 우울증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겨울에 우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현상 같다
우울증에 빠지면 자살률이 15%에 이른다고 하니, 보통 정신병은 아닌 모양이다
푸로작(SSRI) 개발 이후 우울증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하는데,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미국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듯 하다
세로토닌이 과도하면 공격 성향이 강하고, 반대로 부족하면 우울증이 심해진다고 한다
도파민이 많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부족하면 우울증에 빠진다
엔돌핀은 고통 상태를 완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체내 마약인데 몰핀의 100배에 이르는 효과를 보인다
러너스 하이는 바로 이 엔돌핀 분비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몸은 힘든데 계속 달리고 싶은 최고의 기분, 혹시 오르가즘과 비슷한 건 아닐까?
호르몬은 많이 연구해 볼 분야 같다
인체의 호르몬 조절은 정말 신비롭다

성장 호르몬 분비가 많아지면 키가 크고 대사율이 활발해 지방 분해가 촉진된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많이 먹어도 대체적으로 살이 안 찌는 이유가 그 때문인 것 같다
이 호르몬을 어른에게 주입하면 역시 살이 빠진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싼 값에 판매된다고 하니, 앞서 가는 나라답다
GH은 인슐린과 길항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게 많아지면 인슐린 분비가 줄어 들어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이 줄어들 것이다
혈당은 올라가겠지만 일단 축적되는 건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살이 빠지는 모양이다
현재도 폐경이 되면 hormon therpy를 하는데 호르몬의 적용 범위는 계속 넓어질 것 같다

사후 피임약 노보레도 흥미롭다
교과서에도 실린 RU-486이 자궁내막을 탈락시킴으로써 착상된 수정란을 죽이는 것인데 비해, 노보레는 착상 자체를 방해하는 말 그대로의 사후 피임약이다
RU-486은 임신이라고 확인된 후, 즉 성관계 3-6주 후에 복용하는데 노보레는 성관계 후 3일 이내에 먹는다고 한다
혹시 정자와 난자가 나팔관에서 수정됐을 경우 자궁으로 못 가도록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신이 걱정된다면, 어쩌다 한 번 섹스를 하는 여자들이 이용하면 편할 것 같다
예기치 못한 성관계로 임신이 되서 낙태하는 것 보다는 한 백만배 쯤 낫지 않을까?
산부인과 학회에서는 이 피임약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최근 읽은 기사에 의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적극 찬성한다고 들었다
낙태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남아 선호 사상도 문제지만, 제대로 된 피임 교육이 우선 아닐까?
사실 미혼 여성의 경우 매일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피임약을 계속 복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관계 때마다 남자들이 콘돔을 끼면 좋으련만, 성감도가 떨어지네 어쩌네 하면서 싫어하니까 사후 피임약을 먹으면 안전할 것 같다

이 피임약은 의사 처방이 있어야 하는데, 산부인과 의사가 쓴 글에 의하면 당연히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야 한다고 했다
산부인과 진료 기록이 남는 걸 원치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학적인 측면의 안정성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지간하면 일반 의약품으로 풀리는 게 좋지 않을까?
성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또 우리나라처럼 혼전 성관계를 도외시 하는 곳에서 나 어제 섹스했소, 라고 고백하는 건 아무리 의사라 해도 꺼림칙 할 것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아 단숨에 읽었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데 내용이 쉬워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과학 에세이들이 많이 나와 대중의 과학 지식이 높아졌음 좋겠다
자기 계발류 보다 얼마나 가치있는 책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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