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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 씨, 춤 보러가다
제환정 지음 / 시공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무용이 예술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림이나 문학에 비해 그 위치가 열등한 건 사실이다
일단 수능 성적만 봐도 그렇다
고등학교 때 무용반이라고 하면 수능 성적은 거의 바닥을 긴다고 보면 된다
머리 나쁘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그래도 요즘은 춤에 대한 인식이 좀 나아지고 있다
누구나 강수진을 알고 그녀를 예술가로 생각한다
저자가 무용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무용수들의 애환에 대한 얘기가 많다
평론가가 썼으면 현장 얘기 보다는 작품 분석이 많을텐데, 그건 좀 아쉽다
그래도 무용가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같다
제일 공감이 가는 건 역시 다이어트다
다이어트에 대한 놀라운 집착은 놀라울 뿐이다
내 동생도 체형이 말랐다는 이유로 한국 무용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랩을 감고 무용을 해야 했다
온 몸을 드러내는 무용 의상을 소화시키려면, 저자의 표현대로 도대체 살집을 숨길 곳이 없을 것이다
가엾은 작은 새들...
아멜리 노통브는 "로베르트 인명사전"에서 무용수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날아 오르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려고 애쓰는 건 분명하다
무용 자체의 칼로리 소비는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럴 것 같다
저강도로 오래 지속되는 유산소 운동이 지방을 태우는데, 무용은 단 몇 분을 위해 고강도의 동작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순간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무산소 운동에 가까울 것 같다
한 시간 내내 연습해도 칼로리 소비는 겨우 200에 불과하다니, 그들이 요구르트 하나에도 벌벌 떠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저자가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날씬하고 예쁘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당당하게 표지 모델로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자기 전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일까?
강수진처럼 세계적인 무용수가 되고 싶었을텐데
그래도 이화여대를 나와서 기자도 하고 책도 쓰는 것 같다
이대라면 무용계 최고의 권력 기관 아닌가?
저자는 무용에 덧씌워진 지적이지 못하다는 평가에 무척 예민하다
사실 무용수들의 수능 성적은 체육학과 생들과 같다
그래서인지 무용학과는 체대 소속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운동과 무용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왜냐면 저자의 말대로 무용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몸으로 표현해 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무용이 인간과 떨어져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학이나 음악은 배우기 어렵기라도 하지만 (그래서 더 상부 구조를 차지하지만), 춤은 누구라도 몸만 흔들면 출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표현 양식이다
잘 추고 못 추고의 차이는 있을 망정, 장애인이 아닌 이상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춤을 출 수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체적인 것을 천시해 왔기 때문에 무용의 역사도 매우 일천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댄스가 유행하고 있지만, 상위 예술로 대접받지는 못한다
또 발레나 모던 댄스가 문학만큼 대중에게 친숙하지도 않다
서구화가 곧 세계화를 의미하게 됐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발레가 지니는 대중성을 보면 참 부럽다
오페라에 관한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볍게 영화 보는 기분으로 오페라 극장이나 발레 공연장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예술을 두고 서양이냐, 동양이냐를 나누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 본다
발레나 오페라 같은 고급 예술을 마치 영화 한 편 보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지젤"은 워낙 유명한 발레라 학교 다닐 때 비디오로도 보고 자주 듣는 이름이다
낭만 발레가 고전 발레 뒤에 올 것 같은데, 반대로 낭만 발레가 먼저이고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춘 것이 고전 발레라고 한다
"지젤"은 2막으로 구성된 낭만 발레이고 "호두까기 인형"이나 "백조의 호수" 등은 고전 발레다
지젤의 줄거리를 보면, 시골 아가씨 지젤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데 실은 약혼녀가 있는 귀족이었다
말하자면 잠깐 사냥하러 나왔다가 지젤과 불장난을 벌인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살한다
처녀 귀신으로 죽으면 윌리가 되서 마을을 떠도는데, 남자가 그 근처를 지나가면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든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 나오는 계모도 이 벌을 받는 걸 보면 서양에서 널리 퍼진 전설 같다
지젤이 사랑했던 남자도 그 숲을 지나가자 윌리들이 그를 에워싼다
물론 지젤은 그를 보호해 아침에 보내 준다
죽어서도 남자를 지켜 준 것이다
이 정도 이야기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인데, 뜻밖에도 안무가들은 바보 같은 지젤을 정신 병원으로 보내 버린다
고전을 비트는 것이다
사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젤은 지고지순하기 보다는 어리석다
약혼녀가 있는 남자에게 희롱당한 셈인데, 그에게 분노를 터뜨리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공격해 자살을 하는 것이나 죽어서도 그의 영혼을 지켜주는 맹목적인 사랑을 선보인다
그래서 현대 안무가들은 지젤을 정신 병원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무용의 매력이 단순히 테크닉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무용수들이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이 느끼길 바란다
관객과의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고난이도의 동작을 선보이는 것은 가능하면 많은 것을 몸으로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다
연습으로 험악해진 강수진의 발을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강수진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위대한 것은 고난이도의 연기를 선보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 정신의 전달 방식에 있다
앞으로 발레 공연에 자주 가 보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은 모든 예술에 다 통용되는 것 같다
이제 발레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지식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무용수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도록 애쓰고 싶다
몸이야 말로 가장 정직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아닌가?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그들의 몸짓이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나는 제대로 된 감상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