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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말 그대로 환상적인 책이다
여기서 환상이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책, 사라져 버린 책을 말한다
폴 오스터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혹시 "뉴욕 3부작" 의 기묘한 줄거리에 질린 사람이라면 이 책과 "달의 궁전" 을 꼭 권한다
"공중 곡예사" 도 재밌지만 이건 정말 재밌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독서, 은둔, 액자 소설 등으로 뒤덮혀 있다
주인공은 늘 독서열에 불타고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숨어 버리며 주인공의 얘기를 다른 사람이 들려 주는 화자가 꼭 존재한다
모든 소설이 다 그런 형식을 취한다
그는 문장을 참 잘 쓴다
이문열과는 다른 의미로 글을 잘 쓴다
이문열은 문체 자체가 훌륭한데 비해, 오스터는 묘사력이 뛰어나다
사물이나 풍경 묘사가 아니라 주변 정황이나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어쩜 이렇게 술술 잘 풀어 놓는지...
오스터의 높은 독서열이 소설의 수준을 높혀 주는 것 같다
역시 최고의 글쓰기 비법은 다독인 것일까?
이 소설의 화자인 데이비드 짐머는 "달의 궁전" 에 나오는 마르코의 친구다
마르코가 굶어 죽기 직전 집으로 데려가 숙식을 제공하고 돌봐 준 바로 그 짐머다
마르코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그를 만나는데, 그 당시 짐머는 아내가 죽었고 폐인 같이 살 때였다고 나온다
전작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두 번 인용되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창작하기 보다는 기존의 인물을 변형시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영화배우다
오스터는 또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추억이 강한 편인데 여기서는 무성 영화 시대의 코메디 배우가 등장한다
찰리 채플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920년대라면 오스터 역시 태어나기 전인데, 아마 과거 기록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것 같다
이미 영화의 역사도 100여 년이 되기 때문에 무성 영화 시대는 이제 새로운 신화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오스터라면 충분히 흥미를 느낄 만 하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도 오스터처럼 대단한 이야기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지 이야기만 잘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얘기도 수준 높게 잘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문득 안정효가 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가 떠오른다
비슷한 느낌의 책이다
짐머의 아내와 아이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후 그는 폐인이 된다
사실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괴롭긴 하겠지만 인생을 망쳐 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울까?
아직 경험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과장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브리지드가 실종된 후 그녀의 아버지가 고통을 견디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 하는 심정이 들었다
브리지드는 살아 생전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실종되자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녀를 찾아 다닌다
딸이 사라져 버렸을 때 아버지가 느껴야 할 고통은 얼마나 클까?
사이가 좋았던 딸도 아니고 잘해 준 것도 없는 딸인데 화해할 기회도 안 주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면 그 동안 잘못한 게 얼마나 후회가 되겠는가!!
브리지드의 아버지 오팰런은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찾아 헤맨다
차라리 시신이라도 발견되면 포기할텐데 실종됐으므로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도 없다
결국 오팰런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딸에 대한 죄책감과 부질없는 희망으로 자신의 삶을 갉아 먹는 것이다
짐머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그는 가족을 잃는 댓가로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 버렸다
돈이, 혹은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그 행복이 어느 정도 본질적일까?
때로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돈이 없으면 당장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그 돈을 가졌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혹은 물질이 생활을 안락하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 보다 정신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즉 최저 생계 수준만 유지할 수 있다면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서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오스터 소설의 은둔자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났지만 형편없는 새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산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대부분이 책이었다
책 속에 진리가 있고 행복이 있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헥터 역시 헐리우드 대스타라는 최고의 물질적인 자리를 버리고 나왔지만 (물론 어쩔 수 없긴 했다) 부둣가의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그는 책을 읽으며 삶의 새로운 즐거움을 맛봤다
나는 이 설정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달라진다
행복이 충만한 자기 만족감이라면 만족에 대한 기분을 바꾸면 된다
짐머는 아내와 아이들이 죽은 후 피폐한 삶을 산다
사실 그는 대학 교수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굳이 큰 재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물질적인 것에 큰 가치를 주거나 가족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큰 돈까지 안겨 준 비행기 사고가 고맙기도 하겠지만 (아마 로또 복권 당첨된 기분일 것이다), 짐머는 대단히 가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비행기 사고가 가져다 준 불행은 엄청난 보상금으로도 절대 회복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짐머는 보상금을 아낌없이 다른 곳에 쓴다
술과 마약 등 자신을 좀먹는 일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남은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 쓴다
아내 헬렌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고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와 유치원에 놀이 기구를 제공한다
또 그와 헬렌의 피붙이들에게도 나눠 준다
만약 내 가족이 내가 죽는 불행을 당한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돈을 얻게 된다면 우리 엄마 아빠 역시 내 이름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할 것 같다
나를 잃은 슬픔은 다른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가족이란 바로 이런 존재들인가...
(어제 읽은 "변신" 에 나오는 가족과는 참 다르긴 하지만)
짐머가 헥터의 영화에서 위로를 얻는 장면도 공감이 간다
삶의 의욕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을 웃기는 코메디 배우에게 집중한다
아마 그 순간에는 어떤 것에라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뭐라도 살아갈 희망이 있어야 하니까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타당한 것일 필요는 없다
하여간 자기 마음을 의지할 수 있으면 된다
짐머는 헥터에게 빠져 그의 영화들을 모두 섭렵하고 책을 쓴다
헥터의 영화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유럽까지 날아가기도 한다
앨머의 등장은 그를 다시 삶 속으로 끌어 들인다
여기서 삶이란 행복과 기쁨 등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앨머는 짐머를 헥터에게 데려가기 위해 권총까지 꺼내 들고 첫 만남에서부터 섹스를 하는 좀 특이한 여자인데 결론적으로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했다
프리다가 헥터에 관한 전기를 불태우는 걸 보고 그녀를 밀친다는 게 우발적 살인이 되버린 후 죄책감과 불안감에 자살하는 장면이 오히려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헥터의 일생을 수집하는데 7년이나 매달렸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의 전기를 쓴 짐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며 헥터의 아내와도 격렬하게 다퉜을 것이다
그녀가 정상적인 감정 상태였다면, 또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다면 헥터나 짐머에게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일 인상적인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헥터다
오스터 소설에 절대 빠지지 않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바로 헥터 같은 은둔자다
그들은 왜 안락한 현실을 포기하고 고통스런 익명의 삶으로 뛰어들까?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없다
나는 현재 누리고 있는 것 보다 더 얻기 위해 늘 긴장하며 산다
혹시 내 것을 뺏기지 않을까 항상 조마조마 하다
그래서 여유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스터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고 떠난다
물론 정신적인 충격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에 대한 집착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라면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 익명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은 없지만, 대신 의무감이나 구속감도 똑같이 사라진다
가장 큰 의무감이라면 물론 가족에 대한 것이리라
이런 생각하면 큰일나겠지만 가끔 가족이 없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럼 정말 내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멋대로 살아도 미안해 할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로 인해 실망하고 속상해 할 사람이 없다면 나는 좀 더 자유롭게 내 맘대로 살 것 같다
이것도 그저 환상일 뿐일까?
가족은 내 삶의 큰 원천이지만 때로 구속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정한 길대로 따라 가라고 요구하는 그런 구속 말이다
가장이 되면 특히 그럴 것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라면 가끔은 그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헥터는 헐리우드를 떠난 후 부둣가에서 거친 노동을 하면서 산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브리지드를 배신하고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 돌로레스의 손에 죽는데 도의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보속하는 마음으로 밑바닥 삶을 받아 들인다
만약 헥터가 헐리우드의 삶에 전혀 미련이 없었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돌로레스 역시 바로 은퇴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했더라도 우발적인 살인 내지는 정당방위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명성을 위해 사건을 숨겼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그 사건이 알려지면 돌로레스나 헥터가 편안하게 사라질 수는 없었겠지만 평생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것이 가엾은 브리지드의 가족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눈에 총을 맞고 뱃속의 아이와 함께 암매장된 딸을 찾기 위해 평생을 매달린 아버지 오팰런을 생각해 보라
결국 헥터의 행동은 비겁했다
그가 브리지드의 동생 노라의 구혼을 뿌리친 것은 당연하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헥터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심한 육체 노동을 하고 책을 도피처로 삼는다
사실 그는 이민자의 아들로 정규 교육을 못 받았다
더구나 연예인의 화려하고 무절제한 삶에 익숙한 헥터가 책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헥터의 기질 속에는 예술적이고 지적인 면이 풍부했던 것은 아닐까?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그 수준이 형편없더라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좋지도 않지만 나쁠 것도 없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다
상대적인 박탈감만 안 갖는다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뭘 하든지 세 끼 밥은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생활 보호 대상자를 생각해 보라 직업이 없어도 나라에서 쌀과 반찬값을 준다) 도서관에 가면 책은 널려 있다
결혼을 해서 책임질 사람이 생기면 다르지만, 혼자 몸이라면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
더구나 나라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 안정된 직업이 있다
나는 욕심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
노라가 헥터에게 반한 걸 보면 자매간에 닮은 구석이 있나 보다
브리지드는 헥터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가 다른 여자들과 놀아난 것도 참아 준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믿은 것이다
이 믿음은 나도 경험해 봐서 안다
비록 당신이 지금은 다른 여자들과 만나지만, 시간이 가면 내 사랑의 진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유일한 안식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자의적이고 허망하기까지 한 믿음에 매달리는 가엾은 여자!!
결국 헥터가 돌로레스와 약혼까지 한 후 브리지드는 자살을 기도한다
헤어졌다고 자살까지 할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헥터에게 매달렸는지 알 만 하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해 봤지만 그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죽을 생각은 안 해 봤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브리지드는 헥터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안다
그리고 돌로레스에게 찾아간다
아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위협감을 느낀 돌로레스는 권총으로 위협한다는 게 그만 총을 발사하고 만다
살인 무기가 허용된 미국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돌로레스는 그 후 연예계를 은퇴하고 결혼한 뒤 곧 사고로 죽는다
그녀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는데, 혹시 그녀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암매장 당한 딸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가엾은 오펠런에 관해 알았더라면 편한 잠을 자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말이다
어쩌면 사고로 죽는 순간 자기 손에 죽은 브리지드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헥터가 노라의 사랑을 받게 된 까닭은 일단 그가 헐리우드 배우를 할 정도로 잘 생겼다는 것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성실한 태도에 있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가진 것 없는 남자지만 헥터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유능했다
브리지드 가족의 집이었고 또 죄책감을 덜기 위해 헥터는 가게 일에 헌신적으로 매달린다
사실 그렇게라도 집중하지 않았다면 헥터는 브리지드의 집에서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책에서 구원을 찾은 헥터는 노라에게 수업을 받으며 지적 교양을 넓혀 간다
만약 이 정도로 신실하게 사는 남자라면 (더구나 잘 생겼다면) 나도 한 번쯤 호감을 느낄 것 같다
비록 그가 객관적으로는 가진 게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노라는 진실된 여자였다
상원의원의 아들이 가진 명예와 재산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에 숨겨진 가치를 볼 줄 아는 여자!!
그래서인지 노라는 학교 선생님에서 시작해 교장까지 진급한다
비록 헥터가 떠날 때는 괴로웠겠지만 그 후 그녀의 삶이 평탄하고 행복했을 것 같다
또 헥터가 자신이 언니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걸 평생 몰랐기 때문에 더욱 다행스럽다
만약 헥터가 노라를 사랑해 그 사실을 고백했다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언니를 죽인 범인이나 다름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동생의 괴로움이라니!!
헥터는 노라에게 그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또 브리지드의 가족에게 일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녀 곁을 떠나고 만다
헥터란 남자는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소설이기 때문에 뭐든 잘 풀리는 걸까?
내가 보기에 노라와 잘 안 된 걸로 그의 운은 다한 것 같은데, 즉 그녀 곁을 떠난 후 막노동자로 인생을 마감할 것 같은데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기회가 찾아온다
은행 강도에게 인질로 잡힌 프리다를 대신해 총에 맞은 후 놀랍게도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뭐가 딱딱 들어 맞으려고 프리다는 부잣집 딸이었고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 한다
프리다는 왜 이 보잘 것 없는 남자에게 반했을까?
아무래도 헥터에게 큰 매력이 있나 보다
책을 읽을 때는 코메디 배우라길래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논리적으로 꿰맞추다 보니까 그가 엄청나게 잘 생겨야 (장동건이나 송승헌처럼) 여자들 마다 그에게 반한 게 설명이 된다
프리다와 헥터는 시골로 이주해 농장을 짓고 영화를 찍으며 살아 간다
둘 사이의 아들은 벌에 쏘여 일찍 죽었다
이 부부는 그 충격을 이기기 위해 영화 찍는 일에 몰입한다
사람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열정이 있기 마련인데, 짐머가 헥터의 전기에 매달린 것처럼 프리다와 헥터 역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영화 촬영에 몰두한다
책에서는 헥터만 몰입하는 걸로 나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프리다 역시 헥터 같은 열정으로 매달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돈이 들어가는 일을 평생 후원했을 리 없고 그가 죽고 난 후 편집증적으로 영화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부는 쿵짝이 잘 맞았다
아마 프리다는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헥터와 함께 영화에 매달렸을 것이다
어쨌든 헥터가 죽은 뒤 그의 영화는 모조리 파기된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없애기 위해 찍은 영화라...
사실 일기나 다른 글들도 스스로의 만족감을 위해서 쓴다
즉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내적 만족감을 위해 쓰기도 한다
영화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만드는데 돈이 좀 들어가서 그렇지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적인 기록이라면 남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가들도 가끔 일기나 유고들을 없애 달라고 하지 않는가?
헥터는 자신의 전기를 쓴 짐머에게만은 그 작품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리다를 설득해 그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프리다는 완전무결성을 위해 첫 약속처럼 누구에게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결국 헥터가 죽기 전 날 도착한 짐머는 그와 단 5분 밖에는 얘기를 못하고 그의 단편 한 작품을 보게 된다
짐머는 프리다가 헥터를 질식사 시켰다고 추리한다
정말 프리다는 헥터가 모든 것을 발설할까 봐 두려워 그를 살해했을까?
90이 넘은, 오늘 내일 하는 노인이니 죽인다고 큰 죄책감은 없겠지만, 더구나 그녀 자신도 80이 넘은 나이니 삶에 미련 같은 것도 없겠지만, 헥터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까 봐 평생 사랑한 남편을 죽이기까지 한 걸 보면 그녀 성격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프리다는 앨머의 전기마저 불태워 버릴 정도로 집요했다
결국 그 편집증적인 태도 때문에 앨머에게 우발적이지만 죽기까지 했다
프리다는 뭐가 두려웠을까?
세상에 헥터의 작품이 알려지면 자신들이 평생 쏟아 부은 노력이 헛것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나이가 들면 완고해지고 자기만의 세계에 갖히기는 한다
한편 모든 것을 정리할 때이므로 너그러워지기도 하는데, 하여간 프리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꽤나 완고한 여자였을 것 같다
짐머가 본 단 하나의 단편에서도 나오듯, 헥터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를 곧 파괴하므로써 죄책감을 덜려고 한다
"프로스트의 내면적 삶" 을 보면 작가인 프로스트는 사랑하는 클레인이 죽어가자 자신의 소설을 하나씩 불태운다
클레인은 죽기 전 그 소설의 완성을 보려고 간절히 소원하는데 어느 순간 프로스트는 자신이 소설을 없애 버려야 그녀가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만든,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을 파괴하므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역설을 보여준다
헥터는 브리지드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평생을 바쳐 만든 영화를 모두 파괴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도 형벌을 내리는 것일테니까
프리다의 경우는 벌에 쏘여 죽은 어린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부담감을 벗기 위해서였을까?
어쨌든 자기 학대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드문 경우라 하겠다
아주 재밌고 인상적인 책이다
특히 마지막 결론이 마음에 든다
짐머는 앨머의 성격상 헥터의 단편들을 복사해 놨을 거라 믿는다
사실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헥터의 전기를 7년씩이나 쓰면서 그의 과거 행적을 전부 조사하고 다닌 앨머가, 헥터가 죽는 즉시 불타 없어질 영화들을 그대로 방치했을 리 없다
이 부부는 헥터가 죽으면 영화도 없앨 거라고 늘 공언했기 때문에 앨머는 분명히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영화는 그녀의 아버지가 촬영하고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헥터와 프리다만의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짐머는 앨머가 어딘가에 그 영화들을 복사해 놨을 거라 믿고 누군가가 영화를 발견해 내면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리라 믿는다
멋진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난 사실 앨머와 헥터의 관계를 의심했다
프리다가 앨머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거나, 앨머가 성적으로 액티브한 걸 보면 둘 사이에 뭔가 모종의 거래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오스터는 진부한 형식을 거부한다
또 짐머 역시 평생 앨머만 그리워 하며 사는 게 아니라 (사실 둘은 겨우 8일 동안 알고 지냈을 뿐이다) 다른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그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려 하지만 심장마비를 겪은 후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사건을 기록한다
그리고 헥터처럼 죽은 후 출간하라고 유언한다
그러니까 헥터가 살아 있을 때는 이 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이 책은 헥터와 앨머가 죽고 프리다가 모든 기록을 없애 버렸으므로 증거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환상의 책" 이 되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참 대단한 작가다
그가 비록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가는 아닐지라도 독자에게 이 정도의 재미와 생각할 꺼리를 준다면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물론 둘의 차이는 명백하지만 말이다
그가 한국 사람이라면 이 독후감을 보내고 싶다
과연 그 자신은 자기 소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훌륭한 작가도 처음에는 책이 안 팔려 야구 게임을 팔러 다녔다고 하니,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글을 써야 하려나 보다
(역설적이지만 그가 훌륭한 작가가 아니었다면 백날 글 써도 여전히 게임이나 팔고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