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진중권의 책을 꼭 읽어 보고 싶었다
한 말빨 한다길래 대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대목도 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강준만 보다 한 수 위다
적어도 진중권은 자기 입으로 자기 논리를 얘기한다
강준만처럼 남의 얘기 가지고 책 한 권 쓰지는 않는다
다만 문장이 가끔 구어체로 흘러 가는 건 불만이다
본인은 가벼움을 추구하는 모양인데, 글을 쓸 때는 좀 진중했음 좋겠다
옛날에 유시민이 쓴 "Why not?" 에서도 거부감을 느낀 바다
글을 잘 쓰는데 가끔 너무 가볍다
그래도 글은 정제된 언어여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진중권은 마초는 아니다
일단 그건 마음에 든다
마초들의 집단 히스테리를 보면 머리가 다 아프다
한국이라는 가부장 사회에서 철저하게 남성 우월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마초들은, 권위주의와 파시즘에 물든 부류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이 파시즘과 연결됐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병역 가산점 폐지 나왔을 때 소수이고 약자인 여성들에게 퍼부은 그 폭언과 집단 행동을 보라!!
이런 놈들이 설마 진보 운운하지는 않겠지?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생각을 남성 우월주의와 동일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한다
"다르다" 는 것과 차별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입으로는 다르다 하면서도 인식은 똑같게 한다
이게 문제다
남녀차별은 인종차별과 똑같은 논리다
미국 가서 유색인종이라고 무시당하는 게 열 받는다면 우리 역시 흑인 무시하면 안 되고 마찬가지로 여자들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에 관한 시각은 신선했다
역시 푸코는 예리하다
그는 동성애를 새로운 인간 관계의 형태로 봤다
진중권의 지적처럼 남녀 간의 사랑이란 남성 우월주의에 기초한 관계다
동성애는 이 우월 관계를 깨뜨리고 새롭게 다시 맺는다
동성애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다는 논리는, 성을 단순히 생식의 본능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므로 동성애 뿐 아니라 피임과 매춘 등 애를 낳지 않는 모든 종류의 쾌락적 행위도 다 비판해야 한다
또 성서에서 금지했다는 말 역시, 왜 동성애만 아직까지 금기시 하는가?
공평하게 돼지고기도 안 먹어야지
동성애 차별하는 거 반대하지만 호불호 표현까지 막지 말라는 얘기도 진중권이 한 방에 날려 버린다
인터넷 같은 공적 자리에서 표현하면 이미 그 자체가 동성애자들에 상처를 주는 언어 폭력이 된다
네오 나치주의자 같은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유색 인종이나 외국인 싫어한다고 표현하면 그것 역시 우리에게 상처가 되지 않겠는가?

강준만이 지적한 것처럼 피해자는 가해자의 위치에 설 때 더욱 잔인하다
철저하게 가해자 역할을 하므로써 피해자의 신분을 벗어 버리려고 애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문열이다
빨갱이 아니라는 거 보여 주려고 더욱 빨갱이를 욕하고 나서는 것이다
수구 이데올로기의 철저한 내제화라고 할까?
인종 차별에 열받는 사람들은 타고난 것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나 늘 살펴 봐야 한다
내 자신이 남을 차별한다면 나 역시 또다른 사람으로부터 차별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진중권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다
개인주의의 참뜻을 새롭에 아는 기분이다
흔히 개인주의란 서구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 비슷하게 쓰이는데, 이거야 말로 개인주의나 서구 시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말이다
개인주의는 집단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등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구속을 넘어서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개인주의다
애국심 같은 단어 대신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꾀하는 것이 바로 개인주의다
최연구가 쓴 "프랑스 문화 읽기" 에서도 발견한 개념이다
솔리디테르, 사회적 연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이념인 박애를 의미한다
개인주의는 근대 민족국가의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므로 탈근대적이고 세계화와 어울린다

진중권은 개인주의를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에 의지하지 않고 또 민족이나 인종의 테두리 안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홀로서기 할 것을 권한다
그래서 그는 선후배를 공적인 자리에서 씹는 걸 힘들어 하지 않는다
그의 인격과 공적은 구분되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이 얼마나 닫힌 사회인가는 인맥의 끈끈함으로도 금방 알 수 있다
적어도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이라면 이 인맥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몸으로 실천해야 그들의 말에 귀기울일 게 아닌가?
마찬가지로 진보를 자처한다면 집에서도 가사 분담을 당연시 해야 한다
마초적 기질과 진보는 너무나 대립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보수층, 아니 수구층의 이데올로기를 보면 대체 이데올로기라는 게 있나 싶을 때도 있다
신념이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지켜내야 하는 가치인 법인데, 우리나라 보수층들은 가장 기본적인 병역 의무도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아닌가?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믿는 안정과 질서, 애국심 등을 국민에게 강요하려면 먼저 국가의 의무를 솔선수범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입으로는 국가 발전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강조하면서 정작 국가의 근간이 되는 병역의무는 기피하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들이 누누히 강조하는 그 국가의 이익이란 바로 수구층의 이익에 지나지 않단 말인가?

진중권은 이문열의 삼국지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죽어가는 충신들의 숭고함을 찬양하는 이문열은 전체주의자 내지는 파시스트적이다
진중권의 지적처럼 자기가 옳은 것도 아니고 자기가 섬기는 자가 옳은 것을 위해 죽는 것은 개죽음 아닌가?
자발성과 주체성이 결여된 어떤 형태의 희생도 무가치 할 뿐이다
진중권은 그런 의미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가미가제 특공대 보다는 더 숭고하다고 본다
일단 죽음이 숭고미를 띄려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이바지 해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쪽으로 보려고 해도 가미가제나 미시마 유키오의 군국주의를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중권이 이문열을 싫어하는 이유는, 또 자칭 보수층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파시스트적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집단의 가치에 개인을 함몰시킨다
또 그것은 필연적으로 독재와 권위주의, 억압 등과 연결된다
그러니 이문열이나 이인화 등이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찬양할 수 밖에
박정희의 경제 발전 업적은 업적이고, 그의 독재는 독재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기념관까지 지어 떠받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사실 공병호 같은 자칭 자유주의자는 극단적인 자유, 즉 완전한 규제 철폐를 원한다
시장주의자들이 작은 정부를 원하는 것은 새롭지도 않은 고전적 개념이다
공병호는 심지어 장기 매매의 합법화까지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인간의 생명까지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다
진정한 자유란 국가나 집단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상태다
보수층이 국가의 안전을 내세워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대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기본적인 경제적 규제의 철폐는 자유가 아니다

미국보다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은 서구 유럽 사회를 역할 모델로 삼아야 할 것 같다
결국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우리의 의식이 성숙해져서 억압과 차별을 분명히 인식하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보다 살기 좋아질 것이다
유시민 책을 보고도 글 참 잘 쓴다 싶었는데, 진중권도 만만치 않은 필력을 자랑한다
그가 쓴 "미학 오딧세이" 도 꼭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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