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의미
마이클 콕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30년간의 결실은 대단하다. 하나의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였는데 읽으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방대한 자료와 충분한 조사가 주석과 내용으로 덧붙여지면서 가공의 세계가 현실처럼 다가온다. 한 인간의 집착과 철저한 복수의 의지는 그를 삼킨 사랑의 열정과 배신을 뛰어넘어 장대한 서사시로 변했다.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지만 계속해서 빠져들게 만들고, 질문을 던지게 한다. 

  

 

 편집자의 서문 형식으로 시작한다. 19세기의 고백록으로 여겨지는 이 책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발굴하고 편집하여 책으로 내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문을 연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이 살인에 특별한 의미는 있지만 피살자에게 원한이나 다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에드워드가 자신이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살인을 잘 할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얼마나 복수의 의지가 강했으면 무고한 사람을 선택하여 연습으로 살인을 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장대하고 처절하면서도 애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19세기 영국의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는 살아있는 듯 생동감 있고 현실적이다. 주인공과 필생의 적인 포이보스 돈트가 지닌 문화적 배경과 취미와 직업 때문에 작가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19세기 문화와 그 이전 시대의 서적에 대한 연구가 펼쳐지고, 작품 목록이 첨부되고, 방대한 주석이 달린다. 이 모든 작업이 단지 한 작품 속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이란 점에서 30년 결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지적 충족감을 강하게 준다.   

 

 학창시절 성공을 향해 나아가던 그를 방해했던 적 포이보스의 행위로 미래가 바뀌고, 우연히 발견한 출생의 비밀은 새로운 삶을 꿈꾸게 만든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 그가 엄청난 가문인 탠저 경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삶의 신비로운 반전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사실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때부터 그의 능력은 이 사실을 증명할 서류를 찾는데 바쳐진다. 그리고 하나씩 나오고 발견되는 사실은 그를 더욱 희망에 부풀게 만든다.   

 

 

 소설은 큰 두 줄기로 진행된다. 하나는 과연 그 출생의 비밀이 그의 착각은 아닌지 하는 것과 그가 왜 그렇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출생의 비밀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과거는 왜 그런 일을 해야 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배신은 가장 높은 곳으로 그를 올려놓았다가 한순간에 가장 낮고 깊은 곳으로 떨어트린다. 사랑. 이 평범하고 위대한 이름 뒤에서 펼쳐지는 음모와 살인과 복수는 대단한 작업이자 즐거운 책읽기고 슬프면서 잔혹하고 충격적이다.   

 

 작가가 재구성한 19세기의 런던은 에드워드란 한 인물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주고, 생명을 불어넣고, 그 사회를 짐작하게 만든다. 복수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여야 했고, 그 처절한 의지 속에 숨겨져 있던 가슴 아프고 허망하고 무기력한 삶의 흔적은 읽는 동안 숙연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냉정하게 한 사람을 죽이는 첫 장면에서 그의 감정이 이제 메말라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지 가슴 속에 살아있는 감정은 복수란 그 단어뿐이다. 그리고 밤이 범죄자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고, 밤의 의미를 음미하는 순간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적지 않은 분량이고 방대한 주석과 멋지게 만들어진 세계는 단숨에 읽기가 사실 쉽지 않다. 하지만 읽는 즐거움을 계속 준다. 읽으면서 생긴 의문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만들고, 거짓과 사실을 구분하려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순간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한 남자의 처절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밤의 의미를 보여주는 그 순간 마무리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의 속편을 쓰고 있다니 매력적인 주인공 에드워드의 활약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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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의 노래
나카니시 레이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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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0년 나오키 상 수상작이다.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경우 이런 수상작은 나의 시선을 끈다. 이전에 읽었거나 유명한 작가라면 그 자체로 하나의 광고나 선택의 대상이 되겠지만 낯선 작가의 경우 이런 수상경력이 참고 사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출판사들은 수상자들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책의 홍수 속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가장 간단한 선택 방법일 것이다. 아마 주변에 엄청난 독서가가 있다 하여도 요즘 나오는 책들을 모두 읽기는 무리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소설은 한 게이샤 아이하치의 일생을 다룬다. 그녀가 게이샤로 팔려가는 순간부터 죽는 그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을 일생을 다루다보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선 그 시기가 자신이 짝사랑했던 고가와 함께 나가사키 민요를 채집하던 시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민요기행에 소설 전체를 할여하지는 않는다. 단지 원제가 되는 ‘나가사키 부라부라 부시’를 배우고 알려지는 그 마지막이 클라이맥스를 이룰 뿐이다. 그리고 그 애절한 사랑의 흔적과 기억도.  

 

 어린 나이에 게이샤로 입문하지만 타고난 미모가 부족한 그녀에겐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예라고 말하는 노래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게이샤들의 순위는 바뀌지만 노래가 탁월한 그녀는 언제 다섯 손가락에 포함된다. 이런 그녀이지만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경험한 것은 우연히 부딪힌 지역 학자 고가를 만나면서다. 작가는 이 만남을 극적으로 만들지도, 애절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장의 이면에 담긴 그녀의 마음은 읽는 독자에게 충분히 전해진다. 그래서 마지막 그녀가 가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한 도시의 축제에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노래라면 대단히 의미가 있다. 한 노파의 회상에서 시작하여 마무리하는 이 소설의 구성에서 나가사키의 군치 축제는 ‘나가사키 부라부라 부시’를 다양하게 편곡하고 구성하여 화려하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이 노래를 잊었던 과거에서 살려내 현대까지 이어지게 만든 것은 아이이치라는 게이샤와 고가의 민요기행이 시발점이지만 더 큰 이유는 폐렴으로 죽을뻔한 한 어린 게이샤를 살리려는 아이이치의 지극한 정성이다. 그 아이 오유키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기에 쉽게 물러서질 못한 것이다. 그것은 천애고독의 빛이자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있기에 고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집착하지 않고 풀어놓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이 아닌가 한다.  

 

 제목 ‘게이샤의 노래’처럼 많은 노래가 나오지만 가락이 빠져있다 보니 그 흥이 살아나지 않는다. 나가사키 지역 사투리를 남도 사투리로 번역해서인지 처음엔 약간 어색한 감도 있다. 엄청나게 흥미롭거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고, 쉴 새 없이 빠져드는 문장과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슴 속에 잔잔히 스며들며 계속 읽게 만든다. 최근에 읽은 일본소설 중 가장 일본색이 강하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듣지 못한 ‘나가사키 부라부라 부시’를 듣고 싶어지는 지금 아이이치에 대한 그리움이 소록소록 솟아난다. 그녀의 무소유의 삶이 어쩌면 가장 부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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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예언자 4 - 오드 토머스와 흰 옷의 소녀 오드 토머스 시리즈
딘 R. 쿤츠 지음, 김효설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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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예언자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앞의 세 작품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번 소설을 읽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에 펼쳐진 이야기들이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키워놓았을 뿐이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꿈꾸고, 이것이 현실에 벌어질 사건을 막아내려는 오드의 노력을 중심으로 간결하면서 유머 있게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주저 없는 살인은 또 다른 매력이자 재미이기도 하다.   

 

 이번 소설을 읽기 전 오드의 나이가 좀더 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시리즈 첫 권의 책 소개에서 받은 선입견과 이전에 읽은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의 나이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스물하나다. 그런데 이번 소설이 네 번째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 시리즈가 7권까지 이어질 예정이라니 과연 몇 살까지 그의 고난이 계속될까? 시리즈 3이 불과 16주 전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런 행복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흰 옷의 소녀가 새롭게 등장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 예정이 아닌가!  

 

 오드는 뛰어난 요리사다. 그의 실력을 알아챈 왕년의 유명 배우 허치슨 씨가 그를 요리사로 고용한다. 이 집에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새벽 바다에 시뻘건 파도가 일고 무시무시한 불빛이 번쩍이는 악몽을 두 번이나 꾼다. 그의 말대로 보통사람이라면 그냥 악몽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꿈은 미래를 한 모습을 보게 하는 예지몽이다. 그러니 그가 불안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아마도 내가 읽지 않은 앞의 시리즈 3권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물론 사건을 다르지만. 

 

이런 이상한 꿈을 꾼 후 바다로 산책을 나간다. 그곳에서 한 임신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가 바로 꿈속에 나타난 여주인공이자 신비한 매력과 능력을 가진 안나 마리아다. 이 둘의 만남을 보면 신비하고 이상한 느낌을 준다. 이때 거구의 사나이와 붉은 머리 형제들이 나타난다. 이들의 등장은 그와 함께 다니는 유령 개 부를 자극한다. 먼저 그녀를 보낸 후 해일에 대한 농담을 하면서 상황을 유연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거구의 남자가 그의 어깨를 짚는다. 동시에 두 사람은 오드의 악몽을 경험한다. 상대가 놀라 주춤하는 사이 오드는 바다 속으로 몸을 날린다. 이 재빠른 행동이 목숨을 살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적은 바다로 몸을 던진 그를 찾아다닌다. 바다에서 탈출은 성공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작가는 이제 이상한 남자들과 오드의 예지몽과 안나를 하나씩 연결시킨다. 오드의 신비한 능력 중 하나인 심령자석으로 안나를 만난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적들도 그녀를 찾아온다.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오드는 이 상황을 넘기고, 또 다른 친구의 집으로 몸을 피한다. 그곳에서 안나의 집에서 본 것과 똑같은 표시를 본다. 그것은 멈춘 시계다. 현재 그가 차고 있는 시계와 상관없이 이 두 집의 시계는 열두 시 일분 전에 멈춰있다. 여기서 작가는 친절하게 이 시간이 앞으로 사건이 발생할 시간임을 알려준다. 이제 오드가 사건을 막을 시간이 겨우 네 시간 남았다.  

 

 이후 펼쳐지는 오드의 활약과 주저 없는 적들의 살인행위는 놀라움과 동시에 주인공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할리우드 방식이 그대로 재현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과연 이렇게 비정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을까 놀라게 된다. 돈을 위해 수백만 명을 죽일 원자폭탄을 터트리려는 계획을 짜고, 좀더 많은 돈을 소유하기 위해 같은 편도 주저 없이 죽인다. 이런 배신의 고리는 과히 악당의 모범이라 불릴 수 있다. 그리고 경찰서장까지 가담하는 순간 이 도시에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오드의 쉴 새 없는 몇 시간의 활약이 재미의 중요한 축이라면 오드의 눈에만 보이는 프랭크 시나트라 유령은 조연으로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수많은 영화를 소설 속에 인용하고,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사건이 이미 자신이 글로 썼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이것들이 바로 이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다. 작가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을 앞두고 결코 무거워지지 않는다. 유령을 충동질하고, 악당과 농담을 하고, 이전에 몰랐던 선량한 사람들을 만나는 등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경험을 한다. 덕분에 이야기는 풍부해졌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생략되고 불친절해졌다.  

 

 

 딘 쿤츠의 예전 작품에서 느낀 간략하지만 날렵한 재미가 이 소설에 있다. 그리고 매력적이고 멋있는 캐릭터가 등장하여 재미를 보장해준다. 하지만 전작은 모르겠지만 이번 소설에선 전체적인 구성이 허술하게 느껴진다. 의도적인 연출과 구성인지는 모르지만 불친절하고 너무 많은 의문을 남겨두었다. 만약 이 시리즈의 앞이나 뒤의 이야기를 읽은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지면서 왜냐고 물으면 답은 하나다. 그것은 오드의 매력적이고 신비한 경험이 아직도 궁금하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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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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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연쇄살인을 계획한다. 세 명이다. 그는 살인을 시험공부 하는 것과 같게 생각한다. 확실하게 죽이고, 절대 잡히지 말자는 목표로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실행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침착함은 필수다. 연쇄살인을 마음먹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인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그것은 그의 섹스 파트너이자 동료였던 아카네가 갑자기 찾아와 그를 죽이려고 하면서부터다. 그녀와의 사투 끝에 살아남고, 그녀를 죽인다. 이제 그는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 여자를 죽이기 위해 밤을 달린다.  

 

 이 작가의 다른 책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를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살인의 의도가 상당히 결백증에 가까운데 이 소설에서도 그런 경향이 강하다. 또 전작이 수학의 정밀함을 떠올려주었는데 이번엔 살인자 나미키의 심리와 행동을 통해 수학의 가정법과 논리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토하고 실행한다. 예상하지 못한 급박한 전개는 충분하게 가능성을 검토할 시간이 부족하다. 처음부터 그가 연쇄살인을 계획한 목적인 이 세 여자의 각성을 생각하면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쳐들어가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아카네와 사투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했지 않는가!  

 

 그가 죽이고자 하는 세 여자는 기시다 마리에, 구노스키 유키, 야타베 히토미 등이다. 그녀들의 부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 나미키와 아카네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쓴 이들의 가족을 돌봐주는 단체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이 창조한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그녀들에게 있다. 처음엔 그 괴물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는다. 뒤로 가면서 그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점차 알게 된다. 그렇다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성하게 된다면 사회에 대단히 위험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소설의 시점은 두 가지다. 나미키의 심리와 행동 중심으로 하나가 펼쳐지고, 조금씩 유키의 독백이 나온다. 대부분 나미키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그가 각성한 존재들의 위험을 막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준다. 먼저 대상을 정한 후 어떻게 방에 들어가서 그녀를 죽일 것인지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는 모습에선 보통의 살인자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뭐 연쇄살인을 생각하고 계획한다는 자체가 보통 모습이 아니긴 하다. 그런데 이 검토와 실행이 어긋나는 순간 변수가 생기고,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감정과 몸의 반응은 놀랍고 무섭다.  

 

 

 완전 범죄를 꿈꾸며 실행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살인의 대의를 생각하면 주저함이 없어야 하는데 그는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니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후의 장면들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몰입해서 읽는 동안 잘 느끼지 못하지만 잠시 숨을 고른다면 그가 가진 생각의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가 주장하는 정당성이 조금씩 퇴색되고, 자신도 모르게 변하게 된다. 이 부분이 소설의 강점이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가정과 검토가 나와 긴장감을 잠시나마 떨어트리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다시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의 주인공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어야 할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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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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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다. 유전적인 문제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시간대로 여행을 하는 헨리와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클레어의 사랑을 다룬다. 이 둘의 만남과 헤어짐과 그리움과 사랑을 읽다 보면 어느새 시간을 잊게 된다.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자 sf소설이다. 시간을 여행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하여 정말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함께 한 시간이 이렇게 뒤섞여 있으면서 강렬하게 연결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길 정도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서로를 만난 나이가 각각 다르다. 헨리가 클레어를 처음 만난 것이 스물여덟이라면 클레어가 헨리를 처음 만났을 때 여섯 살이었다. 이 둘의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맞다. 이 둘은 산술적으로 계산되는 나이를 초월하여 각각 처음 만나게 된다. 이렇게 이상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헨리가 가진 병이자 능력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시간대로 여행하는 것이다. 멋져 보이지 않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시간 여행을 꿈꾼다. 과거로 미래로 마음껏 여행을 하면서 현재 느끼는 아쉬움을 되돌아보고, 지금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경이로움을 바란다. 하지만 헨리의 시간 여행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 단 하나의 행복이 바로 스물여덟 이후 그와 함께한 클레어를 시간여행 속에서 만난 것이다. 부수적으로 미래에서 온 그가 과거의 그에게 경제정보를 줘서 어느 정도 부유함을 가지게 하는 정도다. 결코 그들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헨리의 시간여행은 자신이 바라는 시간으로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시간여행을 떠난다. 헐벗은 채로 언제인지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타난다. 언제 다시 그가 돌아온 시간대로 돌아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살기 위해 나쁜 짓을 익히고 연습하고 실천으로 옮긴다. 몰래 문을 따고 들어가 옷이나 돈을 훔치고, 소매치기로 다른 사람의 지갑을 슬쩍 빼낸다. 벌거벗은 상태로 나타나다 보니 가끔은 폭력으로 상대편 옷을 빼앗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처음 클레어가 헨리를 만났을 때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현실의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주 나타나면서 그녀에게 하나의 우상처럼 되었다. 몰래 숨겨둔 비밀연인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그의 모습은 어쩌면 그 또래의 아이들보다 우쭐함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미래에서 온 어른이 그녀의 단 한 명의 사랑이 될 것이라곤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찾아온 다양한 나이 대의 헨리가 그녀에게 계속적인 신선함과 즐거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는 순간 그에 대한 환상과 기대와 그리움은 이 세상 무엇보다 강렬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한다.  

 

 얄팍한 물리학 지식은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기존에 보았던 시간여행에 대한 모든 공식이 깨어진다. 미래의 헨리가 과거의 헨리를 만나서 정보와 생존 기술을 가르쳐주고, 과거의 헨리가 미래의 헨리나 클레어를 만나서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된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다른 시간대의 두 헨리가 공존하고, 미래가 과거로 와서 미래의 결정할 수 있는 조그마한 변화를 일으킨다. 다양한 차원의 세계가 공존한다면 무리가 없지만 이 소설은 하나의 시간대만 존재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물리학은 멀리하고 단순히 두 남여의 만남과 헤어짐만을 생각한다면 독특하고 기발하면서 황홀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누가 더 행복했을까 생각해본다. 여섯 살부터 헨리를 그리워하고, 단 한 명과 사랑을 나눈 클레어일까? 아니면 다양한 여자들을 만나고 경험한 끝에 스물여덟에 클레어를 만난 헨리일까? 개인적으로 클레어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헨리의 과거가 주는 아픔이나 자신도 모르게 하는 시간여행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다양한 경험과 많은 여자란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록 클레어가 헨리의 갑작스러운 시간여행에 불안을 느끼고, 다시 나타남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하여도 말이다.  

 

 두 남여가 만나는 나이와 시간은 정말 다양하다. 재미난 것은 클레어의 시간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헨리의 나이만 자꾸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연출로 보인다. 미래의 헨리가 현재에 나타나서 채워주는 시간과 감정들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만으로 이렇게 흥미롭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니 대단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준 “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2권 354쪽)란 문장에 함축된 감정의 깊이와 울림이 강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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