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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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세계문학 294권이다.

이 시리즈도 정말 꾸준히 잘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다.

오랜만에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읽었다.

이 책 이전까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은 정말 잘 읽히지 않았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들도 미로 속에서 헤매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 기억 때문에 사실 이 소설도 힘들게 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은 기우였고, 생각보다 빠르고 재밌게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이 풍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1958년 쿠바 아바나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직 카스트로가 혁명으로 정권으로 잡기 전이다.

아바나에는 각국의 스파이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워몰드는 진공청소기를 판매하는 상인이고, 이혼 후 딸 몰리와 살고 있다.

딸은 천주교 학교에 다니고, 돈 씀씀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일을 마친 후 오랜 세월 술을 같이 마신 친구인 닥터 허셀바흐가 있다.

둘은 술집에서 같이 한 잔 후 서로 헤어지지만 오랜 친구란 유대감이 있다.

이런 평범한 일상에 갑자기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깨어진다.

그는 영국 정보부 소속이고, 워몰드가 요원으로 활약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돈의 유혹이 그를 정보부를 위해 일하는 요원으로 변화시켰다.


요원이 된 워몰드는 사실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돈을 얻어내기 위한 가짜 보고서와 가짜 정보원들을 만들어낸다.

가짜 보고서 중 하나는 그가 판매하는 진공청소기 일부를 그린 것이다.

정보부 직원들은 이것이 진공청소기와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 ‘그사이 런던에서 벌어진 일’에 나온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뭐가 이렇게 허술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원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서 교차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이 코믹했다.

하지만 바로 이 코믹함이 작가가 의도한 연출이었다.

실제 이런 황당한 사건이 있었고, 그 아이디어를 이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이다.


워몰드는 영국 정보부에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이라고 부른다.

비밀번호가 있지만 이 표현 속에 담긴 신뢰가 사건을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키운다.

가짜 정보에 넘어가 그를 돕기 위해 비서와 다른 요원을 아바나에 파견한 것이다.

매일매일 가짜 정보와 가짜 정보원을 만들어내야 하는 워몰드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언젠가 자신의 비밀을 비서에게 말해야지 생각하지만 정보부의 돈은 달콤하다.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한 정보부의 압박은 그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정보원이라고 말했던 라울이 죽는 사건이 생긴다.

거짓을 사실이라고 믿는 다른 나라 요원들이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이다.

황당하지만 현실은 사실보다 자신들이 믿는 바를 더 믿고 따른다.

이때까지 평범했던 진공청소기 판매상이 진짜 스파이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스파이의 허술한 행동은 보는 내내 허술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진심과 상황 등이 그 세계의 문을 그에게 열어준다.

이때부터 긴장감이 생기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일부 장면에서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도 한다.

실제 인물에 비해 덜 잔혹하게 등장시킨 캡틴 세구라에게도 인간미를 부여한다.

이 소설의 진짜 백미는 그의 가짜 스파이 활동에 대해 알게 된 정보부의 반응이다.

우리가 스파이 소설에서 본 냉혹하고 잔인한 정보부 대신 희롱당하는 정보부가 나온다.

어쩌면 이 모습이 정부 조직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풍자와 스릴러가 함께 있지만 나에게는 풍자의 느낌이 더 강하다.

아주 살짝 그레이엄 그린의 다른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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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쿠데타 - 글로벌 기업 제국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클레어 프로보스트 외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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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들은 런던 탐사보도센터의 회원들이다.

둘은 민간 대기업 등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기업 권력을 강화하는 지 파헤쳤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기업 사법, 기업 복지, 기업 영토, 기업 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전에 다양한 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지만 낯선 이야기들도 많다.

낯선 부분 중 유엔 산하 기관들이 본연의 목적을 잃은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IMF 사태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저자들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여행하면서 자료와 정보를 수집했다.

읽다 보면 무시무시한 현실들을 만나게 되고, 생각할 거리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한국 경제와 엮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기업 사법 이야기는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모투자펀드 론스타 소송이었다.

몇 년 전 한국 정부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소송에서 패해 엄청난 손해배상금을 물었다.

IMF 사태 이후 금융시장을 해외에 개방하고, FTA 등을 체결하면서 이 부분은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강행한 정부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언론은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그 결과 해외 투자기업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이유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했다.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었는데 이 일에 대해 책임지는 공무원은 현재 없다.

한국 밖으로 눈으로 돌리면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들도 소송의 대상이 된다.

퍼시픽 림 대 엘살바도르 소송은 개발도상국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독일 함부르크의 상황은 그 범위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알려준다.

하지만 후진국으로 가게 되면 이보다 더 심한 시민에 대한 현실적 공포가 있다.


이 현실적 공포는 기업이 고용한 준군사조직 등의 폭력과 학살 등이다.

현재 수많은 영화 등에서 전쟁대행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현실에서 우리가 이런 준군사조직을 만날 기회는 없지만 보안회사라면 다르다.

한국에서도 이런 경보, 보안회사들이 수없이 생겨 이제는 익숙하다.

단순 경비라고 생각하면서 쉽게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좀더 커지면 준군사조직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사 속 개인 권력자들의 사병이 떠올랐다.

지역 영주나 지주 등이 사병을 거느리고 지역을 다스리던 그 시대 말이다.

놀라운 것은 핵 보안 사업마저도 대기업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이전에 공시되었던 정보들이 기업 비밀로 묵였다고 한다.

너무 광범위한 기업 비밀 조항에 대한 축소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민족을 내세워 독립했다.

독립한 나라는 자본이 없거나 일부 식민지 기대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기업들은 독립 과정에서 그 나라와 문제가 생겼고, 소송도 벌어졌다.

그리고 이 나라들을 지원하기 위해 저개발국 원조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 원조가 빈곤국의 예산 자원에 쓰이지 않고 선진국 기업들에 썼다.

대부분의 원조 자금들이 선진국 기업들의 물건이나 서비스 구매에 사용된 것이다.

이런 지출은 당연히 빈곤국 국민들의 생활 개선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제대로 사용되었다면 그 국민들의 생활 환경 개선과 산업 개발 등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주의를 가진 대기업들이 바라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경제특구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가 어린 시절 배운 수출자유지역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말하는 특구와 어떻게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장 익숙한 형태다.

이 경제 특구가 아일랜드의 발명품이란 사실은 처음 알았다.

중국으로 이야기가 넘어가면서 그 악명 높은 아이폰 공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이런 폭압적인 노동 탄압을 받다니 얼마나 황당한가.

이것은 기업이 만드는 도시 이야기로 넘어가면 상상을 초월한 현실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우리가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 베트남 하노이의 임대료가 월 4천불 이야기는 놀랄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토지가 이전 거주자들에게 약탈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이런 약탈과 폭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더 깊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대기업들의 변화와 수탈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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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개정판
조예은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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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에 한 번 읽었던 책이다.

이후 작가의 행보를 생각하면서 개정판이라고 하니 다시 읽고 싶었다.

이번 글은 이전 감상에 새롭게 다가온 부분들을 덧붙였다.

개정판이라고 하지만 전체적인 얼개를 그대로이고, 몇 곳에서 문장 등의 변화만 확인할 수 있었다.

두 판본을 모두 비교하기에는 나의 능력 밖이라 할 수도 없다.

이전에는 부제로 ‘고통을 옮기는 자’가 들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없다.

오래 전 글을 보면 시리즈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개정판이 먼저 왔다. 아쉽다.

긴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읽어서인지 많은 부분 새롭게 다가왔다.


시프트. 고통이나 병을 옮길 수 있는 전이 능력자 이야기다.

자신의 몸을 통로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의 질병을 자신이나 또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다.

이 전이능력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저주일 뿐이다.

축복은 그 고통과 질병을 넘겨준 사람들이고, 저주는 그것을 받는 사람이다.

실제 이런 능력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능력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이 소설처럼 악당들에게 끌려가 돈벌이로 이용되면서 사육 당할 것이다.

부자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병을 옮기며 영생을 꿈꾸고, 누군가는 이 병으로 죽을 것이다.


소설은 두 인물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한 명은 찬의 능력을 본 이창 형사고, 다른 한 명은 찬의 능력을 전이 받은 동생 란이다.

이창 형사는 누나와 같은 병에 걸린 조카를 살리기 위해 사이비종교 천령교 교주를 찾아다닌다.

자신의 누나가 교주에 의해 병이 완치된 기적을 봤기 때문이다.

교주의 능력은 가짜이지만 찬의 전이 능력은 이것을 기적으로 만든다.

이 사실은 모르는 형사는 열심히 교주만 찾을 뿐이다.

그러다 한 폐건물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그가 바로 사라진 천령교의 교주였던 한승목 목사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이야기가 들린다.

교주의 능력이 아니라 찬의 능력이란 정보다. 이제 좇는 대상이 바뀐다.


란의 이야기는 한승목 목사가 어떤 인물이고, 그가 저지른 악행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찬의 능력을 이용해 사이비종교를 만들고, 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켜 돈을 번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싸들고 와 그에게 기적을 바란다.

교주는 열성적인 신도에게만 기적을 펼친다.

열성도는 헌금에 달렸다. 이창의 아버지가 전재산을 바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했다.

하지만 교주의 아들로 포장된 것 때문에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교단은 파괴된다.

찬의 능력이 없다면 지속될 수 없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능력이 란에게 전달된 것은 아직 모른다.

란이 전이 받은 이 능력을 한 번 사용한 것을 한승목이 알기 전까지는.


한 목사의 죽음은 그의 비리와 악행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다.

거리의 아이들을 납치해 찬이에게 병을 옮기도록 했다.

이 저주받은 능력은 질병과 고통을 받을 그릇으로 연약한 아이들을 납치하게 만든다.

한 목사 일행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찬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신만 죽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면 그는 자신이 그 질병과 고통을 안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동생 란이 있었고, 란에게 가해지는 고통 혹은 죽음이 두려웠다.

교주가 돈을 많이 벌수록 더 많은 아이가 납치되고, 죽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는 정말 저주받은 능력이다.


작가는 능력에 한계를 둔 채 이야기를 만들었다.

특별히 이야기를 확장하지도 않고, 그 능력을 과도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전이 능력은 상대방을 맨손을 잡지 않으면 발현되지 않는다.

이 능력의 한계가 찬과 란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공간도 작은 지방 도시로 한정한 채 많지 않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전에는 이런 설정들이 왠지 너무 가지를 쳐 앙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젠 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속도감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고.

란의 능력과 그 한계를 안 이창의 고민이 가슴 깊은 곳으로 와 닿지 않았다, 고 이전에 적었다.

이것은 내가 놓친 부분들 때문에 선입견이 작용했다.

이창이 왜 그런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에피소드가 그 답 중 하나다.


손을 잡아야만 한다는 제한적인 능력은 늘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 능력을 사용해 정의로운 활동을 하고, 악당을 쳐부술 수도 없다.

누군가의 병을 고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병을 안고 간다는 의미이다.

악당들에게 이 병을 옮겨준다면 통쾌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다.

아 능력을 자주 사용하면 그의 존재가 더욱 알려지는 위험마저 생길 수 있다.

악당들은 개인이라고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등지거나 거대한 폭력을 동원할 수 있다.

실제 우리는 권력 등에 의해 범죄 사실이 덮이거나 사라지는 것을 현실에서 봤다.

책 소개를 보면 표현 등만 다듬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시리즈의 필요를 느낀다.

이 매력적인 능력과 캐릭터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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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게임
박소해 외 지음 / 북오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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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작가 네 명이 부부를 주제로 한 미스터리 앤솔로지를 내었다.

사랑해서 결혼했을 것이란 현대의 가정은 현실의 벽 앞에 쉽게 무너진다.

결혼이란 사회적 제도 속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다.

이해관계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조금씩 밖으로 드러난다.

삶의 힘겨움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자주 가족들에게 가장 날카롭고 거칠고 폭력적인 상황을 본다.

혈연 관계에서도 그런데 촌수가 없는 배후자라면 어떨까?

네 명의 낯익은 미스터리 작가들은 부부와 살인이란 소재를 잘 엮었다.


박소해의 <사마귀, 여자>는 불륜에 빠진 형사를 다룬다.

가정 폭력을 저지르던 남자가 아내를 칼로 찌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현장에서 낯선 여인이 형사 민우를 천천히 아래위로 훑는다.

증인의 말을 듣기 위해 옆집 채윤을 만나러 갔다가 그녀에게 매혹된다.

이 매혹은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를 속이는 불륜으로 이어진다.

그를 경찰로 인도한 선배가 경찰서 내부에서 자살하는 사고가 생긴다.

독자의 직감은 채윤을 떠올리게 하지만 아직 그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는다.

채윤의 강렬하고 도발적인 매혹에 빠진 그는 아내의 출산 이후에도 그녀를 찾는다.

그러다 발생한 사건 하나와 민우에 대한 설명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둔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백미는 서로 다른 생각으로 마주한 두 부부의 식탁 장면이다.


김재희의 <부부, 그 아름다운 세계>는 인터넷 게시판 글로 시작한다.

한 여성이 병원을 다니면서 의사들과 불륜을 저지른다는 게시글이다.

워낙 많은 글들이 올라오지만 어느 병원인지를 암시하면서 인기 게시글이 된다.

이 글을 성형외과 의사와 결혼한 현경이 간호사들의 컴퓨터를 통해 읽는다.

남편은 한때 방송에 나와 인기를 얻었지만 최근 젊은 의사에게 조금 밀리고 있다.

남편의 불륜이 의심스러운 그녀는 고객 한 사람과 상황이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밖에서 둘이 만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알게 되는 진실은 그녀의 생각과 다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남편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말해준다.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 부부, 부부관계와 대화가 사라진 생활 등이 교훈적으로 흘러나온다.

마지막 장에 등장한 의사의 선배들 모습은 앞의 무게를 가볍게 던져버리게 한다.


한수옥의 <설계된 죽음>은 앞부분에서 잠시 혼란을 겪었다.

저수지에 차가 빠졌고, 남편 재우는 나왔지만 아내는 익사했다.

이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은 남편이 저지른 살인이라고 의심하고 신고한다.

남편의 주장과 달리 안전벨트는 쉽게 풀렸고, 블랙박스의 유심은 사라졌다.

신고한 119 구조대 팀장 김형석의 아내와 이 남편은 불륜 관계였다.

둘이 불륜을 저지르는 사이 집에만 있던 아이들은 화재 사고로 죽었다.

최이현 형사의 수사는 새롭게 흘러나오는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면서 처음과 다른 가능성이 나온다.

지독한 복수심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지만 힘은 조금 딸린다.


한새마의 <시소게임>은 모두 읽은 후 너무 거친 내용에 놀랐다.

장편 소설로 발전해야 할 이야기가 단순한 구성 단계의 연속으로 마무리된 느낌이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국제 결혼을 하게 된 남녀.

이 남녀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혼녀, 국제결혼한 베트남 라이따이한의 한국 아버지.

각자의 사연을 충분히 풀어내지 않고 사건만 간단하게 그려낸다.

치밀한 구성과 캐릭터의 깊이를 더한다면 멋진 스릴러가 될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작가는 장편을 단편으로 압축하고 요약한 것처럼 내버려두었다.

언젠가 이 단편을 장편으로 제대로 발전시킨 것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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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고 2025
이준아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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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다섯 신예 작가의 단편집이다.

구성은 각 작가들의 단편 한 편과 에세이 하나다.

이 시리즈는 2023년부터 나왔고, 이번이 세 번째다.

이 시리즈를 처음 읽는데 상당히 유쾌하고 재밌다.

편집 방향이 나의 취향과 맞는 것인지, 이번에만 그런 지는 더 봐야 알 것 같다.

다섯 신예의 단편을 읽다 보면 다양한 느낌이 드는 데 어떤 단편은 영화처럼 다가왔다.

단편 소설에 비해 에세이들은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흥미로운 대목들도 있지만 아직 자신들의 혼란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이준아의 <구르는 것이 문제>는 조금 독특한 조합의 커플 이야기다.

화자인 여자는 제1형 당뇨 환자이고, 그녀의 남친은 바퀴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하루에 세 번이나 네 번 인슐린을 놓는다는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한 남자.

그의 잘 발달된 허벅지와 전완근은 고백하게 했고, 그의 고백이 바퀴 공포증이다.

여친은 단 것을 못 먹고, 남친은 차 등을 타지 못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

우연히 생긴 아이, 결혼, 남편의 현실 적응 필요 등이 재밌게 풀려나온다.

그리고 화자의 선배 언니집에 유아차를 받으러 갔을 때 생긴 사고는 정점을 찍는다.

무거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경쾌하고 유쾌하게 풀어 재밌게 읽었다.


김슬기의 <에버그로잉더블그레이트 아파트>는 한국의 주택 약점을 콕 찌른다.

불과 얼마 전 철근이 누락되어 무너진 아파트 주차장 이야기와 닮아 있다.

화자 부부는 영끌해서 무철근 공법으로 지은 에버그로잉더블그레이트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앞으로 유일하게 매매가가 오를 아파트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입주민들은 울렁증 등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파트에 나쁜 소문이 돌면 집값이 폭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

입주민들끼리 연대해서 집값 하락을 막으려는 노력.

이 울렁증을 해결한다고 말하는 다단계판매약품과 우연히 알게 된 진실.

짧은 단편 속에 한국인의 아파트 환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하고, 잘 풍자했다.


임희강의 <러브버그물풍선폭탄사태>는 힘겨운 임차 자영업자의 삶이 녹아 있다.

주인공은 신혼여행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만두를 빚어 판매하고 있다.

이 만두는 좋은 평을 얻어 동네 맛집으로 소소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의 가게 앞에 러브버그를 넣은 물풍선이 터진 채 발견된다.

누가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가게에 불만을 품은 고객 몇 명이 떠오른다.

만두 국물이 불만이었던 여자, 최대 할인을 받지 못해 화가 났던 남자 손님?

결국 CCTV와 잠복 끝에 잡은 범인의 정체는 황당하다.

이 황당함은 신고와 고발 등으로 자영업자를 괴롭힌다.

임차인의 고통,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 다 읽고 난 후 답답함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권희진의 <머리 기르는 사람들의 모임>은 왠지 모르게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머리를 기르고 싶어 가입한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동해 여행.

한때 모임에 참여했던 누나의 아들이 겪고 있는 암의 고통과 부탁.

서로 다른 배경과 연령대의 세 남자가 겪게 되는 몇 가지 일들.

술 먹고 가다가 우연히 모래사장을 헤매는 남자와의 만남.

그 남자의 친구들을 찾으러 다니는 이상한 행동들과 기억 몇 개.

이 느슨함과 동해 여행이 지난 추억을 불러오고, 여유롭게 이들의 다음 기대한다.

생략된 이야기와 감추어진 감정 등은 또 다른 재미 중 하나다.


김영은의 <하루의 쿠낙>은 어쩔 수 없이 간 부실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일상을 그린다.

다니고 싶지 않아 오티, 엠티 모두 빠진 나.

기숙사에 박혀 같은 룸메이트 친구와 대화도 하지 않는 나.

이런 화자가 학교 축제 때 우연히 만난 동기 하루와 친해지면서 삶에 생기가 돈다.

고릴라 선배와 하루와 셋이 어우러져 보내는 청춘의 시간들.

하지만 부실 대학이란 낙인은 셋의 미래를 갈라 놓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관심과 애정의 대상인 하루의 쿠낙.

서로 헤어졌고, 연락도 잘 되지 않다가 우연히 서울에서 만난 나와 하루.

그들의 만남과 대화, 현재의 모습 등이 내가 지나온 삶의 한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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