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영지순례 - 기운과 풍광, 인생 순례자를 달래주는 영지 23곳
조용헌 지음, 구지회 그림 / 불광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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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동양학자 조용헌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이전에 읽었던 그의 책들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내가 풍수지리나 사주명리학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의 시선은 한 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몇 권 읽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중단되었는데 어느 날 다른 곳에서 다시 그의 이름을 듣고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그 이름과 더불어 영지란 단어 덕분이다. 저자는 영지를 “말 그대로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땅”이라고 말한다. 무협 마니아인 나에게 이 단어는 아주 낯익다. 어쩌면 영물이 더 익숙할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풍수지리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자란 나이기에, 코로나 19로 해외는 꿈도 꾸지 못하는 현실이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저자는 23곳의 영지를 3개 기운으로 구분했다. 신령, 치유, 구원 등이다. 신령의 땅은 낯선 곳이 많지만 치유의 땅은 최근에 관심을 두었거나 알게 된 곳들이다. 구원의 땅은 가본 곳이 한 곳 밖에 없지만 늘 한 번 가봐야지 하고 마음으로 생각만 한 곳이 나와 반가웠다. 그리고 3개로 구분된 영지들은 기운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는데 읽을 때는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 멋진 풍경을 담은 사진과 구지회의 그림과 재밌는 이야기들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목차를 다시 훑어보았고, 간략한 부제들로 인해 이 차이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신령의 땅에서 저자는 영발에 대해 자주 말한다. 계룡산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넘어가자. 그런데 장락산 통일교 본부와 보리산 오하산방은 아주 낯설다. 통일교와 기업인이란 이유 때문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얼마나 사주와 풍수지리에 관심 많았는지 생각하면, 그와 그 후대들이 얼마나 많은 땅을 사 놓았는지 생각하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고 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오대산을 새롭게 인식했다. 이전에는 그냥 이름 정도 알고 있는 산이었는데 오랜 기억 속 한국 선인들의 계파를 다시 떠올리며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체력이 된다면 다섯 곳 모두 둘러보고 싶다.


치유의 땅에서 두 곳은 최근에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한 곳은 며칠 전 이웃 블로그에서 본 서산 간월암이고, 다른 한 곳은 작년에 알게 된 철원 고석정이다. 이 두 곳 모두 풍경이 아주 멋있었는데 이미지와 실제 풍경의 간격이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다. 운길산 수종사의 경우 예전에 친구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간 듯한데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곳에서 공짜 차를 마셨고, 잘 쉬다 온 정도만 기억난다. 두물머리를 갈 때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 단서를 찾았으니 갈 수 있을 것 같다. 경주 문무대왕릉이 전국 최대 무당 굿터란 사실은 처음 들었는데 언젠가 다시 가면 그 기운을 한 번 느껴보고 싶다.


저자는 십승지를 치유의 땅으로 분류했는데 구원의 땅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난과 구원은 다른 의미일까? 구원의 땅에서 가장 중요한 산은 지리산이다. 재밌는 대목은 한국 페미니즘의 시원이자 원형으로 삼신할머니를 꼽은 것이다. 두세 번 지리산에 갔지만 단순한 놀이 이상이 아니었기에, 역사 속 비극의 장소란 인식과 한때 유행이었던 지리산 종단의 이미지 때문에 저자가 풀어낸 당취란 존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 속에 여러 번 당취를 녹여 내었는데 조선의 승려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전 시인의 글 속에서 만났던 선운사를 다시 만났다. 다른 감상과 이미지이지만 반가웠다.


이 글을 쓰면서 만약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내가 결혼 전이고 더 어렸다면 이 영지들을 몇 곳은 반드시 다녀왔을 텐데 하는 가정 때문이다. 차 몰고 가벼운 마음으로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속 사진들이 주는 시원하고 새로운 이미지는 보는 나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든다. 다른 높이와 시각에서 본 사찰의 모습은 발로 걸어가서 만난 풍경과 너무 달랐다. 저자가 풀어낸 산세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히 나에겐 와 닿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나의 심안이 막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곳을 자주 다닌다면 대자연의 기운이 조금은 그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날씨가 풀리고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가까운 곳 한 곳이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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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루스 웨어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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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하나 하자. 나는 이 소설의 작가를 다른 작가로 이번에도 착각했다. 내가 착각한 작가는 ‘루스 랜들’이었다. 얼마 전 루스 웨어의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은 변명을 한다면 이 기억이 두 이름을 혼란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름에 대한 저질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않은가. 소설 등을 읽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 중 하나도 비슷한(최소한 나에게는 비슷하게 보이는) 이름이 나오면 한참 헤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펼쳐 읽자 마자 ‘루스 랜들’이 최근작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이야기의 시작이 2017년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작가 이력을 빠르게 확인하니 다른 작가였다. 하지만 루스 웨어의 소설도 재밌게 읽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현재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의 소설은 모두 세 권이다. 이 책은 다섯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이 책을 포함하면 두 권을 읽었다. 귀차니즘 때문에 한 권은 아직 서평을 완성해 올리지 않았다. 최근 읽고 서평을 쓰지 않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읽은 책은 <인 어 다크, 다크 우드>다. 상당히 잘 읽혀 다음 책도 구해 놓고 묵혀 두고 있다. 나의 특기 중 하나이지 않은가. 솔직히 이름에 약한 나에게 이 책의 제목도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을 읽는데도 말이다. 가독성이 좋아 진도가 쭉쭉 나가는데도 말이다.  ‘헤더브레’란 이름이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소리 내어 자꾸 읽으면 이름이 잘 기억되겠지만 눈으로 읽다 보니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진다.


데이비드 발다치가 루스 웨어를 우리 시대의 애거사 크리스티라고 불렀다. 아직 이 평가는 조금 미루어 두자. 처음 편지 형식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고, 편지가 오고 가거나 날짜 별로 편지가 가지 않을까 예측했다. 그런데 둘 다 아니었다. 아이 돌보미가 무죄를 호소하면서 보낸 편지는 한 권의 장편 소설이 되었다. 가독성 있게 잘 읽히지만 이런 두께의 편지라면 몇 십 개로 나누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중에 왜 이랬는지 알 수 있는 이유가 나오지만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몇 가지 반전을 숨겨 놓고 뒤에 하나씩 풀어놓는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구성은 아니다. 반전의 단서를 내가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로완은 유치원에서 일하다 좋은 조건의 구직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스코틀랜드의 대저택에서 입주 돌보미를 하는 일이다. 연봉도 아주 높다. 마감 당일 자신의 이력서 등을 작성해 지원한다. 인터뷰 요청이 와 휴가를 내고 간다. 헤더브레 저택은 예전에 성으로 이용되었던 거대한 저택이다. 그런데 이 부부가 매입해서 집 전체를 스마트 시스템으로 연결해 놓았다. 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 입구도, 전등의 불을 켜는 것도, 샤위기의 물 온도 설정도. 대단한 최신식 주택이지만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등장시켜 불안과 짜증과 두려움을 뒤섞었다. 물론 이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편리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돌아가는 로완에게 둘째 딸 매디가 불안한 말을 전달한다. 이 말이, 그녀가 방에서 들은 이상한 소리들이 과거 헤더브레 저택에서 있었던 사건과 엮이면서 유령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든다. 헨리 제임스의 고전 <나사의 회전>을 오마주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작품을 읽지 않아 이 부분은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다. 좋은 이력서와 추천서는 빨리 일 할 수 있다는 이유와 더불어 그녀를 고용하게 만든다. 빠르게 퇴사를 진행한 후 이 집에 온 그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다음 날 이 부부가 회의 때문에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직 이 집에, 아이들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혼자 아이들을 돌보면서 실수를 몇 번 저지른다. 아니 서로 친밀하지 않고, 낯선 돌보미와 함께 머물러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이 일은 힘든 일이다. 이 아이들이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 찾아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해피 앱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갑자기 나타난 가사 도우미 아줌마는 아이들이 문밖에서 집에 들어오지 못해 추위에 떨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적대감을 드러낸다. 로완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아이들도 매디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밤에 벌어진다. 천정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갑자기 집에 울리는 큰 소음은 또 어떤가. 앱으로 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 결국 운전기사 잭이 와서 해결해준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아이를 돌본다.


아이들의 적대감, 이 집을 둘러싼 과거의 사건과 소문, 밤이면 들리는 괴상한 소음 등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혹시 ‘유령이 있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첨단 기계로 가득한 집에서 들리는 고전적인 유령의 발소리라니. 힘든 육아와 수면 부족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과 괴상한 소문 등은 이 불안감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내뱉은 으스스한 말까지.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아이들 엄마는 이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이전 돌보미들이 떠난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 그녀를 살인죄로 기소했는데 죽은 아이는 누구지? 등이다. 이 모든 의문은 뒤로 가면서 하나씩 풀린다. 그리고 반전이 이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이 반전이 앞에 펼쳐진 몇 가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개인적 취향에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영리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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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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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읽었다. 몇 년 전 에세이 한 편을 읽은 기억은 분명하게 나는데 소설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인터넷 서점 목록만 놓고 보면 읽었다는 확신을 가질 만한 소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는 소설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늘 이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다른 책들처럼 기약할 수 없다. 사실 이번 소설도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읽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벤트에 신청한 것이 오래전 읽은 에세이의 영향과 늘 보던 다른 책들 때문이지만 말이다. 최근 책읽기가 조금 더딘데 이 책은 용감하게 신청했다. 결과만 먼저 말하면 성공적인 선택이다.


두 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달에 울다>와 <조롱을 높이 매달고>다. 이 두 편의 소설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달에 울다>는 한 편의 산문시를 읽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시소설이라고 분류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어처럼 풀어낸 문장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각 10년의 세월과 병풍 속 법사의 이미지가 겹쳐지고 엮이면서 이미지를 하나씩 만들어낸다. 10대, 20대, 30대, 40대의 화자는 사과 농사를 짓고, 야에코란 여성을 그리워한다. 10년 주기의 흐름 속에 급속하게 변하는 세상이 녹아 있는데 몇 개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잘 요약하고 표현했다. 작은 산골 마을의 권력과 도시로의 이탈이 나오는데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흔히 보여지는 풍경이다.


이 중편 소설 속에서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소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과나무고, 다른 하나는 생선 껍질 옷이다. 야에코의 사과가 특별히 더 달고 맛있다고 할 때, 그 사과나무 숲에 그녀의 아버지가 묻혀 있다고 할 때, 그 죽음이 어떤 연유를 가지고 있는지 과거의 사건을 돌아볼 때, 과거의 사건 때문에 화자와 야에코가 맺어질 수 없다고 할 때 그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도시로 나갈 수 있겠지만 그는 사과 농사에 집중할 뿐이다. 그것도 홀로. 그리고 생선 껍질 옷은 그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가져온 옷이다. 이 옷에 어떤 역사적 비극이 담겨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이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보여준 부모의 반응은 결코 유쾌한 기억은 아님이 분명하다. 야에코 아버지를 잡으러 갔을 때 입었던 기억도 한몫한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읽으면서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정신 이상 진단을 받고, 집을 나와 고향인 M마을로 돌아온 그의 일상과 심리 묘사를 황폐화된 마을 풍경 속에 풀어놓았다. 그가 피리새에 작은 집착을 보이고, 이 피리새 때문에 누구도 살 것 같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을 발견한다. 그 노인을 돌보는 빨간 하이힐의 여성은 또 어떤가. 그 여성이 매춘으로 노인의 생계를 돌보는데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뒤좇다가 발견한 먹먹한 울음은 삶의 저 밑바닥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전반기 40년과 M마을로 돌아와 보낼 후반기를 생각하면 그녀의 삶은 전반기에 해당할 것 같다. 끊어내지 못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게는 홀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화자에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3명의 기마무사 환영은 주인공이 자신의 환상과 대화하는 부분과 겹쳐진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묘사 속에서 이 환상은 그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황량할 것만 같은 M마을이 생각보다 많은 생명들이 살아 있음을 바다가 보여준다. 과거와의 단절을 바라며 찾아온 마을이 그가 어린 시절 한 순간을 보낸 곳이란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곳은 생을 시작한 곳이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매춘하는 딸에게 기생하는 노인이 화자에게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라고 말했을 때 분노했지만 이 문장은 그 노인이라고 별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노인이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이야기의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이 두 편의 소설은 크게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결한 문장과 시어 같은 문장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이미지를 이어가게 하면서 그 속에 머물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이미지들 몇 개가 지금도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만들면 흥행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이미지를 영상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 좀 더 관심을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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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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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기 전 대리모에 대한 나의 생각은 불완전하고 단순하고 피상적이었다. 하지만 모두 읽은 지금 내가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몇 가지 사례를 떠올리고, 이미 산업화된 사업의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SF적인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대리모 대신 인공 자궁 시설에서 자라는 태아들의 모습이다. 수많은 SF 영화 속에서 이미 많이 보여준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 속 설정들은 그 과도기의 모습일 것이다. 아주 불편한 현실의 한 모습이다. 대리모란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유리가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낳았다. 한국에서는 불법이라 일본에서 낳았다. 비혼 여성이 정자 기증을 받는 것이 불법인 나라에서 대리모가 가능해지기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다. 하지만 이 대리모가 외국에서는 생각보다 쉬운 모양이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큰 비용이 들어간다. 실제 이 소설 속에서는 고령의 난임 부자들이나 자신의 경력을 망치길 바라지 않는 엄마들이 대리모를 통해 자신의 아이를 낳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신 기간이 사라지고, 대리모를 통해 낳은 아이만 받아 키운다. 당연히 이 아이들도 자신들이 직접 키우기보다 유모 등을 통해 키울 것이다. 생각이 다양한 방면으로 뻗어 나간다.


모두 네 명의 여성들이 화자로 등장해 이 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대리모가 된 두 사람, 제인과 레이건과 이 일을 성공시켜 큰 돈과 경력을 쌓으려는 관리자 메이와 제인의 사촌이자 브로커 역할을 하는 아테 등이다. 작가는 이들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 속에 녹여 내면서 점점 산업화되고 있는 대리모 제도를 보여준다. 내가 호나우도 등을 통해 알고 있던 간단한 대리모가 아니라 골든 오크스란 리조트 시설을 통해 관리, 통제되는 산업 이야기다. 수십 명의 대리모를 한 곳에 모아 놓고 관리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 등을 소설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리사 같은 아웃사이드 한 명을 넣어 순응적일 수 있는 대리모의 반전을 이끌어낸다.


이 소설의 작가도 필리핀 출신이라고 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메이 유에 그녀의 삶이 상당 부분 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이는 대리모 산업의 성공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중국 거부의 아이를 임신시켜 골든 오크스 같은 조직을 늘리는 것이다. 사업적인 측면에서 이 대리모들을 다루면서 이 조직 구성원들까지 관리해야 한다. 순간순간 생기는 사건과 사고는 법률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작가는 메이를 단순하게 이익만 생각하는 비정한 인물로 그리기보다는 그들의 현실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 훨씬 입체감 있게 만들었다.


제인과 레이건은 대리모이지만 그들의 출발선은 다르다. 제인은 유모일을 하다 실수로 잘린 후 어쩔 수 없이 대리모가 된 반면 레이건은 자신의 미래와 난임부부를 돕는다는 선한 의지가 결합해서 대리모가 되었다. 대리모로 지내면서 받게 되는 급여와 출산에 성공하면서 받게 되는 보너스가 당연히 이 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말리아란 딸까지 키워야 하는 싱글맘 제인에 비해 레이건은 부유한 아버지가 있다. 출산에 실패한다고 해도 각자가 받게 되는 충격의 강도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물론 레이건은 엄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유전적 결함 문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대리모와 관계가 없다. 다만 제인에게는 돌도 지나지 않은 딸과 떨어져 지내면서 생기는 불안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이것이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테. 열심히 일하면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병에 걸려 더 이상 보모일을 하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필리핀에서 온 여성들을 보모 등으로 소개한다. 선의에서 한 일이지만 소개비가 들어오기도 한다. 제인에게 보모일을 소개한 것도, 제인의 실수로 잘린 후 대리모로 연결시켜준 것도 아테다. 당연히 그녀는 소개 수수료를 받았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내는 제인에게 아테가 저지른 몇 가지 사소한 실수는 큰 공포로 돌아온다. 이 공포는 대리모 문제로 태아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제 유전적 부모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공포와 두려움을 골든 오크스는 적절하게 이용해 대리모를 통제한다. 일상의 산모들을 생각하면 과도한 통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거액의 산업이라면 다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부분 부분은 재밌고 잘 읽혔다. 긴 시간을 들여 읽기에는 조금 힘든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쉼없이 달리게 만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기 때문이다. 소개글처럼 이 소설은 단순히 대리모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다양한 인종적, 경제적, 계급적 문제들을 다룬다. 대리모의 학력이나 인종 등을 따지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도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필로그는 어떻게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 대리모 제도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통적인 모성애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10개월 동안 자신의 배속에 품고 있던 시절이 끝났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한동안 생각의 가지들이 여러 곳으로 뻗어 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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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조종사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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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소피의 세계>를 아주 재밌게 읽었었다. 3권으로 출간된 책을 정신없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나의 이해력이 딸려 재미가 조금 덜했지만 서양철학에 관심있는 초심자용으로 최소의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후 나온 그의 책 몇 권을 더 샀다. 당연히 그 책 읽기는 기약 없는 일이 되었지만 언젠가 <소피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서점으로 작가의 작품들을 검색하니 내가 놓친 책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음… 이 책들은 일단 미루어 두자.


이번 책의 선택은 단순하다. 앞에서 말한 <소피의 세계>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책을 선택할 때 작가 이름만 보고 책 내용은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노년의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오늘날 유럽 대부분 언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족을 탐구한다고 했는데 솔직히 이 언어 부분은 읽으면서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의 외국어 이해 능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이 부분을 잘 모른다고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학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새로운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야코브 야콥센이다. 학교 교사인데 신문 부고란을 읽고 옛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가 스승과의 일화를 말하는데 유족들이 의심의 눈빛을 보낸다. 고인의 손녀인 윌바가 그의 말에 딴지를 건다. 그와 언어학에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만 해도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의 시작에 나오는 앙네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도. 그가 절친인 펠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 인물이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꼭두각시란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펠레 때문에 그가 이혼했다고 했을 때조차도 말이다. 작가는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 중간에 하나씩 풀어내는데 이때마다 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야코브가 장례식에 가는 것은 그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니다. 아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습관처럼 찾아가는데 그 이면에는 대가족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다. 장례식장에 가기 전 그는 고인에 대해 조사하고, 그와의 관계에 대해 치밀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는다. 모른 채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다가온다. 많은 장례식장에서 큰 문제없이 지나갔는데 한 장례식장에서 그는 큰 실수를 한다. 고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로 앙네스에게 관심을 받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이 소설이 편지 형식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읽다 보면 두 번 크게 놀란다. 펠레가 꼭두각시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과 장례식장의 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펠레와 대화를 나누면서 언어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쌓고, 어린 시절 왕따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만 펠레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아내와 불화가 생기고 이혼하게 된다. 만약 인형극으로 이 대화를 본다면 재밌는 무대가 될지 모르지만 일상 생활에서 자주 본다면 소설 속 그의 학생들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장례식장의 고인에 대한 가공의 관계는 이 소설이 풍부한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소설임을 알려준다. 고인의 분야에 따라 전달하는 지식은 바뀐다. 물론 그에 따라 언어학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온다.


거짓과 사실이 교묘하게 섞였고, 오해와 진실이 서로의 이해 속에서 엮인다. 윌바와의 만남이 그의 거짓을 밝혀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좀더 편안하게 대할 때 이 둘의 관계는 미묘한 흐름을 가진다. 아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과 약간의 불안감이 이 둘의 대화 속에 묻어 있다. 그리고 처음 그가 에리크 룬딘의 장례식장에서 느낀 데자뷔는 후반부에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풀어놓는다. 그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나왔던 몇 가지 사실들이 엮이면서 만들어진 사실이다. 소설을 다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문장을 발견하고 이 소설이 얼마나 치밀하게 구성되고 전개되었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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