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질문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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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태어나고 자란 이 나라에서 내가 애국심을 느끼는 순간은 결코 적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동을 느끼게 만든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구조의 모순을 알게 되면 분노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노도 결국 이 나라를 사랑하기에 생긴 감정이다. 어쩌면 이 감정은 교육에 의해 주입된 감정일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처럼 국가가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에서 국가의 울타리가 없다면 개인은 너무 위험하고 무력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몇 가지 사회의 문제점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내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생겼다.

 

오랜만에 조정래의 소설을 읽었다. 언제부터인가 대하장편에는 손이 가지 않고 권수가 많아져도 잘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욕심은 있어 사놓은 책들은 쌓여간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즈음 변호사하는 후배와 잠시 이 소설의 내용 중 법쪽 관련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대답은 조금 충격이었다. 거의 대부분 사실이란 것이다. 전관예우의 문제야 알고 있던 것이지만 그런 엄청난 수임료를 한 번에 받는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이런 판사와 검사가 있는 법정이라면 과연 법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얼마 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들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검찰들의 작태를 잘 알 수 있다. 사법 농단 사태는 또 어떤가. 한국에서 법과 정의는 따로 노는 것 같다.

 

작가는 기자, 국회의원, 대기업 임원, 대기업 미술관 큐레이터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기자 장우진은 읽으면서 자연스레 주진우 기자가 떠올랐다. 이름도 그렇지만 그가 탐사 보도한 내용들이 그렇다. 대기업 비자금을 파헤치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그와 그의 아내에게 어떤 식으로 회유와 협박이 들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아주 큰 금액이 주는 유혹은 잠시 사람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다. 누가 이런 유혹에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굳건하겠는가. 재밌는 부분은 그가 조사하려고 한 많은 사건들이 적들의 방해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가 조사한 사건들은 기사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한국 사회의 부정, 부패, 비리 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회의원 윤현기는 보신이 철저한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늘 의식한다. 정치자금을 받지만 뒷탈이 날 돈은 먹지 않는다. 이것은 그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고, 이전에 그가 모신 국회의원이 알려준 보신책이다. 지역신문에 대필로 글을 기고하지만 나름 열심히 노력한다. 대필자 고석민의 말대로 알 때까지 열 번이고 읽는다. 이것이 그를 유식하게 보이게 만든다. 나중에 지역구에 가서도 그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국회의원 자리를 놓칠 생각이 없기에 꼬투리 잡힐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단체가 있다. 바로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다. 이 단체가 그에 대한 나쁜 정보를 내놓으면 상대방 후보가 이를 이용해 그를 낙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오너가의 사위였다가 비자금 문제를 일으킨 김태범은 재벌들이 어떻게 비자금을 만드는지, 언론을 장악하는지 잘 보여준다. 언젠가 삼성에 충성을 맹세했던 수많은 언론사 임직원들이 있지 않았나. 비자금을 잘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란 사실은 예전에 김우중의 해외 비자금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한 번 드러났다. 삼성의 비자금을 사법부가 어떻게 면죄부를 주었는지 알기에 결코 낯설지 않다. 오너가 옆에서 사장단들이 어떻게 부를 쌓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재벌이 어떻게 한국의 부동산으로 거대한 부를 쌓았는지 잘 보여준다. 김태범이 새로운 재벌에 충성하면서 돈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내면이다.

 

미술관 큐레이터 임예지는 재벌들이 왜 미술품 등을 사는지 잘 보여준다. 재벌가의 미술관이 부의 증식과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은 이제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국보급 유물을 둘러싼 소송에서 전관예우의 힘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김태범의 이혼소송이나 재벌가 자손들의 사회문제를 덮는데도 아주 위력적이다. 나중에 임예지가 양심에 찔려하거나 조각가 등을 중개하면서 높은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모습은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이다. 시간 강사 고석민이 한국 대학의 문제점을 노출하고, 생계를 걱정하는 장면은 얼마 전 읽은 책과도 연결된다. 대필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의 모습은 씁쓸하고,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또 하나의 정치자금 모금이란 사실은 새로운 사실이다. 그들이 되지 않는 책을 내는 이유가 이것이라니.

 

실명과 차명을 오가며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파헤치는 작업은 박수칠만 하다. 가독성도 좋아 잘 읽힌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문장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뭔가를 가르치려는 느낌이 든다. 스웨덴 정치나 파리 등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듯한 부분도 조금은 아쉽다. 마지막에 가서 풀어낸 이야기는 한국 관료 조직이 어떻게 재벌 등과 결탁하고 그들의 부를 불려주는지 잘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는 부분이 늘어나면서 더 분노한다. 한국의 미래가 있는지 의문이다. 작가는 이 모든 문제를 풀 대안으로 시민단체 활성화를 이야기한다. 건전한 시민단체가 늘어나고, 국민들이 제대로 투표를 한다면 이 암울한 현실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희망을 말하지만 그 희망이 아직 가슴에 절실히 와 닿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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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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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도발적인 표지가 먼저 시선을 끈다. 제목을 들으면 판타지 소설처럼 다가오지만 말이다. 작가는 이 단편 <캣퍼슨>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왠지 모르지만 거의 끝까지 이 소설에 공감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휩쓸려 섹스를 하게 되는 그녀의 모습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남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몇 번 만났지만 잘 모르는 남자와 함께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도 마찬가지다. 마고가 로버트와 데이트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몇 가지 장면들은 여자와의 관계가 서툰 남자의 모습이 잘 보인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로버트가 마고에게 보낸 문자는 결코 낯설지 않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많은 남자들이 내뱉는 폭언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게시판에서 자주 본 장면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 책이 단편집이란 사실을 몰랐다. 이 작가가 스티븐 킹의 팬이란 사실도 서문을 통해 알았다. 이것을 알고 기대한 것은 킹의 기이한 이야기들이지만 앞의 작품들은 내가 예상한 전개와 달랐다. 대표적인 것인 <캣퍼슨>이고, 그 다음이 <룩 앳 유어 게임, 걸>이다. 이후 몇 편의 단편에서도 킹의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몇 편은 킹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킹의 작품들은 대부분 장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예전에 읽었던 단편들은 사실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킹처럼 쓴 소설이라면 이 또한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다양한 장르가 담겨 있다 보니 개인적 선호도가 나온다. 가장 유쾌하게 읽은 작품은 <무는 여자>고,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두 작품 <좋은 남자>와 <풀장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무는 여자>는 물고 싶은 욕망과 직장 성추행의 절묘한 반전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좋은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속이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가 여자에게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은연중에 보여준다. <풀장의 소년>은 어릴 때 비디오에서 본 남자를 처녀 파티에 데리고 오고, 그가 만들어내는 작은 이벤트가 마지막에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정어리>를 읽으면서 마지막 장면에 섬뜩함을 느꼈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 어른들의 비열한 욕망이 끼어들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려준다. <룩 앳 유어 게임, 걸>은 한 노숙자와의 만남과 그가 죽인 소녀의 기억을 다루는데 죄의식이 어떻게 시간의 흐름을 타는지 보여준다. <한밤에 달리는 사람>을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담인가 생각했지만 문화충돌과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는 깊은 자기애에 빠진 공주 이야기다. 동화처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전개다. <나쁜 아이>는 자존감이 바닥인 남자를 두고 어떻게 학대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인간의 이성은 저강도 감정의 공격에 가끔 너무 무력하다.

 

<겁먹다>는 판타지이지만 확장하지 않고 소품으로 놓아두면서 <나쁜 아이>의 이성 마비를 풀어놓는다. 욕망은 언제나 더 많은 먹이를 요구한다. <죽고 싶어하는 여자>를 읽으면서 한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한계를 넘어 계속 나아가면 결국 파국에 이르지만 그 선을 넘지 않으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녀가 진짜 원한 건 그 한계 너머일까? <성냥갑 증후군>은 다 읽은 지금도 과연 심리 문제인지, 아니면 진짜 기생충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몸을 긁는 장면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나도 긁고 싶었는데 단순히 기분 탓이겠지. 열두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적응이 필요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처음과 상당히 다른 기분이었다. 아마 마지막 단편 탓이 아닐까. 이 작가가 장편을 쓴다면 과연 어떤 장르일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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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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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프래쳇의 놀라운 찬사가 나를 이 책으로 인도했다. “지난 50만 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재미있는 책이다!" 이 문장을 읽고 혹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는 그랬다. 좀더 차분히 생각하면 책이 나온지 50만 년이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뭐 이것이 중요한가. 실제로 이 소설 속 화자인 어니스트란 이름도 지극히 현대적이다. 문자도 없던 시기에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것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오는 시간이나 거리 단위에서도 적용된다. 이런 부분 때문에 내가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을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다. 세부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지만.

 

어니스트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아주 진화적인 인물이다. 불은 화산에서 가져와 가족의 안락한 환경을 꾸몄지만 그는 결코 진화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과 반대편에 있는 인물은 바냐 삼촌이다. 그는 위험하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진화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진화의 결과물을 누리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이 둘의 토론은 나중에 에드워드와 어니스트의 논쟁에서 다시 다른 방식으로 불거진다. 과학기술의 독점과 특허권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다시 소유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을 발견하고,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한 실험은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을 요구한다. 이 불이 다양한 육식동물에게 노출된 인간들을 동굴 속 생활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불로 굴 속 곰을 내쫓았기 때문이다. 안전한 주거공간이 확보되는 순간이다. 이 불을 유지하는 과정에 창을 발명하고, 창은 가족들에게 풍족한 고기를 가져다준다. 나중에는 고기를 굽는 행위까지 이어지는데 작가는 이 과정들을 압축적으로 이 한 가족의 이야기 속에 빠르게 녹여낸다. 과학의 발전을 진화와 연결하고, 더 진화하려는 아버지와 이 부산물로 만족하려는 가족 사이에 대립이 이어진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족외혼의 시작이다. 형제자매끼리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족에서 배후자를 구하려는 노력이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첫사랑이란 감정이 싹튼다. 이 구애 과정이 상당히 힘들지만 두 남녀의 결합을 돈독하게 만든다. 일종의 약탈혼이지만 작가는 이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나중에 과부가 된 여자의 약탈을 둘러싼 작은 해프닝은 또 다른 재미다. 어쩔 수 없이 동굴을 떠나야 했던 가족들이 새로운 부족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몇 가지 일들은 현대 사교계에 대한 좋은 풍자다. 의상과 가방을 둘러싼 유행을 가볍게 말하고 지나간다.

 

작가는 진화의 부작용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가족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벌인 실험의 결과다. 새롭게 불은 만드는 과정에서 초원이 불탄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과학실험이 인류에게 어떤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위험한 실험과 더불어 불의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은 이 가족 내부에서 더욱 심해진다. 새로운 무기의 발명은 부의 소유와 권력을 독점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지고 결국 최악의 결과로 치닫는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그 당시 인문, 과학, 고고학적 발견 등을 바탕으로 쓴 듯한 데 지금도 유효한 내용들이다. 이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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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칭 포 허니맨 - 양봉남을 찾아서
박현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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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을 읽을 때면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경우가 그렇다. 이 소설은 매력적인 세 여성 캐릭터가 먼저 중심을 잡는다. 도로미, 박하담, 윤차경 등이다. 이들은 각각 개성이 뚜렷하고 전문분야도 성격도 다르다. 도로미는 일러스트레이터이고, 하담은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다. 차경은 화장품 회사 마케팅 차장이다. 현재 모두 싱글이고, 차경만 약혼자가 있다. 하담의 생일날 도로미가 말한 작은 에피소드가 이 소설의 제목이자 주제다. 그것은 3년 전 제주도에서 도로미에게 호감을 보여준 남자 양봉남을 찾는 것이다. 프로젝트 이름은 ‘서칭 포 허니맨’이다.

 

제주도와 양봉을 소재로 3년 전 남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과거의 추억과 기억과 현실의 끝없는 만남이다. 이 만남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이 연결 속에서 로맨스가 피어나고, 그 속에 작은 미스터리가 계속 일어난다. 작가는 각 장이 넘어갈 때마다 벌에 대한 설명을 만화나 글로 표현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미스터리한 상황을 알려주는 장면을 넣었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할 때 뭔가 중요한 것이 생각났거나 단서를 알려주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연출이 상당히 많은 등장인물들을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게 만들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한 명씩 용의자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세 여인의 이야기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각각의 분량을 가지고 있다. 도로미는 3년 전 남자와 그녀를 스토커하는 남자가 있고, 하담은 9년 전 화재 사고 이후 헤어진 전 남친과의 재회가 있다. 차경은 하와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만난 인물에게 계속 도움을 받는다. 제주도와 세 커플 이야기란 것만 놓고 보면 한 편의 달콤한 로맨스다. 하지만 작가는 의문의 스토커와 차경의 약혼자 찬민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집어넣어 작은 미스터리를 만든다. 이 미스터리가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면 한 번에 폭발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조연들의 캐릭터가 힘을 발휘한다. 읽으면서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상황을 자연스레 기존 영화의 이미지를 나도 모르게 떠올리고 연결한다.

 

제주도에 얼마나 많은 양봉가가 있는지 모르지만 읽으면서 작가가 자료 조사를 많이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러 차례 제주도에 갔지만 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제주 이주민들의 에세이를 읽고 이들이 어떤 어려움과 차별을 받는지 알고 있지만 작가는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주 이주민들의 삶과 게스트하우스를 연결해서 풀어낸 부분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세 커플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떠올릴 때 이것은 더 분명해진다.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라고 하지만 물리적 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담 등이 렌트해서 제주도를 다니는 것과 생각보다 제주도가 넓다는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공감한다.

 

초반에 미스터리한 상황을 암시하고 세 여인의 캐릭터를 빠르게 잡아놓고 로맨스를 만드는 과정은 잘 만든 코지 미스터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무섭고 살벌한 장면보다 코믹한 장면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소소한 재미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 세 커플이 연결되는 과정과 결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로맨스 공식을 따라가지만 약간 어설픈 모습도 보여주면서 유쾌한 재미를 준다. 만약 내가 최근에 많은 드라마를 본다면 읽으면서 열심히 가상 캐스팅을 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내가 알고 있는 배우들이 많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괜히 제주도에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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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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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멜로극이란 소개에 혹해서 선택했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멜로나 무협보다 권력 쟁투를 위한 냉혹하고 비정한 길을 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황권이 약해지고, 변방이 돌궐에 무너지는 상황에서 기존의 권문세가는 호방한 기세를 잃어가고, 미천한 가문의 인물들은 처절한 생존 경쟁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만든다. 하지만 권력은 단순히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비정하고 참혹하다.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언제라도 적에게 당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왕현이란 한 여성의 시각에서 이런 권력 쟁투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1천백 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상당히 가독성이 좋다.

 

냥야 왕가의 금지옥엽인 왕현은 어린 시절부터 궁궐을 내 집처럼 드나든다. 황제와 황후의 사랑을 듬북 받으며 자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황자 자담과 연인으로 자란다. 하지만 황제란 자리는 하나고, 이 자리를 두고 황제와 황후의 생각이 다르다. 황자들의 모후들 가문들도 이 자리를 두고 다툰다. 황후는 왕씨 출신이다. 당연히 왕씨는 태자인 황후의 아들을 민다. 열다섯이 된 왕현은 자담과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다르다. 변방을 돌면서 연전연승한 소기 장군과 정략결혼하게 된다. 결혼식 당일 신랑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떠난다. 상심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소기의 적에게 납치된다.

 

납치된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강단 있는 여성인지 잘 드러난다. 처음 신랑 소기를 만난 것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다. 3년 독수공방이 한 번이 풀릴 리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소기와 사랑에 빠진다. 현실 인식과 함께 그녀 속에 숨겨져 있던 비정한 철혈의 욕망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왜 자신이 정략결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고, 첫사랑의 상대가 아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대상으로 이용될 수밖에 현실을 알게 된다. 어린 소녀인 그녀에게 이런 환경은 너무 가혹하지만 현실은 끊임없는 암투의 연속이다.

 

황권이 무너지면 그 권력을 잡기 위한 수많은 세력들이 움직인다. 서로의 이해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진다. 군권을 지고 있고, 전투의 능한 소기를 정면에서 이길 적은 없다. 왕현이 황성으로 돌아온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권력을 위해서 각 집안과 개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인내하며, 반격하려는지 잘 보여준다. 이 과정을 보면서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밖으로 평온한 듯한 집안도 살짝 이면을 들여다보면 시기와 질투가 넘쳐난다. 친척도, 친구도, 충신도 시간의 흐름과 권력의 욕망 앞에서는 너무 쉽게 무너진다. 이 끊임없는 암투와 음모와 배신 속에서 왕현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비정한 철혈의 길이다.

 

이 소설 속에 드러나는 비정한 현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분명해진다. 자신이 귀여워했던 아이들을 내쳐야 하는 현실과 황자의 신분이지만 유폐된 자담과의 추억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고 괴롭힌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을 결코 피하지 않는다. 바깥의 적은 남편 소기가 막아낸다면 내부의 적은 그녀가 처리한다. 순진하고 연약한 듯한 여자들조차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숨겨둔 한 수가 있다. 궁궐의 비밀은 담을 넘지 않아야 하고, 내부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서는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도 이 부부의 사랑은 굳건하다. 제왕의 패업을 이루는데 최근의 결합이다. 본편이 끝난 후 후기는 또 다른 여운과 재미를 준다. 중국 드라마에서 장쯔이가 왕현 역할을 할 듯한데 소설 속 나이와 실제 나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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