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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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작가다. 2015년 한경 청년신춘문예란 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것 정도가 사전 정보의 전부였다. 제목만 보고 SF 판타지 작품인가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지만 낯선, 정보가 부족한 작가를 조금 꺼리는 편이다. 그러다 2021 런던북페어 화재의 한국소설이란 소개 포스팅을 봤다. 내가 이런 광고에 약한 편이다. ‘역사와 철학을 종횡무진하며 직조해낸 현대의 우화’란 소개는 괜히 지적 허영을 부채질한다. 어떤 식의 이야기가 나올까 호기심을 가졌다. 역사와 철학이란 단어는 더딘 책읽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불러왔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모두 나의 예상을 뒤엎었다.


고아원 일련번호 42로 불리는 소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재편되는 그린다고 했지만 소설 속에서 특정한 주인공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목에서 폴리스가 나오기에 주인공이 경찰로 성장하거나 경찰일 것이란 나의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한 고서점의 책벌레와 그 책벌레를 먹는 박쥐와 서점에 쫓겨 달아난 박자를 잡아먹는 송골매와 그 송골매를 노리는 고양이로 이어지는 도입부는 ‘뭐지?’란 의문부호를 달기 딱 좋은 전개였다. 그리고 고양이와 송골매가 양패구사한다. 이것을 본 노숙자가 고양이는 버려지고, 송골매는 박제품으로, 아직 먹지 못한 박쥐는 약재상에게 판다. 박제상과 약제상은 모두 난장이고, 이 두 동물을 산 사람들로 이야기는 넘어간다.


소설의 무대는 비뫼시라는 가상의 공간이다. 약간 스팀펑크를 가미한 세계다. 왕이 권력을 쥐고 있는데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이 그 힘을 키운다. 차도 텔레비전도 총도 있지만 빈민가의 분위기는 빅토리아 시기의 느낌이 난다. 이야기의 문을 연 두 동물 중 박쥐는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유리부인에게 팔린다. 박쥐를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 요법 때문이다. 고약한 맛이지만 고통보다는 낫다. 그리고 그 남편은 댐 공사현장으로 출근한다. 아내는 병 때문에 저축한 돈을 모두 소진했고, 남편은 정부의 댐 공사 덕분에 생계를 이어간다.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집안 형편이 조금은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예산 부족과 이 부족한 예산으로 몇 가지 안전 기준을 살짝 넘어가고, 예상하지 못한 큰비가 내리면서 댐이 무너진다. 모르고 보면 천재이지만 독자들은 이것이 인재란 사실을 안다. 그 비리의 정점에 비뫼시의 가시여왕이 있기 때문이다.


유리부인은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판정 받았었다. 그런데 신의 변덕인지 그동안 고아먹은 박쥐가 몸 속에서 변화를 불러왔는지 임신한다. 그 아이가 바로 고아 42다. 얼굴 생김새는 박쥐를 닮았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임신부가 등장한다. 바로 가시여왕이다. 그녀도 아들을 낳는데 박쥐와 닮았다. 지능이 떨어지고, 인격형성에 문제가 있어 철가면을 씌운 채 지하에 가둔다. 이 이전에 가시여왕이 왕권을 잡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려주는 간략한 왕궁 암투사가 흘러나온다. 잔혹하고 참혹한 이야기지만 재미있다. 이 정도 필력으로 왕권 쟁취를 둘러싼 이야기로 장편 소설을 쓴다면 아주 멋진 소설이 나올 것 같다. 살짝 기대해본다.


사실 이 소설에서 줄거리를 요약하고,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42를 둘러싼 이야기가 또 다른 아동 학대로 이어지고, 댐이 무너진 순간 그 물길이 지나간 곳은 빈민가였다는 사실은 나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기시감을 불러왔다. 권력은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고, 책임을 전가한다. 당연히 그들은 죽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너진 빈민가를 재건하고, 상하수도 공사를 제대로 이행해야 하지만 그런 비용이 시에는 없다. 있다고 해도 그런 곳에 쓸 마음이 없다. 이런 사실을 말해도 언론은 입을 다물고 전달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들이라 어디에서 봤다고 특정하는 것이 힘들다. 작가는 이런 상황들을 이야기 곳곳에 풀어놓았다. 그것을 평가하고 비판하기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이어지는 과정이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잘 읽힌다. 특정한 주인공이 없다고 해도 순간순간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과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시선을 잡아당긴다. 읽다 보면 상당히 많은 주석들이 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원전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변용한다. 원래 의미를 다르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원전을 찾아 비교하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다. 물론 적지 않은 책들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중간에 죽은 자들이 등장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고일 조각상의 존재와 마지막 장면 등은 카르마란 제목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열등의 계보>에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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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카의 여행
헤더 모리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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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문신가>의 후속작이란 소개글을 봤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소련의 굴라크로 가서 겪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역사 상 가장 참혹했던 수용소 두 곳을 연속적으로 경험한 전작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이 생각의 반은 맞았지만 나머지 반은 전작을 읽지 않은 탓에 잘못되었다. 잘못된 것은 전작의 주인공이 굴라크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소설 속 한 인물이, 독자들이 궁금했던 실카가 간다. 실카는 나치와 잤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고향 대신 굴라크로 보내진다.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녀가 누린 삶이 나치에 대한 협조로 보였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삶이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데 전작에서 어떤 역할을 했기에 독자들이 그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전작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소설은 실카가 나치와 잠을 잤다는 것으로 유배형으로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여섯 소녀가 나치의 폭압적이고 참혹한 힘 앞에 저항하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다. 그녀가 수용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예뻤기 때문이다. 이 특별 대우를 거부하고 다른 유대인처럼 가스실에서 죽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 용기를 내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왜 당신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고 살아남았는가 하고. 물론 이것은 잔혹한 반문이다. 생존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녀는 어렸다. 보기에 따라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들은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도움이었다. 최소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부부에게는 그랬다.


굴라크에서 15년을 살아야 하는 그녀는 다시 지옥을 마주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굴라크에서 죽었는지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 홀로코스트보다 더 많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수용소에 왔을 때 온 몸의 털을 깎는 행동은 아우슈비츠와 비슷했다. 한 번 경험한 일이나 힘들지 않지만 그녀와 기차를 같이 타고 온 소년 조시에게는 부끄럽고 어려운 일이다. 이 수용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자 수용자들이 밤이 되면 여자들의 숙소에 침입해 강간한다. 힘이 쎈 남자가 먼저 찍으면 그녀는 건드릴 수 없다. 실카에게는 너무 낯익은 현실이다. 처녀인 조시에게는 너무 낯설다. 하지만 이 강간이 반복될 때 두 여자가 보여준 반응은 다르다. 실카는 강간에 무감각해지고 무반응으로 일관하지만 조시는 그 강간범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굴라크의 생존 환경은 최악이다. 추위와 배고픔은 언제나 있고, 남자들의 강간은 수시로 일어난다. 간수들이 이것을 묵인하기에 가능하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중노동 현장으로 보내진다. 중요한 원료인 석탄을 깨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중에 실카가 간호사가 되고, 구급차를 타게 될 때 그 사고 현장을 마주한다. 최악의 경험을 겪었다고 해서 이런 현장들이 쉬울 리 없다.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그녀 자신이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녀이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에 눈을 돌릴 정도는 아니다.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은 실카가 다른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어떻게 전해주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굴라크를 벗어날 기회가 왔을 때조차 그녀는 이 기회를 친구에게 넘긴다.


그녀가 유대인이고,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같은 막사에 있다. 이 사실을 밝히면 실카는 힘들게 연대를 쌓은 막사 동료들에게 배척받을 수 있다. 이 정보를 쥔 한나는 병원의 약을 요구한다. 약을 주지 않으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몰래 약을 전달한다. 어쩌면 이 행위가 병원에서 그녀를 도와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막사의 동료들은 그녀의 삶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그녀가 병동에서 먹을 것을 들고 와 나눠 주는 것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살고 싶어 저항하지 않았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고통을 매일 느꼈던 경험이 이런 행동으로 이끌었다.


잔혹하고 참혹한 현장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기 보다 간결하게 풀어내면서 실카가 처한 현실과 그 순간을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뛰어난 학습능력과 공감능력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게 한다. 그녀의 선의가 항상 바르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향을 바르게 간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남자는 강간으로 메말랐던 감정에 작은 싹을 틔운다. 이 소설은 거대한 참혹함과 비극 속에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혼자 살아남기보다 같이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녀의 삶은 통속적으로 다가올 정도다. 쉽지 않은 선택들이다. 용기와 굳센 의지와 행동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와 다른 지옥 속에서 그녀는 선의를 만나고, 그 선의를 바탕으로 희망을 씨앗을 뿌리고, 작은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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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노동조합
김강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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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선택했다. 지난 책의 경우 몇 번의 주저를 거친 후 읽었다면 이번에는 약간의 주저함만이 있었다. 이 주저는 저질 기억력과 밀린 책들 때문이다. 이 책을 선택하기 전 이전 단편집에 대한 나의 글을 간단히 훑어본 후 그 주저는 사라졌다. 그리고 첫 단편을 읽으면서 이 선택은 올바른 선택임을 알 수 있었다. 책 두께에 비해 단편의 숫자가 좀 많은 느낌이 있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이 현실을 비틀고 꼬고 풍자한 이야기들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잠시 지난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월요일은 힘들다>란 제목만 보면 직장인의 월요병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무대는 무인도다. 요일도 자신이 직접 정했다. 섬 밖의 현실 속 요일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힘들까? 그가 섬에서 생존을 위해 하는 일들을 보면 이해가 된다. 실제 이 소설의 재미난 지점은 이런 설정과 황당한 가능성을 걱정하는 장면들이다. 표제작 <소비노동조합>은 기본소득이 전국민에 적용된 이후 사채업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기발한 사고 실험이다. 소득과 소비의 관계를 단순하게 설명하면서 놓친 부분도 많지만 기본소득 인상을 위해 소비노동조합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은 사회 구조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언론에서 부정수급, 도덕적 해이 등을 말하면서 반대한 그들의 불로소득과 도덕적 해이 등을 눈감는 현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와룡빌딩>은 통일 이후의 한국 현실을 다루었다. 그 중에서도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 이야기다. 안정적인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자영업으로 몰릴 수밖에 없고, 이것은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상승도 그것을 바쳐줄 사람과 시장이 있을 때 가능하다. 가까운 미래의 서울 부동산은 어떻게 될까? 읽으면서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옛날 옛적에>는 대학 교수 임용에 떨어진 여제자의 미투를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구성이다. 자신보다 늘 한 발 앞선 동기의 삶이 이 미투로 흔들릴 때 그처럼 멋진 삶을 살지 못한 그의 조금 찌질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도 대학 교수란 점이다. 찌질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성공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일어나>는 땀을 많이 흘렸던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땀을 흘리지 않는다. 아내와 첫 밤을 보낼 때 그 땀을 열정과 사랑으로 포장해 주변 아줌마들의 은밀한 눈총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 땀이 사라졌다. 학창 시절 그는 선배들과 함께 삼땀으로 불렸는데 그 선배 중 한 명을 목욕탕에서 만났다. 발톱을 깎다 피를 흘리는데 땀도 흘렀다. 자신이 아파야 땀이 나온다고 한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그곳에서 만난 노인의 한물간 경험담이 듣는데 갑자기 그 땀의 실체가 다가왔다. 삶과 세월 속에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게 된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득수>는 사타구니 건선 때문에 긁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린다. 가방에 친구가 준 동영상 CD 등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재판 전 구치소에서 그가 경험한 이야기가 아주 현실적 은유로 가득하고, 운 좋게 건선으로 고생한 판사의 경험 덕분에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는다. 득수와 친구의 삶 속에서 나의 과거 한 장면을 마주했다.


<사자들>은 동네 책방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연극적으로 풀어내었다. 이름이 아닌 옷차림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한 사람들의 시선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을 재치 있게 다루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씁쓸하다. <그날 비가 왔다>는 폭력의 대물림을 다룬다. 가정 경제가 무너진 후 가족을 돌봐야 하는 존재가 아닌 폭행의 대상으로 몰고 간 아버지와 그 폭력을 엄마 이후 대신 겪어야 했던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의 폭행 대상이 되었던 개의 삶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일용노동자에게 비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도르다>는 한 편의 우화다. 읽으면서 많은 가능성을 떠올렸는데 마지막 몇 문장이 다른 우화를 연상시켰다. 어쩌면 내가 읽으면서 작가가 어렵게 이름 붙은 것들에 혹해 이야기 밑에 깔린 것들을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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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리 dele 2
혼다 다카요시 지음, 박정임 옮김 / 살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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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3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두 편은 이전 이야기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마지막 한 편은 분량이나 내용 등에서 훨씬 많고 앞에 깔아 둔 설정들을 하나씩 풀어낸다. 개인적으로 <그림자 추적>은 작가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익숙한 설정이고, 이야기의 여운이나 확장성을 무너트린 느낌이다. 앞의 두 편이 사회의 모순이나 흔히 생각하는 설정을 뒤틀어 주위를 환기시킨 것과 비교된다. 물론 이것이 개인 취향 차이일 수 있다.


<언체인드 멜로디>란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사랑과 영혼>이었다. 나의 연식이 나오는 대목이다. 의뢰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그 데이터가 있는 컴퓨터를 찾아야 한다. 의뢰인이 지정한 데이터를 지워야 한다. 몰래 집에 들어갔다가 형사들이 들이닥치고, 그곳에 흘린 신분증 때문에 의뢰인의 동생이 찾아온다. 동생은 인기 밴드의 리더다. 삭제 요청한 데이터는 이 밴드의 원곡들이다. 흔한 설정이라고 생각할 때 작가는 한 번 더 비틀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준다. 좋은 음악이 잘 팔리는 음악이 아니라는 지적은 왠지 씁쓸하다.


<유령 소녀들>은 한 소녀가 사무소로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이 소녀는 의뢰인의 친구다. 친구를 통해 의뢰인의 죽음을 확인하지만 유타로는 이 소녀를 미행한다. 이 미행의 과정 속에 의뢰인과 소녀가 SNS에 어떤 사진을 올렸는지 확인한다. 의뢰인의 급여로 이런 음식이나 물건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읽다 보면 화려한 사진 이면에 숨겨져 있던 힘든 삶과 그 삶을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드러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사회안정망의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사회안정망이 있다고 해도 비극은 존재할 것이고, 인간의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 추적>은 케이시와 유타로의 과거사를 한 번에 정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타로의 동생 린이 어떻게 죽었고, 이 죽음이 부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준다. 당연히 그 영향은 유타로에게도 미쳤다. 동생의 죽음은 제약회사의 신약 실험과 관계가 있는데 신약 부작용 때문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보를 준 의사는 사고 죽었고, 부모는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한다. 이 이야기에서 최악의 상황은 이 소송을 중단시키기 위해 그들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탐욕, 두려움, 비열함 등이 뒤섞인 행동을 보면서 거대한 음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을 파헤칠수록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예상한 것과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연속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2권까지 읽은 지금 마지막 설정에 아쉬움이 조금 있지만 각 단편이 담고 있는 죽음과 남겨진 자의 감정 들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들이 지우고자 한 데이터가, 그 데이터 속에 담긴 삶이, 그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된 현실이 미스터리와 엮여 재미있는 연작 단편이 되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 중에서 읽지 않은 몇 편이 이런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는데 한 번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 소중한 기억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모습이다. 읽으면서 유타로와 하루나의 로맨스를 조금 기대했는데 작가는 이런 부분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역시 살짝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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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리 dele 1
혼다 다카요시 지음, 박정임 옮김 / 살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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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혼다 다카요시의 소설을 읽었다. 십 수 년 전에 나온 소설들은 읽은 적이 있지만 최근 몇 년 안에 나온 소설들은 나온 것도 몰랐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읽지 않은 책들이 몇 권 보이고,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도 눈에 들어온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흔적이 보이지 않는 책도 있다. 오래 전 기억이고, 소설들이 누적되면서 기억이 혼란을 일으킨다. 계속 작가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기억이 오랫동안 남는 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이 입에 짝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디지털 장의사란 설정이 나를 혹하게 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나왔는데 1권에는 다섯 편의 연작이 실려 있다. 따로 읽어도 무리가 없는 내용들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두 명이다. dele. LIFE 사무소의 소장인 케이시와 그 사무소의 유일한 직원이 유타로다. 이 사무소가 하는 일은 죽은 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데이터를 의뢰인 대신 디지털 기기에서 삭제해주는 일이다. 이 데이터는 스마트폰 속일 수도 있고, 노트북이나 데스크탑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삭제는 의뢰인이 요청한 시간이 지난 후에 가능하다. 개인에 따라 72시간, 24시간 등으로 모두 다르다. 물론 이 삭제는 의뢰인의 사망 확인을 같이 요구한다. 누군가가 의뢰인의 죽음을 알려주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이것을 위해 최소한의 앱을 깔게 한다. 이 앱을 통해 케이시는 접속이 얼마나 오랫동안 되지 않았는지 알게 되고, 사실 확인을 유타로에게 시킨다. 소설은 이 데이터를 둘러싸고 일어난 의문과 그 죽음 이면의 미스터리를 잘 엮어 풀었다.


<첫 포옹>은 이 연작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것인지 잘 보여준다. 케이시는 의뢰인의 죽음이 확인되면 주저없이 데이터를 삭제한다. 하지만 유타로는 그 데이터의 내용이 유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소장 케이시와 남은 사람들의 삶에 더 관심이 있는 유타로는 작은 충돌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망 확인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의혹들이 의뢰인의 데이터를 열게 하고, 그 데이터와 죽음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강매 사기단의 일원이었던 사람의 데이터와 죽음도 그렇게 해결된다.


<비밀 정원>은 의뢰인의 죽음과 그 죽음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여인과 삭제 요청한 데이터가 엮인다. 우리 삶 속의 진실한 사랑과 비열하고 추악한 욕망이 뒤섞여 있고,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넘은 감정이 담겨 있다. 케이시는 앉은뱅이 탐정의 역할을 하고, 유타로는 발로 뛰면서 알게 된 정보를 케이시에게 전달한다. 하나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어떻게 다르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고, 순수한 감정이 어떤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알려준다. <첫 포옹>처럼 마무리는 남은 사람의 선택으로 남겨둔다.


<스토커 블루스>는 한 사회부적응자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스토커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과 감정을 데이터를 통해 추론하면 순수한 감정들이 녹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고 일상적인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단편은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여동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피규어 등을 사야만 했을 그의 삶이 씁쓸하다. <인형의 꿈>은 데이터 삭제를 요청한 의뢰인의 남편이 그 데이터를 보고 싶어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 데이터 삭제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풀었다. 오해와 이해 사이의 간극은 제대로 된 설명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는데 이것을 알려주는 인물이 케이시다. 아내의 질병과 남편의 성욕에 따른 실수는 현실적이지만 역시 씁쓸하다.


<잃어버린 기억>은 갑자기 죽은 의뢰인의 데이터와 과거사가 오래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의뢰인의 아들은 아버지의 예금에서 사라진 금액의 행방이 궁금하지만 케이시가 이것을 알려줄 이유는 없다. 의뢰인이 무료로 시행하고 있던 교육 등은 현실의 대안학교를 넘어 아주 훌륭하고 멋진 일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잇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돈의 정기적인 이체와 그 이체의 이면을 파헤치는 케이시 등의 활약과 의뢰인의 죽음이 불러온 현실은 서로 엮여 있다. 부모 관계와 용서를 다룬 이 단편을 읽으면서 서로 관계가 틀어진 수많은 부자 사이를 돌아보게 된다.  2권의 경우 단편 수가 적은데 앞에 깔아 둔 유타로와 케이시의 과거가 어떤 식으로 흘러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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