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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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부모는? 
남의 부모다.
가장 좋은 자식은?
남의 자식이다.
말장난같지만 항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니까

한국의 어느 미래 사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하지 않는다. 출산율은 줄어들고 미래가 어둡다. 국가는 정책을 결정한다.
이제 아이는 나라에서 책임지고 키우겠다.
아이를 낳은 성인들이 아이의 부모가 되어 키우고 싶다면 키워도 좋다.
아이를 낳았으나 키우고 싶지 않다면 국가가 관리하고 양육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13세가 되어 누군가 부모가 되고 싶어하는 커풀이 있다면 면접을 보고 부모가 될 수 있다. 다만 선택은 아이에게 있다.
국가에서 관리되고 양육된 아이들은 13세부터 부모를 찾고 가정으로 들어가 일반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다. 만약 19세가 되도록 부모를 찾지 못한다면 국가양육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 미래에도 나와 다른 타인은 차별받고 별종으로 몰린다. 
어쩌면 왠만한 가정에서보다 더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케어받았던 아이들이 다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는 순간 다른 타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 전에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야 한다.
부모를 면접하는 것을 페인트라고 한다. 
부모가 되를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로 결정하는 것은 가디의 조언을 받은 아이들이 결정한다.

이제 18세가 된 제뉴301은 더 늦기 전에 부모를 만나야 하지만 부모를 결정하는 일에 늘 시큰둥하고 시니컬하다. 부모가 되기 위해 잘 보이려는 커플의 그 속속이 너무 잘 보이고 어떤 부모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나는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 그리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좋은 부모만으로 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보통의 부모는 자식을 선택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흔히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태어나 보니 저 사람이 내 부모인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숙한 존재로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긴 사람에게 부모는 한때 절대적인 존재다. 나의 생명을 책임지고 정서적 물리적 만족감을 채워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은 거부할 수 없고 순종해야 하는 기간동안 부모는 절대적이다. 따뜻한 사랑과 관계를 배우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거나 불안과 공포를 줄 수도 있다. 어리고 약한 아이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없어 받아들이게 되는 부모의 존재는 대단하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보면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내 아이가 나의 유전자를 닮아 나와 비슷한 성정과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겠지만 나랑 닮았을 뿐이지 나는 아니다. 어떤 아이가 나올지는 부모도 알 수 없다. 태어나면서 처음 만나고 키우면서 알아갈 뿐이다. 
서로가 처처음 알아간다는 것은 미숙하고 실수를 하고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시 돌아보고 다시 안아죽주고 이해햐려는 과정의 반복들이다.
한없이 미워질 수도 있고 너 없으면 이제 못살 거 같은 끈끈함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미움움도 사랑도 켜켜이 쌓이면서 관계는 단단해진다.
다만 그 과정을 무탈하게 겪을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일 수도 있다


이제 제뉴처럼 커버린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릴적 서운했던 경험을 이야기 할 때가 있다. 그때 엄마가 동생만 원하는 걸 들어줘서 너무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웠다는 이야기
사실 나는 공주 드레스가 갖고 싶었는데 엄마는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마술사 망또를 사줬다는 이야기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이 그려진  그 원피스가 정말 진저리치게 싫었다는 이야기 
그때는 어려서 몰라서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과 외로움 두려움을 들을 때면 당혹스럽다.
나는 잘 해주려고 했었는데
나름 너무 여성적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 중성적인 캐릭터를 심어주고 싶었고 
비싸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골라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아이는 그런 내 선택을 너무 싫어했었다고 한다. 10년도 훨씬 지나서
그 때 아이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믿은 나름의 양육태도도 있었을테고 뭔가 정칮치적으로 옳음을 실천한다는 뿌듯함이나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여겨 아이의 의사를 쉽게 잊었던 것들이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아이에게는 그게 외롭고 쓸쓸하고 인정받받지 못하는 기분으로 남아있다.
그게 아닌데
의도와 다다르게 닿는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비일비재한 게 부모와 자식이다.
좋은 것 바른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 간섭이 되고 강요가 되고 일방적인 지시가 된다.
그리고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처를 주고 받는다.
제뉴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와 해오름의 이야기 가디인 박의 이야기를 읽으며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 생각한다. 생각할 수록 그건 쉬운일이 아니라고 자꾸 도망가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뿌듯함 만큼 늘어가는 건 미안한 마음이다.
잘 해줘도 미안하고 무심해도 미안하고  아이가 의젓하면 너무 빨리 눈치를 보게 만드나 싶어 미안하고 아이이답게 이기적이고  무심하면 내가 잘못된 모델이 된 게 아닐까 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서운하다는 말만 자꾸 꽃혀서 미안하고 돌아보 스스로 한심하고 짜증나서 다시 그 부정적인 감정을 전해버린다.
부모도 참 힘든데

책이 아쉬운 것은 다들 너무 생각이 많고 착하다는 것
누구하나 삐뚤어지거나 순간이라도 악한 마음을 품은 인물이 없고 다들 순하고 생각이 많고 반듯하다. 그래서 읽다보면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부모를 면접하고 선택하는 시스템이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왜 이렇게 공공드라마같은 분위기로 풀어버렸을까? 작가가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고민이 많았던게 아닐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5세 전에 아이가 주는 즐거움이  나중에 미운 7살을 지나 사춘기가 와서 지랄지랄을 할때의 증오를 다 상쇄해준다는데 그리고 내 경우도 그러한데
그런 이쁜 기간동안 잘 모아놓은 기쁨도 없이 그리고 함께 미운 기간동안 애증을 쏟아붓는 처절함도 없이 이제 어느정도 대화가 되고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맞추주는 능글맞은 17세의 자식이 생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건 정말 하나와 제뉴의 말대로 부모 자식의관계라기보다는 그냥 친구같은 게 아닐까 싶다. 
미워서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골백번 들더라도 잠들었을 때, 아기때 그 무방비의 천진함이 여전히 남은 얼굴을 보면서 모든 걸 싹 지워버리는 그런 기분 
뭐 이 얼굴 하나면 되지 않나 싶은 마음
이전의 모든 악전고투를 다 잊어버리는 그 망각같은 것들
그게 그래도 부족한 내가 20년동안 부모노릇을 하게 만드는 힘이었는데 
힘든 건 쉽게 잊고 좋은 건 오래오래 나 편하게 편집해서 기억하게 되는 마법
그것이 부모를 부모로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묘약이다
그런 것 없이 어느 순간 각성해서 부모와 자식이 되는 일.. 그건 
참  생각햅해볼 문제다.

좋은 소재였고 아이디어였는데
캐릭터들이 이렇게 재미가 없다니. 
그냥 부모교육지침서로 흘러가버린 게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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