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의 속죄..
이야기와 이야기와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둘러싼 커다란 테두리(?)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 한 사람은 어던 죄도 없이 댓가를 치러야 하고
알맞은 시간에 속죄를 하지 못했던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벌주면서 속죄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속죄였음이 드러나는 반전 반전 또 반전
속죄 용서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사라믈은 김창동의 영화 <밀양>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의 또다른 작품 <시>도 용서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떠올리는 것은 이정향의 <오늘>이다,
용서를 해야히지만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피해자에게는
용서 이전에 반성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고 사죄하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용서는 선택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다,
사람들은 용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거룩한지를 말하지만 막상 사죄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댓가를 현실적으로 치렀는지는 넘어간다,
그저 용서만이 온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살기좋게 하고 옳은 것이라고만 말한다,
피해자는 제 상처를 추스르기도 전에 용서해야하는 압박속에 갖히고 만다,
용서 하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사죄는 권리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과제이다,
김애란의 <서른살>의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희도 자라면 내가 되겠지 고작 내가 되겠지"
결국 자신처럼 되어버린 제자를 생각하며 주인공은 어쩌지를 못한다
일껏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살아가려고 했는데 노량진에서 함께 생활했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지금의 "내"가 되기전 그 어리고 발랄했던 제자의 나이였던 "나"를 떠올리며
다시 내가 버리고 온 제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죄책감이란 그런 것일까
기껏 떼어냈다고 돌아서서 휴우 한숨을 돌리는 순간에도 그 놈은 내 등뒤에 짤싹 붙어 있다,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 등뒤의 무게에 혼자 휘청거리는 사람은 있다,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믿고 싶지만 그 무게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은 약하고 미미하고 보잘것없는게 그래서 그 무게를 어쩌지 못한다,
<서른살>의 주인공은 힘겨운 노량진에서의 재수생활끝에 미미한 대학에 진학하지만 취업은 또 아득하고 그렇게 학원가를 전전하면서 나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보람도 느낀다,
지독히도 공부를 안하고 희망도 없는 아이들이 순진하고 발랄하게 다가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다가섰던 그 순간은 희망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라는 유혹으로 시작한 다단계 생활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생활 관계속에서 마지막으로 아직 순수하고 발랄한 제자를 끌어넣는 순간까지 그는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제자의 문자를 씹고 전화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 죄인이었다,
자기를 아직도 순수하게 기억하는 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부칠지 알 수도 없는 편지를 쓰면서
주인공은 그게 속죄라고 생각할까
이미 자기치럼 피폐해지고 자기정도의 어른밖에 되지 못한 제자를 졔속 밀어내면서도 그는 아마
오래오래 그 아이와 함께 할 것이다, 그게 그의 벌이다,
내가 읽은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인데
나는 자꾸 김애란의 <서른>이 떠올랐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속죄와 아직 살아있고 내곁을 계속 맴도는 사람에 대한 속죄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이 남았지만
아직 살아있고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희망이 있지 않냐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죽어버려서 모든게 끝나버려서 가벼워질 수 있는 (그게 어쩔 수 없는 자기기만일 수 밖에 없드라도) 것이 있다면 아직 현재진행형이어서 점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우유부단 회피 망설임의 덧대어지는 죄들이 있다,
누구의 죄가 더 클까
나는 신이 아닌데도 아무것도 아닌데도 자꾸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차대전과 작가라는 소재에서는 두 책이 연상된다,
전쟁동안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게 되는 이야기와
전쟁을 겪으며 궁핍한 상태를 견디는 작가가 멀리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있는 서점주인과 교류하며 서로를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이 책도 다른 인물이지만 전쟁을 겪는 이야기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겹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록해서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것
그저 흩어지고 엷어져서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싶은 그 순간 그 감정 그 사람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마음이 다,
잡고 싶은 그 마음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잡고 싶은 그것은 어떤 대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를 그대로 박제하는 일이다,
브리오니는 자기의 죄를 반성하기 위해 그 순간을 기록하기로 하고
건지감저껍질 파이의 작가는 그 시대의 상황을 씀으로써 그 시대의 모습과 함께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대상인 동시에 자신이다,
그것이 반성이든 생계를 위한 것이든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그가 쓴 글에는 작가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너무 택도 없는 비유겠지만
어쩌면 이 서재에 글을 남기는 나도 내가 읽은 책들(대상)을 기록하는 일인 동시에 나를 드러내느 일이다, 내가 여기서 쓰는 글은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은 나라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브리오니가 자기가 들어가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것은 그가 아직 어리고 유치하고 서툴러서가 아니라 그때부터 누구가 품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주인공이가 자기가 겪어야 하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if 란 있을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나 사실을 되돌릴 수 없는 것
역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라는 것도 그렇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 되돌리려고 하고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꿰맨 상처는 흉터로 남아버린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되돌리는 일은 없으며 원인에 대한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소설은 그 역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결말을 바꾸고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혹은 일아나게 하는 일
그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은 지워버리고 해야만 했어야 하는 말을 삽입한다
신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기가 쓰는 작품안에서
브리오니가 그렇게 자기 작품속에서 세상을 바꿈으로써 속죄를 한다,
미안한 마음 그러나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 마음으로 몇번은 고치고 고쳐가며 소설을 썼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것이 모두 브리오니의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가 앞에서 언급했던 "소설에 없던 것은 내 삶에도 없었다"
부딘칠 수 없던 일들을 차마 쓸 수 없던 그는 드디어 직면해서 쓰기 시작했다,
지나버린 역사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만들어내면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리오니는 자기가 꼭 들어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유년시절의 미성숙한 의지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작가가 되었다,
브리오니는 결국 언니 세실리아에게도 그의 연인 로비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미처 그럴 틈도 없이 두 사람은 사망했고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브리오니는 그 커다란 속죄를 해피앤딩이 있는 소설로 대신한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연인을 소설속에서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내면서
스스로는 용서를 구하지만 결국 용서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서
스스로를 속죄하려고했다,
열세살의 브리오니는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아직 어리고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이였고
이제 어른이 된다는 어쩌면 설레고 짜릿하면서 아찔한 그 순간이 얼마나 그릇되고 독선적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본 사실 내가 받아들이는 진실이 전부라고 믿는다,
이미 틀을 만들고 그 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틀이 어른의 틀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였다,
존중받고 관심을 끌고 싶고 세상의 중심이고 정의를 실현해야하는 인물을 자기여야 한다고 믿는 아이 그 아이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잘못된 판단이 사람들을 끝으로 몰아갔다,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힘에 밀리고 만다,
그리고 후회는 언제나 때가 늦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속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를 아울러 속죄에 대해 죄책감에 대해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죄도 업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죄 이후가 사람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직면하고 반성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잘못을 알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구나 세가지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적거나 크거나,,,
그냥 이야기의 재미를 따라 읽다가
주인공에 따라 나를 생각하고 내가 아는 누군가를 생각하다가
전쟁과 역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속죄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결국 인간이란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그 이후가
속죄를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범으로 하는가 의 문제가 그 품격을 결정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도덕책에서는 가장 쉽게 서술되어있지만
삶속에서는 가장 어려운 행동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가져다 주는 이언 매큐언은 진정 작가라고 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