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식이란 누군가가 차려줄 때는 그보다 정성가득한 존중은 없지만 내가 차려야 할때는 이 이상의 노동이 없다. 구입하고 다듬고 요리하고 뒷설거지까지 만들기는 손이 많이 가지만 먹는건 금방이다. 금방 식거나 금방 축 쳐져 물기가 흥건해지거나 말라버리기 일쑤다.
정확한 시점에 정확하게 내놔야 한다는 타이밍까지 신경써야 하는 음식이다.
한편 미리 만들어 놓은 밑반찬 어제 먹었던, 다시 데운 국이라면 쉽고 얼렁뚱땅 차려내고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장장 열흘이라는 긴 연휴를 보내면서 상차리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열흘에 하루 세끼 그러니까 서른끼가 지나간 셈이다
물론 모든 걸 다 집에서 차려낸 건 아니고 사먹기도 하고 나가서 외식을 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써야하는 차림에서 아무런 감정없이 무미건조하게 냉장고에서 식탁으로 이동만 하는 상차림까지 모든걸 하고 보니 온간 생각이 들었다.
먹는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참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먹는 일이 의외로 노동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식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이쁘고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건 즐거움이라고 하는 건 그냥 앉아서 차려먹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다가도 나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자치는 줄 모르고 만들어 먹이고 그렇게 만들었는데 안먹고 투정하면 혼자 속상하고 내가 거부당한것 마냥 서럽고 억울했는데 그게 다 무슨 짓인가 싶다.
이래도 한끼 저래도 한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이 기복이 심한 나의 감정곡선의 가장 밑바닥인 시간이라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 우리집은 종가집이라 4대 봉제사를 지냈다.
그러니까 4대 여덟분 일년에 명절 차례까지 하면 열번의 제사가 있는 셈이고 일년에 두달 빼고 매달 제사가 있는 셈이었다
우리 뒷동에 살던 내 친구는 어느 날 밤 우리집 베란다를 봤는데 거실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뒷모습이 웅성웅성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애가 본 그날 밤은 아마 제사가 있던 밤이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그실 한면을 길게 주욱 있다가 모자라 한 면은 꺽어진채 놓은 상까지 네 개의 상을 놓고 남자들은 절을 했다.
당연히 손끝하나 놀리지 않은 남자들은 혀끝은 예민하게 놀려댔다,
뭐가 빠졌구나 뭐가 잘 못 놓였다 뭐가 이상하다.... 뭐는 너무 일찍 만들어서 다 말랐다...
손끝은 무딘데 혀끝은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사흘전부터 동동거린 엄마는 그 말에 죄인이 되고 입맛이 없다면서도 다들 한그릇 뚝딱 비우고 후식까지 찾는 통에 정작 내가 먹은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거나 아에 그게 싫어서 가뿐하게 건너뛰기 일쑤다
명절의 그 의식이 지나면 잘 차려지고 잘 치른 건 당연한거고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들은 언제나 말끝에 묻어났다.
꼴보기 싫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쩌면 그때 명절때 마다 찾아오는 어른들 말고 그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와 함께 온 아들이나 손자들은 오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명절때만 보는 친척집에 가서 차례상이 준비되는 동안 남의 방 한구석에서 기다려야 하고 낯선 어른들과 함께 밥상을 받아서 조금 주눅들어 먹어야 하고 어색하게 인사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중 마는둥하다가 어른들이 이만 가자 하는 순간 화색이 도는 그 남자들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이제사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렇게 매번 꾸역꾸역와서 밥 먹고 과일먹고 떡먹고 먹기만 하다가 말없이 돌아가는 남자들이 싫었다. 나이가 많건 적든 나보다 어리든 그냥 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제사를 꼬박꼬박 형식을 갖춰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나름 자부심이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일을 꼭 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도와주면 칭찬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고 이런 전통을 즐기면 되는 입장이었으니까
결혼하고 남편집은 돌아가신 시아버지 제사 달랑 한 상이었다.
그걸 보면서 쥐뿔도 잘하는게 없으면서 우스웠다.
겨우 차례상 하나쯤이야......
집집마다 다른 상차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내가 20년 넘게 보아온 것이 정석이라고 믿어서 조금만 달라도 이상하고 틀렸다고 생각했다.
상차림은 쉽고 별거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우리 집이 아닌 곳에 오래 있는 건 불편했다.
그렇게 일이 많지도 않고 누군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은근히 내맘대로 해도 별 말 없는 분위기지만 시집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나혼자 맞지 않은 퍼즐판에 끼어있는것 마냥 어색하고 불편하고 엎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맞춰야 할 부분조차 내게 맞추길 바랬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음식을 차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자취를 했고 요리에 관심도 많았고 잘하지는 않아도 겁내는 경우가 없어서 망치든 잘하든 일단 하고 보는 스타일이라 음식을 한다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맛없으면 안먹으면 그만이고 하다보면 대충 꼴은 갖추었으니까 그냥 자만했다.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거야 그래서 안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야...
이게 30년동안 나를 지배한 요리에 대한 자만심이었다.
그런데 올해 긴 연휴를 겪으면서 이제 겨우 50도 되지 않아서 이제 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처음으로 우리 서행자 여사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40년 넘게 종가집 종부로 제사상과 차례상을 차려낸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본가가 중요하고 남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장남으로 장손으로 책임감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아버지였기에 명절이나 제사가 대충 허투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암으로 수술하던 딱 한 해를 제외하고 (제주가 아프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까지 제사는 엄마의 가슴에 얹힌 돌이었을 것이다.
동서들이 와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그건 전날 와서 이미 그 주 내내 계획하고 장보고 몇번을 날라다 놓았던 재료를 다듬고 손질해서 차곡차곡 마련해놓은 걸 와서 지지거나 무치거나 하는게 전부였다. 그래도 어른들(이라 쓰고 남자들) 눈에는 내 눈앞에서 쭈그려 앉아서 하루 종일 전을 뒤집고 손 마를 새 없이 나물을 무치고 탕국을 끓이는 사람이 더 일하는 것 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이 돌아갈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고 뒷 마무리를 하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버리는 사람은 볼 수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나 역시 결혼해서 일이 쉬워보이고 우스워보였던 건 미리 준비하고 다듬어 놓은 시어머니를 보지 않아서이고 내가 일을 했다고 하나 그때 역시 모든게 갖추어진 상황에서 자리잡고 앉아서 전을 뒤집은게 전부였기때문이었다.
해보지 않고 보기만 하는 건 대개는 쉽다.
누군가의 노래도 들을 때는 쉽고 단순한 노래였고 남이 하는 게임도 가만히 보기만 하면 나는 저것보다 적어도 배는 더 잘할 거 같고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자고 빈둥거리는 아이들도 그 시간에 왜 공부하지 않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내가 딱 그랬다.
어느 순간 나이 먹고 모든 준비가 내 차지가 된 순간 밥상을 차리는 일은 (제상이든 차레상이든) 요리하고 차려내는 일은 그냥 껌이라는 거다.
선택하고 다듬고 준비하는 일이 태반이고 그 뒷처리가 남은 태반이다.
그 모든 보이지 않은 일을 40년간 한 서여사님께 세상 모든 존경을 다 바쳐도 모자란다는 걸 한참 나이 먹어 알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제사를 절대 내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이 서여사의 생각이셨다
4대 봉제사를 지내는 집안 장손은 절대 결혼할 수 없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세상에 한명도 없다는 반 협박과 반 애원으로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제사를 줄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우리 올케는 주문식단으로 제사상을 차린다.
맞벌이고 일이 바쁜 입장에서 제사때마다 명절때마다 일찍 와서 상을 차릴 수 없는 입장이다.
시대도 바뀌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서여사도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 서운한 것이 그녀 마음이었다.
- 니 아버지가 어떤 정성으로 조상을 모시고 어른들을 대접했는데 니 아버지는 그 반도 받을 수가 없는거냐며 한탄하시지만 어쩌시겠는가?
내가 한만큼 나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계속 그렇게 자격이 이어지면 이놈의 제사는 끝이 없는 법이다. 누군가는 내가 획득한 내 자격을 그냥 자격으로 남겨두겠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네버엔딩스토리가 된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 내 제사는 간소하게 하라고 하신건 아니지만 시대가 바뀌고 삶이 바뀌면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한편으로 그렇게 자격있게 아버지의 권위를 세운건 결국 서여사다.
우리 아버지지만 명절이나 제사때 한 건 새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거나 그 전 주에 세탁소에서 잘 손질해온 한복을 입고 잘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서 술을 따르고 축문을 읽고 절을 한 것 뿐이다. 만약 내가 한 정성을 내가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면 그건 죄송하지만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아니고 할머니나 우리 엄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서여사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부니까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라 부엌에 들어가는 사위는 그르려니 하지만 부엌에 들어가는 아들은 안타깝고 애틋하다.
우리 올케는 사실 내 남동생보다 바쁘다.
자라면서 공부밖에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공부를 썩 잘했고 좋은 학교를 갔고 또 공부를 잘하고 공부밖에 잘 하는게 없어서 좋은 직장엘 갔고 좋은 직장이란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고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란 일을 많이 시키는 직장이다. 그 모든 조건에 맞게 올캐는 늘 바쁘다 뭐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려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낸 시간을 시가 제사에 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서여사 입장에서는 며느리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거고 같은 여자로서 내가 보기엔 그래도 날짜 잊지 않고 챙기고 주문한 음식이라도 자기집에서 공간을 내고 손님을 맞는(물론 그 옛날 양복입는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고 조폭?을 떠올린 내 친구의 착각을 가능케한 그런 규모는 아니지만)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하든 적게 하든 주문을 하든 뒷처리는 남는 법이니까.
엄마 입장에서 그리고 시누 입장에서 그래도 며느리인데 조금이라도 정성을 보이면 좋지 않나 싶어 얄밉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지만 또 여자입장에서 보면 내가 주관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하겠다고 결정했는데 거기 제 3자가 토를 달 수도 없는 것이라고 수긍한다.
40년을 한결같이 종부로 살아온 우리 서여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녀의 은근한 질투와 아쉬움도 이해할 수 밖에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다.
# 정말 이번 연휴는 드럽게 길었다.
쉬어도 쉬어도 끝이 없었고 아침에 눈뜨면 다들 나가서 보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하루 내내 집안을 뒹굴거리고 있었고 이 인간들은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는 아귀들이나 다름 없었고(미안하다. 내가 인격이 덜 되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하루 세끼 차리는 일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울 수 있다.
따끈한 밥과 두어가지 찬이어도 정성껏 차리는 것이 가능하고
십첩 반상을 아무런 영혼없이 사온 찬이나 미리 해둔 밑반찬으로도 차려낼 수 있다.
게다가 우리에겐 햇반도 있지 않은가!!!!!
연휴가 시작될 무렵 다시 읽었다.
한편 한편 여기저기 헤집어가면서도 다 읽었다.
늘 그렇듯 술이 당겼고 늘 그렇듯 집에 먹을만한 알콜은 없었다.
왜 모든 일들은 지나간 후에야 그 상황이 더 선명해지는 걸까?
시간이 지날 수로 선명하고 단순해지는 기억이고 상황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까 어쩌면 그 순간 몰랐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화려한 시간이었다는 것
내가 내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설프고 한순간의 헤프닝같은 일이지만 그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꼭 한템포 뒤에 알아지는 것이다.
내가 밥상을 차리는 일이 이러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달라졌을까?
연휴 마지막날 오후 봄에 담근 매실을 걸렸다.
얼마가 나올지 몰라 2리터 생수병을 네개를 깨끗하게 씻고 말려뒀는데 겨우 두병 나왔다.
남은 매실로 담은 매실주는 ..... 예전 약초주를 담그고 남은 담금주로 해서인지 내겐 독했다.
그래도 그 매실주를 찔끔 찔끔 마시면서 연경을 생각하고 이모를 생각한다.
내 삶도 이렇게 취하거 깨거나 그렇게 반복하는동안 아하. 하고 무릎을 칠 일들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늦게라도 알게 되는게 다행 아닐까 스스로 위안한다.
스스로 위안하고 만족하는 건 내 특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