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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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우리네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과연 몇 이나 될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생활하거나, 20년 거치 대출로 집을 장만하고, 하루 노동의 댓가를 통해 의식주를 연명하는 서민들에게 있어 자유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오죽하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드회사 카피가 떴겠는가.

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먹고 살아야하는 당면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 단연코 자유는 없을 것이다. 확실히 자유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제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 있어 자유는 그리움의 대상이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 수밖에 없다.

여기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다가 간 사람이 있다. 거친 자연과 더불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썰 들을 풀어내며 ‘자유의 원형’으로 살았던 사람, 조르바! 조르바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두목 봤어요?」 「……」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놀랍고도 기뻤다. (아무렴.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태초에 이 땅에 나타났던 사람들의 경우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理性)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p157)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라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p176)

「저게 무엇이오?」그가 놀라도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불렀다. 「조르바, 혹 돌아 버린 건 아닌가요?」 「무얼비웃고 있어요? 당신 눈에는 안 보이는가요? 두목,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술을 말이요」 (p260)

조르바는 완벽하게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을 살았다. 장자가 말한 ‘물아일체’와 ‘무위자연’의 사상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하지만 소설 속의 작가(카잔차키스 자신)인 두목(보스)은 조르바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지만, 현실의 상황을 끊어낼 수 없어 고민한다. 이를 안 조르바는 보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줄을 붙잡아 맬 뿐이지……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339)

……이해하고 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행복할 텐데.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p340)


조르바가 두목에게 한 말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자본주의라는 사슬에 묶인 채 우리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나는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곧 이따위 돈 벌이를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거야!’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 결의는 두목이 “언젠가는 자를 거요”라고 내뱉는 말과 똑같다. 조르바는 ‘내가 묶인 줄’을 자르지 않고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누구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조르바의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대화들은 모두 ‘삶의 지향점’으로 귀결된다. 두 주인공 모두 생활고(生活苦) 문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삶에 대한 관심사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목은 아폴론적이다. 항상 이성적인 질서와 이데아적인 것을 꿈꾼다. 이에 반해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이다. 이 땅에서 자기의 이기심과 감성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데아같은 것은 빌어먹을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것!

이렇게 호탕한 자유를 구가하는 조르바의 삶은 너무도 멋있다. 조르바로부터 가공되지 않는 자유(진리)의 원형을 접하고 고민하는 두목 또한 멋진 삶이다. 그 둘이 춤을 통해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대목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둘이 함께 춤을 추는 엔딩 장면은 정말 잊을 수없는 명장면이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다. … 내 가슴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중략) (춤을 추면서)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드리지.”」 p329


조르바가 현대인들에게 자유의 부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자연과 더불어 살다간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작품의 주인공 중에서 그가 유일한 실존인물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한편,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그래서 그런지 책의 도처에 이들의 사상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놀랐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이다. 붓다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p155)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말았다. 법이 명하는 대로 자진해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현자(賢者)가 누구였던가? 필연에 순응하고 필연적인 것들은 자유 의지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고 한 사람은? 이게 해탈이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비참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p307)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렸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p3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340)


조르바의 어록을 통해서, 때로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두목)의 성찰을 통해서 그리고 둘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지는 붓다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의 사상은 한데 어울려 ‘자유로운 인간’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자유’라고 말하겠고, 어떤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져주느냐고 묻는 다면 단호히 ‘인간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은 무엇인가?’ 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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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9-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의 서재에 이렇게 정식으로 놀러옵니다. ^^ 그리스인 조르바는 저 역시 무척이나 강렬하게 읽은 책이에요. 인용해 주신 주인공 '나'의 철학이 저에게는 참으로 가슴 깊이 남았죠. 자연으로 둘러싸인 환경이 아닌 욕망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유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죠. ^^ 매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자유로운 삶이란 주체성을 가진 삶이라 생각이 들어요. 환경에 시대에 쓸려 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고 답답한 이 사회 속에서 그런 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파도를 헤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인 것 같아요.
리뷰 굳!!

yamoo 2011-09-02 16:47   좋아요 0 | URL
조르바는 누구에게나 매력을 주는 인물 같습니다.^^ 루쉰님도 이 작품을 강렬하게 읽으셨군요~ 재미난 리뷰 기대하고 있을 께요~ㅎ

와~~~루쉰님이 생각하시는 자유로운 삶...멋진데요~ 님의 그 삶의 궤적을 항상 글로 남겨주시길!

sslmo 2011-09-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삶이란 그저 머리나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사는데도,
그게 순리에 가깝고 자연 그대로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조르바인걸요.
님의 시선을 통해 만나니...새롭습니다~^^

yamoo 2011-09-02 16:51   좋아요 0 | URL
저두 머리나,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살고 싶어요...ㅠㅠ 근데, 그게 자연 그대로, 순리에 가까운 삶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 더 미치겠어요...ㅜㅜ

저는 뭐, 이 작품 읽고 자유만 생각났더랬습니다. 여전히 전 편협한 가 봐요..한 가지밖에 못보니...

양철님의 시선을 통해 보는 조르바는 어떤 모습일지 무쟈게 궁금하네요...저에게도 그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세요, 네~~?^^

쉽싸리 2011-09-02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를 예사롭지 않은 자유인으로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래도 작가는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를 마구 흠모해서 '어디 선창가에라도 가서 살아야겠다. 거기서 멋진 연애도 해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며칠을 달떴던것도 같아요. 마음먹는게 참 중요한것 같아요.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는 것도!! 단, 폐를 끼치면 안되겠죠.

yamoo 2011-09-02 16: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카잔차키스가 불교철학에 심취했다고 해요~

그나저나 쉽싸리님도 그런 생각을 하셨네요..저도 책 읽으면서 조르바를 흠모하며 선창가에 사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만...ㅎㅎ

노이에자이트 2011-09-0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어떤 여자는 조르바같은 남자를 남편이나 사윗감으로 생각하긴 싫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하더라고요.정말 솔직한 답변이죠.

yamoo 2011-09-03 22:11   좋아요 0 | URL
이거 토론 도서였었는데요, 당시 여자분들이 조르바와 같은 남자는 정말 딱 질색이라고 그러더군요~ 솔직한 것 같습니다..ㅎㅎ
 


캐이블 TV에서 우연히 습관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오랜 전 다큐의 재방송이었다. 채널을 돌리려다가 피터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라는 책 소개 때문에 채널을 고정했다. 왜냐하면 난 오래전부터 이 책을 갖고 있었지만 여전히 읽지 않고 있었기에.


 

내용 자체는 뭐, 뻔했지만 습관에 대해서 관심을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난, 조금 다른 측면에서 궁금한 점이 생겼지만.

습관이 중요하다고 하는 자기계발서들은 꽤 많이 구경했다. 아주 대표적인 책이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일 게다. 이 책의 열풍은 정말 대단해서 이후 비슷한 책들이 쏟아졌다.


 

대체로 습관을 다룬 대부분의 처세용 책들의 요점은 단 하나로 수렴한다. 그것은 ‘습관은 자신을 바꾸는 힘이다’라는 것. 습관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는다고 한다.

요컨대, 좋은 습관을 기르면 좋은 행동이 형성되고, 나쁜 습관이 들면 나쁜 행동으로 나타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행동을 뿌리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뿌리면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뿌리면 운명을 거둔다.”는 G. D. Boardman의 경구는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습관을 가졌다는 주장은 좋은 습관을 갖지 않은 유명인사가 소개되지 않는 한 계속 타당한 위력을 떨칠 것 같다.

헌데, 과연 습관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지는 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할 것 같다. 아니, 논의의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 같다. 이 점이 내가 관심을 갖는 지점이다.

그래서 ‘습관’에 대한 철학책을 찾아봤지만 전무했다. 심리학과 자기계발서에 관계된 책만 잔뜩 있었다. 전옥편 <이기는 습관>, <습관부터 바꿔라>, 김경모 <습관-나를 변화시키는 힘>, 브라이언 트레이시 <백만불짜리 습관>, 양창순의 <마인드 포스>, 이시형의 <세로토닌하라> 등등.

집에서 가까운 대형 서점에 나가 살펴 보았지만, 전부 자계서 뿐이었다. 왜 습관에 대한 철학적 분석서는 없는지....의구심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 흔한 철학적 잠언서도 없다니~

이런 생각에 집에 있는 책들도 뒤적거려 봤지만, 역시 관련 책이 있을 턱이 없다. 책은 없었고, 습관에 관해서 내가 찾은 유일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장 “행복은 학습이나 관습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인가, 혹은 신이 보내주시는 것인가, 또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얻게 되는 것인가”가 유일했다. 흠, 하나는 발견했다. 책은 아니지만..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읽던 책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제부터 읽고 있는 책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의 원 저작에 입문하기에는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고라는 전문가의 말에 읽기 시작했다.

‘역시, 베르그송은 천재야’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무심코 책장 하단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 칸은 현대의 지성 시리즈를 모아놓은 곳이다. 내가 언제 사 놓았는지 모르는 <베르그송 연구>란 책이 거기 꽂혀 있었다.

도대체 이 책을 언제 샀는지 기억에도 없거니와,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현대의 지성시리즈라서 그냥 덥석 구매한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들춰보지도 않았었다.

베르그송의 주저들을 읽기로 결심했으니, 구경이나 할 겸 펴들었는데, 나는 이 책으로부터 2번 놀라게 되었다.

타이틀만 보고 중요 부분만 훑었는데도, 저자 김진성은 완전히 베르그송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료한 언어로 베르그송의 핵심 사상을 체계적으로 건저올리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37세에 요절했다는 것이고, 이 책이 김남두 교수에 의해 유고집으로 출간된 책이라는 점이다.

김남두 교수와 동료 교수들이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할만 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짧은 논문 10여 편을 모아 놓은 유고집이었지만 정말 대단한 연구 성과로 비쳤기 때문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베르그송의 사상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정도다)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세계적인 헤겔 전문가인 임석진 교수에 버금가는 베르그송 연구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런데, 또 한 번 놀란 건, 이 책의 7번째 소논문 때문이다. 이 소논문은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의 습관에 대한 고찰>이다. 여기에는 내가 의구심을 가졌던 바로 그 내용들이 논문의 첫머리부터 펼쳐져 있었다.

“습관이 과연 철학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존재․이성 또는 본질과 같은 철학적 개념에 익숙한 사람은 이 대수롭지 않은 심리적 사실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사를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습관과 덕의 관계를 논한 이후로 데이비드 흄에 이르러 습관이 인과율의 성립근거로 제시되기까지, 그것은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 등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습관의 문제는 발(J. Wahl)이 정확히 지적하듯 특히 프랑스 철학에서 주목의 대상이었다. 데카르트, 루소, 파스칼, 비랑, 라베송, 부트루, 베르그송 그리고 현대의 리쾨르에 이르기까지 습관은 여러차원에서 다각도로 검토되고 있다. 예컨대 파스칼은 습관에서 상상력과 함께 가장 커다란 오류의 원리를 찾는다. 순수한 감정을 이성보다 높이 평가한 루소 역시 습관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습관은 감정의 신선한 유출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에밀>에서 “어린이에게는 오직 하나의 습관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습관을 갖지 않는 습관을”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들의 철학은 습관론에 근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랑, 라베송, 베르그송 철학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 논문은 이들, 특히 베르그송에 있어서의 습관의 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pp154-155)

 

있었다! 습관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이. 아쉽게도 ‘습관’이라는 타이틀을 단 책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주요 철학자들의 ‘논의’들은 있었다. 저자의 소개대로 흄의 책 <정념에 관하여>를 펼쳐보니 제3부 제5절에 ‘습관의 영향력에 관하여’라는 부분이 있다. 헌데, 2페이지 분량밖에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요 철학자들이 ‘습관’에 대해 논의했다는 점이다. 아쉬운 것은 주요 저작 속에 절이나 세항목 속에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에 저작을 읽지 않으면 철학자들이 ‘습관’을 다루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 이 점이 참 아쉽다.

물론 무식한 소치의 원인은 바로 나에게 있지만 <습관에 대해서>라는 편집된 책 1권만 출간돼 있었더라면 이런 의구심은 조금 더 일찍 풀렸지 않나 하는 푸념을 하게 된다.

뭐, 이런 쓰잘때기 없는 생각 때문에 김진성이라는 대단한 철학자도 알게 되고, 흄의 저서를 다시금 들춰보는 수확도 얻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런 상념 때문에 귀중한 휴가의 하루가 날라간 것은 되돌릴 수가 없구나~

*****
혹시 ‘습관’을 논한 철학책을 아시는 분은 무지한 야무에게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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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9-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관'에 관한 가장 유명한 경구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뛰어남이란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습관이다."), 그 경구는 제가 알기로『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책도 사 두기만 하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 yamoo님께서 소개해 주신『베르그송 연구』라는 책은 언감생심일 것 같고, 데이비드 흄의 책들도 읽고는 싶은데 참 그게 쉽지 않네요.

다만, 데이비드 흄의 경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깊이 천착한 인물이니만큼 '습관'을 다룬 부분이 (yamoo님께서 찾아낸) 2쪽으로 그치치는 않았겠다 싶고, 또 그와 '절친'이자 그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았던 아담 스미스 역시 그의 주저인 『도덕감정론』에서 '습관'에 대해 깊은 철학적 성찰을 한 것도 당연하다 싶습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가 그의 철학책(도덕감정론)에서 '습관'에 관해 살펴본 내용이 그나마 yamoo님께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것 같아 '길게' 덧붙여 봅니다.

* * *

제5부 습관과 유행이 도덕적 시인과 부인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365쪽∼398쪽)


그들 자신의 결핍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편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우리 자신을 극도로 괴롭히고 있다면, 우리는 이웃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모든 미개인들은 그들 자신의 결핍(缺乏)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필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개인은 그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이건 간에, 이 고통에 관하여 그의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동정(同情)도 기대할 수 없고, 이런 이유로 남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이게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의 격정이 아무리 거칠고 난폭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표정의 태연함 또는 그의 행위 및 태도의 침착함을 어지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북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은 어떤 일을 당해서도 완전히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취하며, 그리고 만약 그들이 어떤 점에서라도 애정이나, 비탄이나, 분개의 격정에 의해 압도된듯이 보인다면, 그들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담대(膽大)함과 자기 통제는 이런 면에서는 거의 유럽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생각)
'울지마 톤즈'에 나왔던 톤즈 사람들(아프리카 미개인)이 생각난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애정에 약하다는 것

신분(身分)과 재부(財富)에 있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수준에 있는 나라(즉, 야만상태)에서는, 남녀 간의 상호간의 애정만이 결혼에서 고려되어야 할 유일한 사정이며, 그리고 이 애정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받지 않고 향유(享有)될 것으로 기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나라에서는 모든 혼인이 예외 없이 부모들에 의해 결정되며, 그리고 만약 어느 한 청년이 한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어느 여성보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또는 자신이 어떤 때 어떤 인물과 결혼해야 할지에 관해서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이 일에 대해 평생 동안 부끄럽게 생각한다.

인간애와 정중함이 존중되는 시대에는 사람들은 애정에 잘 빠지는데, 애정에 약하다는 것은 미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연약한 행위로 간주된다.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양 당사자는 성욕에 기초한 관계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함께 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남들 몰래 만날 뿐이다. 그들은 계속 각자 자기 부모의 집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공공연히 허용되고 있는 남녀의 동거생활은 거기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남자답지 못한 호색(好色) 행위로 간주된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경멸

모든 야만민족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가공할 종말(終末)에 대한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소위 죽음의 노래(the song of death)를 만든다. 이 노래는 자기가 적들의 손에 붙잡혀서 적들의 고문을 받아 죽어갈 때 부르려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고문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죽음과 고통을 극단적으로 무시하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 노래를 모든 특별한 경우에 부른다. 즉, 전장에 나갈 때에도 이 노래를 부르고, 전장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에도 이 노래를 부르며, 혹은 자신ㅇ느 이미 가장 무서운 불행을 만났을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리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큰 사건도 자신의 결심을 흔들거나 자신의 최초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른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이러한 경멸(輕蔑)은 기타 모든 야만민족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지배적이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온 흑인들은 모두, 이런 측면에서, 탐욕으로 더러워진 그들의 주인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인류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 지배권을 가장 잔인하게 행사한 것은, 저 영웅적인 아프리카 민족들을 유럽의 감옥에서 나온 쓰레기들에게, 자신이 떠나온 본국의 미덕도 자기가 찾아온 나라의 미덕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인간쓰레기들에게, 굴종(屈從)하게 만들었을 때이다. 이 인간쓰레기들의 경박함, 잔인함, 천박함은 그들에게 정복당한 자들의 경멸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한 마디 말만 남긴다고 한다

문명한 민족은 천성(天性)을 존중하고 그 요구에 따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민족은 솔직하고 개방적이고 성실하다. 반대로 야만인은 각종 격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감춰야만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위장(僞裝)하는 습관을 획득하게 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또는 아메리카의 야만민족들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의 관찰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리고 그들이 진실을 숨기려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아무리 알아내려고 해도 그들로부터 진실을 알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가장 교묘한 질문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고문을 하더라도 그들이 말할 마음이 없는 것을 고백하도록 할 수는 없다. 야만인들의 격정 역시, 비록 이 격정들이 외부로 드러나는 어떤 감정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고, 그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분(激憤)은 최고조에 도달한다. 그가 분노의 어떤 징후를 보이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그러나 그가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이를 실천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은 항상 살벌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다. 아주 작은 정도의 모욕도 그를 자포자기로 몰고 간다. 그의 용모와 말투는 정말로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며, 마음의 가장 완전한 평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흔히 매우 격렬하고 난폭하다.

북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여성이 그 어머니로부터 단지 가벼운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로 물에 빠져 자살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아무런 격정의 표현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당신의 딸은 더 이상 없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만 남긴다고 한다.

yamoo 2011-09-01 15:47   좋아요 1 | URL
우와~! 감사합니다...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도 습관이 다루어졌었군요! 이런 책을 읽지 않으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습관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오렌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색채는 물리계에서 실재하지 않는다. 색채는 태양광선의 파장이 사람의 눈에 의해 인지된 우연의 산물이다. (어떻게 보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고마운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한다.)  


색체는 실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현상들 중 하나이기에, ‘잠정적 실체’라는 특성을 띠고 있다. 이 기묘한 특성으로 인해 색채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잠정적 실체는 내 마구잡이식 표현^^)


오로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색채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곧 색채는 인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하나의 상징화된 통로였다.

그래서 색채는 이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상징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 신화, 예술, 의식 등에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색채가 지니는 상징성은 문화마다 다를지는 모르지만 그 감성적 측면은 비교적 보편성을 띤다. 예컨대 빨강은 정열, 초록은 명상, 노랑은 명상, 보라는 권위를 상징한다. 이는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연대감을 갖고 전승되어온 문화적 유산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떤 색을 좋아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실로 놀랄만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호프와 웰치라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의 성인 중 절반 이상이 위 질문에 ‘청색을 가장 선호한다’고 답변한단다.

이쯤 되면 우리는 색채의 선호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느낀다.

색채에 대한 연구는 이미 괴테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 미술가였던 조르주 쇠라에 의해 진지하게 탐구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색채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서는 거의 없는 듯하다. (출간된 책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대부분 미술, 디자인, 패션 분과에서 기능적으로 소개한 개론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색채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기호학과 미학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성과가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정도의 책이 많이 출간됐으면 한다. 번역서도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나마 오래전 번역된 <색채심리>와  올해 출간된 <색채의 역사>가 읽을만한 책인 듯하다.

비교적 최근에 색채에 대한 관심의 증폭으로 여러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상당수의 책들이 출간되고는 있지만 마케팅-심리 분야에 한정되고 있는 것 같아 좀 아쉽다.

색채에 대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말해서 무얼 하랴~ 진짜 손에 꼽을 정도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색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관련 학과도 생기고, 학제적인 연구가 풍성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재미있게 읽을 만한 색채에 대한 책들을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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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8-30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채'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고 관련책들도 많이 열거해 주셨네요.
그런데 저는 yamoo님의 글에 이런 엉뚱한 댓글이 달고 싶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yamoo 2011-08-31 19:26   좋아요 0 | URL
아, 오렌님 오랜만에 뵙네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엉뚱하지만은 않은걸요~ㅎㅎ

cyrus 2011-08-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과 관련된 책이라면 에바 헬러의 <색의 유혹>도 빠질 수 없죠. 그 책이
2002년에 나왔는데 그 책이 베스트셀러였던게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품절 상태지만요.
그 때 저도 한 번 읽어봤는데 내용은 분명 재미있었는데 그 때 중학생이 보기에는
좀 어려워서 중도에 읽다가 포기했었답니다.

yamoo 2011-08-31 19:28   좋아요 0 | URL
흠...전 그 책은 구경도 못해봤네요..보니, 품절~ 도서관에 있나 한 번 가봐야 겠어요....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으면 <바퀴벌레>책을 빌리러 가는 김에 <색의 유혹>이 있나 찾아 봐야 겠슴다~ 재밌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막 드는걸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fillnesss 2022-05-2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확장된 것이
루돌프슈타이너의 <색채의 본질>.

yamoo 2022-05-25 08:51   좋아요 0 | URL
저도 슈타이너 책이 몇 권 있는데, 색채의 본질은 없네요..ㅜㅜ
 
금각사 -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8
미시마 유키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미(美)가 명백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미로부터 소외된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금각이 나에게 결코 하나의 관념은 아니었다. 산으로 막혀 있다고 해도,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물체였다. 미는 그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눈에도 확실히 비치는 하나의 물체였다. (pp26-27)  


나는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 혹은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았다. 그것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꼭대기의 봉황도,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름답기는커녕 부조화하고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p29)

 

그토록 실망을 주었던 금각도, 야스오카에 돌아온 후 나날이 내 마음 속에서 다시 아름다움을 되살려, 어느덧, 보기 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금각이 되어 있었다. 어디가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몽상에 의하여 성장한 것이 일단 현실의 수정을 거쳐, 오히려 몽상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나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나 사물에서 금각의 환영을 좇지 않게 되었다. 금각은 점차로 깊숙히, 견고하게 실재하게끔 되었다. (p33)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도망치는 도둑이 고귀한 보석을 삼켜서 숨기듯이, 내 육체의 속, 내 조직 속에 금각을 숨겨 갖고 도망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pp 50-51)

 

내 관심은, 나에게 주어진 난문은 미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에게 작용하여 암흑의 사상을 품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p52)

 

나의 삶에는 쓰루카와의 삶과 같은 확고한 상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그가 나와 같은 독자성, 혹은 독자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을 추호도 갖지 않은 채 삶을 마쳤다는 점이었다. 그 독자성이야말로 삶의 상징성을, 즉 그의 인생이 다른 뭣인가의 비유일지도 모른다는 상징성을 박탈하고, 따라서 삶의 확대성과 연대감을 박탈하여, 항상 붙어다니는 고독을 낳게 하는 본원인 것이다. (p138)

 

미(美)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하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 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었을까? 아니면 그 자체에 있었을까? (p153)

 

나는 벌의 눈이 되어 보려고 하였다. …… 형태는 서서히 희박하여져, 무너질 듯, 떨며 전율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화의 단정한 형태는 꿀벌의 욕망을 본떠서 만든 것이며, 그 아름다움 자체가 예감을 향하여 꽃피운 것이니까, 지금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형태의 의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형태야말로, 형태도 없이 유동하는 삶의 거푸집이며, 동시에, 형태도 없는 삶의 비상(飛翔)은, 이 세상의 모든 형태의 거푸집인 것이다. (p168)

 

세계는 상대성 속에 내버려져, 시간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영원의, 절대적인 금각이 출현하여, 내 눈이 그 금각의 눈으로 변할 때 세계는 이처럼 변모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변모한 세계에서는 금각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미를 점유하며, 그 밖의 것들은 흙먼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p168-169)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不壞)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pp204-205)

 

그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 종말을 부여하는 결단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자유의 근거였다. 그토록 당돌하게 생겨난 상념이라고는 하지만 금각을 불태운다는 생각은 새로 맞춘 옷처럼 정말로 내 몸에 꼭 맞았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듯이 여겨졌다. …… 금각이 소년의 눈에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그 자체에, 이윽고 내가 방화자가 될 모든 이유가 갖추어져 있었다. (pp211-212)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니.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야만 돼.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최후의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p257)

 

하나하나의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의 예감이, 소위 금각의 주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예감은, 허무의 징조였던 것이다. 허무가 이러한 미를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미의 이러한 세부적인 미완성에는, 저절로 허무의 예감이 포함되어, 가느다란 나무로 만든 섬세한 이 건축은 영락(瓔珞)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허무의 예감에 떨고 있었다. (p265)

 

가시와기가 말한 것도 아마도 사실인 듯하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행위를 모방하려는 인식도 있다. 내 인식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행위를 완전히 무효로 만드는 것도 이런 종류의 인식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오랫동안의 주도면밀한 준비는 ‘오로지 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최후의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보아두기 바란다. 이제 행위는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잉여물에 불과하다. (pp266-267)

 

나무 사이로 수많은 불꽃이 날리어, 금각 위의 하늘은 금가루를 뿌린 듯하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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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9-0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꼭 챙겨 읽어줘야 한다고 해서 읽었어요.
근데 전 일본 문학이 제 취향이 아닌지,
남들이 말하는 꼭 챙겨 읽어줘야 할만한 의의를 생각해 볼 수 없었다는~ㅠ.ㅠ

암튼, 님의 서재에서 보니 새롭네요~^^

yamoo 2011-09-02 17:00   좋아요 0 | URL
저두 일본 문학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 멀리하고 있긴 한데요...
이 책은 모 회사 대표께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니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해서 읽었습니다. 전화로도 읽었는지 확인사살을....--;;

읽어보니, 왜 탐미주의의 최고봉이라는 찬사가 나왔는지 알겠더군요. 남대문 화재시에 읽어서 더더욱 느낌이 강렬했습니다. 특히 인물들이 금각의 서사구조를 완벽히 떠받치고 있어 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났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만..ㅎㅎ

흠...가만보니, 양철님은 웬만한 고전작품은 대부분 섭렵하신 듯합니다. 신간 위주의 리뷰 말고 고전 리뷰도 올려주세요...전 나무꾼님의 고전리뷰를 엄청 고대하는 1인이랍니다...계속, 고대 중~~~ㅎ
 

어제 sbs 정의에 대한 다큐 2부작을 보면서 한 없이 암담했다. 정말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온 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체제가 공정한 사회가 지향하는 바인가?

사회의 각종 체제가 기득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나라가 공정을 외칠 수 있는 국가인가?

2주에 걸쳐서 방영된 이 다큐는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의도한 것은 마이클 샌덜의'정의'에 대한 한국적 상황의 자기검증 이었다. 



 

 

  

방영된 사례들은 모두 비상식적이고 억울한 사건의 단면들이다. 부산 저축은행 사건, 아파트 지역 이기주의, 임용고시 축소 1인 시위 노량진녀, 미국에서 대박을 터뜨린 청년 벤처 사업가, 소상인을 죽이는 대형마트의 행태, 대기업으로 인해 공장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재래김 사장님 등.

이들 사례들을 통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행태가 만연한 사회인지 고발하고 있다.

특히 2부에서 보여주는 사례들은 자본주의 해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위 덩치가 산만한 형님이 쪼그만 동생이 먹는 아이스크림까지 홀랑 빼앗아 먹는 사회. 이게 바로 2011년 8월 대한민국이 보여주고 있는 풍경이다.

소위 '근본있는(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이 근본 없는 사람들의 기회까지 빼앗아 가고 있다. 하지만 정말 통탄할 노릇은 이것을 감시할 국가의 감시체제가 근본있는 놈들에게 봉사하도록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완전히 힘이 지배하는 사회.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라는 표현이 교과서에만 있는 딴다라 상황인줄로만 알았는데, 그 현실을 완벽히 구현하고 있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수십억을 들여 초일류 기술을 개발한 중소기업 사장님. 그 원천 기술의 개발은 사장님의 하루하루의 집념과 성실의 열매였다. 하지만 대기업 농간에 하루 아침에 사업체와 전 재산을 잃었다. 법에 호소해 봤지만 싸울수 있는 링에 오를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대기업이 서류조작으로 소송 자체를 사전에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고대 의대 동기 여대생을 집단 강간하고, 사진까지 찍은 의대생 3명. 이들의 부모는 피해자에게 '너 때문에 우리 아들 앞길을 망쳤다'망언을 서슴없이 퍼부었다고 한다. 죄를 짓고도 큰소리 뻥뻥쳐대는 가해자의 부모들은 로펌 고위관계자를 비롯한 소위 '근본있는 놈들' 이었다. 이들은 법조계의 인맥을 동원해 가해자에게 불리한 조건과 상황들을 원천봉쇄하고 피해자가 법의 링에 오를 수 조차 없게 했다. 피해자는 병원에서 나날이 정신이 쇄약해져 가고 있다.

이 두 사례는 몇 달 전, 삼성 전자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아들 때문에 삼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과 그 구조가 완벽히 일치한다. 이 부모가 소송을 제기하고 이 사건을 이슈화 시킨 의도는 비슷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은 시도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같은 피해는 계속되고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감시 시스템은 계속 눈을 감고 있다.

중소기업 사장님과 강간 피해 여학생 그리고 삼성에 아들을 잃은 부모는 모두 돈이 없고 빽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사회의 기득권층에게 피해를 입었고, 이 부당을 국가 감시체계에 호소했지만 감시체계가 사회 기득권층에 의해 무력화된 사례다.

프로그램 말미의 사례는 국가가 '근본있는' 놈들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하나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 도미한 기자출신이 운영하는 국가비밀정보제공 사이트. 이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분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위계층이 수십년 전 외국으로 빼돌린 재산이 어마어마 하단다. 그 자신도 매우 놀랐다니, 액수가 천문학적인가 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든지 수집할 수 있는 공개된 정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이를 발견하기는 매우 쉽다고 한다. 문제는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의지의 문제라고. 결국 '근본있는'놈들의 불법은 눈감아 주는 것이 국가감시체계였다.

위 중소기업 사장님과 재래김 공장 사장님은 마지막에 울먹이면서 말했다. 공정한 사회체제를 믿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살았는데 그 댓가로 나에게 돌아온 것은 절망이었다고. 이 사실이 미끼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변호사 박원순은 인터뷰에서 기득권 층이 의도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재기하지 못할 정도의 패널티가 가해져야 하는데, 그런 제도가 없으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고.

다큐를 보는 내내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지표들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내가 TV화면을 통해서 본 대한민국의 모습은 조폭국가와 다르지 않았다. 현대입헌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각종 불의한 차별로부터 국민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제11조 제1항(평등권)과 제34조 제1항(인간다운 생활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헌법 조항이 제대로 해석되고 기능하지 않는 국가라면 조폭국가라 불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1998년 지만원은 한국 사회의 각종 문제점을 지적하는 <국가개조35제>, <시스템을 통한 미래경영>을 출간하고 2000년<한국호의 침몰>등 여러 사회비평서를 출간한 바 있다. 특히 <한국호의 침몰; 이대로가면 망한다>의 요지는 공정하지 않은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정도 이다.

지금 지만원을 언급한 이유는 책에서 지적한 '상식을 벗어난 체제들'이 현재도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며, 여기에 더하여 '근본없는' 자들이 활게칠 수 있게끔 체제가 길을 열어주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진짜 위로부터 변하지 않는 이상 조폭국가는 지속될 것이며, 아마도 재수없으면 살아 생전에 진짜 '침몰하는 한국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헌법 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 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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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2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가진 자의 세상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가지려고
이렇게 발버둥치나 봅니다...... 아, 몸살약 먹어야겠어요, 지난번에 먹고 남은. ㅠㅠ

yamoo 2011-08-29 22:15   좋아요 0 | URL
이거 보면서 디게 열받았다는..--;;

아뉘, 몸살걸리셨나보군요! 감기는 초기에 확~ 잡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