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실동 사람들』은 우리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교육이란 주된 테마를 위주로 이 교육에 얽혀 있는 여러 모습들을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가 바르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독특한 표현방법으로 말이다. 이 소설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각 단락의 화자로 등장한다. 일견 상관없을 듯싶은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결국엔 우리의 일그러진 교육 욕망을 고발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에 목숨 거는 모습이 기가 차지만, 오늘 우리들의 모습임에 마음이 무겁다.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모습들은 모두 우리들의 모습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음에도 남들이 하는 사교육에 따라가야만 하는 수정의 모습이 수정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지나친 사교육의 압박에 머리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리고 내가 지나친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면서도 애써 이렇게 해야만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모습이 유미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서도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아이가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친구들의 스케줄을 전부 외워놓고 끝나는 시간이 오면 달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교육 방침에 회의를 느껴야만 하는 게 과연 희진 만의 모습일까?

 

작가는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교육의 병든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을 경주마로 표현하며, 자녀들을 수많은 학원으로 내모는 부모의 모습을 베팅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건 게임이야. 아니, 경마라 해야 더 정확하겠다. ... 부모와 일가친척들이 자식이라는 경주마에게 엄청난 돈을 베팅하는 거지. 이 베팅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돼. 아니다, 요즘엔 그 연령대가 더 낮아진 것 같아. ... 베팅엔 여러 종류의 자본이 들어가. 돈은 물론이고 부모의 시간, 정보력, 노동력, 사교력, 여가까지. 최근 몇 년 동안엔 경마 판에 등장하는 관계자들의 다양화가 일어나면서 그들 사이에 자리싸움과 분파, 합종연횡 현상이 숨 가쁘게 일어났어. 그러면서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사설 학원이 대표적인 관계자고, 출판사, 교재 전문가, 시험 출제위원, 광고대행사, 학원 광고를 받아서 먹고사는 신문사, 그 신문사 기자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정치인...”(122-3쪽)

 

우리사회의 사교육병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작가는 이처럼 진단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진 자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선 사교육이 더욱 활성화 되어야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베팅이란 것은 큰 손이 이길 수밖에 없기에. 가진 자들의 사교육을 따라가려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가지랭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기에.

 

또한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생존이란 문제 앞에서 정도를 포기하는 자들의 몸짓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서영이란 친구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몸을 판다. 정도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또한 실력은 있지만 스펙에서 밀려, 결국 자신의 이력을 허위로 조작해야만 했던 승필의 모습, 역시 정도를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정도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그 몸짓이 오히려 애처롭고, 마음 한켠에서는 이들이 잘되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반면, 자신들의 자존심을 위해, 허영심을 위해 정도를 포기하는 자들의 몸짓도 있다. 이들의 모습도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해성엄마 장유미와 태민엄마 심지현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 난 자존심 회복을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담임선생을 몰아세운다. 학부모들을 선동하여 등교거부를 하게 한다. 이런 이들의 몸짓 역시 정도를 벗어난 모습이며, 이런 이 몸짓은 역겨움과 분노를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이 과연 그들만의 모습일까? 우리 역시 교양 있는 듯 행동하다가도 내 자존심이 상처받게 되면, 이처럼 행동하지는 않는가?

 

아무튼 마음 무거운 소설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빗나간 교육의 욕망을 잘 그려내고 있는 좋은 소설임에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래가 보고 싶거든 -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만 들리는 대답
줄리 폴리아노 글, 에린 E. 스테드 그림, 김경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참 예쁜 그림책이랍니다. 그림도 예쁘고 내용도 예쁘답니다. 무엇보다 간절한 바람, 꿈, 소망 등을 이야기하고 있답니다. 고래가 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이야기합니다.

 

예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고래가 보고 싶니?

그렇다면 창문이 있어야 해.

그리고 바다도.

 

맞아요.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을 향한 통로가 열려야 한다는 거겠죠. 수많은 꿈을 품고 있다 하지라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면, 그 꿈은 꿈이 아닌 망상에 머물 수 있답니다. 그렇기에 먼저, 세상을 향한 창문이 있어야 하고, 그 창문이 열려야 한답니다.

 

그 다음엔 마땅히 바다가 있어야 하고 말이죠. 전 이 구절을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조건 내지 상황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고래가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고, 그 고래를 보기 위해 세상과 소통하며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 장소가 깊은 산 속이라면. 그렇다면 고래를 만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태풍에 바다의 고래가 산으로 날아온다면 모르지만요. 이런 일은 현실에서는 극히 불가능하겠죠?

 

아무튼 우리에게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조건들을 하나하나 갖춰나가는 바다가 있어야겠네요.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상황을 지배하는 능력도 갖추고요.

 

사실 이 그림책이 고래를 보기 위해 강조하는 내용은 따로 있답니다. 그건 고래를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다른 것들에 한 눈 팔지 않는 거랍니다.

 

고래가 보고 싶니?

그렇다면 장미 같은 건 모르는 척해야 해.

 

이런 식으로 장미에게도, 바다에 떠 있는 배에게도, 펠리컨에게도, 조그만 초록색 벌레에게도,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에게도, 밝게 빛나는 태양에게도, 한 눈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네요.

 

그래가 정말 보고 싶니?

그렇다면 바다에서 눈을 떼지 마.

 

오직 고래를 보길 원하는 그 소망을 품고 바다에서 눈을 떼지 말라 하네요. 맞아요. 우리가 이루길 원하는 꿈이 있다면, 그 꿈을 향해 나아가며 한눈팔아선 안 되겠죠.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여도, 지금 당장은 많은 것을 놓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라도, 내 안에 꽉 찬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기다림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죠. 그럴 때, 어느 순간엔가 고래가 눈앞에 나타날 테니 말이죠.

 

우리가 원하는 소망이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그러나 또 한편 반대로 생각도 해봅니다. 과연 고래를 보기 위한 소망, 간절한 바람 때문에 장미의 향기와 아름다움,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바라보는 즐거움, 펠리컨의 멋진 모습, 조그마한 초록색 벌레의 꼬물거림이 주는 신비함,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이 주는 상상력, 밝게 빛나는 태양이 주는 환희 등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을요. 어쩌면 그것들이 고래를 보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선택은 우리의 몫이겠죠. 고래를 선택할지, 아님 다른 행복, 다른 꿈, 다른 바람을 선택할지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퍼 영웅 변신 페인트 스콜라 어린이문고 14
호콘 외브레오스 지음, 외위빈 토르세테르 그림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이 동화 『슈퍼 영웅 변신 페인트』는 크게 두 가지 줄기를 가진 이야기랍니다. 바로,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이후의 그리움, 동네 형들의 괴롭힘과 여기에 맞서는 용기를 이야기하고 있답니다.

 

루네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루네에겐 이 일이 그리 슬프지 않답니다. 루네가 아직 어려서일까요?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정확히 다가오지 않나봅니다. 이처럼 할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아이의 감정 상태를 이 동화는 잔잔하게 그려냅니다. 물론, 여러 사건들을 통해, 루네는 할아버지를 추억해내고(물론 동화 속에서는 죽은 할아버지를 만나는 전개랍니다), 할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갖게 된답니다. 아마도 죽음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의 심리 상태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네요.

 

또 하나 이 동화의 커다란 줄기는 동네 깡패 녀석들의 괴롭힘입니다. 이들은 루네와 루네의 친구 아틀레가 함께 지어놓은 오두막을 부순답니다. 나이가 어린 루네와 아틀레는 당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루네는 어느 날 멋진 결심을 한답니다. 슈퍼영웅을 불러내는 거죠. 그리고 이 슈퍼영웅은 루네 자기 안에 있답니다.

 

이 일을 위해 루네는 갈색 망토를 매고, 갈색 마스크를 하죠. 엄마의 갈색 벨트도 하고요. 여기에 갈색 페인트 통을 들고, 못된 녀석들의 자전거 하나를 온통 갈색으로 칠해 복수한답니다. 이렇게 복수한 슈퍼영웅은 바로 ‘브루네’랍니다. 갈색이란 뜻의 노르웨이어 ‘브룬’과 루네의 이름을 합한 거죠. 슈퍼영웅 브루네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브루네의 활약에 친구 아틀레 역시 그 안에 잠든 영웅을 부른답니다. 그 영웅의 이름은 ‘스바틀레’고요. 노르웨이어로 검은색은 ‘스바트’라고 한다네요. 여기에 아틀레의 이름이 합해진 거고요. 그러니, 아틀레가 자기 안에서 불러낸 영웅이 사용하는 페인트 색이 무슨 색인지 알겠죠?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답니다. 이제 루네와 아틀레의 친구인 여자아이 오세 역시 자기 안의 영웅을 불러 함께 한답니다. 이 영웅의 이름은 ‘블로세’고요. 노르웨이어로 파란색이 ‘블로’라네요. 그러니 블로세가 사용하는 페인트가 무슨 색인지 짐작 가죠?

 

이렇게 세 명의 영웅은 동네 깡패들과 맞서게 된답니다. 이들의 짜릿한 복수, 그리고 그 용기가 참 재미난 동화랍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힘이 없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못된 모습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죠?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이 당연시되면 안 되겠죠? 세 명의 슈퍼 영웅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 역시 내 안에 있는 슈퍼 영웅을 불러본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한 곳,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바뀔 텐데 말입니다.

 

참, 이 책에서 또 하나의 음성을 듣게 된답니다. 그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동네 깡패 녀석들 중엔 ‘목사 아들’이 끼어 있답니다. 작가가 일부러 거듭 이렇게 ‘목사 아들’의 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 아들 편에서 아이들에게 다가서는 목사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지네요. 종교가 본질을 놓치게 되면, 그저 하나의 집단에 불과하고, 성직자는 그저 하나의 직업에 불과할 뿐이란 것을 말이죠.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자주 접하지 못하는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것이랍니다. 이것도 소소한 선물이 될 수 있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소리 로봇 맛있는 책읽기 34
김아로미 글, 김은경 그림 / 파란정원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동화 『잔소리 로봇』은 우리 아이들의 자발적이지 못한 모습을 고발하고 있답니다. 물론 예쁘게 고발하고 있죠.

 

지민이는 학교공부도 잘하고, 독서토론 발표도 잘한답니다. 그런데, 자발적이지 못하네요. 모든 일들을 엄마가 계획하고 알려준답니다. 그것이 바로 엄마의 잔소리죠. 그리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적은 수첩은 바로 ‘잔소리 노트’가 되고요. 이 ‘잔소리 노트’에는 지민이가 해야 할 일이 모두 적혀 있답니다. 그 중요성에 따라 별표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요. 심지어 독서토론 발표마저 엄마가 작성해주기도 하네요.

 

이 책 제목인 『잔소리 로봇』은 바로 이런 지민이를 가리킨답니다. 엄마의 잔소리에 그대로 로봇처럼 반응하고, 해내는 모습을 빗댄 거죠. 마치 엄마가 잔소리 리모콘을 가지고 누르는 대로 그대로 행동하는 지민의 모습이 마치, “잔소리 로봇”같다는 거죠.

 

반면 한율이는 엉뚱하기도 하고, 때론 부산스럽기도 하지만, 알고 보니 모든 일을 자신이 스스로 하는 아이랍니다. 한율이의 부모님은 한율이가 스스로 일을 해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분들이랍니다. 그래서 한율이는 때론 실수도 한답니다. 지금 당장은 지민이보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율이의 모습이 훨씬 멋지게 느껴지네요. 과연 지민이는 계속하여 『잔소리 로봇』에 머무르게 될까요?

 

언젠가 읽은 교육전문가의 책을 보니, 오늘 젊은 세대들은 뭔가 일을 맡겨두면 굉장히 잘 한데요. 그런데, 아무것도 맡겨두지 않으면 뭘 해야 할지 몰라 한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엄마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끌었기 때문이라네요. 심지어는 장래 희망까지도 엄마의 바람이고, 꿈이죠. 그 엄마의 꿈을 향해 아이는 열심히 달려갈 뿐이고요. 그래서 맡겨진 일은 잘 해낸대요. 엄마의 바람처럼 지민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해내는 것처럼 요.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누가 문제일까요? 무엇보다 부모가 문제 아닐까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기 전부터 부모가 아이들을 그렇게 길들였으니 말이죠. ‘잔소리 로봇’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요. 그저 시키는 것, 별 말썽 부리지 않고 잘 해낸다고 좋아하며 말이죠.

 

이 동화 속에서의 지민이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반성하게 된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변하게 되죠.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행운이 있길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이제 그만 아이들을 향한 리모콘을 내려놓았으면 좋겠고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정원 2015-03-1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이 책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는 제11회 세계문학상 대상작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어쩌면 이런 꼬리표만으로도 이 책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싶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작가의 이력이 더 관심을 끈다. 작가인 김근우 씨는 판타지 소설을 쓰던 분이다(『바람의 마도사』의 작가다). 그러니 흔히 말하는 장르소설 작가였다는 거다. 물론, 장르소설과 본격문학소설의 구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경중을 누가 정할 수 있겠느냐만, 통상적으로 장르소설 작가들을 높게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이력을 가진 작가가 당당하게 본격문학 소설에 도전하여, 이처럼 대상을 거머쥐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여기에 더하여 작가의 신체적 장애로 인한 학력부분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 신경계이 이상으로 제대로 걷지 못한 작가는 아홉 번의 수술에도 중2때 건강이 허락지 않아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여전히 학벌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서 중2중퇴라는 학벌을 가진 작가의 대상수상을 우린 ‘인간승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작가의 쾌거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어떨까? 우선 제목이 심상치 않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라니, 어찌 이런 괴상한 제목이 있을 수 있을까?

 

내용은 이렇다. 한 노인은 자신이 자식처럼 사랑하던 고양이와 산책을 나갔다가 한 오리에게 고양이가 잡아 먹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원수 같은 오리를 잡기 위해 사람을 산다.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대신하여 산책을 나갔던 불광천을 걸으며, 오리들의 사진을 찍어오게 하는 것.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고용되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다. 남자1, 여자1, 꼬마1이 그들이다.

 

‘남자’는 한 때 장르소설로 인기를 얻었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책을 출간해주지 않는 삼류작가다. 전 재산 4,264원이 전부인 그는 하루 일당 5만원을 준다는 전단지를 보고 이 황당한 일에 고용된다.

 

‘여자’는 평범한 증권회사 직원이었지만, 회사의 어려움과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된 후에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빈털터리가 되고 자신이 그토록 떠나길 원했던 은평구로 다시 기어들어온 실패자다.

 

그리고 꼬마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손자로 아버지와도 할아버지와도 관계가 깨어진 아이다.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그 일을 하는 맹랑한 녀석이다.

 

노인은 하루 일당 5만원 외에도 성공수당 천만 원을 내걸었는데, 그건 바로 그 못된 오리인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잡았을 경우의 성공수당이다. 이들은 과연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을 수 있을까?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라는 다소 황당한 사건, 그 사건을 추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 ‘경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의 삶에 대한 질문, 장르소설과 본격문학소설의 경계는 무엇인가? 어쩌면 경계를 확연하게 지으려는 시도야말로 소설답지 않고,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냐는 반문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작가는 여전히 ‘진짜’글을 쓰고자 하지만, 과연 ‘진짜’글과 ‘가짜’글의 ‘경계’는 무엇일까?

 

소설 속의 ‘남자’는 ‘레인보우 다리’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진다. 한글도, 영어도 아닌 짬뽕, 그 경계가 모호한 이런 다리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여자’는 말한다. “어째 소설가답지 않은 사고방식인데요? 과학자적 사고방식 아녜요? 모호하면 모호한 대로 괜찮던데 뭘.”(264쪽)

 

‘진짜’글과 ‘가짜’글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모호한 대로 괜찮지 않을까라는 여전히 ‘진짜’글을 쓰고 싶은 저자의 고백이 아닐까?

 

무엇보다 ‘경계’가 모호한 것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쫓는 이들은 생각한다. 그 ‘오리’는 거짓, 즉 가짜라고. 그렇기에 ‘가짜’의 ‘가짜’를 만들어 노인에게 제시하자고 말이다. 가짜의 가짜는 진짜이기 때문이란다. 여기에서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나중에는 이들은 호순이(오리에게 잡아먹힌 노인의 고양이)가 죽지 않았다고 여기며(호순이가 죽었다는 노인의 말이 가짜라는 것), 진짜 호순이를 찾는다. 하지만, ‘진짜’ 호순이를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 ‘가짜’ 호순이를 찾는다. 결국에 이들은 노인에게 처음엔 ‘가짜’ 호순이를, 그 다음엔 ‘가짜’ 오리를 ‘진짜’인 양 내놓는다. 하지만, 노인은 이들이 모두 ‘가짜’임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노인의 집에서 ‘진짜’가 된다.

 

또한 노인과 아들의 관계도 가짜다. 이들의 부자관계는 ‘진짜’다. 하지만, 이미 둘 간의 관계가 깨어졌기에 ‘가짜’다. 반면, 노인과 남자, 여자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 만난 ‘가짜’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니 이들은 ‘진짜’가 된다.

 

그렇다면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질문해 본다. 여전히 모호하다. 어쩌면 그 ‘경계’를 찾아 떠나는 우리 삶의 모험만이 ‘진짜’가 아닐까?

 

“수많은 가짜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일은 도전이고 투쟁일수밖에 없다. 수많은 진짜 속에서 가짜를 찾아내는 일 또한 도전이고 투쟁일수밖에 없다. 도전이고 투쟁일수밖에 없는 것은 또한 모험일수밖에 없다.”(148쪽)

 

모르겠다. 괜히 ‘경계’로 정리하려 했나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암튼 이 소설, 재미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