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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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는 제11회 세계문학상 대상작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어쩌면 이런 꼬리표만으로도 이 책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싶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작가의 이력이 더 관심을 끈다. 작가인 김근우 씨는 판타지 소설을 쓰던 분이다(『바람의 마도사』의 작가다). 그러니 흔히 말하는 장르소설 작가였다는 거다. 물론, 장르소설과 본격문학소설의 구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경중을 누가 정할 수 있겠느냐만, 통상적으로 장르소설 작가들을 높게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이력을 가진 작가가 당당하게 본격문학 소설에 도전하여, 이처럼 대상을 거머쥐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여기에 더하여 작가의 신체적 장애로 인한 학력부분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 신경계이 이상으로 제대로 걷지 못한 작가는 아홉 번의 수술에도 중2때 건강이 허락지 않아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여전히 학벌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서 중2중퇴라는 학벌을 가진 작가의 대상수상을 우린 ‘인간승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작가의 쾌거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어떨까? 우선 제목이 심상치 않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라니, 어찌 이런 괴상한 제목이 있을 수 있을까?

 

내용은 이렇다. 한 노인은 자신이 자식처럼 사랑하던 고양이와 산책을 나갔다가 한 오리에게 고양이가 잡아 먹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원수 같은 오리를 잡기 위해 사람을 산다.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대신하여 산책을 나갔던 불광천을 걸으며, 오리들의 사진을 찍어오게 하는 것.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고용되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다. 남자1, 여자1, 꼬마1이 그들이다.

 

‘남자’는 한 때 장르소설로 인기를 얻었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책을 출간해주지 않는 삼류작가다. 전 재산 4,264원이 전부인 그는 하루 일당 5만원을 준다는 전단지를 보고 이 황당한 일에 고용된다.

 

‘여자’는 평범한 증권회사 직원이었지만, 회사의 어려움과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된 후에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빈털터리가 되고 자신이 그토록 떠나길 원했던 은평구로 다시 기어들어온 실패자다.

 

그리고 꼬마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손자로 아버지와도 할아버지와도 관계가 깨어진 아이다.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그 일을 하는 맹랑한 녀석이다.

 

노인은 하루 일당 5만원 외에도 성공수당 천만 원을 내걸었는데, 그건 바로 그 못된 오리인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잡았을 경우의 성공수당이다. 이들은 과연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을 수 있을까?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라는 다소 황당한 사건, 그 사건을 추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 ‘경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의 삶에 대한 질문, 장르소설과 본격문학소설의 경계는 무엇인가? 어쩌면 경계를 확연하게 지으려는 시도야말로 소설답지 않고,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냐는 반문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작가는 여전히 ‘진짜’글을 쓰고자 하지만, 과연 ‘진짜’글과 ‘가짜’글의 ‘경계’는 무엇일까?

 

소설 속의 ‘남자’는 ‘레인보우 다리’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진다. 한글도, 영어도 아닌 짬뽕, 그 경계가 모호한 이런 다리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여자’는 말한다. “어째 소설가답지 않은 사고방식인데요? 과학자적 사고방식 아녜요? 모호하면 모호한 대로 괜찮던데 뭘.”(264쪽)

 

‘진짜’글과 ‘가짜’글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모호한 대로 괜찮지 않을까라는 여전히 ‘진짜’글을 쓰고 싶은 저자의 고백이 아닐까?

 

무엇보다 ‘경계’가 모호한 것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쫓는 이들은 생각한다. 그 ‘오리’는 거짓, 즉 가짜라고. 그렇기에 ‘가짜’의 ‘가짜’를 만들어 노인에게 제시하자고 말이다. 가짜의 가짜는 진짜이기 때문이란다. 여기에서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나중에는 이들은 호순이(오리에게 잡아먹힌 노인의 고양이)가 죽지 않았다고 여기며(호순이가 죽었다는 노인의 말이 가짜라는 것), 진짜 호순이를 찾는다. 하지만, ‘진짜’ 호순이를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 ‘가짜’ 호순이를 찾는다. 결국에 이들은 노인에게 처음엔 ‘가짜’ 호순이를, 그 다음엔 ‘가짜’ 오리를 ‘진짜’인 양 내놓는다. 하지만, 노인은 이들이 모두 ‘가짜’임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노인의 집에서 ‘진짜’가 된다.

 

또한 노인과 아들의 관계도 가짜다. 이들의 부자관계는 ‘진짜’다. 하지만, 이미 둘 간의 관계가 깨어졌기에 ‘가짜’다. 반면, 노인과 남자, 여자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 만난 ‘가짜’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니 이들은 ‘진짜’가 된다.

 

그렇다면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질문해 본다. 여전히 모호하다. 어쩌면 그 ‘경계’를 찾아 떠나는 우리 삶의 모험만이 ‘진짜’가 아닐까?

 

“수많은 가짜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일은 도전이고 투쟁일수밖에 없다. 수많은 진짜 속에서 가짜를 찾아내는 일 또한 도전이고 투쟁일수밖에 없다. 도전이고 투쟁일수밖에 없는 것은 또한 모험일수밖에 없다.”(148쪽)

 

모르겠다. 괜히 ‘경계’로 정리하려 했나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암튼 이 소설,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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