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귀여우신 방년 4세(아니, 만 나이로 하면 3세) 둘째는 요즘 걱정이 많다.
집에 괴물, 마녀, 악당 등등이 올까봐 걱정이고, 꿈에 나올까봐도 걱정인데,
엊그제는 "나 안 클 거야, 절대 안 클 거야, 계속 네살 아기로 살거야아아아"
하며 울어제끼는 거였다. 세살 때는 자기 아기 아니라고 빡빡 우기더니,
네살에는 항상 자기 아기라며, 아기 동물 흉내를 내는데..
이게 언제까지 가랴 싶었는데 지금 피크를 찍는 것 같다 ㅋㅋ
왠지 자라면 누나처럼 스스로 해야하는 일이 많아지고, 어리광을 부리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건지.
유치원 다닐 생각에 두려움이 있는 건지, 이 녀석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아무리 커도 엄마아빠한테는 귀여운 아기다"라는 말로 달래주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은 무게를 떠안는 일이다.
내 밥벌이를 해야할 뿐 아니라, 생활을 위해 필요한 온갖 잡일을 해야 하고, 공과금 납부라든가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잊지 않고 처리해내야 한다. 그런 책임에 지나치게 힘들어하지 않고, 인생의 방향을 잡고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양육자의 임무가 아닐까.
어른들이 다 해주던 세수, 양치, 밥 먹기, 옷 입기를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듯이,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한 능력과 마음가짐(모아서 '돌봄능력'이라고 해볼까)을 나이와 특성에 맞게 발전시켜 주기.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해보는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고, 너무 과한 부담이 한꺼번에 오지 않도록 적절히 조정해가며 좌절을 견디는 힘도 키워주기.
그러나 인생이 던져주는 갑작스런 시련 앞에서, 개인의 돌봄능력만으로는 힘에 부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사회가 지지해줘야 한다. 사회가 내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어두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같이 있던 친구 2명이 사망한 참극. 그 기억만으로 힘들 터인데, 죽은 친구들에게 "연예인 보러 갔다가 죽은 거 아니냐"고 던지는 댓글들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 시의원이라는 사람은 "나라 구하다 죽었냐"며 막말을 쏟아냈다는 기사도 보았다. 연예인을 보러 갔든, 춤을 추러 갔든 술을 마시러 갔든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그러면 사고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인가? '무구한 피해자'라는, 성범죄에서 적용되던 기준이 이런 사고에까지 확장되는 것인가? 3년 가까운 팬데믹을 지나는 동안 이 청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오랜만에 하는 축제에 얼마나 들떴을지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픈데.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시의적절한 안전조치만 취해졌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를 당했을 뿐이다.
생존자 고등학생에게 사회가 한 마음으로(물론 한 마음같은 건 안 될 테고 와중에도 악플러는 반드시 있겠지만) 함께 애도하고 회복을 응원해주었다면, 그가 이런 선택을 했을까. 참담하기 그지없다.
<토지> 11권에서도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다. 복동네가 양잿물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복동네, 그녀는 누구인가. 그네의 생은 참 기구하다. 아이 없이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고, 남편도 아이도 없는데 시부모를 부양하며 함께 살며 효부 소리를 들었다. 어느 해 지독한 흉년이 들어, 복동네는 다만 보리 한말이라도 얻기 위해 친정에 간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앓아눕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 돌아와 보니, 시어머니는 굶어 죽었고 시아버지(서서방)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 겨우 시아버지를 살려냈으나, 정신이 나가버린 이 자는 "시어미를 굶겨 죽인 며느리가 해주는 밥은 먹기 싫다"며 동네방네 구걸을 다닌다.
복동네는 아이를 입양하며 애지중지 키워 장가까지 보내는데(그 사이 언젠가 시아버지는 사망), 친어미가 아니라고 그러는지 아들도 며느리도 그녀를 괄시한다. 그런 사실이 동네에 소문날 정도. 그렇게 속상하게 살고 있는 복동네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으니, 바로 "삼수놈(조준구에게 붙었다가 배신하려 했다가 다시 붙어 한몫 잡아보려다 조준구에게 팽 당해 죽은 그 삼수!)과 복동네가 붙어먹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진 것이었다. 뒤늦게 소문을 알게 된 복동네가 출처를 따져보니 심술쟁이 봉기가 범인. 봉기에게 가 따졌으나 소용 없고, 아들 며느리조차 의심하는 상황에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럼 봉기는 대체 왜 그랬는가? 오래 전, 봉기의 딸 두리는 삼수놈에게 강간을 당한 바 있다. 봉기 내외는 딸 신세를 망치지 않기 위해 쉬쉬 하며 숨기고 두리를 시집보냈다. 그런데 "삼수놈이 수수밭으로 두리를 끌고 가 욕보였다"는 말을 누군가 했고, 그게 봉기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말은 복동네 며느리에게서 나왔는데, 봉기가 찾아가 어디서 들었냐 닦달을 하자 자기 시어머니 복동네에게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이에 봉기는 자기 딸 두리가 당한 일을 덮기 위해, 복동네에게 "니가 쌀 몇말 얻자고 삼수놈이랑 붙어먹어 놓고 내 딸에게 뒤집어 씌우느냐"고 지랄을 한 것이었다.
이 사연을 복동네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마당쇠댁네가 복동네의 죽음 후 야무네에게 이 말을 전하고, 분개한 아낙들은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간다. 결국 해결사를 자처한 석이(조준구 때문에 죽은 한조의 아들로, 물지게꾼을 하며 어렵게 살다가 이상현 등의 도움으로 공부하여 선생이 되었다)가 봉기에게 찾아가, 딸의 일이 알려지길 원치 않으면 복동네의 출상날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지어낸 내용대로 자복하라고 협박한다. 울며 겨자먹기로 봉기는 그 말에 따르는데, 본성이 어디가는지, 마무리에 결국 "말 몇마디에 죽는 사람이 어디 있나? 너희들은 꾸며낸 말 한 적이 없단 말이냐?"며 펄펄 뛰고, 이에 성난 사람들이 그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박경리 선생님의 예리한 통찰에 의하면, 복동네의 소문이 돌 적에 뒤에서 입방아를 찧으며 동조했던 사람일수록 더 화를 내며 돌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석이는 씁쓸해하며, 개미가 무너진 굴에서 알부터 찾아 옮기는 것처럼, 제자식 지키려는 봉기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사태의 핵심은 결국, '강간 피해자가 되려 피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던', '강간당한 사실이 알려지면 신세 망치는 꼴이 되었던' 그 시대 부당한 인식에 있다. 그에 더하여, 과부인 복동네의 죽음에 슬퍼하며 같은 과부로서의 처지를 울며 하소연하는 마당쇠댁네의 말이 뼈아프다.
임자가 있었다면 갬히 누가 그런 말을 했겄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서 그리 애발스럽게 살라고 나부대었는고. 참말이지 남의 일 같지 않소. 혼자 사는 것도 뼈가 저리게 설운데, 이놈의 세상, 머릿기름 한번 바를라 캐도 남의 눈치보고, 옷 한번 갈아입을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면 또, ..아휴.. 남정네를 보면 마주칠까 길을 돌아가고, 이것저것 귀찮아서 남을 피하고 살면 신들맀다 카고, 말도 많고.. 아이고.. 과부 팔자.. 죽일놈 살릴놈 해도 가장같은 그늘이 또 어디 있겄소.
(...) 우짜다가 이웃이라꼬 안쓰러워 하믄 남의 남정네기 때문에 고마우면서도 모른척 하고, 마구잡이로 나오면은 임자 없는 탓이려니,, 안 그렇습니까 야무어매?
(...) 여자끼리는 어떻고요. 같은 여자믄서, 아이고.. 제 임자 누가 뺏아갈까 봐서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어림없는 것을 두고 그럴 때는 이 오장이 틀어져서 속앓이를 한다카이.. 덮어놓고 헐뜯고 몹쓸년을 만들어놔야 맴이 놓이는가. 누가 어쨌기에, 가만히 있는 사람을.. 아이고.. .
- <토지> 11권(3부) 14장 자살 중(오디오북 발췌)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함께 결혼했어도 남편을 잃은 과부에 대한 모난 시선과 차별 대우, 툭하면 쉽게 헐뜯기 만만한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가부장제의 당연한 전략이다. 그래야 마당쇠댁네의 말처럼, "죽일놈 살릴놈 해도 가장같은 그늘이 또 어디 있겠냐"며 가장을 떠받들며 살지 않겠는가. 또 시집을 못 갈까봐 강간당해도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지 않겠는가.
남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만만한 과부의 스캔들이라니 떠들기 좋았겠다. 그러다 복동네가 자살하니 양심의 가책을 한번에 평소에도 미운 짓 골라하던 봉기에게 쏟아내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복동네가 어디 마음이 "굳건하지" 못하여 자살에 이르렀을까? 한많고 서러운 과부생활에, 시아버지의 패악을 건디며, 입양한 아들을 키워 내며, 아들과 며느리의 괄시도 견뎌내던 사람이 거짓소문에 무너진 것은, 그녀를 지탱해주던 기반 자체가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절을 지키며 살아온 인생에 대한 모욕도 모욕이려니와, 그 인생을 아무도 인정하고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절망, 그것이 결정적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더 굳건했으면" 이라는 국무총리의 발언은 개인의 주체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근대적 주체'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에서, 모든 걸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발상은 쉽고 편하다. 악플에 시달리다 자살에 이른 여러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아무리 악플러들이 달려들어 한 사람을 물어뜯어도 개인이 스스로를 믿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된다고, 그러니 그 개인이 무너진다 한들 정부와 사회에는 책임이 없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조직이, 제도가, 정책이, 사회 운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남은 생존자들이 '굳건해 질 수 있도록' 이제는 비방의 말과 댓글을 삼가고 조용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