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슬럿>, 이 책을 내가 어디에서 봤더라. 신간 소개였나? 새로나온 책을 훑어보다가 보았나? '젠더의 언어학'이라는 흥미로운 부제 때문에 궁금했다. policeman 같은 단어가 경찰을 모두 남성으로 전제하므로, police officer이라는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우리 말 중에도 '시댁'을 '처가'와 마찬가지고 '시가'라고 부르자는 등의 페미니즘에 기초하여 언어에 숨겨진 불평등을 고민하고 바꾸려는 주장과 움직임은 보아온지 꽤 됐지만, 언어학자가 본격 분석한 젠더 언어학이라니? '비록' 영어에 관한 것이지만.. 대단히 흥미롭지 않은가. 게다가 옮긴이는 이민경 작가다. 



언어와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다. 언어는 언제나 권력 구조와 사회규범을 반영하고 그것을 강화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늙은 백인 남자들은 문화를 너무 오래 다스렸고, 언어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소통되는 매개체다. 그렇기에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도전하고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살필 시간이 왔다. 우리가 매일같이 쓰는 단어에 질문을 던지고, 그런 단어들을 사용하는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깨닫지 않으면 주소나 욕처럼 아주 간단한 말조차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권력구조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 20쪽 


이런 목적의식을 갖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0장'에서 설명한다.



이후 장들에서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욕설에 숨은 성차별주의 그리고 보컬 프라이와 '그니까like'를 자주 쓰는 습관이 사실상 언어학적 지식을 담은 표지들이며, 캣콜링을 하는 인간들이 허구한 날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을 향해서 "섹시한데!"를 외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속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를 다루게 된다. 젠더 포괄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쿨한 이유와 어째서 '게이 보이스'는 존재하는데 '레즈비언 보이스'는 회자되지 않는지도 다룬다. '컨트cunt'라는 단어에 얽힌 역사와 '가십'이 무엇인지, 남자가 이 행성에서 사라진다면 언어는 어떻게 바뀔지(그냥 가설이다!), 이 정보를 통해서 진짜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 29쪽 


위 인용문에서 느껴지겠지만 저자의 글은 딱딱한 학자풍이 아니다. 저자 소개에 "<에스콰이어>가 '2022년 최고의 팟캐스트'로 선정한 인기 팟캐스트 <컬트처럼 들린다Sounds Like A Cult>의 제작자이자 진행자"라고 적혀 있는데, 팟캐스트 진행자 이미지에 더 가까운, 위트가 있는 글이라 재미있다. 저자는 스스로가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발화량이 많았던 수다쟁이라면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일화도 있다. 

저자가 뉴욕대를 다니던 19세 시절, 아르바이트로 돌보던 5학년 여자아이, 그 친구 및 그 어머니와 함께 지하철을 탔을 때, 저자가 아이들에게 "얄y'all"이라는 표현을(너희들이라는 뜻) 쓴다. 친구 어머니는 이에 놀라며 "그런 단어를 쓰면 안 돼. 그건 잘못된 영어야!"라고 말한다. 이 순간, 저자가 뭐라고 생각했는지 아는가?

"나는 이런 순간을 위해서 사는 것 같다."(31쪽)

ㅋㅋㅋㅋ 그리고 이어지는 얄의 사용이유에 대한 해박한 설명!! 



1장에서는 주로 욕설에 사용되는 단어들을 분석한다.



영어에서 여성-생애주기 어디쯤에 놓여 있든 상관없다-을 묘사하는 거의 모든 단어는 어느 정도 음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슐츠가 썼듯이, "언어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은 소녀나 여성을 묘사하는 단어가 처음에는 중립적이거나 심지어는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가도, 점진적으로 부정적인 함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함의는 처음에는 약간 헐뜯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악의적으로, 결국에는 성적인 모욕으로 변한다."   - 39쪽 


그 예로 '서sir'와 '마담madam', '마스터master'와 '미스트러스mistress', '버디buddy'와 '시시sissy'를 비교하며, '허시hussy', '타트tart'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여성을 의미하는 무해한 단어였다가 어떻게 점점 모욕적인 언어, 특히 성판매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격하되는지를 설명한다. '비치bitch'와 '컨트cunt'도 마찬가지.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시길!! 


이는 모든 단어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유로 혹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용 중지를 선언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이는 규칙에 대한 저항이다. '슬럿' 혹은 '푸시'와 같은 단어를 악의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절함으로써, 우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남성우월주의를 위해 만들어진 불균형한 기준을 거부하는 셈이다. 이는 여성의 성적 독립을 비난하는 데 대한 저항이며 남성이 남성우월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데 대한 거부이다. 충분한 사람들이 저항한다면 모두가 이기는 셈이다.   - 65, 66쪽 


어젯밤, 자려고 누워서 아이들이랑 <바리데기> 이야기를 듣는데, 여성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예쁘고 착해야 할 뿐 아니라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갖은 고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데기, 바리공주는 어릴 적 옥함에 담겨 버려졌다가 후에 왕과 왕비를 만나는데, 왕과 왕비가 쓰러지는 바람에 이들을 구하고자 저승의 생명수를 얻으러 간다. 가는 길에도 많이 고생하는데, 가서도 9년 동안 3년은 나무를 하고 3년은 불을 때고.. 그런 고난 끝에 생명수를 얻어 온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남편을 다시 얻기 위해 세 가지 시험을 거쳐야만 했던 <구렁덩덩 새선비>의 신부,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 말한마디 못하고 마녀라는 오해를 받아가며 옷을 지어내야 했던 <백조왕자>의 공주도 있다. 그러고보니 이들은 그렇게 고생해놓고 제목에 이름도 못올렸네.. 아버지 눈 뜨게 하기 위해 바다에서 몸을 던져야 했던 <심청이>나,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온갖 고생을 하는 <콩쥐팥쥐>도 있다. 


반면 남성 주인공은 잘생길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착하고 똑똑하고 용감할 필요도 없다. 그중에 뭐 하나만 있으면 된다. 주로 착하기만 하면 된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좁쌀 하나만 가지고 한양으로 떠나도 결국 좁쌀이 황소가 되고 아내까지 얻는 남자(<좁쌀 한 알로 행복해진 총각>), 멍청하고 순진하고 하나도 가진 게 없는데 공주와 결혼하게 되는 남자(<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와 하늘을 나는 배>), 고양이 한마리 돌봐줬다고 공주와 결혼하게 되는 남자(<장화신은 고양이>), 심지어 온몸이 반쪽밖에 없어도 보쌈해 온 양갓집 규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반쪽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 1장에서 다룬 백설공주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는데, 집에 있는 요 책, <사실은 잔인하고 불친절한 세계의 요정들>을 조만간 훑어봐야겠다. 제목은 이렇지만,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양)설화 모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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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12-02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서 직접 읽어봐야겠어요! ㅋㅋㅋㅋ
특히 이 부분 ‘남자가 이 행성에서 사라진다면 언어는 어떻게 바뀔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우리나라(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지만) 전래동화 읽다 보면 정말.... 그놈의 성차별때문에 이런 걸 요즘 애들한테 들려줘야 하나 싶다가도... 또 꼭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들도 있어서 ㅠㅠ 참 그렇더라고요. 자식 없는 저도 이런데 자녀 있는 분들은 더 할 듯합니다.

독서괭 2022-12-02 16:0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 부분이 제일 궁금합니다 ㅋㅋ 캣콜링하는 인간들의 심리상태도요 ㅋㅋ 다락방미친여자 읽어야 하는데 딴길로 새서 어쩔 ㅠㅠ
동양이고 서양이고 전래동화들은 다 그래요.. 기본은 알아야하겠지만. 그래서 요즘은 미취학아동들에게는 전래동화보다는 창작동화를 먼저 읽히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초등학교에서 <종이봉지공주>나 <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여성주의적 동화를 읽기도 한대요. 아예 안 읽을 순 없고, 비판적 시각을 키워주려고 노력해야 할 듯요^^;

다락방 2022-12-02 14: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워드 슬럿, 저도 젠더의 언어학 이라는 구절을 보고 진작 사두었거든요. 저는 시사인을 보고 알게 됐었어요. 그래서 바로 구매했는데 독서괭 님이 먼저 읽고 계시네요? 하하하하핫. 에휴 사는 것만 빛의 속도지 읽는 건 세상 게을러서 큰일이네요.

페미니즘 책 읽기 시작하고 차츰 더 읽어나가면서 언어학에 대해서도 공부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때 어떤 게 좋을까 고민만 하고 제대로 책을 찾아보거나 하진 않았는데 이 책이 제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맞춤한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서괭 님의 깊은 독서 응원합니다!

독서괭 2022-12-02 16:11   좋아요 2 | URL
흐흐 다락방님 책탑에서 보고 반가웠던 기억이 나요. 전 사진 않았고, 회사 도서실에 들어와서 냉큼 들고 왔지요 ㅋ 그런데 ‘읽는 건 세상 게을러서‘라니요? 다락방님은 무지 많이 읽으십니다. 다만 무지무지 많이 사실 뿐... ㅋㅋ
언어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도 계속 들어요. 첨에 엄마성을 아빠성과 함께 쓴다거나 ‘남녀‘를 ‘여남‘으로 바꿔 쓰는 것에 대해 ˝뭘 그런 걸로˝, ˝지엽적˝이라는 둥 말들이 있었는데, 점점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락방님도 조만간 읽으실 거죠? >ㅁ<

공쟝쟝 2022-12-06 08:24   좋아요 1 | URL
무지무지 많이 사실 뿐 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2-02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애들 어렸을 때 전래동화 많이 안읽혔어요. 우리나라든 서양거든 그놈의 성차별적인 내용이나 내 생각에 도저히 어린이용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그렇다고 페미니즘 동화라고 각색해서 나오는 동화는 또 대부분이 재미가 없어요. ㅎㅎ
이 책 흥미가 생기기는 하는데 기왕이면 저는 우리나라말을 대상으로 이런 책이 나왔으면 하게 되네요. ^^

독서괭 2022-12-02 16: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페미니즘 동화 각색한 건 재미가 없다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ㅋㅋㅋㅋㅋ 각색한 거 말고 그냥 창작동화 중에 자연스럽게 성평등이 구현되었거나 아니면 성별구분 따위가 아예 안 나오는 책들이 나은 것 같아요.
저 예전에 관심가서 담아둔 책 중에 <언어의 높이뛰기> 있어요 바람돌이님! 우리나라 언어학자가 쓴 책이고, 책소개를 보면 젠더적 시각도 담겨있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2-12-13 1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책 얻어갑니다. 전래동화 딱 한질만 사줬던 나를 칭찬하면서요. 요즘 나오는 동화는 좀 덜 한 거 같은데 전래동화는 동서양을 망라해서 한결같아요, 그죠?

독서괭 2022-12-13 18:3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아 그런데 페미니즘적으로 각색한 것 중 재미난 거 떠올랐어요. <장수탕선녀님>! 책에는 선녀와나무꾼 이야기를 비튼 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뮤지컬에는 반영이 되더라고요. 노래만 들어봤지만^^

미미 2022-12-02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언어와 젠더‘라는 굿즈 때문에 구매 하다시피한 원서가 있어요ㅋ
그 책 그림의 떡이라 언제 읽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는데
이 책 부제도 비슷하고 연관성이 있어보여 반갑네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독서괭 2022-12-13 18:38   좋아요 1 | URL
오 굿즈 때문에 원서를 ㅋㅋㅋㅋㅋ 미미님 더욱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ㅋㅋ 원서는 후일을 기약하시고 이 책을 한번!^^

책읽는나무 2022-12-02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책이??
처음 보는 책이에요.
동화 뒤집는 내용의 책들이 뒤늦게 나오는 것 같아요. <세계의 요정들> 책도 재밌겠어요.
이런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애들한테 좀 바르게 읽혔을텐데 말이죠ㅜㅜ

독서괭 2022-12-13 18:40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자녀분들은 책나무님 평소 언행과 가르침에 영향받아 스스로 잘 해석했을 거예요^^ 세계의요정들 애들이랑 읽어볼까도 했는데 어떨지 몰라서 혼자 읽으려다보니 안 읽고 있..;;

공쟝쟝 2022-12-06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빌려왔어요.... 지금 제 우글 거리는 책더미들 속 어딘가에 콕 박혀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읽기 전에 약간 긴장했거든요? 부제가 어려울 거 같아서 ㅋㅋㅋ 근데 뭐냐 입담이 좋다고 하니까 좀 더 진도 빼봐야겠다~~ㅋ 이 글을 읽고 펴볼 뽐뿌오려고 미리 내가 들고 왔능가 봐요. 너무 행보카다... 나는야 도서관의 신간 콜렉터 ㅋㅋㅋ ㅋㅋㅋ

독서괭 2022-12-13 18:41   좋아요 0 | URL
빌려오셨습니까? ㅋㅋㅋ 준비되어 있으시군요! 어렵지가 않아서 좋더라구요. 저자가 어렵게 전달하는 걸 안 좋아하는 느낌이~ 아주 재미납니다. 하지만 이 글 쓴 이후 하나도 더 못 읽고 있다는 ㅠㅠ

유부만두 2022-12-14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예전에 언어 성차별에 대한 글 중에 seminal(정액의)이 왜 중요한, 이라는 뜻을 가져야 하냐고 그대신 clitoral(음핵의)를 쓰면 안돼냐! 라는 걸 읽은 적 있어요. 그후론 저 s 단어는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되었어요. 추천해 주신 이 책도 읽어보겠습니다.

독서괭 2022-12-15 12:11   좋아요 0 | URL
으아 seminal이라는 단어 몰랐는데, 중요한=정액의 라니.. 징그럽기도 하고.. 참 언어에 성불평등이 많이 반영이 되어 있구나 싶네요. ㅠ 앞으로 저 단어 보게 되면 뜨악할듯요. 이렇게 영어공부도 하고 ㅋㅋ 만두님 감사합니다~^^

2022-12-15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5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