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곗덩어리'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니!
제목부터 신랄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요전에 읽은 톨스토이(이반 일리치의 죽음)가 허영을 좇는 자의 어깨에 내리치는 근엄한 죽비 같다면, 모파상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광대의 말 같달까. 좀더 건들거리면서 이죽대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 속에 한번씩 날카로움이 깃드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midnight 중 두번째로 읽은 책, <비곗덩어리>에는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비곗덩어리', '두 친구', '목걸이'.
<비곗덩어리>와 <두 친구>는 보불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는 1870년에서 1871년 사이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두 친구>는 전쟁의 비정한 면을 매우 짧은 단편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데 비해, <비곗덩어리>는 전쟁이라는 시련 앞에서 얼마나 인간이 구질구질해 질 수 있는지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중편이다. 이 <비곗덩어리>에서 모파상은 작정하고 인간들의, 특히 상위 계층이라는 인간들의 추악한 내면을 까발린다.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의 도시 루앙에서, 독일군 총사령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다른 도시로 떠나는 승합 마차가 출발한다. 여기에 탄 사람들은 다양한데, 부유한 상위 계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세 쌍의 부부("마차 안쪽 자리를 차지한 이 여섯 사람이 여유 있고 유력한 삶을 사는 부유층으로, 종교와 도덕을 앞세워 올바르고 성실한 사람으로 행세할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이었다."-23쪽), 두 명의 수녀, 혁명가 남성 1명, 화류계 여성 1명이다. 이 화류계 여성이 바로 '비곗덩어리'라는 별명을 가졌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 이 세 남자는 한순간 흘깃 서로에게 호의의 눈길을 던졌다. 처지는 달랐어도 금전을 통해 서로가 형제임을 느낀 것이다. 가진 자들의 유대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 금화가 짤랑거리는 사람들끼리의 동지 의식이었다. - 27쪽
상위 계층인 세 쌍의 부부가 순식간에 유대감을 형성한 반면, 코르뉘데(혁명가)와 엘리자베트 루세(비곗덩어리)는 그들로부터 멸시어린 시선을 받는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세 쌍의 부부 사이의 유대감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들은 엘리자베트를 보며 <창녀><공공의 수치>라고 수근댄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되는데, 예정과 달리 마차의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려 식사를 할 수 있는 도시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굶주림 속에 지쳐가는 일행 앞에, 엘리자베트가 짜잔- 음식으로 가득한 바구니를 꺼낸다. 그리고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음식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절하게도 모두 나누어 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 도시에 도착한 그들은 엘리자베트에게도 상냥하게 대한다.
그러나 또다시 반전, 그들이 하룻밤 묵어 가기 위해 도착한 도시 토트에서, 매력적인 엘리자베트가 독일군 장교의 먹잇감으로 찍혀 버린다. 그는 엘리자베트에게 하룻밤을 요구하며 엘리자베트가 거절하자 일행 전체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여관에 머무르던 일행은 엘리자베트가 장교의 요구를 거절한 것을 알게 되고, 세 쌍의 부부는 어떻게든 엘리자베트로 하여금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꼬시려고 작전을 짜는데...
남자 여자 구별 없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저마다 생각을 꺼내 놓았다. 그러면서도 예의는 무척이나 차렸다. 여자들은 아주 낯 뜨거운 내용을 입에 올리면서도 절묘하게 돌려 말하고, 섬세한 표현들을 매혹적으로 구사했다. 만약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들었더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말을 포장했다. 하지만 사교계 여성이 저마다 몸에 두른 정숙이라는 그 얇은 너울은 표면만을 덮어 가릴 뿐이어서, 그들은 이런 음탕한 사건 앞에서 자신의 본성에 딱 맞는 뭔가를 만난 듯 편안한 기분으로 그 어느 때보다 활짝 피어나서는, 이 잠자리 연애사를 주물러 대며 속으로 후끈 달아 즐겼는데, 이런 주제를 다루는 그들의 태도에는 식도락가 요리사가 타인의 저녁거리를 조리하며 맛보는 관능이 스며 있었다. - 63쪽
이 대목에서 모파상의 이죽거리는 태도가 절정에 이른다. 그들의 작전은 예기치 못한 수녀들의 -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 아리송한- 지원사격에 의해 성공한다. 실은 루앙에서도 분노에 차 독일군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고, 독일군 장교의 파렴치한 요구를 당당히 거절하고, 여관에서 하룻밤 자자고 조르는 코르뉘데를 "적이 가까이 있는 상황에서는 결코 몸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단호히 물리치는 엘리자베트, 창녀라고 깔봄을 당하지만 실은 가장 고상한 내면을 가진 이 여성은 결국 독일군 장교와 하룻밤을 보내고 만다.
목적을 달성한 장교는 그들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허락한다. 떠나는 승합마차에서 만난 세 쌍의 부부가 엘리자베트를 대하는 태도가 가관이다. 이번에는 처지가 바뀌어 다른 이들은 여관에서 먹을 것을 챙겨온 반면 정신이 없던 엘리자베트는 빈 손인데, 누구도 그녀에게 음식을 권하지 않는다. "비곗덩어리는 행세만 번듯한 저 파렴치한들에게 자신이 철저히 멸시당하고 있음을 느꼈다."(80쪽)
정말이지 여러 번의 상황 반전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통렬한 풍자가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 와중에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비곗덩어리'로 멸시되는 엘리자베트에 대한 연민도 놓치지 않는다.
<목걸이>는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 "대체로 모파상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쓰메 소세키가 특히 이 작품을 <온통 어리석음 투성이>라고 혹평"(123쪽)했다는 게 재미있다. 너무 극적인 설정 때문일까?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마틸드를 보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떠올렸다. 플로베르가 평생의 스승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영향이 있었을지도.
식탁보를 사흘째 갈지 않은 둥근 식탁에 남편과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할 때, 수프 그릇 뚜껑을 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아! 맛 좋은 포토푀로군! 이게 최고지.....>라고 탄성을 지르는 남편을 보면서, 그 여자는 최고급 만찬, 반짝이는 은제 식기, 고대 인물들과 마법의 숲 속 기이한 새들의 모습을 짜 넣은 장식 융단이 벽을 뒤덮은 연회장을 꿈꾸었다. - 105쪽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었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 민음사, <마담 보바리>, 55쪽
샤를르가 하는 말은 거리의 보도(步道)처럼 밋밋해서 거기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뻔한 생각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줄지어 지나갈 뿐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는 루앙에서 사는 동안 한번도 극장에 가서 파리에서 온 배우들을 구경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무엇 하나 가르쳐줄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흔들림 없는 이 평온과 이 태연한 둔감, 그녀 자신이 그에게 안겨주고 있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 민음사, <마담 보바리>, 65쪽
마담 보바리를 읽으며 아, 인생의 낭만을 꿈꾸지만 실제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는 별로 가져보지 못했던 여성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너무 재미없고 호기심도 없고 낭만이라곤 없는 남자를 만났을 때 이런 비극이 생기는구나.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고 느지막히 만났다면 괜찮은 부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목걸이>에 나오는 부부도 비슷해 보인다.
<목걸이>와 <비곗덩어리>를 함께 보니 '뒤통수를 조심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인생은 늘 뒤통수를 치지, 명심하게나.
어떻게 하면 뒤통수를 맞지 않을 수 있을까요, 모파상 선생님? 뒤통수를 조심하다가는 앞통수를 맞겠지. 그것이 인생이라네. 아니 그럼 어쩌라는 건가요, 선생님?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원래 그런 거라니까?
네.... 인생 원래 그러한 것.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잘해 주는 것, 최소한 비열하게 살지는 말 것, 그것이 모파상을 읽은 감상이다.
막장드라마로 유명한 <벨아미>.. 집에 있는데, 읽었으나 기억이 안 나는데, 이걸 또 읽어 말어? 일단 모파상의 다른 단편집은 보관함에 담아 두었다.
흰 눈송이들이 끝없는 장막처럼 지상을 향해 펼쳐지며 펄럭거렸다. 이 눈의 장막이 세상의 형상을 지우고 사물마다 얼음 거품을 덮어씌웠다. 겨울에 감싸여 가라앉은 이 도시의 광활한 적막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나부대는 소리, 어떤 것이라고 표현할 말이 없는 그 희미한 바스락거림이 전부였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느낌이었다. 뒤섞여 흩날리는 가벼운 티끌들이 온 천지를 가득 채운 듯했고, 세상이 그 흩날림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 P18
그는 비곗덩어리를 <어린 아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말을 걸었다. 분별 있는 남자들이 나이 어린 여자를 대할 때 사용하는 보호자인 양하면서 다소 얕잡는 말투였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확고한 명망을 부각시킴으로써 상대를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두려는 의도가 내비치는 말투이기도 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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