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전화벨이 울린다 [06/05/18]
겨우내 다듬은 원고를 내밀며 무조건 사달라는 필자들이여

점심을 먹고 볕이 하도 좋아 잠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동교동 골목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연일 과음으로 찌든 몸을 해바라기하며 햇빛에 말리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자리에 들어오니,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머뭇거리게 되더군요. 아직은 봄볕의 나른한 여유를 즐기고 싶은 사치스러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요즘 들어 워낙 먹고살기가 힘드니 자신의 원고를 팔고 싶다는 어느 이름 모를 저자였습니다.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상대의 말을 들은 뒤 원고를 검토하고 연락드리겠다고 했더니, 한마디라도 더 전하려는 그의 끈질긴 목소리에 그만 짜증이 나더군요.

봄이 되면 겨우내 누군가의 손에서 다듬어졌던 원고들이 여기저기서 많이도 들어옵니다. 메일은 말할 것도 없고, 출력한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께서 육필원고를 들고 사무실을 방문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육필원고를 들고 오나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멀리서까지 찾아오는 그분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차 한 잔을 대접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를 나누는 일이 제 일인 듯해 바쁜 업무 시간을 쪼개곤 합니다.

아무튼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그분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막무가내로 원고를 사달라는 요청뿐이었습니다. 정작 원고의 내용은 말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하여, 머릿속에서는 ‘안 됩니다’라는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었지만,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한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로 정중하게 통화를 매듭지었습니다.

우리나라 출판계에는 국내 저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좋은 기획안이 있어도 저자를 찾다찾다 못 찾아 결국은 진행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니 어떠한 경로로든 먼저 출판사에 말을 걸어오는 저자분들이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귀한 손님입니다.

앞뒤 아무런 설명 없이, 무작정 원고를 사달라고 출판사에 매달렸던 그분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먹고살기가 너무도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살기가 어렵다고 온갖 사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살아보겠다는 그분의 용기는 당연히 박수를 쳐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분과의 통화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국내물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출판사와 저자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저자분들을 만나다 보면 간혹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습니다. 원고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으나, 어떤 분들은 시장 규모까지 터무니없게 예측해오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저자는 자연스럽게 출판사에 높은 인세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아예 계약조차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높은 인세를 저자에게 지급하고, 지속적인 집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꿈이고 희망입니다. 어느 누구인들 좀더 많은 인세, 좀더 높은 원고료를 저자에게 주고 싶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출판사에서 이득을 다 취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거나, 자신이 예측한 수요를 못 팔아내는 것을 출판사의 능력 부족으로 돌리는 저자를 만난 날이면 한동안 멍하니 길거리를 배회하다 사무실에 들어오곤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기억이 나는 건, 대부분 그분이 열심히 설명했던 당신의 유명세와 권위에 대한 이야기뿐 원고가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아련한 경우도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봄볕 아래 보냈던 모처럼의 여유가 휑하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째 마음 한구석이 퀭하기만 합니다.

2년 반 동안 집필했다는 자신의 원고는 피와도 같을진대, 원고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둔 채 처음 통화하는 나에게 죄인처럼 사정하듯 말하는 그의 마음도 잠시 헤아려봅니다. 그래도 그분이 그렇게 자신을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통화에서 자신을 팔지 말고, 자신의 원고를 팔았다면 우리는 훨씬 유쾌한 통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볕이 잘 드는 책상 위에서 그분의 원고가 며칠째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출간이 가능할까 하여, 소개해줄 출판사는 없을까 하여 몇 번을 읽고 또 읽게 됩니다. 아, 정말이지 오늘 봄볕은 정말 너무합니다.


(양상호 도서출판 해바라기 대표) = 한겨레21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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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로드무비 2006-05-1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짠합니다.

하늘바람 2006-05-20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물만두님 로드무비님 오죽하면 그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