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있는 풍경>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작가 박상률
초등학교 담장에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봄인 것이다. 수업이 끝나 재잘거리며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 모습이 환히 핀 개나리 같다. 운동장은 뛰고 뒹구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서서 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뚱맞게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저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 왜 부아가 치밀었을까?

최근 몇 달 동안 쏟아진 아이들 관련 뉴스는 아이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뉴스는 아이들의 영혼을 멍들게 하거나 육체를 괴롭히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뺏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 냈다. 한 동네 사는 아저씨한테 성추행 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아이, 부모 대신 조카를 맡은 삼촌 부부라는 사람들의 인면수심 때문에 멍든 아이, 부모의 폭행에 몸이 망가지고 얼이 빠진 아이, 심지어는 친부모에 의해 죽임까지 당한 아이.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런 세상이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 일이 터질 때마다 방송이나 신문은 며칠 동안 세상이 다 끝장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정부는 뭐 하냐, 대책을 세워라, 캠페인을 벌이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처럼 군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다른 대형 사건이나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수그러들고 만다. 뉴스를 보며 혀를 찼던 어른들 역시 며칠 지나면 일상의 삶에 함몰되어 잊고 산다.

그럼, 아이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는 문학인 동화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아직까지는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폭력 이나 죽음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는 게 최고라는 동화 작가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문제를 다룬 작품이 나오면 동화 작가는 물론 평론가들조차 애써 외면한다. 아이들 정서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느니, 소재주의에 빠졌느니 어쩌느니 하는 명분 하나 그럴싸하게 붙이면서.

그런데 아이들이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어른들과 나뉘어져 있나? 아이들만 따로 모아 살게 함으로써 사회의 악이나 폭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 놓고 있나? 그렇지 않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차피 사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러니 어른들 문제는 어른들 문제로 끝나지 않고 아이들 문제로 곧장 이어지고, 아이들 문제 역시 아이들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고 어른들 문제로 곧바로 이어진다.

문학은 바로 문제적 인물, 문제적 사회를 다룬다. 사람살이에, 하나하나의 사람에 문제가 없으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밤낮 예쁜 꽃이 어쩌고 멋진 구름이 어쩌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꽃 자체만을, 구름 자체만을 다루는 게 문학이 아니다. 꽃을 대하는 사람, 구름을 쳐다보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게 문학이다. 그러한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편안하지만은 않다. 눈은 예쁜 꽃을 들여다보고 머리는 멋진 구름을 이고 있을지라도, 마음과 현실은 복잡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그 동안 아이들이 읽은 동화는 어떠했나? 그들이 발 딛고 숨 쉬며 사는 현실은 어지럽고 숨 막히는데, 그들이 읽는 동화 속 현실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그야말로 ‘환타지’ 세계였다. 환타지 세계가 별 건가? 현실하고 동떨어진 세계 아닌가? 아무리 우리가 사는 현실을 배경으로 했다 하더라도 다루는 얘기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채 꽃 타령 구름 놀음만 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환타지 아닌가?

그러나 진정한 환타지는 현실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지 현실 세계를 낯설게 하여 보여 줄 뿐이다. 낯설게 하는 이유도 사실은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상한 괴물이 나온다고, 아니 아예 기계 인간이 나온다고 해서 그게 현실 속 문제를 떠나 따로 존재하는 문제를 다루나? 아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체가 어떠하든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동화는 환타지 작품은 놔두고라도, 현실 세계를 다룬 이른바 사실주의 동화에서조차도 현실을 외면했다. 어른들의 폭력과 사회의 냉대 속에 더할 수 없이 망가져 가는 아이들의 문제보다는, 누가 보아도 편안하고 따스한 이야기를 다루기 좋아했다. 그건 작가들이 동화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를 반쪽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 내린 들녘 풍경을 보거나 강변 같은 곳을 곡선으로 멋지게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야, 동화 같은 풍경이다.’라며 탄성을 내지른다. 사람들에게 동화는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엔 폭설에 깔려 망가진 농사 시설물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농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위험한 지점에 철길을 놓을 때 다치거나 죽은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물과 대상의 겉만 보지 속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독자가 잘 볼 수 있게 뒤집어 보여 주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더라도, 작가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현상의 뒷모습과 사물의 속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글로 써야 한다. 말하자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것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은 반쪽 작가일 뿐이다. 이 점 동화라고 다르지 않다.

곰브리치라는 미술학자가 말하기를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화가 자신이 아는 것만을 그린다.’고 했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만을 쓰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작가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자신이 아는 영역을 넓혀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이, 아름다움과 추함이 한데 섞여 있다. 그러기에 눈에 잘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이요, 잘 보이지 않는 추한 풍경에 대해서도 잘 알아 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결국은 아는 만큼 쓰게 될 테니까.
글쓴이
박상률 /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녔습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 「진도아리랑」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집 『진도아리랑』 『배고픈 웃음』 등과 소설 『봄바람』 『나는 아름답다』 『밥이 끓는 시간』, 동화 『바람으로 남은 엄마』 『미리 쓰는 방학 일기』 『까치학교』 『개밥상과 시인 아저씨』 등을 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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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1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그게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된다니까요. ㅋㅋ. 가져가요.

하늘바람 2006-05-1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고민입니다 스텔라님

물만두 2006-05-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면 못쓰겠군요 ㅠ.ㅠ

하늘바람 2006-05-1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은 탄탄하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