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인으로서의 정지용, 그리고 정지용이 쓴 동시_전 병 호



일반적으로 정지용 시인은 대중들에게 「향수」를 쓴 ‘시의 거장’으로 그 이미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지만 동시인으로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일찍이 1930년대 문단을 풍미한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간파한 적이 있다. 그 말에 걸맞게 지용은 지금도 변함 없이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星座)’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는 이 같은 선구적 위치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그가 일찍이 수준 높은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지용이 쓴 동시는 몇 편일까
정지용 동시를 말하기 전에 먼저 대상 작품을 선정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느껴진다. 왜냐 하면 지용이 생전에 동시집을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펴낸 책 중에서 시집은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 두 권뿐이다. 그 중에서 『정지용 시집』 제3부에 실린 시의 일부가 오늘날 말하는 정지용 동시인 것이다. 박용철은 제3부에 실린 작품을 가리켜서 ‘자연동요의 풍조를 그대로 띤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이라고 말했다. 제3부에 실린 시는 모두 23편이다. 일반적으로 전반부 16편은 동시이고, 후반부 7편은 민요풍 시로 나뉜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좇아 정지용 동시를 16편으로 묶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먼저 「호수 1」을 보자.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호수 1」 전문

틀림없는 동시이다. 그것도 너무나 앙증맞고 귀여운 갈래머리를 한 여자 아이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는 동시인 것이다. 또 「호수 2」는 어떠한가.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호수 2」 전문)’ 이 작품도 동시이다. 이 시들은 『정지용 시집』의 제2부에 실린 시들이다. 정지용 동시를 말하는데 이 시들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밖에 고르는 이에 따라서 제2부의 시를 일부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지용에게는 시의 전반부는 동시이고 후반부에 가서 어른 목소리를 드러내는 소위 ‘동시적 발상이 주조를 이루는 성인시’도 의외로 많다.
한편 작년(2004년)에는 박태일이 동시 두 편 「넘어가는 해」1), 「겨울밤」2)을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신소년’ 1926년 11월호에 ‘지용’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 두 편은 지용의 다른 시집에는 실리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정지용 동시는 제3부의 작품을 중심으로 고르는 이의 기준에 따라서 얼마간 달라진다. 그렇지만 넉넉잡아 30편은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불까막이/불까막이//들녘지붕/파먹어라//내려왔다/쫓겨갔나//서쪽 서산/불야 불야
   (「넘어가는 해」 전문)
2) 동네집에/강아지는/주석방을//칠성산에/열흘 달은/백통방을//갸웃갸웃/고양이는/무엇 찻나
   (「겨울밤」 전문)

>>지용은 그 당시 문단에서도 동요 동시 작가로 알려졌을까
지용은 그 당시에도 동요 동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를 가리켜 김환태는 ‘가장 완전하게 동심을 파악한 동요 동시 작가’라고 평했으며, 석은과 이양하는 정지용 동시의 뛰어남을 지면을 통해 밝힌 적도 있다. 그는 좌경적인 작품을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학가동맹에서는 아동분과위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가 아동분과위장으로 추대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체에서는 어떠한 활동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그가 일반으로부터 동요 동시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참고로 말하면 지용은 1933년 8월경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을 옹호하려는 취지로 구인회를 결성하고 이를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카톨릭 청년’지의 편집에 관여했던 만큼 카프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지용 동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체적으로 정지용 동시는 1922년을 전후한 습작기의 소산으로 여기고 가볍게 처리해 온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박용철이 시집의 발문에서 ‘많은 눈물을 가벼이 진실로 가벼이 휘파람 불며 비누방울 날리든 때’의 부산물이라고 언급했고, 또 오탁번은 ‘민속적 정서에 바탕을 둔 가벼운 소품들’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다. 정지용 시의 본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어디까지나 현대 자유시이지, 동시와 민요시 또는 시조가 아니라는 전제가 강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이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정지용 동시를 폄하하거나 그렇게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정지용 시집』이 발간된 것은 1935년이다. 1935년이라면 지용이 시작의 원숙기에 들어선 시기이다. 지용은 첫 시집을 펴내면서 동시를 민요풍 시와 함께 별도의 장을 설정하여 수록했다. 시조를 제외시킨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이는 지용이 동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내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정지용 동시에는 작품의 의미가 비교적 짙게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지용의 일반시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이에 대해 일찍이 김종철은 ‘대단히 높은 정신적 경지를 나타내는 지용의 시들은 그의 동시의 변형’이라는 견해를 피력했고, 김학동은 ‘초기의 동요나 민요풍의 시편들은 그 뒤로 전개되는 「바다」와 「신앙」과 「산」의 시편에서 보인 고고한 정신적 태도와 표현 기법의 바탕’이 되었다고 보았다.

>>지용은 언제부터 동시를 썼을까
지용은 1926년 6월에 발간된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일반 시 3편, 시조 9수와 함께 「서쪽 하늘」, 「띠」, 「감나무」, 「한울 혼자 보고」, 「딸레(인형)과 아주머니」 등 5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이것이 지용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동시이다. 지용의 이 동시들은 주로 일본유학 시절을 전후한 시기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용은 22살이 되던 해인 1923년에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서구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28살이 되던 1929년 3월에 졸업한 이후 모교인 휘문고보에 영어과 교사로 취임한다.
정지용의 시작 과정을 작품 경향에 따라 살펴보면 대략 3단계로 나뉘는데 이 시기는 제1단계에 해당한다. 이 때 지용은 도시 이미지를 추구하는 모더니즘 계통의 시와 함께 토속적 향수와 실향 의식을 담은 동요류 및 민요풍 시편들을 발표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많은 동시들은 물론 노래로 작곡되어 널리 불려지고 있는 「향수」도 이 때 씌어졌다.


>>>지용은 왜 ‘동요류 및 민요풍 시편’을 쓴 것일까>
지용은 일본 경도에서 여섯 해를 보냈다. 지용은 유학 초기에 새로운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 많은 경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해탄 건너 멀리 이국의 하늘 밑에서 고향 옥천에 대한 향수와 고독도 절실히 느꼈다. 그는 압천(鴨川)이라는 냇가에 하숙을 정했다. 이 곳은 고향 마을의 자연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시상을 다듬으며 압천을 따라 거닐었다. 그러나 지용이 이 압천에서 만난 것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자연 풍경만이 아니었다. 압천 상류엔 케이블카 가설 공사장이 있었다. 그는 이 곳에 강제로 끌려와 중노동에 시달리는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와 그들의 비극적 참상을 함께 보았다. 망국민의 비애를 처절하게 느낀 그는 그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을 「지용문학독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수백명식 모이어 설레는 일판에 합비 따위 노동복들은 입었지만 동이어 맨 수건틈으로 날른대는 상투를 그대로 달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째앵한 봄볕에 아지랑이는 먼 불타듯하고 종달새 한끗 떠올라 지즐거리는데 그들은 조선의 흙빛같은 얼골이매 우리라야 알아듣는 왁살스런 사투리며 육자배기 산타령 아리랑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용이 조선에서 온 유학생임이 밝혀지자 그토록 거칠고 사나웠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신랑 신부 볼모 잡듯이 그를 환대해 주었다고 한다. 지용은 그 때 고국에서 온 이 노동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그들을 찾아 향수를 달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현해탄 건너 고향에는 꿈에도 그리는 그들의 가족이 있었고 지용에게는 무척이나 사랑한 누이동생 계용이 있었다. 이처럼 압천 유역은 그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면서도 한편으로는 망국민의 비애와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런 심정을 시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정지용 시집』의 제3부에 실린 동요류 및 민요풍 시편들인 것이다. 이 시들은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나아가서는 민족의 동질성 고취와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간절한 심정에서 씌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지용 동시는 전승 설화, 세시풍속, 민요 등을 주요 소재로 한다. 또한 우리 시의 전통적인 율격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다. 우리는 지용을 전통지향적 시인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의 동시는 전통지향 정형적 동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향토적 색채가 짙다. 이것은 일본 경찰의 총검 아래서도 조선의 자연 풍토와 조선인의 정서와 우리 언어를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던 그의 항일의식을 드러 낸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용 동시를 가리켜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이 유년 시절의 동심과 조화되어 민요의 율조를 타고 고독과 비애로 표상’했다고 한 김학동의 말은 그의 동시가 어떤 배경에서 씌어졌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지용의 동시는 사실상의 망향가이면서 망국민으로서의 서러움을 달래고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던 영혼의 노래였던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첫째는 지용이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 및 청록파 시인들에게 끼친 동시에 대한 크나큰 영향이다. 잘 알다시피 청록파 시인은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이다. 이 중 박목월과 조지훈은 동시를 썼다. 특히 박목월은 박영종이라는 본명으로 많은 동시를 발표했고, 동시단에서도 또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 지용이 ‘문장’지에서 추천한 시인들 중에서 박남수도 동시를 썼다.
그런데 정지용과 윤동주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지용은 1902년생이고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으므로 15년 차이가 난다. 윤동주는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하던 중 1943년 사상범으로 몰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다. 정지용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 윤동주는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이 시집은 윤동주가 죽은 후인 1948년 그가 남긴 시 30편을 모아 펴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윤동주는 윤석중, 강소천, 일본의 오가와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한 시인은 정지용이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정지용의 동시를 애독했다. 그런 만큼 『정지용 시집』은 윤동주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두 사람이 다 민족의 수난기에 허망하게 희생되었다는 비극적 사실도 같다. 이처럼 당대 최고 시인인 정지용이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 당시 젊은 시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 흥미롭다.
두 번째는 그의 최후 행방에 관한 것이다. 정지용의 시가 해금된 것은 1988년이다. 6·25 당시 녹번리 초당에서 지내다가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었지만 월북인사로 분류되었다. 그 동안 그의 최후에 대해 여러 증언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1950년 미군기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유력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지용 시인이 북한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향신문 2000년 11월 1일자에 실린 한 편의 기사는 필자를 아연케 했다. 기사의 제목은 ‘정지용 시인의 기막힌 사연’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셋째 아들 이름은 정구인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행방불명 된 아버지를 찾는다며 집을 나섰던 셋째 아들이 50년 만에 아버지 정지용을 찾아 달라고 북에서 서울로 연락해 온 것이다. 그러면 월북했다던 정지용은 그 동안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같은 북녘 땅에 살면서도 아들의 안부조차 모르고 살았거나 아니면 아예 월북하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정지용 동시를 읽어 볼 수 있는 책

『정지용 전집』(민음사, 2003)
-시전집
『향수』(미래사, 2001)
-시선집(개정판)
『엄마야 누나야』(보리, 1999)
-앤솔러지, 동시선집
『해바라기 씨』(비룡소, 2002)
-그림책


▶▶▶전병호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청주교육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정지용 동시’를 연구했습니다. 1981년 ‘소년중앙문학상’과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계간 <아동문학평론>에 『재운이』, 『샛강 아이』 등 여러 권의 동시집 서평을 발표하였으며, 지은 책으로 『꽃봉오리는 꿈으로 큰다』, 『소금 얻으러 간 날』, 『꽃 속의 작은 촛불』, 『들꽃 초등 학교』 등이 있습니다.




(※ 이 글은 월간 <동화읽는가족> 2005년 2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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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6-02-1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북 옥천 출생이지요...... 동시도 쓰셨군요~~~

하늘바람 2006-02-1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출생까지~ 역시 해박하셔요. 세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