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10’ 순위표 왜 문제인가] “초반 흥행 부풀리기는 마케팅의 일부”
지난 연말 불거진 출판계의 사재기 파동이 해가 바뀌어도 진정되지 않은 채 번지고 있다. 이 문제는 애초 출판사들의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가 자체 조사를 벌여 사재기 증거가 발견된 5권의 책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올들어 교보문고가 문제의 책 5권을 다시 베스트셀러 집계에 포함시키자 출판인회의가 차제에 문화관광부에 ‘출판유통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하면서 사재기 파동 2라운드가 불붙었다.
출판인회의는 교보문고가 약속을 파기했다며 비판했고,교보문고는 해당 출판사들이 사재기 사실을 부인함에 따라 다시 집계에 포함시켰다고 해명했다. 이번 파동은 사재기의 진위 여부,대형서점의 사재기 조장 혐의 등 여러 쟁점을 포함하고 있지만 출판 불황 속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출판사들의 슬픈 현실을 드러냈다.
◇순위는 과연 믿을 만한가
판매순위 조작은 출판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음반업계에서도 끊임없이 사재기 소문이 흘러나온다. 일부 가수들은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이번에 네가 낸 음반 네가 다 샀다며?”식의 얘기를 농담으로 던진다.
한 음반기획사 대표는 “일단 판매순위 ‘톱 10’에만 들면 그 다음부터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알아서 다 홍보해준다”며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CD 1만∼2만장만 사면 순위에 진입시킬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음반업계에서는 이것을 사재기라기보다는 일종의 마케팅 비용으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영화 역시 자사나 계열사 직원들에게 영화표를 공짜로 돌리는 방식으로 사재기를 한다. 첫 주 흥행성적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첫 주에 일정한 흥행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극장 측은 곧바로 종영을 통보한다. 반대로 첫 주에 관객몰이에 성공하면 롱런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몰린다고 알려진 영화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벌어진 영화 ‘홀리데이’의 CGV 조기종영과 재상영 사태는 순위의 힘을 둘러싼 여러 논점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 제작·배급사인 롯데엔터테인먼트와 ‘투사부일체’의 제작·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개봉 초반 극장 점유 싸움에서 불거진 ‘홀리데이’ 사태는 극장을 많이 확보해야 1위에 오를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고 그래야 장기흥행을 노려볼 수 있는 영화계의 약육강식을 여실히 보여줬다.
방송사의 시청률 순위 역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지표로 보이지만 허점이 있다. 조사대상가구가 너무 적어 대표성이 늘 의문시되고 있으며,특정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조사기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몇 년 전 일본에서는 한 드라마 PD가 시청률조사 대상 가구에 뇌물을 주고 시청률을 조작하다 들통난 사건도 있었다.
◇검색시대,더 막강해지는 ‘순위 권력’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인기뉴스 순위나 인기상품 순위는 어떨까.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는 사람들 대부분은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인기뉴스로 분류된 뉴스들을 먼저 검색한다. 포털사이트가 ‘인기뉴스’라고 하면 하루종일 인기뉴스가 된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인기상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마련이다. 결국 ‘인기상품’ 코너에 오르면 진짜 인기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순위는 소위 ‘알바(아르바이트 직원)’를 동원한 클릭수 조작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 각 사이트들이 특정 업체와 부당한 거래를 맺고 특정 상품의 순위를 올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인터넷 정보 검색을 통해 상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면서 순위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순위야말로 대중이 가장 쉽게 접하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분야의 유명 저술가인 존 바텔은 ‘구글 스토리’(랜덤하우스중앙)에서 “앞으로 모든 마케팅은 검색순위 상단을 차지하려는 경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검색정보 순위의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마케팅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경우가 ‘해커스 토익’이다. 경쟁사들은 현재 토익 책 분야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해커스 토익’의 경쟁력을 인터넷 홍보로 분석한다. ‘해커스 토익’은 책을 출판할 때부터 조직적으로 아르바이트 직원들을 동원해 각종 사이트에 책 소문을 냈고,이런 압도적 정보가 네티즌들의 토익 책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토익 책 출판사들은 현재 사별로 아르바이트 홍보팀을 조직,인터넷 홍보 경쟁을 펼치고 있다.
◇‘순위 맹신’ 이대로 좋은가
문화상품의 인기는 순위표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순위표에 반영된 것은 대중의 기호와 취향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재기나 로비와 같은 조작행위와 자본이나 유통 등 외부적 힘이 반영돼 있다. 모든 상품들이 공정한 경쟁을 거쳐 순위표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이 아니고,좋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다”는 출판계의 속설은 순위의 허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순위표가 문화상품을 고르는 한 기준일 뿐인데 거의 유일한 기준으로 자리잡아 가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신현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은 “순위표의 맹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인기와 판매실적만을 기준으로 하는 기존의 순위표 외에 별점이나 평점처럼 질을 평가하는 지표들이 다양하게 개발돼 사람들이 양과 질을 함께 따져보며 문화상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재일 한국언론재단 수석연구원은 “자본이 시스템을 장악하고 순위를 좌우하게 되면서 다양한 콘텐츠가 대중에게 접근하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면서 “상업논리에서 벗어난 수준높은 상품들이 알려지고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도록 대안적 공간을 마련하려는 소비자 주권운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