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의 얼굴을 또렷이 보게 된 건 수업이 끝난 오후 선생님들끼리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게 된 날이었다.

여학교지만 젊고 경력이 많지 않은 선생들이 많아서 마치 대학 동아리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가끔 모여 당구도 치러가고, 맥주도 마시러가고 족구를 하기도 한다.

그날도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 선생님들끼리 모여 축구를 하는데 여학생 응원단이 절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언제 사왔는지 아이스크림에 냉커피까지 대령해 놓았다. 선생님들은 각자 팬클럽이라며 자랑하고 있었고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야, 선아야. 넌 왜 공 정리만 하냐? 그 공 몇 개나 있다고. 공 정리를 해.”

뒷반 국어 선생님 말에 나는 공 정리 하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선아?’

“차 선생, 쟤가 선안데 차선생 팬이야. 내가 재 때문에 거슬려서 수업을 못해.”

“네?”

내 팬은 이미 짐작했던 일이지만 수업은 왜 못 한단 말인가?

“아니, 내 수업시간에 내 수업은 안 듣고 차선생 생각하느라 넋이 나가 있으니 어찌나 신경이 쓰이는지.”

“제가 언제요.”

선아라는 아이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는 그 아이를 쳐다보았고 그 아이는 약간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았다.

‘저 애가 그 선아?’

“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차선생은 앞반 국어 선생이고 나는 뒷반 국어 선생인데 이 녀석이 한반 차이로 선생 수업을 못 듣잖아. 얼마나 애절한지.”

아 그래서 내가 들어가는 반에 선아가 없었구나.

“맞아요.”

다른 아이들이 맞장구를 친다.

“아니에요.”

선아라는 아이가 웃음을 띤 채 대답한다.

“뭘 아냐? 아니긴. 내가 너 먼 산 쳐다보면 무슨 생각하는 지 다 알아.”

뒷반 국어 선생님은 농담반 진담반 기분 나쁜 표시를 냈다.

“아, 나도 옛날엔 한 인기 했는데 말야.”

“에잇 거짓말.”

아이들이 또 입을 모았다.

선아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내성적인가?’

그날의 만남으로 나는 선아라는 아이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뒤로도 마치 내게 선아라는 이름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다는 듯 여전히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는 선아라는 이름이 울려 퍼졌다.

‘선아!’



그 아이가 시간을 뛰어 넘어 지금 저 앞 구부정한 등을 한 채 유모차를 끌고 가고 있다.

나는 문득 선아가 옛날에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선생님께


선생님 저 임선아예요.

선생님은 저를 아시면서도 여전히 인사도 안 받아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시죠?

오늘은 일요일인데 친구 서희랑 어딜 다녀왔어요.

어디 다녀왔냐고요?

궁금하시죠?

바로 선생님 집 앞입니다.

꽤 멀더라고요

아시면 난리 날까 싶었는데도 이리 고백하는 건 전 그냥 솔직하고 싶어서요.

선생님

선생님 집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한참

선생님은 아침 육교를 건너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오시지요?

육교 계단을 오르며 이 자리 이 계단 선생님이 밟으셨을 지도 몰라 하면서 가슴이 쿵쿵 뛰었어요.

왜 왔냐고 혼내시겠지만 뭐 제 맘이에요.



히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몰래 선생님 집 앞에 가 있고 하는 거 안하려고 마음 먹었어요.

선생님은 원하시지 않죠?


그럼 월요일 뵙겠습니다.


선생님을 바라보는 선아가



 

나는 선아 흉내를 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들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심조심 그애를 따라가 보았다.

그애라 하기엔 40에 가까운 그녀.

선아는 아이 유모차를 끌고 언덕길을 오르는데 힘들지도 않은지 연신 노래를 부른다.

아이는 그게 그리 재미있는지 까륵까륵 웃어댄다.

선아는 아이와 함께 어느 빌라로 들어가고 나는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나는 그 빌라 입구를 한참 쳐다 보았다. 선아가 20년전 우리 집에 와서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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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8-05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편지..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네요. ㅋㅋ
저도 비슷한 편지 선생님한테 썼던 것 같은데.. -_-;;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선생님은 2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대로 선생님 이실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랬을지.. 뭐 그런게 궁금하네요.
다음 회에 알게되겠죠? :)

하늘바람 2009-08-05 16:09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님 아고 바로바로 읽어주셨군요^^ 조희 2명인데 한분이 가시장미님이니^^
감사합니다.
당연 선생님은 망가졌지요

2009-08-06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