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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ㅣ 서남동양학술총서 31
정재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고대 유목국가의 군주는 정주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보다 정기적인 공납(貢納)이나 교역(交易, 즉 互市) 등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10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이른바 '정복왕조'와는 달랐다. 유목 군주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직접 주변 지역을 약탈해 물자를 확보하거나 정주 지대에서 유입되는 물자를 입수, 재분배하는 방식을 채택하고자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43
정재훈의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돌궐 제국(552~745)의 뒤를 이은 위구르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돌궐 제국의 뒤에 출현한 유목 제국이지만, 역사 속의 위구르 제국은 돌궐 제국의 강성함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돌궐 제국과 위구르 제국과의 결정적 차이는 '서역무역권 확보'여부라고 여겨진다.
위구르는 몽골 초원을 지배하면서도 기존의 유목제국들과 달리 서방의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역에 대한 진출 역시 당조와 토번이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전제해야만 했다. 따라서 770년대 이후 뵈귀 카간이 당조로부터 공급되는 재화를 기초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켜온 상황하에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구르의 당조에 대한 경제적 의존 관계는 해소될 수 없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35
돌궐 제국은 일찍이 서방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며 상업 제국의 지위를 쌓을 수 있었던 반면, 위구르 제국의 초기에는 당(唐)이 돌궐 제국을 대신하며,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상황이었기에 오아시스 상업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상업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위구르 제국은 경제적으로 당나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국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태생적인 한계였다. 어쩌면 당나라와 무역에 의존해서 살아야했을지도 모를 위구르 제국에 변화가 찾아 온것은 8세기 중반의 일이다.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조가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주변 민족에 대한 기미지배는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또한 당조의 지배력 약화에서 그치지 않고 10여 년에 걸쳐 지속된 반란 과정에서 막남의 여러 유목 세력 역시 약화되었다. 740년대에 돌궐이 붕괴하자 남하해 막남에서 활동하던 돌궐 항호와 7세기 중반 이후 당조의 기미지배를 받고 있었던 많은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들, 즉 대표적으로 복고회은과, 당조에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 사사명 집단이 모두 이 과정에서 소멸되었다. 반면 위구르는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되었고, 경쟁 관계에 놓였던 토번 역시 복고회은의 난을 통해 당조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후 당조를 중심으로 토번과 위구르가 경쟁을 벌이는 새로운 삼각관계의 형성을 의미했다. 이렇게 10여 년 동안 중국을 동란으로 몰아넣었던 안사의 난은 중국사의 전개만이 아니라 유목 세계의 세력 재편, 즉 기존 투르크(돌궐) 세력의 몰락과 위구르의 성장을 가져왔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95
이런 상황에서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 ~ 763)은 위구르에게 큰 전환점이 된다. 과거 돌궐제국이 수 양제(隋 煬帝, 569 ~618) 직후 혼란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것처럼, 위구르와 토번은 안사의 난을 기반으로 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을 압박했고, 당은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으로부터 심각하게 위협을 받으며 중앙아시아 정세는 급변한다.
위구르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토번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조가 약화되자 천산남로부터 중국으로 이어지는 하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가 당조와 토번이 대립을 벌이던 하서 지역에 진출하려고 하자, 토번은 그에 호응하려던 사타 돌궐의 움직임을 막아서 그에 적응 대응했다. 따라서 토번은 위구르의 하서 지역에 대한 세력 확대를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문 기록에 나타나듯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를 중심으로 서로 경쟁을 벌어야만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88
당시(8세기 중반) 유목 세계는 과거 돌궐의 지배하에 있었던 많은 세력들이 그 나름의 영역을 지배하면서 세력화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당조 역시 돌궐의 붕괴를 계기로 각 지역의 분열을 조장해 거대한 유목제국이 재등장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의 카를륵 카간은 몽골초원의 중심인 외튀겐을 차지하고 돌궐을 대체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먼저 이념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42
위구르 제국은 당의 쇠퇴를 계기로 서역교역권을 놓고 토번(吐蕃)제국과 경합하게 된다. 때마침 당나라의 소그드 상인 탄압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상업 세력의 마음이 당(唐)조에서 떠난 것 함께 서방에서 쫓겨난 마니교도의 가세를 통해 위구르 제국은 마니교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고, 상업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갔다. 유목문화와 정주문화의 결합을 통해 위구르 제국은 중기 이후 돌궐의 뒤를 잇는 유목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듯했다.
중앙아시아와 당조에서 억압을 당하던 마니교도들에게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자유로운 선교와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때 그들이 주목한 존재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성장한 위구르였다... 반면에 마니교도의 활동을 지원한 뵈귀 카간의 경우에도 안사의 난을 통해 당조와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오아시스 출신의 마니교도들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외교 및 무역의 매개로 인식하였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24
마니교는 카간의 권위를 강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것은 유목국가에 수용된 고등 종교의 역할이 이념적으로 '내적 통합 이념'으로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기초로 성전(聖戰)을 전개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까지 제공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니교는 유목 세계의 패자로서 이념적 분식과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했던 위구르 카간에게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18
그렇지만, 돌궐 제국과 마찬가지로 위구르 제국의 붕괴 역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과거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 BC209 ~ BC174), 훈족의 아틸라(Attila, 406~453)의 경우에서 보듯 유목민족은 강력한 지도자를 만났을 때, 강력한 힘으로 주변을 위협하지만, 그 지도자가 죽는 경우에는 승계 문제 등으로 그 힘이 소멸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목제국의 정치적 위기 상황과 맞물려 3년, 5년 단위로 닥쳐오는 가뭄, 폭설, 전염병 등 조원지역의 자연 재해는 제국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 제국의 존망을 가르게 되는데 위구르 제국 역시 이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위구르의 붕괴는 말기에 지배 집단 내부의 내분과 키르기즈의 개입, 그리고 자연재해에 따른 유목 생산 구조의 파괴에 기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몽골 초원을 버리고 카를룩, 토번, 안서, 막남, 동몰골의 거란 등의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44
유목 사회 내에 정주적 요소가 수용되고 그 지역 출신들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은 카간의 권력 강화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유목 사회 내부의 기존 세력들에게는 반가운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반발 원인이 되었다. 카간은 자신의 권력을 무한대로 강화할 수 없고 자신의 권위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일정 정도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지배 집단과 평형 관계를 이루는 것도 중요했다. 따라서 유목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내적인 통합력은 카간의 권위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능력 부족으로 권위가 강화되지 못하거나, 권위가 너무 강해 집권화로 치달으면 약화될 수도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25
이상과 같이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1세기 남짓한 유목제국 위구르의 흥망성쇠를 통해 유목제국의 특성과 한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독자들은 책을 통해 유목제국은 약탈을 통해 성장한 무력으로 만들어진 나라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실은 안정적인 교역권 확보를 위한 상업제국이라는 사실과 함께 유목 제국의 흥망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에 영토확보를 위한 투쟁을 했던 정주형 제국(로마, 한나라 등)과는 달리 인간 중심의 정치가 이뤄졌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끝없는 장성을 쌓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을 희생하는 문명과 자신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외부와 교섭하고 외부인과 외래사상을 포용하는 문명 중 과연 어느 문명을 더 고등한 문명이라 할 수 있을까. 맹자(孟子, BC372 ? ~ BC 289)는 일찍부터 민(民)본위의 정치를 외쳤지만, 과연 오랜 영토형 제국의 역사에서 그의 사상이 얼마만큼 실현되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백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했던 유목민족의 노마디즘(Nomadism)이 더 앞선 문명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카를륵 카간이 753년에 국가 건설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전통(회뤼)이 회복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피지배 대상인 백성(bodun보둔), 즉 유목 세계의 부족민들과 함께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적 범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중에서 공간적 범위인 영토 (지배 영역은 그리(하늘, 신)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내용인 백성(보둔)을 채우는 것이 카간 자신의 개인적 능력, 즉 현실적인 몫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 국가(일)는 영토보다 백성(보둔)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영역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 국가의 회복을 선언하기 위해 텡그리의 수명과 함께 그를 현실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해야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68
초원에 기근을 발생시킨 자연재해는 유목 생산 양식 자체의 태생적 약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목 사회는 정주 농경 지역에 비해 자연환경의 변화가 생존을 결정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정주 지역에 비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 번 초원이 파괴되면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거의 없었고, 다시 복구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