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반드시 간사하게 뇌물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여 변명하고 따지지 않으며, 그 공적으로 논의할 것을 사사롭게 하여 그 사람의 이름은 드러내지 않고, 허물이 없는 사람을 의심하며 보고, 죄가 있는데도 놓아주며 굽어진 것과 곧은 것을 함께 꿰뚫어 놓는 것이니,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식량이 부족한데 재물은 남으면 쌓아 놓은 재화를 풀어 곡식창고를 힘써 채우고, 식량은 남는데 재물이 부족하면 쌓아 놓은 식량을 느슨하게 하고 재물을 아껴 쓰도록 해야 합니다.

무릇 헐뜯으며 일러바치는 일은 대부분이 실제로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니, 중상(中傷)하는 것을 이롭다 생각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을 꺼립니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조사하며 찾을 수 없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일의 본질에 방해가 되니 모름지기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한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사악한 흔적을 아직 드러내지 않고 마땅히 다른 일을 빌려서 명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단지 그 사람을 버리면 되는 것을 어찌 반드시 말을 밝혀 꾸짖으며 욕을 보여야 하느냐고 합니다.

대저 송사(訟事)를 들으면서 헐뜯는 말을 분별하려면, 반드시 정황을 찾아내고 흔적을 드러내 밝혀야 하는데, 정황이 보이고 흔적이 나타나면 말로 자복하고 이치에 막히게 되니, 그런 뒤에 형벌을 가하며, 이렇게 하여서 아래로는 억울한 사람이 없고 위로는 잘못되게 듣는 일이 없게 됩니다."

무릇 장수를 뽑아 임용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품행과 능력을 조사하며 살펴서, 가능한 사람이면 이를 파견하고, 할 수 없는 사람이면 이를 물러나게 하며, 의심스런 사람이면 시키지를 말고, 시킨 사람이면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하니, 그러므로 장군은 군대에 있으면서 주군(主君)의 명령이 있어도 받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왕 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성의로써 하며, 꾸짖고 화를 내도 시기하며 싫어하는 것이 없고, 징계하며 막으나 원망하며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없습니다. 멀리 내치는 것은 그가 조심하지 않았음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며, 면제하고 용서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새로워진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차츰차츰 조금씩 스며들어 권위와 형벌에 이르게 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다시 쫓아내고 벼슬을 깎이는데 비록 여러 차례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더라도 모두 아끼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시행하여서 마침내 잠시 좌천시키는 것이고, 재목을 생각하여서 점차 등급을 올리면 또 다시 채용될 것을 알 것이니 누가 더욱 수양을 늘리지 않겠습니까! 어찌 정상적인 것을 어지럽힐까를 걱정하며, 어찌 한이 쌓이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대저 등용하여 끌어 올리는 것은 공적을 이루도록 힘쓰게 하는 것이고, 물리쳐 내쫓는 것은 잘못을 징계하는 것이니, 두 가지를 번갈아 쓰는데 그 이치는 순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제정한 부역(賦役)의 법은 조(租)·조(調)·용(庸)
입니다. 정남(丁男) 한 사람은 전(田) 100무(畝)를 받고 매년 속(粟) 2석(石)을 내도록 하였는데, 이를 조(租)라고 하였습니다. 매 호(戶)마다 각각의 토지에 따라서 의당 산출되는 비단, 예컨대 능(綾)이나 시(?)는 함께 2장(丈), 면(綿)으로는 3량(兩)을 내도록 하고, 양잠을 못하는 토지에서는 포(布) 2장(丈)5척(尺)·마(麻) 3근(斤)을 내도록 하였는데, 조(調)라고 하였습니다.
매 정(丁)은 매년 노역을 하게 하여 그 용(庸)을 거두어들이는데, 하루 기준을 견(絹) 3척(尺)으로 하고 이를 용이라고 하였습니다

유통(流通)하여 이자를 늘리는 재물은 숫자가 비록 적어도 날을 헤아려서 늘어나는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사는 집과 쓰는 용기(用器)의 자산은 가격이 비록 높다 해도 해가 다가도 이자는 없습니다. 이처럼 비교해 보면 그 흐름은 실제로 번잡한데, 일률적으로 값을 셈하고 민전(緡錢)을 계산하니, 마땅히 그것은 공평함을 잃은 것이고 거짓을 늘리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벼운 재물 얻기에 힘을 쏟으며 즐겨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은 항상 요역(?役)과 부세(賦稅)를 벗어나고, 본업(本業)에 힘쓰며 사는 곳에 뿌리를 박고 생산하는 사람은 매번 거두며 요구하는 것으로 피곤해집니다.

법은 반드시 시행하는 것을 귀하게 하고, 깊이 각박한 곳에서는 신중하게 하는 것이고, 통제하는 것을 여유 있게 하여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법령을 엄하게 하여서 어그러진 사람을 징계하는 것이니, 여유있는 것을 조금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조금 우대하십시오.
잃는다 해도 부유함을 잃지 않으며, 우대하여야 궁핍함을 구휼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유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는 좋은 길이니, 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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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서남동양학술총서 31
정재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고대 유목국가의 군주는 정주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보다 정기적인 공납(貢納)이나 교역(交易, 즉 互市) 등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10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이른바 '정복왕조'와는 달랐다. 유목 군주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직접 주변 지역을 약탈해 물자를 확보하거나 정주 지대에서 유입되는 물자를 입수, 재분배하는 방식을 채택하고자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43

정재훈의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돌궐 제국(552~745)의 뒤를 이은 위구르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돌궐 제국의 뒤에 출현한 유목 제국이지만, 역사 속의 위구르 제국은 돌궐 제국의 강성함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돌궐 제국과 위구르 제국과의 결정적 차이는 '서역무역권 확보'여부라고 여겨진다.

위구르는 몽골 초원을 지배하면서도 기존의 유목제국들과 달리 서방의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역에 대한 진출 역시 당조와 토번이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전제해야만 했다. 따라서 770년대 이후 뵈귀 카간이 당조로부터 공급되는 재화를 기초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켜온 상황하에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구르의 당조에 대한 경제적 의존 관계는 해소될 수 없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35

돌궐 제국은 일찍이 서방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며 상업 제국의 지위를 쌓을 수 있었던 반면, 위구르 제국의 초기에는 당(唐)이 돌궐 제국을 대신하며,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상황이었기에 오아시스 상업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상업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위구르 제국은 경제적으로 당나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국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태생적인 한계였다. 어쩌면 당나라와 무역에 의존해서 살아야했을지도 모를 위구르 제국에 변화가 찾아 온것은 8세기 중반의 일이다.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조가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주변 민족에 대한 기미지배는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또한 당조의 지배력 약화에서 그치지 않고 10여 년에 걸쳐 지속된 반란 과정에서 막남의 여러 유목 세력 역시 약화되었다. 740년대에 돌궐이 붕괴하자 남하해 막남에서 활동하던 돌궐 항호와 7세기 중반 이후 당조의 기미지배를 받고 있었던 많은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들, 즉 대표적으로 복고회은과, 당조에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 사사명 집단이 모두 이 과정에서 소멸되었다. 반면 위구르는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되었고, 경쟁 관계에 놓였던 토번 역시 복고회은의 난을 통해 당조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후 당조를 중심으로 토번과 위구르가 경쟁을 벌이는 새로운 삼각관계의 형성을 의미했다. 이렇게 10여 년 동안 중국을 동란으로 몰아넣었던 안사의 난은 중국사의 전개만이 아니라 유목 세계의 세력 재편, 즉 기존 투르크(돌궐) 세력의 몰락과 위구르의 성장을 가져왔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95

이런 상황에서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 ~ 763)은 위구르에게 큰 전환점이 된다. 과거 돌궐제국이 수 양제(隋 煬帝, 569 ~618) 직후 혼란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것처럼, 위구르와 토번은 안사의 난을 기반으로 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을 압박했고, 당은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으로부터 심각하게 위협을 받으며 중앙아시아 정세는 급변한다.

위구르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토번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조가 약화되자 천산남로부터 중국으로 이어지는 하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가 당조와 토번이 대립을 벌이던 하서 지역에 진출하려고 하자, 토번은 그에 호응하려던 사타 돌궐의 움직임을 막아서 그에 적응 대응했다. 따라서 토번은 위구르의 하서 지역에 대한 세력 확대를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문 기록에 나타나듯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를 중심으로 서로 경쟁을 벌어야만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88

당시(8세기 중반) 유목 세계는 과거 돌궐의 지배하에 있었던 많은 세력들이 그 나름의 영역을 지배하면서 세력화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당조 역시 돌궐의 붕괴를 계기로 각 지역의 분열을 조장해 거대한 유목제국이 재등장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의 카를륵 카간은 몽골초원의 중심인 외튀겐을 차지하고 돌궐을 대체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먼저 이념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142

위구르 제국은 당의 쇠퇴를 계기로 서역교역권을 놓고 토번(吐蕃)제국과 경합하게 된다. 때마침 당나라의 소그드 상인 탄압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상업 세력의 마음이 당(唐)조에서 떠난 것 함께 서방에서 쫓겨난 마니교도의 가세를 통해 위구르 제국은 마니교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고, 상업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갔다. 유목문화와 정주문화의 결합을 통해 위구르 제국은 중기 이후 돌궐의 뒤를 잇는 유목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듯했다.

중앙아시아와 당조에서 억압을 당하던 마니교도들에게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자유로운 선교와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때 그들이 주목한 존재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성장한 위구르였다... 반면에 마니교도의 활동을 지원한 뵈귀 카간의 경우에도 안사의 난을 통해 당조와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오아시스 출신의 마니교도들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외교 및 무역의 매개로 인식하였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224

마니교는 카간의 권위를 강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것은 유목국가에 수용된 고등 종교의 역할이 이념적으로 '내적 통합 이념'으로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기초로 성전(聖戰)을 전개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까지 제공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니교는 유목 세계의 패자로서 이념적 분식과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했던 위구르 카간에게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18

그렇지만, 돌궐 제국과 마찬가지로 위구르 제국의 붕괴 역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과거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 BC209 ~ BC174), 훈족의 아틸라(Attila, 406~453)의 경우에서 보듯 유목민족은 강력한 지도자를 만났을 때, 강력한 힘으로 주변을 위협하지만, 그 지도자가 죽는 경우에는 승계 문제 등으로 그 힘이 소멸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목제국의 정치적 위기 상황과 맞물려 3년, 5년 단위로 닥쳐오는 가뭄, 폭설, 전염병 등 조원지역의 자연 재해는 제국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 제국의 존망을 가르게 되는데 위구르 제국 역시 이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위구르의 붕괴는 말기에 지배 집단 내부의 내분과 키르기즈의 개입, 그리고 자연재해에 따른 유목 생산 구조의 파괴에 기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몽골 초원을 버리고 카를룩, 토번, 안서, 막남, 동몰골의 거란 등의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44

유목 사회 내에 정주적 요소가 수용되고 그 지역 출신들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은 카간의 권력 강화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유목 사회 내부의 기존 세력들에게는 반가운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반발 원인이 되었다. 카간은 자신의 권력을 무한대로 강화할 수 없고 자신의 권위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일정 정도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지배 집단과 평형 관계를 이루는 것도 중요했다. 따라서 유목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내적인 통합력은 카간의 권위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능력 부족으로 권위가 강화되지 못하거나, 권위가 너무 강해 집권화로 치달으면 약화될 수도 있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25

이상과 같이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는 1세기 남짓한 유목제국 위구르의 흥망성쇠를 통해 유목제국의 특성과 한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독자들은 책을 통해 유목제국은 약탈을 통해 성장한 무력으로 만들어진 나라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실은 안정적인 교역권 확보를 위한 상업제국이라는 사실과 함께 유목 제국의 흥망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에 영토확보를 위한 투쟁을 했던 정주형 제국(로마, 한나라 등)과는 달리 인간 중심의 정치가 이뤄졌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끝없는 장성을 쌓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을 희생하는 문명과 자신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외부와 교섭하고 외부인과 외래사상을 포용하는 문명 중 과연 어느 문명을 더 고등한 문명이라 할 수 있을까. 맹자(孟子, BC372 ? ~ BC 289)는 일찍부터 민(民)본위의 정치를 외쳤지만, 과연 오랜 영토형 제국의 역사에서 그의 사상이 얼마만큼 실현되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백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했던 유목민족의 노마디즘(Nomadism)이 더 앞선 문명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카를륵 카간이 753년에 국가 건설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전통(회뤼)이 회복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피지배 대상인 백성(bodun보둔), 즉 유목 세계의 부족민들과 함께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적 범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중에서 공간적 범위인 영토 (지배 영역은 그리(하늘, 신)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내용인 백성(보둔)을 채우는 것이 카간 자신의 개인적 능력, 즉 현실적인 몫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 국가(일)는 영토보다 백성(보둔)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영역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 국가의 회복을 선언하기 위해 텡그리의 수명과 함께 그를 현실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해야 했다. 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68

초원에 기근을 발생시킨 자연재해는 유목 생산 양식 자체의 태생적 약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목 사회는 정주 농경 지역에 비해 자연환경의 변화가 생존을 결정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정주 지역에 비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 번 초원이 파괴되면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거의 없었고, 다시 복구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_ 정재훈, <위구르 유목 제국사 : 744~840>,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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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2-0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렸던 리뷰입니다^^ 재미있네요.
안사의 난이 당 내부 왕조만이 아닌 주변 국가들 모두에 영향을 끼쳤군요.
서방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면서 안정적으로 위구르를 이끌고 갈 수 있었구요.
유목 사회에 대한 우리 안의 편견도 돌아보게 됩니다. 백성을 확보하고 자연 환경이 상대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속에서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테니까 그만큼 대단한거지요!
읽지 못하는 책이라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대리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2-03 09:44   좋아요 0 | URL
연휴 잘 보내셨지요?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안사의 난은 안록산, 사사명들 자신이 이민족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나라 내부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마치 로마제국 말기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군단의 다수가 게르만족 출신이었고, 이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난 것처럼, 당나라 말기 안사의 난은 북방민족의 세력 확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사건의 영향력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과 큰 재난은 여러 요인이 맞물려 일어난 결과임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를 국사, 서양사, 동양사 등으로 구분해서 바라보는 지역사의 관점도 중요하겠지만, 사건의 세계사적인 의미와 해당 문명권에 대한 이해도 더불어 살펴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심하도다! 당(唐) 덕종(德宗)의 깨닫기 어려움이여! 옛날부터 근심거리가 된 것은 임금의 은택에 막혀 아래로 전달되지 않고, 힘없는 백성들의 뜻이 막혀 위로 통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군주가 위에서 힘써 구휼을 하여도 백성들은 이를 마음에 품지 못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근심에 싸여 원망하여도 군주가 알지 못하여, 떨어져 나가며 배반을 하고 위급해져서 망하는 데에 이르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것 때문입니다.

임금 된 사람은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았으니, 천하의 재물은 모두 그의 소유입니다. 천하의 재물에 기대어 천하의 백성들을 키우면 자신도 반드시 기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마침내 다시 사사롭게 쌓아 둔다면 이는 필부(匹夫)의 천박한 마음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가난하면 검소함을 배우지 못한다.’ 무릇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사치한 욕심이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이필이 말하였다. "하늘의 명령은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이를 말할 수는 있지만 오로지 임금과 재상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대개 임금과 재상은 명령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명령을 말한다면 예·악·형·정(禮·樂·刑·政)이 모두 쓸데가 없게 됩니다. 주(紂)가 말하기를, ‘내가 살아 있으니 목숨이 하늘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상(商, 은나라)이 망한 까닭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오로지 경(卿)은 저들 세 사람과 다르오. 짐(朕)이 말을 한 것이 합당하면, 경은 기쁜 빛을 띠었고, 합당하지 아니하면 항상 근심스런 얼굴빛을 하였소. 비록 때로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였는데, 예컨대 조금 전에 말한 주왕(紂王)이 망하게 하였다고 하는 종류들이오. 짐이 이것을 자세히 생각하니 모두 경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 먼저 말을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다스리는 것이 편안해졌고, 저들 같이 하면 위태하고 어지러워졌으며, 말은 비록 깊고 절박하였으나 기색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양염(楊炎)과 같은 업신여김이나 거만함이 없었소.

짐이 어려운 것을 물으면서 말을 주고받아도, 경(卿)의 말씨와 도리에서 굽히지 않았고, 또 조금도 이기기를 좋아하는 뜻이 없으면서도 곧바로 짐으로 하여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다하여 없어지게 하여 굴복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짐이 사사롭게 경을 얻은 것을 기뻐하는 까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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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륵 카간이 753년에 국가 건설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전통(회뤼)이 회복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피지배 대상인 백성(bodun보둔),  즉 유목 세계의  부족민들과 함께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적 범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중에서 공간적 범위인 영토 (지배 영역은 그리(하늘, 신)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내용인 백성(보둔)을 채우는 것이 카간 자신의 개인적 능력, 즉 현실적인 몫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 국가(일)는 영토보다 백성(보둔)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영역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 국가의 회복을 선언하기 위해 텡그리의 수명과 함께 그를 현실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해야 했다.
- P68

 위구르는 몽골 초원을 지배하면서도 기존의 유목제국들과 달리 서방의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행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역에대한 진출 역시 당조와 토번이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의관계를 전제해야만 했다. 따라서 770년대 이후 뵈귀 카간이 당조로부터 공급되는 재화를 기초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켜온 상황하에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구르의 당조에 대한 경제적 의존 관계는 해소될 수 없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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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를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게 하는 것이 스스로를 생존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편안함을 베푸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는 술책입니다.

만약 말씀과 실행이 부합하다면 착한 것으로 옮기는 마음이 점차 굳어질 것이지만, 만약 실행과 말씀이 위배된다면 화(禍)의 자태가 다시 일어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엄은 이미 행해졌지만 은혜는 미흡합니다. 진실로 마땅히 위로는 하늘의 보살핌에 부응하게 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을 거두어야 하는데, 사람을 구휼하는 은혜를 펼쳐서 위엄을 구제하고, 도적을 소멸시킨 위엄을 타고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신하의 공이 크다는 것으로 그들을 꺼리지 말고, 두 신하는 직위가 높다는 것으로 스스로 의심하지 말게 한다면 천하는 영원히 무사할 것입니다.

명령을 내려서 여러 야장(冶匠)들에게 농기구를 주조하게 하고, 보리 씨앗을 사들이게 하여서, 변방에 연하여 있는 군진(軍鎭)들에게 나누어 내려주고, 수졸(戍卒)들을 모아서 거친 밭을 갈아 거기에 씨를 뿌리게 하여, 다음해에 보리가 자랐을 때에 그 종자의 두 배로 보상해준다고 약속하시고, 그 나머지는 시가보다 5분의 1이 더해진 가격으로 관청에서 그것을 사들이게 하십시오. 다음해의 봄에 벼를 심을 때 역시 이와 같이 하십시오. 관중(關中)의 땅은 기름지나 오랫동안 황폐해 있어서 수확하는 것이 반드시 두텁게 될 것입니다. 수졸들이 이익을 얻게 될 것이어서 경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질 것입니다

"수졸들이 둔전(屯田)으로 인해 부유하게 된다면 그 땅에 안주하게 될 것이어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의 제도에서는 수졸들이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그들이 곧 만기에 이르게 되면 명령을 내려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즉시 개간한 밭을 주어서 영업전(永業田)으로 삼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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